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74화 >
“올해로 십칠 년째에요.”
5살 때부터 건반을 만졌으니.
“처음에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자르고 싶을 정도로 좌절감이 심했어요. 초절기교를 연마할 때는 더욱 그랬죠. 그땐 리스트의 곡을 연주하지 못하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잠도 자지 않고 연주하고, 또 연주했어요.”
손가락 끝이 뭉툭하다. 이미 열 손가락의 지문은 희미해져 있을 정도였다. 가문의 인정을 받고 싶어 재능을 혹사시켰다. 조금이라도 빨리 꽃을 피워야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 그 덕분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커 왔지만, 건초염을 비롯한 질병을 항상 껴안고 살아야
만 했다.
“영광의 상처가 아니냐고요? 아니에요. 아주 바보 같고 미련한 짓이죠. 건초염, 수근관증후군, 포컬 디스토니아는 피아니스트의 수명을 깎아 먹는 질병이에요. 저는 악마하고 계약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내 손가락에 조금만 더 실력을 얹어주렴. 언제든 꺾어가도 좋으
니.”
어린 시절의 백정훈은 그만큼 절박했기에.
“지난 2년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피아니스트로 사는 삶과 자세를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쇼팽이 그랬다죠, 최고의 스승은 자신의 귀라고 말이에요. 그동안 제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지난 2년이 제 삶을 성장시켰다면 지
난 2주는 제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인터뷰어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철혈이 누구의 곡이냐고 물으셨죠?”
아무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예정에도 없던 추가 레퍼토리였다. 더군다나 ‘철혈’이라는 악보는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악보였으니. 작곡가조차 미상에 남긴 채 궁금증만 더욱 증폭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 철혈을 들었을 때 저는 제 인생이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어렸을 적 피아노를 처음 만졌을 때처럼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렸으니까요. 그분은 음악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어요. 제가 건반을 누를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가락 이완의 정도는 어떤지 쳐
다보는 것만으로도 파악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그렇게 가르치지는 못할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고요? 철혈의 주인이자.”
백정훈의 눈동자가 한 소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난 2년이란 세월 자신이 성장했다면 소년은 마치 한계를 뚫은 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협연을 제안하러 가서 오히려 음악을 배우지 않았던가. 그의 음악적 재능과 수많은 악보가 드러날 때 다시금 세상이 들썩이리라.
“제 스승입니다.”
*
어째, 지난 2주 동안 정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매번 출근 도장을 찍던 백정훈이 보이지 않자 한편으로는 살짝 허전한 마음도 들었다. 아무래도 독주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리허설과 무대점검에 한창일 테지. 나라가 뒤숭숭한데 무
슨 독주회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수익금은 물론 후원금까지 모아 전액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하니 오히려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고 신문에 실렸다. 더군다나 차세대 거장이라 평가받는 피아니스트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작곡가는 왜 안 밝힌 거야?’
철혈을 추가 레퍼토리로 상정하면서 작곡가를 비밀에 부쳤으니. 졸지에 신비주의 작곡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백정훈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모르겠다. 물어봐도 이벤트라고만 말할 뿐,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청스럽게 대화를 회피했기에.
그 순간 내 시야에 백정훈이 항상 앉아있던 피아노 의자가 보였다.
‘할 수 있을까.’
작업실에는 수많은 악보가 쌓아져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피아노곡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백정훈이 매번 군침을 흘리며 악보를 바라봤을 정도였으니. 대부분이 피아노에 대해 공부를 할 즈음 머릿속의 악상을 떠올려가며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음표들이었다. 오
선위의 음표들을 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자신을 연주해달라 소리치는 것 같았다.
“후우―!”
바이올린을 켤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다.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있자면 마치 열 손가락이 스스로 자아를 가지고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감정을 한 줌의 날숨으로 내뱉는 그 순간.
