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83)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83화 >
악장의 지시에 맞춰 오보에가 ‘A’ 음을 길게 불어준다.
조율이 끝마쳐지고 무대 위로 지휘자가 올라섰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지휘자의 가슴팍에는 자수가 된 손수건이 행커치프를 대신해 꽂혀 있었다.
거침없는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긴장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악장은 메마른 침을 대신해 삼켰다.
“카라스……?”
문득 오스트리아의 여제 카라스가 떠올랐다. 카라스는 그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마에스트로였다.
샤론은 강현의 모습에서 1983년 카네기홀을 연상했다. 벌써 십수 년 전의 기억이지만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것이 금방이라도 카라스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물론 샤론이 그렇게 느낀 건 단순히 강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좌중을 훑어보는 저 깊은 눈빛이 그러했다. 콘서트홀과 공명하듯 마치 모든 것을 관조하는 눈빛이었으니. 때문에 샤론이 강현의 모습에서 카라스를 찾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1983년 카네기홀에서 울려 퍼졌던 교항곡과 같은 곡을 지휘한다니 더욱 기대가 되는 바였다.
그 순간 강현은 청중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수많은 청중들이 숨을 죽인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마치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것처럼 시선을 집중케 했으니.
천사가 그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청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고하신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바칩니다.”
짧은 인사말조차 없었던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강현은 달랐다.
“모두에게 그의 찬사가 닿기를.”
강현의 목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콘서트홀의 천장에 닿았다.
내면의 고뇌와 침잠하는 심연 속의 어둠을 바라보는 브람스의 교향곡을 두고 찬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 순간 강현의 연미복이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듯 펄럭였다.
스르릉.
마치 공기가 베어지듯이 지휘봉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고즈넉한 인생의 가을을 만끽하듯 천천히 첼로와 호른의 저음역이 울림을 주었다.
백정훈의 지휘적 색깔이 철혈이었다면 강현의 색깔은 유연함이었다. 마치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 녘의 대지를 밟는 것 같았으니.
서두만으로도 청중들은 이미 마른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현악의 피치카토에 이어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는 음색은 듣는 이로 하여금 거룩하고 서정적인 색채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강현의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선율의 파도가 일었다. 차오르는 환희 속에서 단원들의 얼굴은 고양감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으니.
마치 노년기의 브람스가 직접 무대 위에 오른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그때였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지휘봉의 끝이 매서워졌고 연미복의 끝자락이 펄럭임과 동시에 혹한의 바람이 불어오듯 무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 * *
“후아―!”
흡사 마라톤을 한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무대가 끝나고 단원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청중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표할 때는 자칫 쓰러질 뻔했다.
그 정도로 마치 온몸의 기운을 전부 쏟아낸 것 같았다.
심장이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어깨와 팔꿈치를 지나 손끝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떨렸지만 아직도 벅차오른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무대 위로 올라가 서울시향과 함께 다시 한번 지휘를 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흥분 어린 마음을 차가운 물로 씻어냈다. 앞머리가 물기를 머금었을 무렵 머리 위로 흰 수건이 내려앉았다.
“수고했다, 현아.”
머리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냈다. 고개를 올리고 마주한 백정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4악장의 도입부에서 네가 트롬본을 그렇게 쓸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난 여태껏 브람스가 그러했듯이 샤콘느의 형식만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 청중들이 넋이 나간 것처럼 나도 대기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과연 백정훈은 음악가라는 단어가 딱 맞아 떨어지는 지휘자였다.
배움의 자세는 또 어떠한가. 고지식하고 고압적인 음악가들이 많은 반면, 백정훈은 배움에는 그 어떠한 알량한 자존심도 꺼내 들지 않았다.
하물며 궁금증 또한 어마어마해 항상 탐구하는 자세로 임한다.
“2악장의 성악적인 색채는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프리지아 선법으로 작곡된 곡이긴 하지만 그렇게 거룩하게 표현해 낼 줄은 몰랐어. 만약 함께 지휘를 하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네 리허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을 텐데 말이야.”
혹여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까 싶어 언제부턴가는 서로의 리허설에는 참관조차 하지 않았으니.
백정훈은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 모습만 보자면 무대 위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흩뿌리던 ‘철혈의 마에스트로’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지 않은가.
“형은 어땠어요?”
“나?”
“형의 지휘 말이에요.”
러시아에서 객원 지휘자로서 활동하던 백정훈이었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한국을 찾은 것이 아닌가. 비에 홀딱 젖은 채 우수에 젖은 눈으로 나를 찾았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의 백정훈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니.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어.”
“어떤 점이요?”
“스승님은 내 지휘를 보고 항상 뭔가 결핍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셨거든. 오늘 무대에 오름으로 인해서 그 결핍된 부분이 채워진 것 같아. 정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내가 추구하는 지휘의 방향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으니까.”
백정훈의 지휘는 그야말로 철혈의 마에스트로였다. 지난 삶 기억 속에 존재하던 마에스트로가 무대 위로 다시 재현된 것 같았으니.
예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정훈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오늘 객석에 마에스트로 길버트와 마에스트로 샤를이 온 걸 알고 있니?”
“시카고 심포니와 LA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요?”
“그래, 전부 현이 너를 만나보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다, 지금.”
아무렴, 무대가 끝나자마자 청중들과 단원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대기실로 직행하지 않았던가.
객석에 수많은 음악가들이 자리한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미국의 지휘자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활동 중인 각국의 지휘자들이 한국을 찾았다는 소식은 이미 뉴스를 통해 연일 보도된지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임혜라 이사장이 대기실을 찾은 것이 아닌가.
