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64
463 농락(2)
우우웅!
현천도장이 내력을 일으켰다.
태극천의공이 경계를 넘어선 현천도장은 무당제일검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화경의 극의에서 한 발 내디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웅후한 기운을 감지한 장문인과 장로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청하라. 귀곡, 월산, 혈겁, 잔수, 천살, 수신, 설풍…….”
현천도장은 단어에 내력을 실어 또박또박 읽어 갔다. 장문인을 비롯한 도사들은 의아한 기색이 완연했다. 이어지지 않는 스산한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이번에도 조금 전처럼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었다.
오싹, 부르르!
아연한 분위기도 단어가 이어질수록 달라지고 있었다. 음양의 합일을 추구하는 태극의 근원이 흔들렸는지 살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 돼!”
그 순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 있었다. 촌음간 살의를 발산하여 검을 휘둘렀다.
착!
검은 나아가지 못했다.
씨익!
검병을 막아선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무진이 있었다. 걸리지 않으면 어쩔까, 고민이 됐는데 과연 그랬다. 원래 범인은 다른 누구보다 아닌 척하기 마련이었다.
무진은 현천도장을 위해 비무대로 올라올 때부터 눈치를 깠다. 약 파는 새끼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가만히나 있지 그랬냐. 크크크크!”
“네놈!”
안면을 악마처럼 일그러뜨린 현소도장이 살의를 발산하고 있었다. 눈이 혈안으로 물들었고, 피를 머금은 섬뜩한 살기를 풍겼다.
으아아악!
현천도장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견고했던 의지가 무너지면서 본성이 드러났다. 막아서던 금제가 폭주하자 마성이 폭발했다. 제어하려고 해도 사방을 가득 메운 선기로 인해 살의가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허!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사태였으나, 우왕좌왕할 때가 아니었다. 이지를 상실한 도사들이 바로 옆에 있었다. 산 자를 말살하기 위한 암시만이 남았다.
스와, 크악!
어째서?
동문의 검에 당한 도사들의 눈에 불신이 깃들었다. 비무 전까지만 해도 아침을 먹으면서 떠들었던 동문이자 친구였다.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살의를 발산하자 충격을 받았다.
도사들도 그렇지만, 장문인과 장로들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들 믿는 도끼에 발등을 두 번, 아니 서너 번 찍힌 표정들이었다.
“현극, 왜 이러나?”
“죽인다!”
장로들 가운데서도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나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으니 난장판이 될 수밖에.
채채챙, 타아앙!
푸아앙!
잔치인 줄 알았던 비무가 지옥으로 바뀌었다. 유혈 사태가 번지며 자줏빛을 발하는 자소궁을 피로 물들였다.
“현소! 네가 어떻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현천도장이었다. 천운권과 내기를 할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잠시 어울려 주는 셈 치려고 했다. 천만 냥은 금욕적인 도인에게도 흘려들을 수가 없는 액수였다.
공짜로 생기는 돈인 줄 알았거늘. 세상엔 공짜가 없으며, 현실은 잔혹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위해서 막아섰던 사제가 검을 휘둘렀다. 배신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부르르르!
배신에 치를 떠는 사형도 현소도장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천운권만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말을 해 줘야 알지.”
현소도장는 치솟아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억눌렀다. 감정의 기복이 지나치게 컸다. 자신도 이럴진대 암시에 걸린 자들은 통제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모르겠다.
암시를 펼친다고 해도 이처럼 반응하진 않는다. 특정한 음공을 쓰지 않으면 암시는 단어에 불과했다. 이렇게까지 통제 불능으로 격렬하게 반응을 하진 않았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천운권 때문이었다. 놈이 요상한 내기를 할 때부터 신경을 썼어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현소도장은 암시로 인한 폭주의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이 방법이 다른 곳에서도 쓰인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떻게 한 짓이냐?”
“나도 몰라. 그냥 검제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러면 안 되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진의 대답이 현소도장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차라리 알면서 모른 척하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진짜로 모르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아이구, 불쌍해서 어쩌냐. 네 사형이 많이 화가 났나 본데.”
현소도장은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화가 너무 난 나머지 현천도장을 잊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버린 현천도장이 현소도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다른 누구보다 믿고 있었기에 배신의 상처가 컸다.
“청현, 그 병신이 혼자 지랄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병신은 병신이거든요.”