열 개의 손가락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달빛처럼 사무치는 외로움 속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곡이었다. 드뷔시가 베를렌의 하얀달을 보고 영감을 얻었듯이 나는 어느 날 보았던 순백의 사슴을 떠올리며 영감을 받았었다. 타오르는 여명
사이를 표현하듯 신비로운 분산화음과 신비한 사슴의 발걸음을 표현한 미끄러지는 글리산도 주법에 이르기까지. 음과 음 사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레가토를 끝마쳤을 때 비로소 순백의 사슴이 눈앞에 음악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 순간,
“대단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임혜라 이사장이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켰다. 이사장 답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이 지난 삶에서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으니.
“문이 열려있길래 나도 모르게 잠깐 듣는다는 게, 불쾌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데 곡은 어땠어요?”
평가를 받고자 만든 곡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에게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 아닌가. 임혜라 이사장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조차도 방금 전의 광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끝내 단 한 마디로 곡을 표현했다.
“몽환적인 존재.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음악이 살아있는 것 같았어.”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었으니.
“얼굴 뚫어지겠어요.”
임혜라 이사장과 브런치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아직도 방금 전의 연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인지 이따금 나를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째 주말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조연 같지 않은가. 갈레트의 노른자가 바닥을 보일 즈음 그녀
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른자의 고소함이 결국 진한 여운을 이겨버렸나.
“참, 현아. 오늘 아침에 정훈 씨 인터뷰 봤니?”
인터뷰?
“무슨 인터뷰요?”
백정훈도 나와 성정이 비슷한지라 여태껏 인터뷰를 미러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렴, 독주회를 앞두고 한창 예민했을 시기였으니. 그나저나 임혜라 이사장의 말을 들어보니 결국 인터뷰를 한 모양이다. 이윽고 미현이 누나가 잡지하나를 들고오는데 국내 클래식계
에서는 유명한 음반지였다.
“한 번 봐봐, 아침에 보고 아줌마가 깜짝 놀랐다니까?”
뭐가 놀랐다는 것일까.
백정훈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음반지를 받아들었다. 질의응답식으로 되어있는 인터뷰지를 읽어내려가던 내 눈이 마지막 답변에 쏠렸다. 뭐 스승?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을 한 거야? 좋기보다는 어이가 없던 찰나.
“현이 그거 너 말하는 거 맞지?”
임혜라 이사장이 출생의 비밀을 하나 더 알아버린 표정이다.
* * *
오랜만에 찾은 할아버지의 집무실, 비서 누나가 비스킷과 오렌지 주스를 가져왔다. 여전히 나를 보며 귀엽다고 말을 하니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어떻게 해서든 키를 좀 빨리 키워야겠다. 하물며 오랜만에 차려입은 정장은 거짓말처럼 딱 맞으니. 옷소매가 조금
모자라도 좋으련만 야속하다, 야속해. 어째 신체에 관해서는 지난 삶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으니.
“현아, 오늘 독주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다지?”
“예, 할아버지.”
난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독주회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 정도라니 그 인기가 가히 실감이 났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사회 지도층도 많이 등장할 것이다. 아무래도 독주회의 수익금으로 기부를 한다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구미를 당길만
한 내용이었으니.
“현아, 조만간 대성그룹이 부도가 난다는구나. 정부에서 부도유예 협약을 실시한다고 다들 말들이 많구나.”
“그래요?”
도미노가 시작되었다. 정부에서 금융기관들을 종용해 부도유예협약을 만들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 머지않아 주가는 700선이 붕괴가 될 것이며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칠 테니 결국에는 환율이 폭등할 것이다. 그다음 청사진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할아
버지는 내가 무언가 말을 하길 바라는 눈치셨지만 난 그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참, 오늘 독주회에 한 명 더 같이 가기로 했다.”
“한 분이 더요?”
누굴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처럼 만의 시간을 즐기기로 하시지 않았는가. 오랜만에 신혼으로 돌아가신 기분이실 테지. 그렇다고 큰 삼촌은 클래식이라면 하품부터 하는 인간이니 이런 자리는 알아서 피할 것이다. 때마침 집무실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영감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영감?
