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65화 >
“천부적인 재능, 그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군요.”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벅찬 감정이 미셸 피콜리의 전신을 휘감았다. 누군가의 음악을 듣고 이토록 흥분했던 적이 있을까. 소년의 음표는 마치 음악가로서의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리스트를 바라봤던 쇼팽이 이러한 심정이
었을까, 모차르트를 바라봤던 살리에르가 이러한 감정이었을까.
“현, 정말 작곡을 배워본 적이 없는 건가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미셸은 감탄 섞인 탄식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아냈다. 대중가요를 작곡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곡가를 화가에 비유하자면 먼저 곡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구도를 잡아야하며, 채색과 스케치를 마무리하는 것은 하루 이
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밴드 음악은 악기의 구성 때문에 종종 풍경화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한 사람의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밴드 전체를 아우르는 조화를 보여 줘야하기 때문이었다.
헌데.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야?’
클래식을 전공했기 때문에 악기의 구성에 대해 강할 줄은 알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규격외이지 않은가. 미셸 본인 또한 신동소리를 들으며 커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창 풍경화를 그려가던 소년의 손이 멈추었을 즈음.
“현, 궁금한 점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미셸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처음 소년의 자작곡 ‘아름다운 인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불과 14살의 어린아이다. 신디사이저마저 조작하기 힘들 정도로 짧은 팔을 지니지 않았는가. 외형만 보자면 본래 그의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일정도로 앳되기까지 하다. 헌데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러한 감정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농밀한 감정의 선을 단 이틀만에 완성시켰다는 소년의 말을 믿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니 사실인 것도 같다.
“현, 작곡가들마다 세세한 특징이 있죠. 누군가는 코드를 먼저 찾는다거나 멜로디를 구상하고 것도 아니면 어떤 리듬으로 시작해야할지 구상하는 등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 각자의 루트가 있어요. 아무래도 처음 스케치를 해나가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현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작곡을 하는지 궁금하군요.”
“음, 미셸. 저는 그렇게 전문적으로 작곡을 배울 시간이 없었잖아요. 사실 악상기호가 떠오르는 대로 그려나가고 있다는 게 맞을 거예요. 아름다운 인생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거니까요. 잠깐만요, 방금 또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 순간 소년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작은 손가락이 밴드 음악에 대한 해석은 물론 기획과 코드, 리듬, 후렴을 잡아내는 과정을 단 하나로 축약시킨 것 같았으니.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을 오선위에 끊임없이 적어 내려가는 그 모습이 정말 야사속의 모차르트
와 닮은 것 같다고 미셸은 생각했다.
*
“현―!”
촬영현장에 도착하자 아이작이 두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나와 동갑이라지만 다 큰 녀석이 두 팔을 벌리고 뛰어오는 광경은 아직도 영 적응이 안 되었다. 하물며 저 선망에 찬 눈동자까지.
“오늘 인터뷰를 했는데 말이야, 현 이야기를 했어!”
“내 이야기를?”
“응, 영화 촬영장에 엄청난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고 말해줬지. 기자님도 현 이름을 알고 있는 눈치셨어. 브뤼셀의 모차르트라고 칭하시던 걸!”
아이작은 신이 나서 계속해서 인터뷰를 했던 내용을 말해줬는데 가만 들어보니 영화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내 소개만 실컷 하다 온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창 아이작의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장피에르가 다가왔다.
“현, 밤 늦게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원래는 이틀 뒤로 예정된 야간촬영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당긴 이유가 있었지.
“괜찮아요, 감독님. 오늘 같은 밤하늘은 흔한 게 아니잖아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올리면 맞을 것이다. 검은 도화지위로 수놓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지 않은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깊은 생각에 잠길 정도였으니. 영상미를 중시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날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작, 오늘 무슨 촬영을 하는지 알고 있지?”
아이작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대본을 닳도록 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촬영장에 없었다. 영화촬영을 이야기할 때면 어린 아이 같던 눈망울이 한없이 진지해지지 않는가.
“모세가 처음으로 타인의 곡을 연주하는 날이잖아.”
“맞아, 만약 곡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부모형제처럼 여겼던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이지.”
수용소의 새로운 소장은 악랄하다시피 모세를 괴롭혔는데 한날은 무명 바이올리니스트의 곡을 들려주고 모세에게 똑같이 연주하라고 시켰다. 만약 음이 조금이라도 틀린다면 틀릴 때마다 모세와 같이 수감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죽일 거라 겁박하며. 영화촬영이 시작되자,
“흐음.”
장피에르가 턱을 매만지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본을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한 아이작의 연기는 훌륭했다. 하지만 문제는 뭔가 2% 부족한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분명 지난 삶과 다를 바 없는 장면이었지만 나 또한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감독님, 모세에게 안대를 씌워보는 건 어떨까요?”
“안대를?”
“수용소의 사람들은 전부 모세를 믿고 있어요. 모세의 연주가 틀릴 때마다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애써 미소 짓고 있잖아요. 하지만 어린 아이인 모세는 떨고 있어요. 불안하고 무섭고 두렵겠죠. 자신의 눈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담벼락에 줄지어 서있는 친구들이 크게
동요할테니까. 제가 만약 모세였다면 안대를 써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뜻밖의 아이디어에 장피에르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 모세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생애 처음으로 타인의 곡을 연주하는 것도 모자라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지천에 깔렸어요. 눈을 가리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생애 처음으로 들은 타인의 곡을 한번 듣고 곧장 따라 연주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더군다나 축음기의 음질은 좋지 않았고 고요한 밤 속의 벌레소리는 그 무엇보다 크게 들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널티를 안고 곡을 완주
하는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때였다.
“감독님, 안대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직접 해보는 수밖에.
