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34
“이리스…!”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몸 역시 어두운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웃고 있는 카를의 모습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어둠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이리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죽는다. 바닥에 닿는 순간, 그녀도 나도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고자 발버둥 친 노력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하지만.
모든 성력을 가져가 버린, 나를 죽음으로 이끌 운명이었던, 이벨리나의 동생인, 이벨리나와 똑같이 카를에게 이용당한, 제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처음 만난 언니를 걱정하는, 제 것이 아닌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 외치는.
나는 그런 이리스를 구하고 싶었다.
나는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는 이리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거대한 푸른빛이 어둠 속에서 폭발했다.
카를은 허공에 떠올라 끝이 보이지 않는 균열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한 비열한 웃음이 떠 있었다.
‘하나만 처리해도 잘된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둘 다 한 번에 치울 수 있을 줄이야.’
이제 이리스는 죽든지 말든지 그에게 알 바 아니었다. 성력을 갖고 있는 주제에 쓰지 못한다면 어차피 쓸모없는 계집이다. 게다가 그에게 적의를 갖고 있다면 죽어 주는 쪽이 편하다. 모자란 것이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된 성녀라면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모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벨리나까지 함께 치우게 될 줄이야.’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떨어지는 사람을 붙잡으려 들 줄은 몰랐다.
‘하긴, 아닌 척하면서도 계속해서 가족을 그리워했으니.’
대신전 내 치료소에서도 딸을 데리고 온 부모들에게 유독 더 신경을 쓰던 이벨리나였다. 그 속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벨리나가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카를은 일부러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 거짓을 말했으니까. 그렇게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저에게 향하게 만들었기에 카를이 조금이라도 얼굴이 굳거나 쌀쌀하게 대하면 이벨리나는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마음이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될 줄이야.
이제 어서 이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카를은 아래를 보았다. 비명 소리와 어딘가 부딪혀 터져 버리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 좋겠다, 생각하면서.
하지만 밑에서 나타난 것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건…!”
놀라움에 소리를 미처 다 내뱉기도 전에 아래에서 시작된 푸른빛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세상을 다 뒤덮어 버릴 것 같은 격렬한 성력의 폭발은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타올랐다. 대신전을 덮었던 성력의 결계는 지금 이 폭발하는 성력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해 보일 정도였다.
도망가던 사람들도, 고대 신을 상대로 맞서던 기사들도, 그것을 베어 내던 라트반도, 심지어 엉킨 채로 세상을 부수고 있던 아슬란과 고대 신마저도 성력의 폭발에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 뭐야….”
모두가 그 빛에 안락함을 느꼈지만 카를은 그렇지 못했다. 이 성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저 멀리 균열의 바닥에서 천천히 떠오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이리스를 끌어안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은 이벨리나였다.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에 카를은 본능적으로 지금 당장 그녀에게서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녀가 성력을 되찾은 것이다.
황급히 몸을 돌려 남은 마법으로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카를은 갑작스럽게 제 등을 덮친 뜨거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고개를 돌려보자 발아래에서 레온 황태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황태자의 손에는 찢어진 마법 스크롤이 들려 있었다.
“부, 분명 나에게 준 게 마지막이라고…!”
“거짓말인 게 당연하잖아.”
카를은 레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끔찍한 통증이 그의 등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발버둥 치는 카를에게 다가간 레온은 주변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그의 손등을 내려찍었다.
“크아악!”
마수와 다를 바 없는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뱉은 카를은 극심한 고통에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가파르게 숨만 쉴 뿐이었다. 레온은 발로 검을 밟아 더욱더 카를이 움직일 수 없도록 한 다음 리나를 기다렸다. 곧 이리스를 안은 그녀가 균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불길에 휩싸여 평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레온은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곳에 성녀가 있었다.
***
이리스를 붙잡은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나는 눈을 감으며 더욱 이리스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내 안으로 거대한 힘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언제 받았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성력을 전부 잃고 중앙 신전 뒤, 지하의 성소를 찾아갔을 때 밑에서 올라오던 성력을 붙잡은 적이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성력은 내 손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잠시 느꼈던 따스함이 생각났다.
지금 내 안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은 작은 온기가 아닌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뜨겁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잠시 갈 곳을 잃어 헤매던 것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이다.