“사돈, 나왔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왕구렁이 영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주변의 이목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어찌 된 게 지난 삶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같지 않은가. 두 명의 창업주 사이에서 당당히 앉아 독주회를 감상하게 되었으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지난 2년 전보다는 많은 보강을 거친 뒤였다. 이천 명 넘는 청중을 수용할 수 있었음에도 설계가 열악해 오죽했
으면 한때 예술의 목욕탕이라고 불렸겠는가. 그래도 과거의 치욕을 잊고자 목욕탕 울림이 나오던 공간들을 없앴으며 파이프 오르간을 비롯해 부족했던 설비들을 보충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런던 심포니의 스펜서 또한 만족하리라. 그 순간 조명이 비치는 무대 위로 백정훈이 걸어 나왔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쫙 펴진 어깨, 흔들림 없는 시선은 지난 삶 마주했던 철혈의 마에스트로가 절로 떠오르게 했다. 그는 마치 무수하게 쏟아지는 박수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과거 도쿄 콘서트홀에서
보았던 풋내기 백정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두두두둥―!
시작은 쇼팽의 폴로네이즈 중 걸작으로 평가받는 환상 폴로네이즈였다. 폴로네이즈였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지독히 아름답고 우아한 서두를 띠고 있지 않은가. 쇠약해진 결별 직전의 쇼팽이 피폐해진 마음으로 오선위에 그려나간 음표였다. 떨리는 그
의 손끝과는 다르게 울림은 수많은 이상향을 표현해내고 있었으니. 화려한 음색 뒤에 가려진 슬픔. 백정훈의 기다란 손끝에서 쇼팽의 격정적인 마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역시 무대체질이네.’
괜히 쇼팽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아닐 터. 무대 위의 백정훈은 태양 빛을 내리쬐는 것 마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청중들은 하나같이 숨죽이며 그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눈과 귀를 빼앗는 것이 악마의 선율이 따로 없었다.
환상 폴로네이즈에 이어 바흐 반음계적 환상곡가 푸가, 슈베르트,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주옥같은 명곡들이었다. 하물며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면모는 명배우가 따로 없었으니. 기다란 손가락과 턱 끝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조명까지
한 폭의 그림같았다.
“앞으로 선보일 곡은 이번 무대에서 처음으로 연주하는 곡 ‘철혈’입니다.”
고요함을 지키고 있던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팸플릿에서도 나왔듯이 작곡가를 공개하지 않은 곡이지 않은가. 항간에는 백정훈의 자작곡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인터뷰에서 그가 자신의 스승이 작곡한 곡이라 말해 큰 파문이 일었으니. 백정훈이 다시 피
아노 의자에 앉자 좌중이 거짓말처럼 고요를 머금었다.
첫 시작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닮은 서정적인 선율의 시작이었다. 첫음절이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무렴, 누가 코칭해준 것인데. 허나 1악장을 넘어 긴장을 고조시키는 2악장, 격정적인 3악장에 이르기까지 내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
거리는 것은 왜일까.
콰득―!
청중들은 숨을 참으며 전율을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위로 올라서고 싶었다. 백정훈, 저 양반 마치 자신과 협연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라도 하게 해주겠다는 듯 한 음 한 음에 혼신의 힘을 실어 연주하지 않는가. 마치 이 곡이
끝나면 생이 다하는 사람처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듯 황홀했던 연주가 끝나자,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마치 앙코르는 잊었다는 듯이 철혈의 피날레에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니. 백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을 향해 깊게 고개 숙였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독주회였으리라.
그때였다.
“오랫동안 저를 기다려주신 수많은 팬분들에게 제 연주가 작은 감동이 되었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백정훈이 수많은 청중 사이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제게 철혈이라는 악보를 연주할 수 있게 해준 친구이자, 스승인 바이올리니스트 현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일순 좌우로 앉아계신 할아버지와 왕회장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삽시간 만에 콘서트홀의 이목이 전부 내게 쏠린 듯했으니. 한편 백정훈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설마, 이게 그 기대하라던 이벤트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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