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76
76. 라르고 (Largo, 폭넓고 여유롭게)
치킨은 맛있었다.
다리의 오동통함은 물론이고 날개 쪽에 있는 부드러운 살과 뼈를 분리해 각기 다른 소스에 찍어먹으···.
가 아니라.
지은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말로 내게 치킨을 사줬다.
위치는 학교 앞에 프랜차이즈 치킨집. 이 가게의 특이사항이 하나 있다면 그건 이곳이 버스정류장과 비교적 가깝다는 것이다.
“저기 최지은씨.”
“엉?”
지은이는 영 시원치 않은 얼굴로 치킨을 뜯어 먹다가 자신의 긴 머리를 정돈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우리 어디 멀리 가나요?”
“갑자기 왜 존칭이야. 징그러워, 하지 마.”
“아니···. 음. 굳이 기숙사 앞에 있는 치킨집이 아니라 여기서 먹자고 하니까. 혹시 버스를 이용할 계획이 있는 건가 해서.”
“맞아.”
“정말로?”
“엉.”
담백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 짓는 최지은.
“그냥 얘기만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는데, 돈을 투자했으니까 다른 것도 더 해보려고.”
그렇게 말하며 최지은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가리켰다.
그럼 나오기만 하고 치킨은 먹지 않았다면 잠깐 대화를 나누는 거로 끝날 일이었다는 건가.
거기서 치킨으로 내 판단 능력을 떨어뜨리다니 역시 최지은은 머리가 좋은 것 같았다.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시각은 이제 밤이라 부르기 딱 좋은 9시.
꽤 늦었음에도 지은이는 거침없이 버스를 잡아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있잖아.”
“응?”
“모리스 선생님께 레퀴엠을 작곡해달라고 하면 실례일까?”
자리에 앉자마자 무서운 말을 하는 최지은.
레퀴엠은 죽은 이의 안식을 빌어주기 위한 음악을 말한다.
지은이의 할머님, 병원, 레퀴엠.
내 생각보다 할머님의 상태가 더 위독하신 걸까.
그랬다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최지은이 움직이려는 이유가 좀 납득이 되긴 한다.
“글쎄, 누구를 위한 것일지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그런가···.”
최지은은 큰 의미를 담지 않은 내 말에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며 다시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한 상가였다.
큰 백화점을 중심으로 영화관이나 여러 가지 시설들이 마련된 그런 상가.
최지은은 익숙한 듯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과일가게로 향해 큼지막한 오렌지를 대여섯 개 담아 결제하더니, 또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도착한 장소는 다름 아닌 병원.
설마설마했는데 최지은의 목적은 정말로 병문안인 것 같았다.
덜컥 긴장되기 시작했다.
방금 자다 일어난 것 같은 머리에 간편한 체육복을 입고 있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도 괜찮은 걸까.
첫 만남부터 예의도 차리지 못하는 놈으로 찍히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혼자 바빠진 것과는 달리 최지은은 태연하다 못해 초연한 모습으로 안내대로 향했다.
“지은 학생 왔어요?”
“안녕하세요.”
“할머님은 6층에 그대로 계시니까요. 10시 되기 전에 얼른 다녀와요.”
“감사합니다.”
최지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뭐, 이런저런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이 바로 우리를 들여보내 주는 걸 보면 지은이가 얼마나 자주 이곳을 방문해왔던 것인지 정도는 바로 보였다.
이윽고 도착한 6층의 입원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보인 풍경에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먹을 수 있는 병문안 선물을 구매하길래 그래도 할머님이 몸을 움직이실 수 있는 상황을 예측했었다.
하지만 산소호흡기와 여러 기계와 연결된 튜브가 할머님의 환자복 안쪽으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영화나 드라마로만 보았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나 왔어.”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오렌지를 구매할 때처럼 참 익숙하게 할머님이 누워계신 병상 옆에 앉는 최지은.
옆 책상에 올려둔 봉투에서는 잘 쌓여 있던 오렌지가 굴러떨어졌는지 한참 동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기계에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삑, 소리보다는 훨씬 더 경쾌한 소음이었기에 나는 그 바스락거림이 멈추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모리스 선생님이 오셨어. 전에 말했던 성현이도 지금 옆에 왔고···. 한 달 동안 참 신기한 일이 많았어. 다 성현이가 한 일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가던 어떤 시설을 돕기도 했고, 엄마랑 아빠가 일하시는 병원에 가서 플래시 몹도 했어. 아 플래시 몹이라는 게 뭐냐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일방적인 중얼거림.
