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54
다시 혼자가 되어 길을 걷던 레온은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그렇게 중얼거린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급하게 대신전을 나가야 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이리스라고 했었지?”
대륙 끝에서 성녀라고 불리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 때문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편지에는 그 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끝까지 읽었을 때, 레온의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기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대신전에서 앉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성녀의 답변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누릴 시간도 없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다. 물론 보좌관들에게 성녀에게서 연락이 오면 잘 답변하라고 신신당부를 해 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보원과는 대신전 밖의 도시에서 만났다. 훔쳐 듣는 귀가 많은 대신전 안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내용이었으니까.
“작은 마수 한 마리가 습격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지역의 기사들이 쫓아내기는 했지만 독을 가진 마수였기에 다들 이제 끝이려니 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이리스라는 여자가 성력을 써서 모두를 치료했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정보원이 하는 말을 들으며 레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저 상처를 치료했다, 정도면 성력이 있는 누군가가 그 힘을 사용했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류에는 이리스라는 여자가 치료했다는 사람들의 인원수와 그들의 부상의 심각성 그리고 사람들을 공격했던 마수의 종류도 적혀 있었다.
마수 트란테.
레온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수였다. 크기도 작고 파괴력도 약하지만 그 마수가 나타나면 모두 경계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란테는 무척이나 강력한 독을 가진 마수였다. 그것은 위험한 상황이 되면 입 안에서 가시를 뱉어 내었고 그 가시에 찔리면 대부분의 생명체는 피부가 빠르게 썩어 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 독은 약으로는 치료가 절대 불가능하며 오직 성력으로만 치료가 가능했다. 게다가 어지간한 상급 신관들의 성력으로도 트란테의 독은 쉽사리 해독되지 않았다. 그러니 변방의 지역에서 트란테가 나타나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빠른데.
“그 트란테의 독을 해독시켰다고…. 그것도 수십 명이나….”
레온의 입에서 저절로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나왔다. 이것은 상급 신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정도의 성력은 오직 성녀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쪽의 상황은?”
“‘진짜 성녀님’이 나타났다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성녀라고 부르자 당황해서 그곳을 떠났구요.”
정보원이 말한 진짜 성녀라는 말에 레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난 몇 년간 이벨리나의 행실이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얼마 전, 기도회의 일로 또 새롭게 좋지 못한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성녀가 성스럽고 고결하기를 바랐다. 대신전과 성녀의 오랜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타락한 성녀. 사람들이 그런 이벨리나를 가짜 성녀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러나 성녀는 오직 한 명. 두 명의 성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에게 사랑받는 신의 대리인은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오직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짜 성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레온의 마음속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벨리나는 기도회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 그리고 위협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다가와 축복을 내렸다. 그 모습은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위해서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제 정체를 알아채기 전까지 이벨리나가 보여 준 모습은 진심으로 아픈 자가 낫기를 바라는 성녀의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레온은 정보원에게 명령했다.
“그 여자를 계속 추적하고 발견하면 놓치지 말라고 해. 그리고 그 여자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도록.”
“알겠습니다.”
레온의 명령에 정보원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만남은 끝났다. 홀로 대신전으로 돌아오는 레온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신전에 와서 보았던 성녀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타락한 성녀라….’
기도회 때 각 나라가 바친 공물들이 생각났다. 신의 힘을 제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쓰고 있는 성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레온은 타락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사람들은 정작 성녀가 금은보화를 긁어모은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밤마다 남자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더욱 꺼렸다. 정작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이상한 사람이 눈에 보였다.
“……?”
아르벨이라는 낡은 가게의 간판이 붙어 있는 골목길의 초입에서 안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다른 자가 없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도대체 저 사람은 뭔데?’ 라며 구경을 했을지도 모른다.
‘뭐 하는 사람인데 저렇게 티 나게 얼쩡거리는 거지?’
