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0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09화 >
젊은 지휘자의 손끝에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폭풍이 불어오듯 숨 가쁘게 악장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지휘자의 눈동자는 담담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담담한 눈동자 사이로 비치는 날카로움은 단원들에게 긴장을 머금게 했으니.
‘알베르토―!’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는 곧장 지휘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뒤따랐다. 무언의 경고 속에서 첼로를 맡은 알베르토의 이마에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젊은 지휘자는 일말의 방심도 용납지 않았다. 마치 자로 잰 듯한 완벽한 지휘 속에서 단원들은 연주를 끝마쳐야 했다.
그래서일까, 지휘자의 별명은 쇠와 피를 뜻하는 철혈이었으니.
“역시 부지휘자님의 리허설은 엄청나다니까.”
“알베르토, 그러니까 리허설 중에는 한눈팔지 말지 말라니까?”
“잠깐 딴 생각했는데 그걸 단박에 눈치채실 줄 누가 알았겠어. 완전 귀신이 따로 없다구.”
단원들은 부지휘자를 신뢰했다. 그가 교향악단에 입단하고 나서부터 단원들의 실력이 일제히 상향되지 않았던가. 그만큼 완벽하고 혹독한 연습 뒤에는 성과가 뒤따랐다.
“그런데 혹시 부지휘자님이 웃으시는 거 본 분 계세요?”
누군가의 질문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부지휘자와 함께한 지 반년이 흘렀지만 그가 미소를 짓는 것은 본 적이 없었더랬다.
아무렴, 괜히 철혈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었으니. 처음에는 지휘를 위해 태어난 로봇인 줄 알았다는 단원도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부지휘자의 눈빛과 입가는 항상 담담했으며 날카로웠다. 그때였다.
“난 봤는데?”
교향악단의 악동이라 불리는 단원 미켈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미켈은 단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부연했다.
“방금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봤어. 한국에서 넘어온 신문을 보시면서 미소 짓고 계시던걸?”
“한국에서 온 신문?”
“일면에 마에스트로 카라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신문이었어.”
카라스라는 말에 단원들의 눈이 빛났다. 아무렴, 여제 카라스는 그만큼 전 세계 교향악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마에스트로였으니.
교향악단의 부지휘자, 백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고국의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든 타국생활에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는 현의 소식이었다. 전설의 마에스트로를 감동시키다니 놀랍지 않은가.
철혈의 마에스트라 불리는 백정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결의를 다짐했다. 자신 또한 현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 * *
드럼을 채로 때리듯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쩌다 보니 러시아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영국행을 택하게 되었다.
마에스트로와 함께하는 여행이어서일까.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암, 클래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마에스트로 카라스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기에.
“와인은 괜찮습니다. 식사는 양식으로 준비해 주시고 죄송하지만 그라모폰지 혹은 클래식과 관련한 잡지가 따로 없을까요?”
내 입에서 능숙한 러시아어가 흘러나오자 승무원은 물론이고 마에스트로도 놀란 표정이다.
“현,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는 거예요?”
“그냥 서너 개 정도 언어만 통할 정도로 하는 수준이죠.”
“그냥 서너 개요?”
마에스트로는 혀를 내둘렀다.
지난 삶의 기억과 발달된 소프트웨어 덕분일까. 언어능력에서 있어서는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겸손을 더해서 서너 개라고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는 그 이상일 것이 틀림없었다.
‘안나?’
항공사 팸플릿에는 일전과 마찬가지로 백금발의 안나가 장식하고 있었다.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연한 백금발의 머릿결,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불공평했다.
이 정도로 예쁘고 음악적 재능도 충만한데 항공사 오너 일가의 영애라니.
“현, 아는 사람인가요?”
“예, 마에스트로. 친구입니다.”
그 순간 카라스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마치 유하를 두고 한눈팔면 안 된다는 말을 묵언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공을 가르던 비행기는 어느새 밤이 지나 다시 낮이 도래할 즈음 런던에 도착해 있었다.
10월의 날씨를 상징하듯 비 내음이 가득한 선선한 영국의 바람이 폐부를 저민다. 출국 게이트 밖으로 나서자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처음에는 연예인이라도 도착한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그 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전부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였다.
“마에스트로―!”
경호원들과 함께 스펜서와 단원들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 * *
“왕립음악대학?”
스펜서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나는 나쁘지 않다고 보네.”
“런던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것이 말입니까?”
“그래, 현 네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공연이 늘상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현장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는 것보다 자네 또래의 천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음악적 세계관을 넓히는 좋은 방법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스펜서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왕립음악학교에서는 웬만해서는 교환학생을 받으려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나 또한 왕립음악학교 출신이지만 교환학생을 받아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아무렴, 세계적으로 명성이 드높은 음악학교이지 않은가. 천재들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이들만 입학을 하고 그마저도 전부 졸업을 하지는 못한다.
하물며 1990년대까지 버킹엄의 여왕이 직접 총장을 맡았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때였다.
“하지만 현 자네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음악가라면 말이 다르지. 입학시험이야 자네라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추천장은 내가 직접 써주도록 하지. 더군다나 작금의 왕립음악학교 총장이라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니 걱정할 건 없을 걸세.”
직접 추천장을 써주겠다고 말할 줄이야.
