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03
302 동분서주(2)
서창현으로 가는 도중 넓은 습지를 만났다. 습지라고 해서 물이 전부 들어와 있진 않았다. 군데군데 길이 나 있고, 쉴 수 있는 마른 땅이 있었다.
어두워지는 시각.
먼저 도착한 당연우는 자리를 만들고 노숙할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대단치는 않았다. 불을 피우고, 바람을 피할 천막을 치는 정도였다. 나중에 도착할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요리를 했다.
불 앞에 당문의 형제들이 나란히 앉았다. 전에 들른 현에서 오일이 흘렀다. 예상보다 길어진 여정이지만, 당연천과 당연수는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다. 갈등을 봉합하지 않은 상태라 의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째서 따라온 거지?”
“혼자서 독차지하게 놔둘 줄 알았어!”
“보물이 탐이 났다고?”
“신화마정갑이라면 누구나 탐하는 신병이기잖아.”
소가주로서의 인정과는 별개로 당연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무인이라면 신화마정갑을 욕심낼 만하다. 더욱이 신화마정갑의 무한변형은 당문의 무공을 펼치기에 최적화되었다. 암기를 지니지 않았어도 암기를 펼칠 수 있는 상태, 만천화우도 가능할 것이다.
처적, 처적!
질척한 늪지의 갈대숲을 헤치고 아미파의 후기지수들이 도착했다. 적서린과 무애가 사매들을 이끌었다. 임연홍 사건 이후로 사매들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오느라 피곤하실 테니 식사부터 하시죠.”
“배려에 감사합니다, 소가주.”
버섯과 채소로 우려낸 국물을 적서린과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삭풍이 부는 늪지를 걷느라 몸이 식었던 그녀들은 뜨끈한 국물로 속을 달랬다.
호오오, 후르르륵!
배가 고팠기에 염치 불고하고 국물을 몇 그릇 더 마셨다. 그제야 젊은 선자들은 눈치가 보였다. 불도를 수행하는 승려로서 탐식은 옳지 않았다.
아미파가 왔으니 다음은 청성과 무당이었다. 시간 차를 두고 모여야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에 용이했다.
아!
뜻하지 않은 비음이 들리자, 당연우의 표정이 굳었다.
적서린뿐만이 아니라 여승들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불빛에 몸을 녹인 상기된 얼굴과는 다르다.
당연우의 음성이 날카롭다.
“무슨 짓이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당문의 소가주가 여승을 탐하다니, 천한 본성은 어쩔 수가 없는가 봐.”
당연천과 당연수는 되레 당연우를 비웃으며 이 사태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적서린과 여승들은 그제야 이상함을 깨닫고 운기를 해 보았다. 육체의 불균형이 자연적으로 발생하진 않았을 테고.
“저런, 운기하면 안 되는데.”
당연수의 안타깝다는 말은 노골적인 조롱에 가까웠다. 운기를 하던 적서린과 여승들은 멈칫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천밀독을 썼군.”
“맞아,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소가주만 쓸 수 있지.”
천밀독은 신선폐와 같은 산공독이면서도 지독한 성질의 미약이었다. 미약은 강호에선 천시받는 독에 속하지만, 내가기공을 익힌 무인에겐 최악의 상성을 지녔다. 더욱이 당문에서 작정하고 만들었기에 해독이 여의치 않다. 미리 알고 당문의 비전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고서는.
당문에서도 천밀독은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다. 지독하기도 하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미약의 성분에 춘약을 섞어 목표물의 명예까지 실추시키기 때문이다.
피식!
당연우의 담담한 미소에 당연천과 당연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너희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조소처럼.
“너희들로 될까?”
“천한 잡종 놈이 끝까지 잘난 체를 하는구나. 곧 네놈은 절망에 몸부림치며 애원하게 될 것이다!”
당연천과 당연수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모여드는 자들이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아니기에 무당파와 청성파는 아닐 테고, 기질도 다르다.
“자, 어디 더 떠들어 봐라!”
“아무리 너라도 중독된 상태로는…… 응?”