이 골목에서 많은 물건이 어둠의 경로로 처분되는 것을 안다. 도대체 뭘 팔러 온 것일까, 하며 레온은 그 사람을 구경했다. 그러다 곧 그 사람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 어느 가게의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얼굴은 그가 걸어오는 내내 생각하고 있던 얼굴이었다.
‘성녀가 여기서 뭘 하는 건데?’
그는 골목으로 다가와 성녀의 행동을 살폈다. 그러다 곧 알게 되었다. 성녀가 가게 주인에게 속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을 사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저리 필사적인 것을 드러내면 안 된다. 저랬다가는 값도 값이지만 가게 주인이 성녀가 사려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고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보다 못한 레온은 그 일에 끼어들고 말았다. 성녀가 사려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도와주고 싶은걸.’
그것은 레온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감정이었다.
어느새 하늘 저편에는 새벽의 빛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 빛에 레온은 그제야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가짜 신분이 적힌 신분패를 내밀고 대신전으로 들어온 그는 제 처소로 가며 이리스란 여자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만약 그 여자 때문에 이벨리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여자였건만 이벨리나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생각을 한 순간 그는 이리스에 대한 적대감이 제 안에 생기는 것을 알았다.
***
새벽이 가까워져서야 처소로 돌아온 탓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만 그와 반대로 몸과 마음은 무척이나 편했다.
‘카일레스의 단검을 찾아서 그런가 봐.’
그동안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들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라트반이 오면 바로 보여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신나게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을 때, 신관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라트반 경?”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라트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다른 신관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오늘 수업이 약속되어 있었나요?”
서랍장 안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카일레스의 단검을 떠올리며, 혹시나 내가 그와 약속을 하고 잊어 먹었던 것인가 싶어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외출의 허가를 받고자 해서 왔습니다.”
라트반은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에 대신전을 벗어날 때 내 허락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조금 전 카를 신관을 모시러 간 기사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드디어 연락이 왔군요. 곧 도착한다고 하던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다만?”
“도착이 늦어졌던 이유가 오는 길에 갑자기 원인 불명의 이유로 카를 신관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허가해 주신다면 상급 신관들과 함께 카를 신관을 맞이하러 가려 합니다만….”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카를 신관을 대신전으로 데려오세요.”
내가 허락을 내리자 라트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이제 카를 신관이 오면 대신관 후보 대부분이 대신전에 모이게 된다. 그러면 또 긴 회의를 거쳐 새로운 대신관이 선출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다음 조심스럽게 거울에 손을 대었다. 이제는 이 얼굴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울 뿐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벨리나.”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들었던 날 이후로 마치 사라지기라도 한 듯, 이벨리나로부터는 어떠한 말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가 제 패배를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기를 포기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너무 조용해.’
이벨리나의 성격을 알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조용한 것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안 뺏길 거야.’
나는 두 팔을 끌어안았다. 나는 지금의 삶이 좋았다. 평판은 아직 바닥일지라도 내 자리가 있고 내 일이 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이 삶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으면.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라트반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쉽게 허가가 났군.’
그가 지금까지 성녀에게 외출의 허가를 구하러 갔던 것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이루어진 허가였다. 예전에는 며칠을 부탁해서 겨우 받은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나가냐는 듯한 눈으로 너무도 쉽게 허가를 내렸다. 물론 라트반은 그런 성녀의 변화가 반가웠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만나는 날이 괴롭지 않다. 오늘도 그렇다. 성녀를 기다리고 있는 신관들 사이를 헤치고 그녀를 보았을 때, 하마터면 먼저 소리를 내어 성녀를 부를 뻔했다. 그런 제 마음에 라트반은 자신이 성녀를 만나는 것을 꽤나 기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신관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제 귓가에 오늘 수업이었냐고 물어보는 당황하는 얼굴은 이상하게도 빤히 바라보게 되는 힘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라트반은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대신전을 이끌 대신관을 선출해야 한다.
‘서둘러 카를 신관님을 모셔 와야겠군.’
연락에 따르면 그는 마치 마수의 마력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한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상급 신관들에게 부탁을 해 그를 치료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