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2)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72화 >
“대한그룹에 뭘 해?”
응접실에는 묵은 향만이 감돌고 있었다.
“제 착오였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투자자금을 전부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버려 두어라.”
“예?”
손일선이 고개를 들어 왕회장을 바라봤다. 책망을 받아 마땅한 실책이었다. 한낱 사사로운 생각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왕회장의 눈동자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했다. 마치 오랜 시간 벼려진 검처럼.
“괜스레 투자자금을 회수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이 불게야, 정관계가 날카롭게 곤두서있으니까 말이지. 이럴 때일수록 한걸음 물러서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거라. 경거망동하다가는 결국 자빠질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다름아닌 왕회장이었다.
“일선아.”
“네, 아버지.”
“돌부처가 그리 말했다지. 몰라서 둬버린 실수는 별 느낌이 없지만 경솔하게 불쑥 손이 나간 실수는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라고 말이다. 앞으로 대한그룹은 그 뿌리가 뽑힐게고, 그 뿌리에 연결된 대한민국이 흔들릴 것이다. 너는 오늘날의 실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손일선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적에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범접할 수 없는 태산처럼 느껴졌다. 대한민국이 풍랑을 만난 유람선 마냥 위태로운 지금 아버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마
치 수백 수 앞을 내다본 바둑 명인처럼.
“아버지, 김대식 리스트에 유회장님의 차남이 기재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김대식 리스트, 대한그룹의 총수 김대식이 로비한 자금명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앞으로 대한철강이 도산하고 대한그룹이 무너지면 자명히 드러날 문서였으며 대한민국에 또다시 피바람을 불게 할 살생부나 다름없었으니. 그렇게 되면 주홍글씨가 새겨진 동주 또한 안
전한 것이 아니다. 허나.
“일선아, 유회장과 내가 어찌해서 이 나이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아느냐. 우리는 그 누가 무너진다 할지라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않기로 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경영을 망치지 말아라. 네 선택에 제일그룹이라는 이름이 항상 뒤따르는 것을 명심하고 말이
다!”
칼같이 단호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찻잔을 입에 대는 왕회장의 입꼬리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았으니. 형형한 눈빛이 시선 너머의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파헤쳐 나갈 것인고.”
*
염병!
오선위의 음표가 악다구니를 쓰는 것 마냥 거칠게 휘어졌다. 슈베르트의 마왕처럼 분노를 비롯한 복잡 난해한 감정이 깃든 악상의 연속이었다. 지금 내 마음을 여실히 투영해주고 있는 것일 터. 쉼표가 없는 소설을 읽어내려가듯 막힘없이 그려내려가던 음표 뒤 겹세로
줄 위에 페르마타가 쓰이며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현이 네 모습을 보여주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거다. 마치 악상을 쏟아내는 것처럼 오선위를 채우고 있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번 봐도 될까?”
여태껏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백정훈이었다. 어째, 유학길에서 눈칫밥을 가르쳐준 선생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곁으로 다가왔으니. 하지만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건넨 악보를 백정훈이 조심
스럽게 받아들었다. 갓난아기를 안는 것처럼 신중하기 그지없다.
백정훈의 시선이 줄곧 오선위의 음표를 따랐다.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던 백정훈의 눈동자가 겹세로줄 위 페르마타에 닿는 그 순간.
“하.”
숨길 수 없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왜 음반 레이블에서 현이 너를 그토록 애타게 찾는지 알겠어. 휘몰아치는 감정을 토대로 단숨에 써 내려간 악보가 이 정도라면 다른 악보들은 어떻다는 걸까? 아마 네 작업실에 악보들이 쌓여있다는 것을 알면 전 세계에서 백지수표를 들고 앞다투어 찾아올 거다.”
백정훈은 어느 순간부터 내게 많은 것을 물어왔다. 독주회에 쓰일 레퍼토리부터 시작해서 음악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과 추상적인 개념까지. 마치 선생님을 대하듯 진지한 그 태도에 나도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으니.
