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7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74화 >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서슬 퍼렇게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단원들은 마치 전쟁에 나서는 병사처럼 무겁지만 담담한 선율을 펼쳐 나간다.
라르고의 서주로 시작되는 악장은 드넓은 대지를 보는 것처럼 광활하기 그지없다.
클라리넷의 솔로는 눈과 귀를 자극시켰고 관현악의 서정적인 스케르쵸가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관현악의 서슬 퍼렇고 화려한 음색은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물결처럼 차올랐으니.
감미로운 선율의 끝에서 대단원의 행진이 울려 퍼졌다.
“마에스트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리허설을 끝낸 스펜서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손님이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었으니.
치켜 올라간 눈썹 아래 번들거리는 안광은 스펜서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깊게 팬 볼과 굳게 닫힌 입술은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 순간 스펜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막심 이바노프―!”
스펜서가 깊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표정의 변화가 적은 그가 이토록 상대를 환영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과거 함께 지휘를 배우며 동고동락했던 친우였기에.
러시아의 마에스트로 막심 이바노프가 볼을 실룩이며 스펜서와 포옹을 나눴다.
“스펜서, 영국을 찾은 김에 자네를 만나러 왔네. 사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을 감상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지. 런던 심포니의 명성은 여전하더군. 악장 드미트리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느낌이었어. 반면 스펜서 자네는 예전보다 유해진 느낌이었고 말이야.”
“내가 유해졌다고?”
“그래, 기억나지 않나. 과거 왕립학교 시절 자네 별명이 뭐였는지. 얼마나 음악에 깐깐하고 까칠했던지 오죽하면 교수님들마저도 자네를 어려워했겠나.”
막심과 스펜서는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담소를 나눴다. 과거 함께 지휘를 배웠던 이들 중에 세계 정상에 도달한 이는 두 사람이 유일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바이올리니스트 현에 대해 알고 싶네. 자네와 인연이 있다지.”
“바이올리니스트 현?”
“그래, 내가 요즘 가르치고 있는 제자 녀석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 같더군. 알잖은가. 음악을 하다 보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헌데 그 상대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 현 같더군.”
스펜서는 귀를 기울였다. 일찍이 막심 이바노프가 제자를 양성한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허나 이토록 제자를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제자 양성은 물론이고 후학들을 돌보는 일 또한 상상할 수 없기에.
“현은 분명 뛰어난 음악가이지, 앞으로 런던 심포니의 심장을 이어받을 지휘자. 그 말로밖에 표현을 못 하겠군. 그 아이의 음악적 재능은 내가 가늠하기에는 너무나도 넓고 깊으니 말일세.”
스펜서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막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냉정하고 깐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가 아닌가. 그런 스펜서가 이토록 확답을 내릴 줄은 몰랐으니.
더군다나 런던 심포니의 후계자로 점찍어놨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 *
에취―!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어서일까 아니면 누가 내 이야기를 해서일까 낯간지러운 느낌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팔다리가 길어진 탓에 정장이 꽤나 잘 어울렸으니. 그나저나 바바라 회장의 주최로 대기업 총수들이 모인다라.
“실장님, 오늘 모임에 어느 기업들이 초청을 받았나요.”
김상국 실장이 백미러를 힐끔 보고는 기업들의 이름을 읊었다. 대한민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대기업들이 하나같이 편성되어 있었으니. 대한민국 재계가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동주?”
화학기업인 동주까지 포함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때마침 자동차가 제일그룹 승정원에 도착했다. 제일그룹의 의사결정과 주요 경영회담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으며 때때로는 영빈관(迎賓館)의 역할을 겸하는 곳으로 국내외 귀빈들을 만날 때 사용하는 장소였으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비가 삼엄하다. 아무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자산을 따져본다면 과장을 더해 대한민국이 움직였다고 표현할 수 있었으니. 김상국 실장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실장님, 괜찮으세요?”
“승정원은 너무 오랜만에 와봐서 저도 긴장이 됩니다. 그나저나 후배님, 아니, 대표님은 이곳을 보고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시는군요. 제가 한 수 배워야겠습니다.”
승정원의 웅장하고 화려한 내부는 처음 찾는 이의 기를 죽여 놓기에 딱 좋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지.
암, 지난 삶 몇 번이고 이곳을 찾지 않았던가. 물론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제일그룹의 하수인으로서 말이다. 얼마나 승정원을 방문했던지 눈을 감고도 지형지물의 위치를 훤히 꿰뚫을 정도이지 않은가.
그때 안내를 맡은 경호원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전통 한옥으로 된 본관 특실에 들어서자 선객들이 있었으니.
대한민국 5대 기업이라고 불리는 대기업들의 총수는 물론이고 동주의 대표를 맡은 아버지까지 앉아 계시지 않은가.
총수들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은 물론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아, 여긴 네가 어쩐 일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만 여기서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일그룹을 대표해 앉아 있는 손일선 사장만이 내가 VH컴퍼니의 대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
“크흠, 바바라 회장도 예의가 있는 인물은 아니군요. 듣자 하니 저 바이올리니스트와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이런 자리에까지 초청을 할 줄이야. 이거 원 꼬마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때 동신그룹의 김성락 사장이 가자미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응수해 주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허나 김성락 또한 말은 저렇게 했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는 않았다.
