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49
949화 문을 열고 들어가다
나송이 사라지고 난 뒤.
숲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킁킁……. 이 냄새는…….?”
어느새 농후한 피비린내가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숲속에 울창하던 나무들은 전부 말라버리기 시작했고, 나뭇잎은 전부 시든 채 떨어져 버렸다.
하늘도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는 갑옷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은 너덜너덜해진 붉은색의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철컹-!
녀석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금속 충돌음 비슷한 발자국이 흘러나왔다.
갑옷은 어느새 진양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진양의 눈앞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진양은 곧바로 동술을 사용하여 주변을 살폈다.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환각이 아니라 갑옷이 가진 기억이었다.
녀석은 어느새 진양을 자신의 기억 속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다.
진양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오직 죽음과 피만이 존재하는 수라장 한가운데 서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을 잃고 전의에 휩싸일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광폭!”
공법이 발동되기 무섭게 진양은 다시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모든 감정의 소요는 사라졌고, 마지막 남은 전의만 끓어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던 갑옷은 우뚝 멈춰 섰다.
마치 진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갑옷이 해체되며 수많은 조각으로 변하여 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진양의 몸에 달라붙어 다시 갑옷의 형상을 이루었다.
짙은 피비린내가 뒤섞인 살기가 진양의 온몸에서 뿜어져 올랐다.
진양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쪽 발이 들리는 순간, 진양의 몸에서 기혈이 뿜어져 나와 불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들려 올라갔던 발은 다시 지면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옷을 입어야지, 반대로 옷이 사람을 입으려고 해선 안 되는 법.”
진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갑옷에 손을 얹었다.
습득 능력은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급할 건 없었다.
“끝까지 가보고 싶다면 그렇게 하거라. 순순히 받아주도록 하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양의 몸에서 강렬한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갑옷의 기운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진양이 가진 기혈을 최대한 끌어올려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이걸로 부족한 모양이구나. 좋다. 패왕사갑!”
굉음과 함께 진양의 몸에선 한층 더 강력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겨우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한 탓인지 진양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진양은 곧바로 두 번째 단계에 돌입했다.
그러나 완전히 단계가 넘어가기도 전에 몸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한층 더 색이 짙어졌다.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한층 더 강력해졌다.
그렇게 다섯 단계에 접어들자 새빨갛게 타오르던 화염은 어느새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진양은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순수한 육신의 힘만으로 갑옷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단순한 소모전이라면 자신보다 두 경지 더 높은 고수가 와도 자신 있었다.
두 사람의 대치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갑옷의 기운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느덧 반 시진이 흐르자 갑옷은 완전히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이래도 고개를 숙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갑옷은 끝까지 물러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옷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 그러나 그 의미를 잃으면 더 이상 존재할 필요는 없다. 네 녀석을 살려둘 이유가 없으니 이만 파괴하도록 하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능력이 반응했다.
진양은 기다렸다는 듯 갑옷을 완전히 연화시켰다.
연화가 끝나자마자 갑옷에서 맹렬히 뿜어져 나오던 살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곳곳에 남은 상처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갑옷뿐이었다.
진양 기혈을 거두고, 광폭 공법을 해제했다.
다만, 진양의 표정은 썩 밝진 않았다.
갑옷이 스스로 고개를 숙인 게 아니다.
진양의 무시무시한 협박과 물리적인 수단에 의해 강제로 고개가 꺾인 것일 뿐이다.
도대체 누가 사용하던 갑옷인지는 모르지만 재질, 등급 등 어느 하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단조 기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갑옷과 망토에 남아있는 흔적만 봐도 상당히 강력한 힘을 지닌 갑옷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양이 갑옷을 거둬들이자 주위의 환경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녹색 잎사귀들까지.
하지만 어느새 주위에 있던 연나 일족의 사람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 * *
진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
검은 통치마를 입은 나송은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다시 진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진 선생은 무사하실까요?’
“걱정할 필요 없네. 비록 무시무시한 살기를 가진 갑옷이지만, 진 선생께서는 분명 녀석을 굴복시킬 수 있을 테니까.”
가주가 나송을 위로하며 한마디 했다.
한편, 주변에는 도망친 연나 일족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진양이 불러온 갑옷 때문에 겁에 질린 옷들이 전부 도망치는 바람에 연나 일족은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옷을 입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모든 것이 진양 덕분인 것이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진양이 나타나지 않으니 평온해진 듯하던 옷들도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가주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렸다.
“일단 우리가 먼저 건너가도록 한다. 이대로 더 지체했다간 우리도 못 건너가게 될지도 모른다.”