무진은 히죽이며 현천도장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암시의 주체자라면 완전하진 않더라도 폭주를 억제할 수는 있었다. 폭주 암시로부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기습한 순간부터 현소도장이야말로 무당에 스며든 마신교의 실세였다.
“놈의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제가 사형께 한…… 제기랄!”
“그 입 닫거라.”
현천도장의 검이 현소도장을 노리고 들어갔다. 현소도장도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검을 들었다.
채채챙!
한 수의 공방에서 서로의 전력을 가늠했다.
현천도장의 두 눈이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사제는 다른 사형제보다 검에 재능이 없어, 장서각의 각주를 맡았다. 그런 사제가 자신의 의지가 담긴 검을 가볍게 막아 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간의 모든 추억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네놈……!”
“검을 버리게. 사제.”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어차피 무당은 본교의 상대가 되지 않아!”
“과연, 마신교의 앞잡이였구나.”
정체가 탄로 난 현소도장은 냉정을 잃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끝까지 자신을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금제의 폭주로 인해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불완전한 상태였다.
“후딱 정리하지 않으시면 도사들이 많이 죽겠네요.”
큭!
무진의 태연함에 현천도장은 이를 악물었다. 이 모든 사태를 무당이 자초했다고는 하나, 남의 문파를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이 저래도 되나 싶었다. 천운권이 얄밉지만,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제를 제압하고, 배신자를 색출해야 했다.
“검제께서 당도하실 텐데.”
헉!
모든 계획은 무림맹에서 세웠다는, 무진의 거짓말이었다. 검제가 움직이면 사전에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명백한 허언이나, 상관은 없었다. 현소도장을 비롯한 세작들을 당황스럽게 한다면 일거양득이었다. 손 안 대고 코를 풀 기회가 있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가 있나. 그것이 설령 날조와 왜곡일지라도.
“……송연, 왜 이래!”
“죽엇!”
“적일, 정신 차리라고!”
“죽인다!”
사방이 전장의 치열함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문 사제 간의 끈끈한 혈전이었다. 사형이 사제를 죽이고, 사매가 사형을 죽이며, 사제가 사형의 등을 찔렀다.
“오늘의 경험이 전장에선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무진은 피가 난무하는 대환장의 연회장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당장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살면서 이런 기사멸조의 혈전을 해 보지 않으면, 실전에서 당황하는 경우가 흔했다.
“전장은 원래 신뢰가 없거든.”
무당의 안위를 걱정하진 않았다. 배신자가 제법 강하게 날뛰고는 있지만, 무당파의 도인들이 훨씬 많았다. 하물며 장문인과 장로들도 건재한 편이었다. 많이 당혹스럽기는 해도, 문파의 어른으로서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도가의 성지엔 벌레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나 문파를 어떻게 꾸리기에 배신자들이 이렇게 득세를 할까? 마신교의 집요함이 이루어 낸 성과긴 하나, 저들이 안일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약점이 있었군. 한데 왜 사용하지 않았지?
‘무당산이라서 통한 거야.’
-선산이나 도가의 성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건가?
‘불문의 성지인 소림에선 해 보지 않아 단정할 순 없지만, 항마공에는 면역력이 있었어.’
마기의 상극이 항마공이었다. 마신교는 이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을 것이다. 항마공에 저항하는 마공을 개발했다면, 사공이나 암시가 통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 전장에서 응용할 방법을 용무길과 황보세령이 찾았지만, 장소가 받쳐 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 폐기되었지.’
-흠, 내 신체를 무당산으로 데려올 수 있으면 괜찮겠는데.
‘그게 맘대로 되겠어? 걔들이 눈뜬 해태도 아니고.’
-네놈은 안 되길 바라는 거잖아!
과연 마왕이었다. 그새 필요한 방법을 찾아냈다.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마신교의 금제는 단계가 있기는 해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범주였다. 송호문에 설치된 진법과 연계한다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었다.
마왕이 수작 부릴까 봐.
크악, 퍼엉!
유혈 사태가 번지는 가운데, 무진은 한가로웠다. 좌우로 철호와 서문호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비무대에선 현천도장과 현소도장의 대결이 살벌했다. 깨달음을 얻어 절대경의 초입에 오른 현천도장은 현소도장을 압도는 하지만, 제압은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진 않았다.
‘암주급은 되겠는데.’
-무당이라면 암주 중에 하나일 테지.
천군이나 마장급이 아니면 무진도 이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동귀어진이나 자폭은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선에서 개입은 불가피했다.
