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3)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73화 >
스피오 스피오 맴맴―!
장마가 그치고 매미들이 따사로운 햇볕을 자랑하듯 목청껏 운다. 조경수를 매만지고 있던 왕회장의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젊었을 적 아들의 재롱을 봤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가. 아무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한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심장이 다시 젊어진 것만 같았다. 인재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규격 외였으니.
“손가, 늘그막에 정원사라도 할 셈인가?”
때마침 유회장이 왕회장을 찾아왔다. 조경가위를 내려놓는 왕회장의 표정을 보고는 유회장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상했다. 왠만해서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양반이 아닌데.
“이번에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일세, 마음 같아서는 가평에 가고 싶지만 시국이 뒤숭숭하지 않은가. 몸에 좋은 것이니 어서 들게나. 사돈.”
“사돈?”
“허허, 그냥 그렇게 불러보고 싶구만. 사돈.”
아쉬운 마음을 진한 보이차로 달래는 두 할아버지였다.
“손가, 자네와 거래를 하고 싶네.”
유회장이 왕회장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불거질 살생부에서 동주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이유야 어찌 되었건 살생부에 이름이 적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업을 와해시킬 수 있는 노릇이었다. 신소재를 팔았건, 뇌물을 받았건 내용은 중요치 않았으니. 코에 걸
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감탱이,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만.”
“그게 무슨 소리인가?”
“헌데 결단력과 저돌적인 면모는 손주가 더 뛰어나구만. 자네보다 훨씬 빨리 내게 찾아왔으니 말이야.”
유회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생부에서 이름을 지울 수만 있다면 동주의 지분을 내놓을 생각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문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울부짖고 학생들은 데모를 할 정도로 세상이 떠들썩한 이야기지 않은가. 왕회장이라고 해도 결코 위험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하는 일이었으니.
“영감탱이, 내가 이북에서 처음 내려왔을 때 서울 땅에서 쌀 세 가마니를 팔았지. 그때 남겼던 이문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제일상회가 제일그룹으로 바뀌기까지 수많은 장사를 했지만, 그때의 손맛을 잊을 수가 없었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같던 서울에서 처음 얻은
기회였으니 말일세.”
왕회장의 눈동자에 지난 세월이 투영되어 흘렀다. 오랜 세월 대한민국 경제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이 아닌가. 조그마한 상회가 전국을 아우르는 그룹이 되기까지 저 주름진 손으로 수많은 것을 일궈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 순간 마지막 눈동자의 끝이 한
소년을 가리켰다.
“헌데 말이야. 내 이번에 했던 거래가 예전 기억을 덮어버릴 만큼 가슴을 요동치게 했어. 내 앞에서 내가 거래를 해야 할 이유가 두 가지나 된다며 당당히 말하더군. 어찌나 놀랐던지, 식은땀이 나서 혼쭐이 났지 뭔가.”
“손가, 설마 현이를 말하는 겐가?”
“아무렴, 그 아이말고 나를 놀라게 할 인물이 있으리라고. 내 그 아이의 눈동자에서 뭘 봤는지 아는가.”
왕회장은 오래전 쌀 세 가마니를 팔고 얻었던 것을 떠올렸다. 황폐한 서울 땅에 제일상회를 세울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해준.
“기회였네.”
왕회장은 소년의 훗날이 궁금했다. 과연 그 기회가 발아해 시대를 풍미할 장사치가 될 것인가, 것도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개화할 것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그 아이라면 어떻게든 풍전등화의 세상을 살아갈 혜안과 담대함이 있었으니. 일순 왕회장의 시선에 비어있는
찻잔이 보였다.
“사돈, 몸에 좋은 것이니 좀 더 들게나.”
결혼식까지 보려면 이제부터라도 단단히 건강을 챙겨두어야 했다.
*
“현아, 정말 말 안 해줄꺼니?”
어째, 임혜라 이사장의 눈빛이 심상찮다. 왕구렁이 영감님과 내가 나눴던 대화가 자못 궁금한 모양. 것도 그럴 것이 이사장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달라진 왕회장의 태도가 무척이나 의아할 터였다. 더군다나 언론에 발표된 김대식 리스트에 동주의 이름은 감쪽같이 사
라졌으니.
“거래는 비밀유지가 기본이잖아요.”
“그러니까 ‘거래’를 했다는 거네?”
아차, 임혜라 이사장도 왕회장과 마찬가지로 속에 구렁이 백 마리쯤은 너끈히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가지고 훗날 제일재단을 차지한 여자가 아닌가. 오죽하면 손일선이 왕회장 다음으로 무서워했을 정도였으니. “했죠, 다음부터는 바둑둘 때 석 점 깔아드리기로 했거든요. 넉 점 놓고 하시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그 대신 용돈을 두둑이 주시기로 했어요. 다음에 유하 오면 제가 맛있는 거라도 사주게요.”
내가 에둘러 말하자 임혜라 이사장이 묘한 시선을 지어 보였다. 지난 삶에서도 종종 봐왔던 시선이었으니. 임혜라 이사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눈빛만 봐도 대강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백날 쳐다본들, 내가 흔들릴 쏘냐.
“아줌마가, 졌다 졌어. 궁금하긴 하지만 더는 안 말해줄 것 같으니 이쯤할께. 그건 그렇고 장피에르, 그 친구 제안은 어떻게 생각하니? 현이 너를 아주 필요로 하는 것 같던데.”
파가니니와 관련한 영화라고 했다. 아무렴, 내 예상이 맞다면 장피에르의 첫 흥행작이 될 것이다. 라비안로제가 작품성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파가니니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거머쥐었으니. 음악영화로는 20세기 최고의 매출을 자랑했다지 아마.