그럼에도 지은이는 멈추지 않고 자신이 최근에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병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가장 온전하게 남는 감각이 청각이라 했었나.
지은이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그 묘하게 섬뜩한 ‘익숙함’을 가득 담아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억양도 굴곡이 있었고 다양한 사건을 충분히 말하고 있었으나 왠지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는 길었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30분간 병실에 있던 우리는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병원을 나왔다.
“후우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쉬는 숨이 길어졌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한숨 소리로도 들리리라.
전생에서도 나는 음악에 미쳐 사느라 이런 광경을 눈으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장례식이야 몇 번이고 참가했지만, 그것도 잠깐 들렀다가 바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밀도 있는 공기와 무거운 분위기.
이런 상황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미안.”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자 화가 난 것이라고 착각한 듯했다.
“좀, 많이 놀랐지? 미안해···.”
하지만 나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놀란 것뿐이었기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우리는 걸었다.
버스정류장으로 직행하는 길이 있었음에도 굳이 지은이가 병원 인근에 있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 나는 이제야 지은이가 전화로 말했던 ‘얘기’가 시작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내가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할머니였거든.”
우회 없이 바로 놀라운 정보를 털어놓는 최지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전생에도 가정사를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평소에는 칭찬에 엄청 인색하신 분이면서 그렇게 엄하신 분이 내가 피아노만 치면 잘한다, 잘한다. 하시면서 무지무지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 거야. 나 실은 그 칭찬이 더 받고 싶어서 피아노 시작한 거야. 좀 어이없지?”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렇게 묻는 최지은.
평소 도끼눈을 뜨고 강한 인상을 주고 다니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괜히 더 연약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할머니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5살의 나이에 콩쿠르도 출전하고 좋은 선생님도 만나면서 실력을 기르게 되었다고,
“근데, 작년 10월쯤에 정말 나보고 미향예고 진학을 포기하자고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더라고···.”
이제 공부를 하자.
열심히 공부해서 피아노는 나중에 취미로 즐기면 된다고 할머님은 말씀하셨다고 했다.
안 그래도 당시의 지은이는 민호에게 3년이 넘도록 패배를 맛보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고 결국,
“지금까지 피아노를 밀어준 게 누군데, 갑자기 다 포기하자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화를 냈어. 진짜, 그날 나는 머리가 어떻게 됐던 건지. 할 말, 못 할 말 구분 없이 소리까지 지르면서 다 해버렸어.”
그런데, 지은이와 할머니가 심하게 다툰 그다음 날, 거짓말처럼 할머니는 지병이 재발해 병원에 실려 갔다고 그녀는 말했다.
실제로 전생에 최지은은 확실히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상상을 초월하게 긴 슬럼프를 겪었다.
많은 이들이 그 이유를 김민호와의 경쟁에서 찾았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뿐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머니랑 모리스 선생님은 두 분 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당시부터 알고 지낸 사이셔서 그으···.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모리스 슈만 콩쿠르를 위해 지은이를 부른 것으로 아마 그녀 안에 묻혀있던 할머니에 대한 추억 같은 걸 건드리게 된 모양이었다.
“그냥, 그냥···.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서 불렀어. 너무 내 멋대로라서 미안해.”
그렇게 긴 이야기를 마친 최지은은 고개까지 숙이며 내게 사과했다.
확실히 갑자기 병원까지 찾아오게 된 건 솔직히 놀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지은이가 미안해할 정도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에게 괜찮다는 말을 했다.
원래, 너무 답답하고 그럴 때는 누군가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좀 풀린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얘기를 듣게 되는 ‘누군가’는 보통 말하는 이가 신뢰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고.
그녀는 나를 신뢰해 준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이번 일을 너무 심각하고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입이 무거운 친구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지은이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 다음 나는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라고 생각해?”
그것도 꽤 날카롭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을 말이다.
지은이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천천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마, 나를 믿지 못하셨던 것 같아.”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그 대답이 어떻게 돌아오건 그녀 안의 상처를 내가 후벼 파는 말이 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건 그녀가 나를 이 늦은 시간의 불러낸 계기이자, 저번 뮤지컬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
결국, 네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지은이는 다시 정말 오랫동안 그 한마디를 곱씹더니, 버스에 타고 학교로 돌아와 기숙사로 향하기 직전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사과도 하고 싶고, 화도 내고 싶고, 원망도 하고 싶고, 쓴소리를 듣고도 싶은 그런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고민하는 표정은 전생에 끝까지 아버지와 척을 지고 살았던 내가, 아버지를 바라볼 때와 정말 닮았기에 거의 확실했다.