천밀독에 중독되고서도 여유로운 당연우의 태도는 부조화를 이루었다. 감이 좋은 당연수는 불현듯 위화감에 휩싸였다.
예상을 확인해 주듯 당연우가 좌장과 우장을 뻗었다.
슈욱!
기습적으로 펼쳐진 당문의 적련신장이었다.
화들짝 놀란 당연수와 당연천의 대응은 겨우 막아 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크윽!
재차 정련된 장력이 발출되었다.
푸아앙!
충격을 받은 당연천과 당연수는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다가 재빨리 좌우로 회피했다.
퍼퍼펑!
굴렀던 자리가 허공으로 비상하였다. 늪지의 물기에 젖은 흙이 사방을 휘저었다.
“이놈…… 어?”
늪을 구르는 바람에 엉망이 되었던 당연천은 오싹한 한기에 돌아서야 했다.
퍼억!
방비하기도 전, 옆구리를 강타하는 당연우의 권격이었다.
낫처럼 꺾인 당연천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당연수가 신속히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다음 수에 끝장날 뻔했다.
휘릭!
추혼혈조로 반격을 꾀했던 당연수는 뱀처럼 휘젓고 들어오는 당연우의 독룡수에 팔목의 관절이 뒤틀리는 걸 보았다. 이대로라면 팔이 기형적으로 부러지며 떨어져 나갈 것이다. 좌수로 극양지기를 담은 삼양수를 꺼내 들었다.
타앗!
크윽!
너는 내 손바닥 안이다.
당연우는 안으로 파고들며 당연수의 예측을 비웃었다. 먹이를 가두는 뱀의 탐욕, 독룡수의 나선이 채찍처럼 소요를 일으키더니 당연수의 삼양수를 무력화했다.
중심이 텅 비어 버린 당연수는 무방비가 되었다.
헉!
일수유에 벌어진 공방에 당연수는 기겁했다. 일전 소가주 경합에서의 패배를 곱씹으며 절치부심했기에 이처럼 맥없이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퍼억!
크어어억!
수벽에 실린 내력이 점에서 시작하여 거친 와류를 일으켰다. 닿기가 무섭게 빨려 들어가 버린다.
당연수는 피를 토하며 비명을 터뜨렸다. 다음 공격을 막을 여력은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일발.
“멈춰랏!”
공세를 취했던 당연우는 한 줄기 고성과 함께 쇄도하는 거센 장력과 충돌했다.
꽈아아아앙!
지축을 흔들어 대는 거센 힘의 여파. 웅후한 공력이 사방팔방으로 맹위를 떨치며 파괴력을 과시했다.
몰아붙였던 당연수와 거리를 두게 된 당연우는 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상을 상회하는 강맹한 장력은, 후기지수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섰다. 공력만 놓고 보면 당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착!
단숨에 거리를 뛰어넘은 중년인이 내려섰다. 그는 위기에 빠진 당연수를 보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장법을 발출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다행이기는 하나, 손자의 처참한 모습에 착잡해졌다.
‘이놈의 내력이 이렇게나 대단했었나?’
소가주 경합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짧은 시간 당연천과 당연수가 손도 못 써 보고 당한 걸 보니, 그간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시간이 더 흘렀다면,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기회였다.
“신수가 원해지셨습니다. 당사진 장로님.”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하고, 당문의 녹의를 입지 않았다. 면구를 쓰지 않았다곤 하나, 평소 두문불출하던 당사진의 변복을 알아볼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사전에 함정을 파고 당연우를 꾀어낼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가 되었다.
일신우일신의 당연우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함정이었다. 그런데도 여유가 있기에 당사진을 불편하게 했다.
사람의 본성은 위기에 빠졌을 때 나타나기 마련이다. 작금의 모습이야말로 당연우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맘에 들지 않았다.
“제법 심기가 깊구나. 하나, 네놈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당사진은 혼자 오지 않았다.
주변에 눈에 익지 않은 자들이 서 있었다. 수는 다섯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어째서 혼자라고 단정하시는지요.”
“흥, 주변…… 아니?”
천밀독에 중독되어야 했던 아미파의 여승들이 검을 들었고, 적서린과 무애가 당연천과 당연수를 제압했다.