“레퍼토리에 철혈을 추가하고 싶다고요?” 백정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퍼토리라는 것은 빈대떡 뒤집듯이 쉬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고뇌 끝에 완성되는 목록이었으니. 더군다나 귀국 후 처음 맞는 독주회이지 않은가. 백정훈은 수많은 청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자리에서 숙련되지 않은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가히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부탁한다, 현아.”
“될 때까지 합니다?”
백정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두두두둥―!
건반 위의 손가락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시.”
찰나였지만 음정이 틀렸다. 손가락의 이완처럼 미세한 조절이라 일반인이 듣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게는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려왔다. 백정훈은 틀린 부분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내게 혀를 내둘렀지만 모순적이게도 얼
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다시.”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건만 백정훈은 묵묵히 내 말을 경청했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음 하나 하나에 힘을 실어 연주하는 1악장을 시작으로 안개가 짙게 깔리듯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2악장 격렬하게 몰아치는 3악장에 이르기까지. 백정훈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팔은 이
미 엷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독주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백정훈의 말처럼 정말 철혈을 레퍼토리에 정식으로 추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었으니. 틀린 부분을 찾아 내주고 악보의 해석을 도와주었다. 천재라고 할지라도 단기간에 악보를 오롯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했다. 백
정훈의 말처럼 작곡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셔츠는 이미 굵은 땀방울로 흠뻑 젖어있었다. 장대비라도 맞은 것처럼.
“형.”
무의식적으로 악보의 첫음절로 움직이는 백정훈의 손을 잡아주었다.
“완성됐어요.”
탈진할 만도 하건만 백정훈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과연 철혈의 마에스트로다. 곡을 봐주던 중반부부터는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연주에 몰두하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마저 일 정도였으니. 그의 깊
은 시선과 열정에 복잡했던 내 머리마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백정훈의 철혈이 완성된 그 순간,
-역사는 반복된단다, 현이 너는 어느 위치에 설 게냐.
어디로 향해야 할지 나 또한 갈피를 잡았다.
* * *
뻐끔뻐끔―!
연못에 잉어밥을 흩뿌리자 황금잉어들이 앞다투어 주둥이를 샐쭉 내밀었다. 왕회장이 그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님, 날이 찬데 그만 들어가시지요?”
장마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치고는 날씨가 서늘했다. 때때로 찬바람이 부는 것이 삼배옷을 입은 시아버지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는 것일 터. 왕회장은 한데 모여든 황금잉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멈아, 신기하지 않으냐. 이 잉어들 말이다. 밥을 준 지 얼마나 됐다고 망각한 채 또다시 앞다투어 입을 벌리고 있지 않느냐. 다 그런게다. 인간의 욕심 또한 끝이 없지. 대한철강이 무너지고 조만간 대한그룹 김대식이의 청문회가 열린다지? 그놈의 떡밥에 몇 명이나
잡혀들어갈는지.”
“아버님, 김회장이 쉽사리 말문을 열 양반은 아니잖아요?”
오죽하면 김대식의 별명이 자물쇠였겠는가. 검찰이든, 청문회든 어디서 압력을 행사할지라도 결코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그때 왕회장이 연못에 남은 잉어밥을 털어냈다. 이쯤 되면 배가 부를 법도 하건만 여전히 앞다투어 잉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김대식이도 똑같은 인간이야, 더군다나 아주 욕심이 많은 인간이지.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털어 놓을게야.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판국이니.”
알음알음, 재벌가 사이에서는 김대식 리스트의 명단이 확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한테까지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데모까지 열린다고 하겠는가. 부정부패 명단의 공개를 요청하는 신문고의 북소리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으니. 이유불문하고 김대식 리스트에 이
름이 적힌 인물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동주도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아무렴, 주홍글씨가 새겨졌다고 봐야지.”
임혜라 이사장은 의아했다. 자신의 시아버지와 동주의 유회장은 절친한 막역지우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의 태도만 보자면 전혀 관계없는 남남처럼 보이지 않은가. 역시 이러한 철두철미한 왕회장의 성격이 이날의 제일그룹을 있게 한 것일까. 그때였다. 왕회장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은.
“양반은 못 되는구나.” “예?”
“두고 보아라, 모든 것은 저 아이에게 달렸으니.”