성력이 돌아오는 순간, 나는 내 안에서 이벨리나가 제가 덮어 버린 기억들을 전부 풀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순간에 나는 흘러넘치는 이 힘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끝없이 떨어지던 나와 이리스의 몸이 허공의 어딘가에 멈췄다. 땅속을 뒤덮은 힘은 균열을 전부 채우고도 남아 넓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나는 가만히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곧, 다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떠오른 내 앞에는 한쪽 손이 검에 의해 땅이 박힌 채 꿈틀거리고 있는 카를이 보였다.
나는 안고 있던 이리스를 레온에게 부탁한 다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세상 모든 곳에서 넘실거리던 성력이 아슬란과 고대 신의 주변에 거대한 결계를 만들었다. 그다음 나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에게 다가가 그의 손등에 박혀 있던 검을 거칠게 뽑아내자 신음 소리와 함께 카를이 몸을 뒤틀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손을 감싸 쥐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왜? 죽이고 싶어서?”
내 손에 검이 들려 있음에도 카를은 두려운 표정 하나 없이 비웃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이미 했겠지. 갑자기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이벨리나? 너는 성녀야. 너는 아무도 죽일 수 없어.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저 황태자의 손을 빌렸어야지.”
나는 그런 카를에게 다가가 검을 든 손을 올렸다. 카를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벨리나, 넌 나를 죽일 수 없어.”
그 순간 내 손에 들린 검이 정확히 카를의 목을 찔렀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카를의 눈이 커졌다. 그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아올랐다. 바들거리는 카를의 손이 더듬거리며 제 목에 꽂힌 검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나는 그런 카를에게 말했다.
“난 이벨리나가 아니야.”
“……!”
그 말에 카를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에 박혔던 검을 빼낸 다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짙은 푸른빛이 그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했다. 흐른 피만 남아 있을 뿐, 카를의 목은 긁힌 상처 하나 없이 태어났을 때와 같은 말끔한 피부로 되돌아와 있었다.
“왜… 컥!”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배를 찌른 검을 바라본 다음 그것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엉망이 된 대신관의 예복이 피로 물들었다.
검을 빼내자 조금 전 목이 찔렸을 때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다시 카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력이 그를 감싸자 그의 배에 났던 상처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상처가 사라졌다 해서 그 고통마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 찔렸던 고통을 아직도 느끼고 있는지 카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카를은 놀라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 쳤지만 뒤틀린 그의 다리는 제대로 땅을 디디지 못하고 휘청이더니 바닥을 굴렀다.
나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카를의 다리를 망설임 없이 걷어찼다.
“크아악!”
그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짓은 이벨리나가 상상했던 것들이다. 그의 아래에서 짓밟힐 때마다 이벨리나는 제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상상했다. 그녀가 성녀가 아니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던 이 쉬운 일들을.
나는 의식 속, 이벨리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저 울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그녀가 얼마나 바랐던 일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깔려 신음 한 번을 낼 때마다 이벨리나는 그녀의 상상 속에서 카를을 죽였다. 감히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녀가 상상했던 그대로 카를을 찔렀다. 단번에 죽어서는 안 된다. 이벨리나가 그를 죽인 횟수만큼 그는 죽어야 하니까.
나는 주변에 일렁이고 있는 성력을 바라보았다. 이리스를 구한 순간, 이벨리나는 성력을 다루는 법을 나에게 전부 알려 주었다. 동시에 이벨리나가 끝까지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기억들도 함께 나에게 흘러들어 왔다. 그녀가 이 대신전에서 두려움에 떨며 지냈던 모든 시간들의 기억이.
“너… 이벨리나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
내 손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이제야 인지한 것일까. 카를의 얼굴에 드디어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카를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에 검을 대었다. 비틀리지 않은 멀쩡한 다리에.
“하, 하지 마!”
그가 애원함과 동시에 나는 검을 그의 다리에 박아 넣고 비틀었다.
“크아아아악!”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카를이 몸부림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이 좋았던 것일까. 그의 다리는 뼈까지 잘려 너덜거렸다. 나는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카를의 다리가 그의 옆을 뒹굴었다.
“내, 내 다리! 내 다리!”
성력을 사용했기에 그는 죽기는커녕 기절할 수도 없었다. 나는 검을 집어 던진 다음 몸을 돌려 레온의 품에 있는 이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때 내 안에서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울음에 묻혀 제대로 알아먹기조차 힘든 목소리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울음과 한숨을 동시에 토해 내는 이리스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제 이벨리나는 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한 번만.”
이벨리나는 나에게 애원했다.
“한 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