“항상 도움만 받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마에스트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그렇게 벽을 둬서야 쓰겠나. 혹시나 하는 말인데 요즘에도 베를린의 유리에게서 연락이 오나?”
스펜서는 아직도 베를린 필에서 나를 영입하려 할까 봐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슬그머니 입꼬리가 위로 향한다. 스펜서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낡은 브라운관에 시선을 두었다.
“지휘실 한편에 자리한 브라운관을 통해 현 자네의 연주를 처음 들었지. 아주 어린 아이가 무대 위에 올라 바이올린을 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 한평생 쌓아 올렸던 음악적 가치관이 뒤흔들리는 기분이었으니까 말이야. 모차르트 이후 모든 신동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네를 직접 만나고 나서야 가치관이 오롯이 부서지고 말았지.”
“과찬이십니다, 마에스트로.”
“자네가 그렇게 겸양을 떨면 수많은 음악가들이 손가락질할걸? 그 어린 나이에 퀸엘리자베스를 평정한 것도 모자라 영국 왕실에서 지휘를 했을 정도라니. 아마 20세기에 자네가 이룩한 커리어와 비교할 만한 이는 없을 걸세. 마에스트로 카라스 또한 그토록 어린 나이에 왕실에는 오르지 못했으니 말이야.”
스펜서는 혼잣말로 ‘모차르트 정도라면 모를까.’라고 부연했다. 이윽고 마에스트로는 지휘실 한편에 놓인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오랜만에 내게 자네의 선율을 들려줄 수 있겠나?”
* * *
여제 카라스의 복귀무대까지는 시일이 남았다. 런던 심포니의 단원들은 여제의 복귀무대를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악기를 켰으니. 리허설을 관람할 때마다 여제의 지휘와 통솔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숱한 경력을 지닌 런던 심포니의 단원들이 여제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해 오히려 여제가 호흡을 늦추지 않았던가. 전설은 전설이었으니. 그녀의 복귀 무대 날 분명 청중들은 전설을 다시 맞이하리라.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바라봤다.
“The Royal Academy of Music.”
어느샌가 도착해 버렸다. 1882년 왕세자 에드워드 7세에 의해 설립된 왕립 음악학교니 만큼 고풍스러운 외관이 눈에 띄었다.
일전에 방문했던 줄리어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으니. 창가에 부는 가을바람만큼이나 은은한 선율이 들려오는 가운데 학생들의 품에는 하나같이 악기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HYUN?”
미리 연락을 드렸던 학교의 관계자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었으니. 김미현과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처럼 보였지만 무테안경과 복장이 무게감을 주고 있었다.
하물며 꽤나 학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고개를 숙이지 않는가.
이윽고 학생들의 시선이 곧장 내게 따라붙었다. 어찌나 그 시선이 강렬하던지 과장을 더하자면 학생들 중 나를 쳐다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총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설마하니 다이렉트로 총장과 만나게 될 줄이야. 아무렴, 런던 심포니의 수석지휘자가 쓴 추천장이 아닌가. 긴장을 삼켜버리곤 총장실로 들어섰다.
“오래간만입니다, 현.”
오래간만?
그 순간 낯익은 인물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었으니.
‘새뮤얼 왕세자?’
새뮤얼은 반갑다는 듯이 내게 포옹을 해왔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여왕이 총장을 내려놓은 뒤 새로이 학교를 맡았다는 인물이 바로 왕세자라는 사실을.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새뮤얼은 직접 찻잔에 진한 홍차를 따라주기까지 했다.
“저는 그때의 어린 신사가 이토록 빨리 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생각해 보니 새뮤얼과 첫 만남은 신림동이 아니었던가. 지난 삶의 기억을 정리하고자 찾았던 신림동에서 뜻밖의 만남을 하게 된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운명이란 참으로 신기했다. 신림동에서 제육순대볶음을 먹고 난 후 영국의 왕세자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용하다는 무당 또한 이러한 미래를 맞추진 못했으리라.
“스펜서가 제게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바로 현을 입학시키지 않는 건 왕립음악학교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행위라고 말이에요. 정말이지 스펜서는 아마 깜빡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현의 가장 첫 번째 팬은 다름 아닌 저인데 말이죠. 스펜서에게 현을 소개한 장본인이 저니까 말이에요. 하하하.”
총장과의 면담은 뜻밖에 사담이 되었다. 이미 왕립음악학교의 총장과 학부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었으니.
새뮤얼은 나와 대화를 하다 ‘현과의 대화는 역시 즐겁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와 비슷한 동년배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기분이 드니까요.’라고 부연했다. 새뮤얼은 찻잔으로 입을 축이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거 아십니까? 현이 교환학생으로 오고 싶다는 말에 왕립음악학교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예?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정말입니다. 퀸엘리자베스의 우승자이자 영국 왕실에서 공연을 했던 지휘자가 직접 음악학교에 학부생으로 들어오는 것이니까요. 사실 학생들 말고 교수님들이 더욱 반가워하는 눈치예요. 소문에는 스펜서와 마에스트로 카라스의 공동 제자라는 말까지 있던 걸요. 아마 현이 직접 왕립음악학교를 다니게 될 때에는 더한 관심을 받을 거예요. 분명합니다.”
어째 폭풍의 전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