* * *
“장피에르, 흥분 좀 가라앉히고 말해.”
미셸은 아침 댓바람부터 걸려온 전화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촬영 때문에 밤을 샌 감독의 목소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들뜬 목소리였다.
“안대를 쓰고, 처음 듣는 곡을 연주했다고? 그 낡은 축음기를 통해서 나오는 음반을 말이야?”
수화기를 들고 있던 미셸의 어깨가 들썩였다. 장피에르의 이야기가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입에 침까지 고이지 않는가. 장피에르는 리얼리티를 중심여기는 감독이었다. 그 때문에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기대치를 정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부로 그 벽이 부서져 내
린 것이었으니. 현에게 안대를 씌운 것도 모자라 예정되었던 곡이 아닌 다른 음반을 들려줬다고 한다. 헌데.
“원래의 곡보다 훨씬 그 음색을 더 잘 살렸다고? 장피에르, 그 영상은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메이킹필름을 위해 촬영한 6mm카메라 속에 그 모든 과정이 담겨있다고 하니. 한편으론 믿기지 않기도 했다. 사람의 귀가 녹음기도 아닌데 찰나의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정말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장피에르가 과장이 심하긴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었다. 전화가 끝났음에도 여운이 남는 것이 미셸은 하루 빨리 그 영상을 실제로 보고 싶었다.
때마침.
“미셸.”
작업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일전 마주했었던 프로듀서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신인 밴드. 아아, 이름이 아이리스라고 했던가.
“벌써 작곡이 끝났다는 건 무슨 말이야?”
그때 프로듀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하긴 코드를 짜고 멜로디만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시간. 물론 다수의 작곡가들에게 협업작업을 맡겼을 때는 이토록 빨리 끝나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의뢰를 맡긴 작곡가는 현 한명이니 의아
할 만도 했다. 빨라도 너무 빠르지 않나.
“정말 끝났어, 폴.”
“미셸, 설마 샘플 하나를 보여준다고 이렇게 우리를 다 부른 건 아니지?”
미셸은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시선에 어린 모차르트가 적어 내려간 수많은 악보가 닿았으니. 단단히 놀랄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
다채롭게 익어가는 잎새를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가 있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날이라서 그런가, 화창한 창공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떼를 지어 선회하고 있었다. 그의 연주를 기다리는 청중처럼.
“현, 이 자세는 어때?”
언덕 위에서 아이작이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 취했다. 무형의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이었기에 그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손과 어깨의 위치였다. 바이올린이 있을 때는 몰랐지만 없으니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리라.
“아이작, 자세를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늘은 모세 혼자하는 연주만은 아니잖아?” 바이올린이라는 것이 원래 그러했다. 정형화된 자세가 있긴 하지만 각자만의 고유한 틀이 따로 있는 법이니, 더욱이 무형의 바이올린이지 않은가. 하물며 오늘 촬영은 모세가 무형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수용소의 수많은 수용자들도 차가운 철창사이로 휘파람을 불어
앙상블을 이루는 슬프지만 그 음악만은 아름다운 마지막 씬이다. 모세는 내 짧은 말에 무언가 영감을 받은 것인지 와락 날 껴안았다.
“현, 넌 정말 천재야! 이번 배역은 네가 없었더라면 난 결코 해내지 못했을 거야.”
일전 안대를 끼고 연주를 했던 날 이후로 완전히 나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장피에르 또한 종종 바이올린에 관한 장면이 아닐지라도 내게 의견을 묻고는 했다.
“현, 여기 와서 앉아요.”
어느새 내 지정석이 되어버린 장피에르의 옆자리였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데 어때요?”
장피에르가 나를 향해 물었다. 물론, 라비안로제의 마지막 촬영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만 따로 뽑아 미리 촬영하는 것이기에 내가 자리하는 마지막 촬영이라는 뜻이었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삶에서도
찾아본 적 없던 영화촬영장에서 훗날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를 내가 코칭하게 될 줄이야.
“음향감독도 현을 아주 좋아해요. 만약 기회만 된다면 다음 영화에도 음향부문에 섭외하고 싶어하더군요. 그리고 내가 보기엔 현은 연기재능도 아주 뛰어나요. 촬영구도와 영상미를 이해하는 것은 타고나는 건데, 현은 완벽히 그걸 타고 났어요.”
“제가요?”
“아무렴요. 아이작은 동년배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아역 중 한 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연기에 대한 가치관과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죠. 그런 아이작이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사소한 연기부분까지 현에게 묻는 건 엄청난 거라고요. 아이작도 본능적으
로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현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아서라, 내가 무슨 영화촬영을 하겠나.
“사실 라비안로제가 흥행한다면 파가니니와 관련한 음악영화도 만들 생각이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파가니니의 아역으로 현을 등장시키고 싶은데…”
아무래도 피부색이 문제가 되겠지, 이태리 출생의 니콜로 파가니니의 어린 시절을 동양인이 연기 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
“마음만 받겠습니다, 감독님.”
“한 번씩 볼 때 마다 현은 정말 그 나이처럼 안보여요.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친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니까요.”
중년의 삶을 갈아온 나이기에 어린아이의 조급함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장피에르는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이내 촬영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이 연기를 할 준비를 끝냈기 때문. 조연출의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점등되었다. 더 이상 모세의
손에는 낡은 바이올린이 없었다. 현이 끊어진 것일까, 활이 부러진 것일까, 아니면 소장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때 긴장한 모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모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소장이 그를 항해 총구를 들이밀었음에도 더 이상 모세의 눈동자에는 슬픔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장피에르의 입술이 바짝 마른 것을 보며 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난
삶 마주했던 명장면이 내 눈동자위로 투영되어 흐르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휘파람을 타고 흐르는 자유의 선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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