“현아, 정훈 씨. 잠깐 두 분을 만나보고 싶다는 분이 찾아오셨는데 아무래도 꼭 만나봐야 할 것 같아.”
과연 누구기에 임혜라 이사장이 직접 나타난 것일까. LA필하모닉의 지휘자일까 것도 아니면 시카고 심포니의 역사라 불리는 상임 지휘자일까.
하지만 뒤이어 등장하는 초로의 여인에 나는 물론이고 백정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카라스.
말로만 전해 듣던 전설이 눈앞에 나타났기에.
* * *
“마에스트로, 어떠하셨습니까?”
예정에 없던 아시아 방문이었다. 극비리에 움직인 터라 항상 가족처럼 함께하는 비서와 경호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카라스의 내한을 알지 못했으니.
전설의 마에스트로가 직접 한국을 찾은 이유는 다름 아닌 두 명의 젊은 지휘자 때문이었다.
“마야, 1983년 카네기홀을 기억하나요?”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의 마지막 무대이자 피날레를 장식한 공연이 아니었던가.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부통령마저 참석했을 정도였으니 그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마치 그날을 다시 한번 겪는 것만 같았어요. 같은 교향곡을 지휘한 것도 모자라 두 명의 젊은 지휘자는 청중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으니까 말이죠. 무대만 조용히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들을 만나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카라스의 눈동자에 이토록 흥분이 차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단조로운 지휘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강렬한 환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으니.
누군가 강현의 모습에서 여제 카라스를 떠올렸듯이 카라스는 강현의 모습에서 젊었을 적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께서 그토록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아요. 이제야 믿기더군요. 런던과 베를린이 그 젊은 청년을 두고 그토록 다퉜던 사실도 말이죠. 마야도 함께 공연을 보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마에스트로께서 이토록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무렴, 수십 년간 카라스를 보필했던 비서였다. 마야는 그녀가 이토록 환하게 웃는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으니.
것도 그럴 것이 십수 년 전 사랑하던 자식을 잃고는 지휘는 물론이고 더 이상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마치 호기심 많은 소녀처럼 돌아가 있었다.
“백정훈도 놀라운 지휘자이지만 강현은 다른 의미로 놀라웠어요. 설마하니 브람스의 역작을 그토록 재해석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요하네스 브람스가 만약 살아계셨다면 분명 현에게 찬사를 내렸을 거예요.”
“그 정도였습니까?”
“청중들의 얼굴에는 환희가 들어찼고 현과 함께한 단원들의 머리에는 축복이 내린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만큼 대단했죠.”
마야는 마에스트로가 이토록 남을 칭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렴, 그녀는 이미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세계의 정상에 올랐던 지휘자였으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 카라스의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본 적 없던 활기가 넘쳐흘렀다.
“마야, 현을 오스트리아에 초대할까요?”
* * *
클래식계가 들썩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카라스의 내한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으니.
것도 그럴 것이 지난 1983년 카네기홀에서의 마지막 지휘 이후 카라스는 세상에서 모습을 철저히 숨기지 않았던가.
“낯간지러워서 못 살겠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뉴스에서도 연일 나에 대한 이야기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특히 다큐멘터리로 인해 이미 국민적인 관심도가 높아진 뒤라 여자 친구의 유무는 물론이고 그의 일대기를 마치 질소로 과대 포장된 과자처럼 띄워주고 있었다.
자식교습법을 가르치는 TV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에게 섭외 전화가 왔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아들, 엄마는 그래도 이 기사 제목은 마음에 든다. 대한민국의 아들들 전 세계를 뒤흔들다. 아들하고 정훈이 얼굴이 딱 정면에 박혀 있잖아.”
“너무 과장되게 기사가 난 거예요. 저 정도는 아니에요.”
예컨대 국뽕이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이 아닐 테다. 개중에는 전설적인 마에스트로 카라스가 나를 제자로 삼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는 얘기까지 돌았으니.
그뿐이겠는가. 사설 주간지에서는 이미 내가 제일그룹의 숨겨진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여보, 집 앞에 기자들 아직도 있어?”
“아까 순경 아저씨들이 와서 정리했는데 또 왔나 보네요.”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학을 뗐다.
아무렴, 유명 스타들에게나 붙는다는 사생 기자들이 내게 붙지 않았던가. 파파라치를 당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마음이 어떤 심정인지 십분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얼마 동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듯싶다. 그때였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가정부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찾았다.
“강현 학생, 지금 저택 밖에 손님들이 왔는데 아줌마는 영어를 못해서.”
“네?”
“외국인이 찾아오셨어.”
외국인이라니.
설마하니 런던에서 스펜서라도 찾아온 것일까 싶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밖으로 나가니 뜻밖의 인물이 서 있지 않았던가.
맘씨 좋은 할머니처럼 인자한 표정의 여제 카라스가 서 있었다. 옆에는 비서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도 함께다.
이로써 두 번째였다. 지난 삶에도 마주한 적 없었던 전설의 마에스트로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
“마에스트로, 어떻게 여기까지?”
분명 오스트리아행 비행기를 탄다고 했는데.
“오빠아―!”
그 순간 마에스트로의 뒤로 또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난 것이었으니. 아직 한국에 남아 있던 손유하까지 이촌동 저택을 찾은 것이 아닌가.
두 여자의 등장으로 인해 어안이 벙벙할 때였다. 아뿔싸, 그제야 기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이 생각났으니.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장면을 촬영하고 있을 거다. 내일 아침 헤드라인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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