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61
961화 숨기고 싶으면 숨기는 거지
밖으로 향하려고 돌아서는 순간.
장정의는 다시 멈춰 섰다.
도무지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냥 돌아가자니 아쉬웠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그 유명한 향계다.
장정의는 잠깐의 고민 끝에 둔세향을 피우며 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장정의가 사라지자 둔세향에서 피어오른 연기도 깔끔하게 사라졌고, 둔세향에서 흘러나오던 힘도 모두 소멸되었다.
연나 일족조차 보관해두었던 둔세향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모른다.
이들이 알고 있는 건 오직 단 한 가지.
보관해두었던 둔세향을 사용한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둔세향은 시효(時效)가 존재한다.
때문에 둔세향을 사용하여 향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시간의 제약이 따른다.
새로 만든 둔세향은 왕복을 하고도 남을 만큼 그 시간이 넉넉했지만, 문제는 미리 만들어 보관해두었던 둔세향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효과가 크게 줄은 탓에 향계로 들어갈 순 있어도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장정의는 향계에 발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흑백으로 명확하게 분리된 세계가 나타났다.
검은 것은 하늘이었고, 하얀 것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바다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멀리 구름이 솟구쳐오르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파도였다.
파도가 하늘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파도에는 번개, 안개, 연기 등 모든 힘이 뒤섞여있었고, 거대한 구름의 바다를 들끓게 만들고 있었다.
미처 반응할 틈이 없었다.
파도에 휘말린 장정의는 온갖 힘에 의해 찢겨 나갔고, 반 다경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육신은 끓어오르는 구름의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구름으로 만들어진 파도가 일어나며 온 세상을 뒤엎었다.
그때,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며 구름 아래쪽에 숨겨져 있던 세계가 드러났다.
파도로 인해 한 곳으로 구름이 몰려들며 거대한 틈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아래로 볼 수 있게 된 것.
진정한 세계는 구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세계의 중심은 따. 이상이 바다가 뒤덮고 있었고, 바다를 중심으로 네 방향에 크고 작은 섬들이 몰려 바다를 둘러싸고 있었다.
구름의 바다 아래 자리 잡은 육지.
이곳에서 한 줄기의 빛이 솟구쳐올랐다.
이어서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강풍층을 뚫고 구름의 바다로 올랐다.
그는 엄청난 힘에 의해 구름의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미묘한 빛이 반짝였다.
“운정계(雲頂界)가 마침내 무너지려 하는군. 도대체 구름 위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나지막한 노인의 목소리에선 짙은 우려가 묻어나왔다.
이어서 바다 가운데 황금빛이 번쩍이며 온몸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신룡이 나타났다.
“함향종(含香宗)에서 온 친구여, 운정계에 마침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긴. 누군가에겐 잘된 일이고, 또 누군가에겐 안 된 일이겠지만, 어쨌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다는 건 사실일세.”
노인의 목소리는 상당히 어두웠다.
황금 신룡이 콧방귀를 뀌자 콧구멍에서 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막을 필요 뭐가 있겠나? 마침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쇠사슬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아닌가?
비록 모두가 견뎌낼 순 없겠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네. 안타깝다고 생각된다면 자네가 직접 모든 사람을 이끌고 나가도록 하게나.”
신룡의 시선이 출렁거리는 구름의 바다 쪽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아직 잠잠해지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이대로 그곳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다.
겉으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향사가 만든 운정봉쇄(雲頂封鎖)를 뚫을 수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수십만 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한들, 운정계는 감히 그 어떠한 생명체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룡은 다시 바다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장포를 입은 노인이 팔을 휘저으니 몸 아래쪽에서 광막이 생겨났다.
그는 운정 아래 앉은 채 죽간 하나를 꺼내 들고 조용히 기다렸다.
죽간을 펼쳐 들고 그곳에 기록되어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운정이 다시 열리는 날은 향사가 진정한 후계자를 찾았을 때다.
이는 곧 향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현재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 이곳이 한때 향계라고 불렸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다.
노인은 죽간의 맨 아래 찍혀있는 낙관(落款)을 어루만지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함향’이라고 적힌 낙관이었다.
그것은 함향종의 초대 종주가 찍은 것이었다.
* * *
수낭 동굴을 빠져나온 진양은 당분간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수낭 동굴은 여전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천팔백 개의 문 역시 비록 위험한 곳이긴 해도 이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을 모두 살펴보기엔 아직 실력이 모자라다는 점.
언젠가 실력이 충분해진다면 그때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진양은 연나 가주와 고별을 한 뒤 곧장 유령호로 돌아왔다.
유령호로 돌아오기 무섭게 세 명의 해족 강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어색하게 인간의 예를 흉내 내며 포권을 취했다.
이들 중 머리 양쪽에 부채와 비슷한 무언가를 달고 있는 교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진 선장, 혹시 공주님께선 어디 계십니까?”
“백리칠이요? 아마 선실 안에서 놀고 있을 텐데요.”
진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장 먼저 보이는 흑피를 향해 손짓했다.
“가서 백리칠을 데리고 나오도록 해.”