“감독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힘들 것 같아요.”
“정말? 이번에는 러닝 개런티도 지급하겠다는데?”
“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영화출연도 아닌데 러닝 개런티를 주는 경우가 있었던가. 하물며 아무리 퍼센티지가 미미할지라도 파가니니는 전 세계를 강타한 흥행작이었으니 그 금액이야 어마어마 할 것이었다. 어째 이번 삶에서는 물욕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금
전운이 스스로 내게 달라붙는 것만 같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백정훈이 작업실로 들어섰다. 요 며칠 악보 ‘철혈’을 봐준 뒤로는 아예 내가 프로듀서라도 된 것 마냥 독주회의 레퍼토리를 봐주고 있었다. 귀찮지 않냐고? 오히려 이 시간이 기다려졌을 정도였다. 매번 백정훈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뿐더러 척하면 척
알아듣는 것이 과연 철혈의 마에스트로였으니.
“정훈 씨, 오늘은 왜?”
임혜라 이사장이 의아한 시선으로 백정훈을 바라봤다. 그가 이토록 오랫동안 작업실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 그때 백정훈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 모시러 왔습니다.”
“선생님?”
그 순간 임혜라 이사장이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도대체 정체가 뭐냐는 듯이.
* * *
꿀꺽―!
삼촌 내외는 물론이고 이모 내외까지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녁 식사 자리가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했으니. 혹여나 숟가락 소리라도 날까 싶어 아주 조심스럽게 밥을 뜨고 있었다. 자칫 했다간 단체로 체라도 할 기세다.
“아버디, 죄송함미다.”
홍두깨로 두들겨 맞은 것 마냥 얼굴이 시퍼래진 작은 삼촌이었다. 입안이 터진 모양인지 발음까지 새는 모습이 꽤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으니. 그래도 겁은 나는 모양인지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 때마다 움찔움찔 거린다. 작은 삼촌이 눈
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덮어주셔서 감사함미다.”
거센 신문고의 북소리에 결국 김대식 리스트가 만천하에 공개되었지. 다행이라면 작은 삼촌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피바람이 불 것이 자명했으니. 오죽하면 이유불문하고 리스트에 적힌 이들의 삼대를 멸하라는 말까지 나
돌겠는가.
“내가 한 게 아니다.”
“녜?”
작은 삼촌이 할아버지의 눈빛을 보고는 움찔 떨었다. 큰 삼촌과 이모도 마찬가지였으니.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되는 모양. 할아버지가 한게 아니라면 누가 살생부에서 이름을 지울 수 있었단 말인가.
“범경이는 제주도에 내려가 있거라.”
작은 삼촌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자식이니까 봐주는 것이 아니냐고? 아서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감옥에 넣고 싶을 테지만 보는 눈이 많지 않은가. 괜히 꼬투리를 잡힐 필요가 없었다. 제주도에 내려가 있으라
는 말 자체가 기약없는 유배를 뜻하는 것이었으니. 더군다나 땡전한푼 안줄 것이 분명했다.
“아, 아버지.”
작은 삼촌이 저도 모르게 울먹거리며 말을 하는 그 순간이었다.
팍―!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날아와서 그대로 이마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깨진 이마 사이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 지난번 상처가 그대로 다시 터진 모양. 작은 삼촌은 바닥을 뒹굴며 이마를 부여잡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와 큰 삼촌이 부리나케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이마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았기에.
*
만월이 가득 흩뿌려지던 밤이었다. “할아버지.”
난 조심스럽게 서재로 향했다. 역시나 할아버지는 아직 주무시지 않고 서재에 홀로 앉아계셨는데 나를 발견하고는 손짓하셨다. 아무래도 작은 삼촌의 일 때문에 생각하실 것이 많았던 모양.
“현이, 네가 손회장을 설득했다지?”
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왕구렁이 영감님께 얼추 들으셨을테니.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심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찌 되었건 손자의 손을 빌려서 일을 해결한 격이 아닌가. 난 작은 두손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마주잡았다.
“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동주는 어떻게든 제가 지킬 테니까요. 할아버지는 건강만 챙겨주시면 돼요.”
“욘석, 또 건강이야기냐. 누가보면 현이 네가 할애비 주치의인 줄 알겠어.”
할아버지의 삶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듯이 할아버지의 수명또한 연장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아무렴, 지금도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정정하시지 않은가. 일순 할아버지가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셨다.
“현아, 네가 보기엔 이 국란이 어디까지 닿을 것 같으냐.”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결국, 자력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거예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기에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수 없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강대국이 아닌 이상에야 채무유예는 그야말로 제 손으로 숨통을 옥죄는 격이고 말이다. 그럼 동아시아 전체의
위기가 아니냐고? 아서라, 이번 위기는 내부에서 발발된 것이었으니.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이 사백프로를 넘어서지 않는가. 말 그대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구조였다. 수출업에 의존하는 나라가 경상수지가 매년 적자를 기록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일.
결국,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허어.”
할아버지가 감탄 섞인 탄식을 터뜨리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냈다. 여기까지는 미처 예상치 못하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현아, 할애비는 궁금하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그 영감이 자신이 실을 보는 거래는 절대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도대체 어떻게 거래를 성사시켰는가 하고 말이다. 영감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구나.”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할아버지가 저렇게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시는 것일까. 그때였다. 급작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단호히 말씀하셨다.
“현아, 그래도 데릴사위는 안된다.”
“할아버지, 저 아직 중학생이에요.”
할아버지의 농담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완강하시지 않은가. 왜일까, 그 순간 왕구렁이 영감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하물며 창문을 향해 들어오는 만월이 마치 나를 희극의 주인공처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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