가주의 명령에 따라 연나 일족은 나무 문을 향해 움직였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연나 일족 사람들은 나무 문 너머로 그림자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그대로 숲속에 남았다.
옷들은 훈향을 받고 이들이 숲속을 건널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전부였다.
이것만으로도 거래는 이미 끝난 것이었다.
거래를 마친 옷들은 다시 숲속 곳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같은 시각.
진양은 갑옷을 입은 채 나무 문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던 신비로운 힘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갑옷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길을 안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저항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진양을 가로막지 않았고, 길을 잃지도 않았다.
그렇게 진양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머리카락 사이에선 백리칠이 갑옷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네 몸에선 달콤한 냄새가 나는 거야?”
…….
“뭐라고? 못 지나간다고? 왜? 아니지, 너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네 몸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이유가 뭐냐니깐!”
…….
“가신 징표를 써도 못 지나간다는 거야? 하지만 난 진양 아저씨 몰래 있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리고, 왜 이렇게 달콤한 냄새가 나냐고 물었잖아!”
…….
“어? 왜 갑자기 아무 말이 없어? 왜 달콤한 냄새가 나냐니깐!”
한참을 대화를 나누던 갑옷은 말이 없었다.
갑옷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는 듯했고, 그녀를 쫓아낼 생각도 없는 듯했다.
백리칠은 그제서야 배시시 웃으며 계속해서 징표에 앉아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진양은 숲속을 일자로 가로지른 끝에 마침내 거대한 나무 문 앞에 도착했다.
연나 일족의 자료에 따르면 의관도에는 미궁과 같은 숲이 펼쳐져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면서 그런 건 구경도 못 했다.
이 외에 나무 문과 접촉하게 되는 순간 옷은 바깥에 남게 되고 몸만 문을 통과하게 된다고도 기록되어있었다.
그런데, 진양이 나무 문과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등 뒤에 달린 망토가 바람에 흩날리듯 펄럭이기 시작했고, 갑옷에서 심장이 뛰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무 문 사이에서 작은 틈이 벌어지며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연나 일족의 자료에 적혀있던 것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군.’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며 길을 만들었고, 길은 진양의 발끝에서 멈춰 섰다.
진양은 흡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갑옷을 툭툭 두드렸다.
“자식,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 * *
새로운 부유섬.
연나 일족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대열을 재정비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으나 이때까지도 진양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가주도 난처해졌다.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끓어오르는 혈기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구나.’
연나 일족은 무려 아홉 번에 걸친 실패 끝에 간신히 가장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런데, 진양은 생각지도 못하게도 가장 어렵고 위험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새로운 유적이나 비경을 탐험할 때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을 지키는 것이다.
때문에 연나 일족의 사람들은 체면을 구기는 것을 무릅쓰고 여자 옷을 입고 의관도를 지난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 옷의 수가 남자 옷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세 번째 부유섬도 미리 조사해둔 자료를 토대로 지나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진양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 * *
사실 진양은 죽지 않았다.
다만, 세 번째 부유섬이 아닌 다른 곳에 도달했을 뿐이다.
나무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로 옷의 도움을 받아 문을 통과한 연나 일족과는 달리, 진양은 문을 열고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
진양은 일곱 빛깔로 빛나고 있는 바다의 상공에 떠 있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겨우 반 시진 만에 일출과 일몰이 반복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태양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지 않았다.
지평선과 가까워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떠오르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허공에는 형형색색의 옷감이 매달려있었다.
그것들은 바람에 의해 나부끼며 진양의 시선을 방해했다.
진양은 손을 뻗어 눈앞에 걸려있는 푸른 옷감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옷감에 손을 대는 순간.
옷감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힘이 진양의 몸을 파고들었다.
강력한 부식 성질을 가진 힘이었다.
진양은 곧바로 수신 상태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온 기운을 수신 상태로 완전히 연화시켜버렸다.
모든 물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는 천일진수를 기반으로 연성한 수신이라 그런지 조금이라도 물의 기운이 깃든 힘이라면 무엇이든 눈 깜짝할 사이에 연화시킬 수 있게 된 진양이었다.
연화가 완료되자 정체불명의 힘은 진양의 몸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론적으로 현재 진양은 어떠한 영수(靈水) 안으로도 녹아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건 말 그대로 이론상일 뿐.
상고 지부의 오 대 수맥 중 하나인 약수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물에 녹아드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겁 없이 함부로 뛰어들기라도 했다간 적응할 틈도 없이 뼈까지 전부 녹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다만, 옷감에서 흘러들어온 힘을 소화하는 것 정도는 큰 무리가 없었다.
진양은 옷감의 힘에 적응한 뒤 눈앞에 보이는 푸른 천을 걷어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