아무렴, 지금 동신그룹을 비롯한 한국의 기업들에게 바바라 그룹은 막대한 외화를 유통할 수 있는 하늘의 동아줄로 보일 테니.
그때였다.
“바바라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경호원의 목소리와 함께 격자로 된 특실의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었으니.
진갈색의 눈동자를 품은 바바라 회장이 걸어 들어오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히 동신그룹의 김성락은 한 발자국 앞서나가 먼저 눈도장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째 두꺼운 입술을 들썩이는 것이 준비한 멘트라도 있는 모양.
어?
설마 김성락의 어설픈 영어 발음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일까. 그 순간 바바라 회장이 그대로 내게 먼저 걸어왔다.
* * *
“지금 클래식계에서 가장 뜨거운 음반?”
애덤 위쇼는 고민하는 기색 없이 단 한 장의 앨범을 떠올렸다. 발매부터 전 세계 클래식인들을 들썩이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의 자작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변조적이고 화려한 곡의 색채는 마치 한 곡 한 곡이 전혀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처럼 풍부한 선율과 치밀하다 못해 날카로운 구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과거 베토벤,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의 곡을 들었던 이들과 같은 마음이리라.
“애덤, 놀랍지 않아? 판매량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애덤은 현의 앨범 판매량을 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확히는 EMA의 대표 오스틴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리라.
많은 사람이 EMA에서 발표한 앨범의 초동 물량을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았던가. 일각에서는 전부 소진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까지 나왔다. 허나 결과는 어떠했나.
“EMA의 전략이 정확히 통했군.”
초동 물량이 단 며칠 새에 동이 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계속해서 추가 증판을 요구하지 않는가.
유럽 등지는 물론이고 클래식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조차 마치 신드롬처럼 현의 앨범이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하물며 빌보드와 대중음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미국은 어떠한가.
“이러다가 현 덕분에 RIAA 기록 갱신하는 거 아니야?”
샤론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RIAA, 미국 레코드 공업 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한 해에 판매되는 음반의 비율 중 5%가 클래식 음반이었다.
허나 현의 앨범이 연초부터 천정을 치솟으며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으니. 과장을 더하자면 과거 전설적인 오스트리아의 여제 카라스의 명반이 발매되었을 때 비슷한 양상이었다.
“현 나이가 올해 열아홉 살이라고 했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정말 궁금해. 애덤, 올해의 음반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올해의 음반상?”
시기상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고민해봐야 뭐하겠는가, 정답이 벌써부터 눈앞에 나타나 있었으니. 다른 클래식 음악인들에게 있어서는 어찌 보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라모폰의 악마들이 손꼽아 현의 앨범을 말하고 있었기에.
* * *
“저를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각 기업의 대표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찍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시아에서 투자의 적격으로 손꼽힌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분명 머지않아 훌훌 털고 일어날 정도로 저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요.”
바바라 회장의 유창한 영어에 대기업 총수들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번졌다.
것도 그럴 것이 오프더레코드라고 할 수 있는 이 장소에서 바바라 회장이 저토록 긍정적으로 나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객관적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은 현재 외환위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완전히 그늘을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특히 나라의 성장동력으로 삼기에는 부적격한 기업들이 즐비해 있다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일순 동신그룹 김성락 사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반면 제일그룹 손일선 사장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있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김성락 사장에게 다가가 ‘바로 당신 이야기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크흠. 바바라 회장님께서 아직 한국에 대해 잘 파악하시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대한민국을 좀먹던 기업들은 지난 외환위기때 버티지 못하고 한 줌 모래로 사라졌습니다. 그런 걱정은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어쩜 저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김성락은 여전히 바바라 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양 아닌 아양을 떨고 있었으니. 그때 바바라 회장이 말석에 앉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총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집중되는 것이 아닌가. 특히 김성락 사장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고 있었으니. 목을 몇 번 가다듬고는 운을 띄웠다.
“바바라 회장님의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은행에는 부분 지급 준비율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은행이 예금 고객에게 줄 돈으로 쌓아 둬야 하는 비율을 말하는 것이죠. 어찌 보면 대한민국은 이러한 비율을 잘못 계산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부분을 남용해 특정 기업이 혜택을 봤을 수도 있겠죠.”
바로 동신그룹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김성락이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삶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동신그룹은 밀레니엄이 지나고 채 수년이 지나지 않아 도산을 하게 된다.
항간에는 김성락의 횡령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다른 말로는 정부에서 본보기로 삼았다는 말도 있었으니.
아무렴, 김성락은 재벌 총수로서는 이례적으로 감옥에서 삶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바바라 회장님께서 저 학생의 말을 너무 주의 깊게 안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유명한 학생이지만 경제와 경영으로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학생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어쭈 이것 봐라. 김성락이 의도적으로 나를 깎아내리며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일 테지.
“미스터 킴, 죄송하지만 사과를 하셔야 할 것 같군요.”
“예?”
“저는 방금 한낱 학생에게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그때 바바라 회장이 나를 바라보며 단호히 부연했다.
“VH컴퍼니의 대표에게 의견을 구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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