그 순간 정원 너머에서 낯익은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
아침 일찍 평창동 대저택으로 향했다. 바둑을 두는 날도 아니었기에 의아할 만도 했건만 김기사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평창동까지 태워주었다. 작은 삼촌으로 인해 이촌동 저택이 풍전등화처럼 뒤숭숭한 것에 비해 평창동 대저택은 마치 아침 숲속의 고요를 보듯
고즈넉한 운치마저 느껴졌다.
“현아, 아침에는 따뜻한 녹차가 좋단다.”
왕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직접 우려낸 녹차를 찻잔에 따라주기까지 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할아버지께서 범경이 삼촌의 일을 없던 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왕회장은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봐온 왕구렁이 영감님이었으니 이 정도에는 놀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되려 이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할애비와 현이네 할애비는 서로의 가정사는 물론 경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거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씩이나? 왕회장이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로는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제일그룹의 회장님밖에 안 계십니다. 저희 할아버지 또한 불가능한 일이죠.”
애초에 할아버지는 왕회장과 달리 정관계에 손이 넓지 않으셨다. 더군다나 왕회장은 오래전부터 전략기획실은 물론, 정관계에 장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에서 왕구렁이 영감님의 손을 거쳐 안 되는 일은 없었다.
“둘째로는 할아버지께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거래이기 때문입니다.”
“거래?”
“예, 거래입니다.”
왕회장의 눈가에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으론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날카로움도 도사리고 있었으니. 마치 똬리를 틀고 있는 천년 묵은 왕구렁이 같았다.
“현이 네가 부탁하는 일이 그렇게 여반장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다. 할애비는 이번 거래에 많은 이윤을 취해야 할 터인데 가능하겠느냐?”
아무렴, 제값에다가 이문까지 톡톡히 얹혀드리리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무너질 것입니다.”
“대한철강이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그리 속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텐데?”
“속단이 아닙니다.”
단호한 내 대답에 왕회장이 고갯짓했다. 더 말해보라는 듯이.
“대한철강은 도화선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작금의 대기업들은 하나같이 불합리한 구조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분식회계는 물론이고 관치금융으로 인해 막대한 금융부채를 지니고 있는 게 그 방증이죠. 종국에는 종금사의 영업정지는 물론 수많은 기업이 도미노가
쓰러지듯 하나둘씩 도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결국 그 속도는 뉴스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겠죠.”
왕회장은 놀라움을 삼키느라 애쓰는 표정이었다. 왕구렁이 영감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내가 말한 내용은 이미 제일그룹 전략기획실에서 이미 시뮬레이션을 돌린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사안이 어린 아이의 입에
서 술술 흘러나올 줄은 상상치 못했을 테지.
“현아, 네 말을 확신하느냐?”
“네, 할아버지.”
“그렇담 이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는 무엇이더냐?”
어떻게 이것들을 파악했느냐고 묻지 않는다. 지난 2년간 날 알아봤던 왕회장이었으니.
“동주가 망하는 것을 보기 싫으니까요.”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왕회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김대식 리스트에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이 무엇이 큰일인가 싶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문제가 된다. 훗날에도 정계의 힘은 막강하다. 더군다나 보수적인 20세기이지 않은가. 옛말에 도둑놈에게 잡히면 가진 돈
만 뺏기지만 정관계에 꼬리가 밟히면 전재산은 물론 앞으로 벌 돈까지 뺏긴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라이핀이라는 불세출의 신소재를 가진 동주는 그야말로 탐이 안 날 수 없는 밥상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동률.
난 마지막 수를 꺼내었다.
“앞으로 단 한 번, 손장원 회장님의 부탁이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라 칭하지 않았다. 거래란 무릇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중요했으니. 일순 왕회장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한 왕구렁이 영감님이었지만 이토록 커다란 웃음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다 살다, 영감탱이가 이렇게 부러운 적은 처음이구만. 이토록 이문을 많이 남기는 거래를 제안할 줄이야.”
장사치는 어느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으니.
“그 누가 거절하겠느냐.”
왕회장과 내 첫 번째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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