그렇게 우리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기숙사에 돌아왔다.
***
이틀이 지나 목요일이 밝았다.
하지만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와 모리스의 부탁을 수행하느라 바빴다.
그걸 핑계로 오래간만에 정석 선배와 1시간 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긴 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바빴다.
지은이는 그날 이후, 평소와 같은 텐션으로 돌아왔다.
모리스의 부탁에 관해 셋이서 회의를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도 곧잘 나누는 걸 보면 그녀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지, 정말 괜찮아진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서둘러 방과 후의 회의를 끝내고 평소처럼 셋이서 저녁을 먹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오늘은 거절했다.
그렇게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M스튜디오로 향했다.
굳이 지은이도 놓고 혼자 온 이유는 다양했다.
오늘은 조용히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럴 때는 지은이처럼 다른 사람과 긴 대화를 나누며 속에 있는 감정들을 털어내는 것도 좋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안녕하세요.”
“오, 이 시간에 오는 건 오랜만이구나?”
M스튜디오를 관리하시는 경비아저씨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드린 뒤, 열쇠를 받고는 곧장 연습실이 가득한 장소로 향했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연습실에 불을 켰다.
준비해온 악보는 한 장도 없지만, 일단 덮개를 열어 손을 얹었다.
현재 시각은 저녁 7시 30분.
마음이 가는 대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몸에 힘을 풀고 고요 속에 선율을 퍼트렸다.
첫 곡은 처음으로 민재가 다시 한번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했던 곡.
[C. Debussy – Claire de Lune]내가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어둑한 침묵을 메우는 옅은 달빛.
언젠가 먼 별과 같이 느껴지던 김민호를 따라잡고자 미친 듯이 연습하고 연습하던 시절의 나를 상징하는 곡이었다.
절박한 호소와 안타까운 심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졌다.
옅은 음색과 음과 음 사이의 빈 공간이 곡의 음색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신기한 선율.
그렇게 달빛을 시작으로,
중학교 교장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자 최선을 다해 연주했던 ‘쇼팽 에튀드 1번’.
M스튜디오에 처음 방문했을 때 박은호와 승부를 펼치기 위해 연주했던 ‘에튀드 5번’
엘리나와 협주를 했고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예선 곡이기도 했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버스킹에서 연주했던 ‘피아졸라의 사계’도 빠트리지 않고 연주했다.
거기에 가장 최근에 연습했던 그 유명한 ‘비발디의 사계’까지.
나는 손끝에 땀이 맺혀 건반을 닦아야 할 정도로 힘차게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는 모든 곡을 쳐냈다.
오래간만에 전신을 움직여 피아노를 치고, 땀을 흘려가며 머리를 깔끔하게 비우고 나니 거꾸로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뭘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걸까.
왜 마음이 갑갑했고, 어째서 지금까지처럼 바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인가.
머리가 깨끗해지니 그런 것들이 하나, 둘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 겁먹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은이와 할머님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멋대로 복지 센터의 운명을 뒤바꾼 일이야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좋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의를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지은이의 일은 좋게 봐줘도 개인적인 가족사 아닌가.
어디까지 참견해도 될지, 어떻게 하는 게 지은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그것들을 모두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성품이 그리 고운 사람이 아니었다.
곤란해하고 힘들어하는 걸 봐버렸으니 왠지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독단이며, 전부 지나친 참견이 될 수 있기에 굳이 지은이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었다.
정말로 힘들면 그녀가 먼저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지 않을까 싶은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건 전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서 명령대로 행동하기만 하는 건 이미 전생에 실컷 해봤다.
거기에 아버지와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던 전생의 나와 지금의 지은이가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았다.
동정심이라기보다는 자기연민에 가까운 감정일지라도, 나는 지은이를 돕고 싶었다.
“후우.”
병원을 나왔을 때처럼 긴 한숨이 픽 나왔다.
하지만 그때처럼 무겁고 텁텁한 느낌이 아니었다.
다짐했으면 계획을 세워야겠지.
나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끼 고얀 놈!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해 놓고는 사과 한마디 없는 게냐?!
통화 대상은 다름 아닌 모리스 슈만이었다.
그의 말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벽걸이 시계는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삼 내가 꽤 배고픈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르신.”
나는 움직이기로 이미 다짐했다.
“혹시 이번 약속했던 보상 중에서 혹시 레퀴엠을 의뢰해도 받아주시나요?”
그리고 일을 크게 벌이는 건 내 전문분야다.
나는 터져 나오는 모리스의 잔소리에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