징표 안에 숨어있던 백리칠은 진양의 말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피던 그녀는 손에 결인을 맺었고, 이내 가신 징표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같은 시각, 선실 내부.
한참 곯아떨어져 있던 흑구가 코를 킁킁거리며 눈을 떴다.
녀석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녀석의 뱃가죽에 새겨진 징표가 번쩍거리며 빛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백리칠이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백리칠은 베시시 미소를 지으며 흑구의 머리에 입을 쪽 맞추었다.
“고마워. 나중에 조용히 나무 정령과 만날 수 있게 해 줄게.”
흑구는 씨익 웃으며 백리칠을 등에 태운 채 선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선실 밖으로 나온 흑구는 곧바로 언짢은 표정으로 해족 강자들을 째려보았다.
백리칠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해족 강자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리칠이 얌전히 유령호 내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이들은 백리칠이 몰래 밖에 나갔다 왔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그녀가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백리칠의 행동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은밀해졌던 것이었다.
때문에, 최대한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다.
“진양 아저씨!”
백리칠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폴짝 날아올라 진양의 품에 안겼다.
교인 강자가 말했다.
“공주님, 최근 들어 근해의 상황이 썩 좋지 않으니 이만 돌아오라는 교황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만약 바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청유 할멈이 있는 곳으로라도 돌아가도록 하시지요.”
“알았어.”
백리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과 함께 멀리 나갔다 와서 그런지 기분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진양은 아직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진양은 백리칠을 데리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리칠은 그제서야 머뭇거리며 진양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내가 아저씨한테 무언갈 숨기면 나한테 화낼 거야?”
“허허, 그럴 리가. 숨기면 숨기는 거지.”
진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녀는 여인이다.
크다 보면 때론 자신만 알고 싶은 비밀도 생기는 법.
무엇보다 진양은 백리칠을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백리칠만큼은 절대로 진양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진양의 대답에 백리칠은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눈을 깜빡거리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그럼 만약 두 가지를 숨기면? 아니, 하나다. 또 다른 한 가지이긴 한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이건 내가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게 아니거든.”
“하하하! 괜찮다니깐. 숨기고 싶으면 숨기는 거지. 그런 걸로 내가 화를 낼 리가 없잖아.”
진양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진양의 반응에 백리칠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흑구와의 약속이 떠올랐는지 진양의 어깨에서 뛰어내렸고, 곧장 흑구와 함께 나무 정령을 만나기 위해 가버렸다.
백리칠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진양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선실 하부.
이곳에는 탑 하층부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나무 정령은 자신의 영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곳에 펼쳐진 영전(靈田)은 전부 나무 정령의 영지였고,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가 직접 돌보고 가꾸고 있었다.
탑 하층부의 영전에 매년 풍년이 드는 것도 전부 나무 정령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중에 나무 정령도 거듭 진화를 반복해 나가고 있었다.
흑구는 웬만해서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나무 정령을 발견한 흑구는 적당히 높을 곳을 찾아 올라가 배를 깔고 앉은 뒤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백리칠은 나무 정령을 따라다녔다.
두 녀석은 온갖 언어로 한참 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한창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백리칠이 말했다.
“‘향’이라는 걸 만드는 방법에 대해 배웠거든. 그것만 있으면 너도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나중에 만드는 방법을 완전히 배우고 나면 제일 먼저 너한테 나눠줄게. 어때?”
백리칠의 말에 나무 정령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흑구한테 계속해서 징표를 남겨둬도 되는지 물어봐줄 수 있어?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말이야.”
나무 정령은 흑구가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고, 흑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징표는 복부에 있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들킬 일이 없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는지 복부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자 주름이 일어나며 징표가 살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좋아. 그럼 나중에 제대로 배워와서 가장 먼저 만들어줄게!”
현재 백리칠의 머릿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향계의 입구에서 흘러나오던 향기를 맡은 순간부터 그녀는 진양이나 다른 사람이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걸 느끼기 시작했다.
구름의 바다로 들어서는 순간.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만 집중하는 동안 백리칠은 특별한 냄새를 맡게 되었다.
오직 백리칠 한 사람만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운율(韻律)이 가득한 냄새였다.
마치 단조로운 구름의 바다로 이루어진 세계에 누군가 악장을 써놓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백리칠도 이해를 할 수 없었으나, 조금씩 냄새의 변화를 느끼며 운율에 젖어 들게 되었다.
마치 모든 세계의 냄새가 그곳에 녹아있는 듯했다.
모든 운율은 그녀가 깨달음을 얻어갈수록 머릿속으로 흘러들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특히 진양이 열두 개의 대전을 주우러 다닐 때.
그곳에선 가장 강력하고 짙은 냄새가 흘러나왔었고, 상당한 운율이 녹아있기도 했다.
백리칠은 이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새기듯 기억으로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알게 된 사실들을 전부 진양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하려고 하면 이상하게도 한 글자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리칠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매우 쓸모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적어도 진양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게다가 나무 정령을 도울 수도 있었고, 흑구가 계속해서 그녀를 돕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