“가서 도와줘라.”
“예, 사부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철호와 서문호는 발 벗고 나섰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여력을 남기지 않고 전력을 다했다.
“손속에 사정 두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타 문파의 패륜이니만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남의 일에 나서다 내 제자들이 피 흘리는 건 못 보지.
말귀를 알아들은 제자들은 거침없이 살수를 뿌렸다. 제압되는 과정에서 동귀어진도 마다하지 않았던 도사들은 머리통이 박살 나고, 수급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파아앙, 서걱!
우리 제자지만, 기습을 참 잘한다.
자고로 실전은 기습이었다.
보고 배운 바를 실천하는 제자들의 활약상에 사부로서 흐뭇했다. 제자한테 뒤처질 수 없었던 무진은 현소도장의 사각에서 권강을 발출했다.
기습에 이은 치고 빠지기의 정석.
퍼어엉!
현소도장은 현천도장에게 압도를 당하고 있어, 무진의 기습에 대응할 리 만무했다.
나는 공격하고, 상대는 일방적으로 처맞으며, 분풀이도 못 하는 현실.
아름다운 공방이었다.
여기에 무진은 효과음까지 첨가했다.
“크크크크.”
무진의 간사한 웃음소리에 현소도장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는 짓도 얄밉지만, 따로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한다.
‘완성되지 않았거늘.’
화룡점정이라고 했던가, 마지막이 되기 전 점을 찍지 못한 상태였다. 불완전하기에 꺼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지체하다간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장이었다.
위이이이잉!
결심을 굳힌 현소도장은 귀로는 들리지 않는 음공을 발동했다. 동시에 숨겨 놓고 있었던 돈황마공(豚皇摩功)을 꺼내 들었다.
우우우웅!
돈황마공을 운용하자 현소도장의 내력이 삽시간에 증폭되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순간적으로 두 배 가까이 공력이 증가한 것이다.
살기에서 마기가 감돌자, 변화를 눈치챈 현천도장이 검강을 발출했다.
꽈아아앙!
자소궁을 거칠게 울리는 파공성이 들리고, 비무대의 중앙이 움푹 파였다. 현천도장과 현소도장을 중심으로 파문이 번지며 사방을 뒤흔들었다.
“마공을 익히다니, 대체 어디까지 타락한 것이더냐!”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들어와. 둘 다 죽여 주마!”
마공을 개방한 현소도장은 물러서지 않고 전력 대결을 펼쳤다. 검을 버리고 뻗은 장법이 현천도장의 검강과 충돌하여 거센 기파를 발생시켰다.
흡!
태극천의공에 영향을 주는 사제의 장력에 현천도장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몇 배나 증가한 데다가 검강에 베이고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반격을 가해 왔다. 흡사, 아수라에 물든 마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퍼엉, 퍼어엉!
사제가 사용하는 장법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강력했다. 보통 전력을 다해 공력을 소모하면 간격이 생기기 마련인데, 마르지 않은 샘처럼 쏟아 냈다.
현천도장은 태극의 묘리로 현소도장의 장력을 흩어 내고 있지만, 그것도 여의치는 않았다. 현소도장은 기회가 생기면 무당의 도사들을 향해 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천인공노할, 네놈이 그러고도 무당의 제자더냐!”
“자상하신 우리 사형께선 언제나 인정이 많구려. 제자들을 살리려면 어서 빨리 저를 제압하십시오!”
현소도장이 비아냥거리자, 현천도장도 더는 참지 못하고 태극천의공을 극한으로 운용하여 태청검법을 쏟아 냈다. 사제의 장법을 회피하면 제자들이 위험하기에 정면 대결을 해야 했다.
펑펑펑!
싸우는 틈을 노린 무진의 권강에도 현소도장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몇 차례의 반응을 통해 현소도장이 사용한 마공을 알아냈다.
“현천도장님. 이놈 내력을 흡수하니까, 무분별한 공력 대결은 위험합니다.”
“안다고 달라질 것 같으냐!”
정체가 발각됐음에도 현소도장은 냉철했다. 도사들을 인질로 잡으며 현천도장을 유인하고 있었다. 현천도장으로선 알면서도 물러서기 어려운 국면이었다.
“현천 사제, 우리가 돕겠네.”
때마침 배신자를 제압한 현심 장문인과 현운, 현장 장로가 합세했다.
이제는 누가 봐도 불리한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현소도장은 물러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