이런!
다급해진 당사진이 움직이려고 하자, 당연우가 제지하며 막아섰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그제야 당사진은 당연우가 여유로웠던 연유를 깨달았다.
이놈은 함정을 눈치채고, 아미파의 여승들에게 해약을 미리 복용하도록 내어 준 것이다.
천밀독은 중독된 상태에서의 해독은 어렵지만, 미리 복용했다면 운기만으로도 해독이 되었다. 운기할 시간을 주지 말았어야 했거늘.
역으로 당연우의 심계에 놀아나고 말았다.
부들부들!
자신의 나이 반 토막도 안 되는 애송이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당사진은 분노했다.
그러나 섣불리 행동할 순 없다. 계집들에게 손주와 조카가 사로잡혀 있었다.
“동생을 미끼로 써서 구사일생을 도모하다니, 본가의 소가주로서 부끄럽지도 않더냐!”
“동생이 아니라 가문을 배반한 역도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본가의 규율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함과 부동심이 당연우에게 엿보였다. 당문의 혈족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냉혹함이었다.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당사진은 당연우의 연약한 심성을 보아 왔다. 이제까지 냉혹해 보이려고 위장했다고 여겼다. 한데, 이놈은 소가주 경합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의 성정을 숨기고 여태까지 연기했었나? 어찌 되었든 가증스러운 녀석이었다.
“시간을 끌어선 좋지 않을 텐데요. 곧 청성과 무당이 당도할 겁니다.”
당사진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면초가에 처했다.
함께하기로 한 제갈세가의 무인들도 망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걸 다 떠나, 당연천과 당연수가 죽어 버리면 함정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더 큰 문제는 이 사태가 외부에 알려져서도 안 되었다. 당연우가 저항하기 전에 끝내야 했었다.
“그 전에 네놈은 죽는다. 아미파의 여승들까지 죽이고 싶은 것이냐?”
“어쭙잖은 수작은 통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구걸하겠다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더군요. 좀 구차하면 어떻습니까.”
당사진은 대화를 유도하면서 하독을 하려고 했었다.
당연우는 미리 알고 있는지, 바람을 등지고 있었다. 또한, 대비한 상태였다.
“적 소저, 낌새가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그냥 베십시오.”
“억울하게 죽을 순 없지요, 당 공자.”
제갈세가의 무인 중 특별한 자가 있었다. 겉으로는 기세를 드러내지 않지만, 분위기가 남다르다. 당사진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그런 자가 빈틈을 노린다면 위험했다. 애초에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제갈세가에 대부인을 아끼던 분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혹, 천류검이십니까?”
“당가에 용이 있었군.”
천류검(天漻劍) 제갈무기.
제갈세가에서도 대성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진 천류십이검류를 익힌 검공의 대가였다. 연배로 따져도 당사진과 차이가 크지 않았다. 능히 전대의 고수로 분류되었다.
“대단하신 분이 오셨군요.”
“자네의 비상함은 당문이 아닌 본가와 닮았어. 하나, 우릴 너무 궁지로 모는군.”
제갈무기는 당문의 가모인 제갈수련을 어린 시절에 많이 아꼈었다. 그러나 본가와 저울질할 순 없다. 작금의 사태가 외부에 알려진다면 제갈세가는 지탄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치였다.
“이쯤에서 멈춘다면 두 동생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적절한 처분으로 끝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류검께선 이미 모두를 죽일 작정입니다. 최고 장로께선 진정 그리되길 바라는 겁니까?”
당사진의 표정이 굳었다.
제갈무기는 이 어린놈의 심기가 보통이 아님을 또 한 번 실감했다. 그사이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무공, 배포, 심기,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았다.
‘당문도 썩었군. 이런 놈을 배척하다니.’
능력이 있다면 배척하기보다 이용했어야 했다. 놀랍도록 무서운 심기는 물론이거니와 당문의 최고 장로와 비견되는 내력을 갖추었다. 젊은 후기지수 중 과연 상대할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싹을 자른다.’
제갈세가를 위해서라도, 당문의 금룡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커다란 우환으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