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the Unique Lineage RAW novel - Chapter 117
114. 톨킨 선물 세트
‘염병할 이계.’
기남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편두통, 오한, 발열, 복통.
이계 진입 증세가 몽땅 나타났다.
완연히 다른 환경과 공기, 산소 농도의 변화, 중력의 변화, 기후의 변화.
그 모든 게 오감을 엉키게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단숨에 되지는 않을 거다. 견디고 버텨.”
형, 정호남은 그렇게 말하곤 훌쩍 자리를 비웠고.
형이 말한 대로 기남은 버텼다.
버티고 또 버텼다.
대부분 길어야 12시간 이내에 이계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인데, 기남은 조금 달랐다.
순혈 정가.
순혈의 혈통을 타고난 가문 중에서도 특별한 피를 지닌 이들을 칭하는 말이다.
순혈 정가의 특징은 보통의 불멸자를 뛰어넘는 예민함을 타고난다는 거다.
그 덕분이다.
타고난 예민함 덕분에 오감이 과하게 비틀어지며, 적응하는 시간도 더 걸렸다.
익숙해지면 적응하는 시간이 더 줄겠지만, 기남은 이게 첫 경험이었다.
“후우.”
미묘하게 흐트러진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기남은 창밖에서 위화감을 느꼈고, 집중했다.
보이는 건 없다. 흐릿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귀가 쫑긋 섰다.
삭, 드으으.
지긋이 땅을 발로 누르면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거의’다.
완벽히 소리를 내지 않을 수는 없다.
기남의 예민함은 그 소리를 잡아챘다.
기남은 밖에서 움직이는 놈들의 숫자를 속으로 가늠했고, 말했다.
예민함이 극도로 발달한 순혈 정가의 저력이었다.
* * *
다들 순혈 정가, 순혈 정가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했었다.
솔직히 별거 없다고 생각했다.
기남이를 보며 예민한 햄스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기남이는 순혈 정가의 면모를 보였다.
어떻게 인베이더가 온다는 걸 알았을까.
기남이가 말한 뒤에 나도 집중하니까 들리고 보이긴 했다.
창밖에서 그림자가 서성인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이걸 알아챘다.
그냥 들려서?
그럴 순 없다. 평소에도 이 정도 소리를 듣기 위해서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뭘 느꼈으니까 오감을 집중했을 것이다.
공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기남이 한 일은 위화감을 느끼는 것.
형태변환자의 어색함을 잡아내는 작업이었다.
그걸 지금도 했다.
대신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라 분위기,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고로 순혈 정가의 힘은 오감의 예민함을 넘어선 날카로운 육감에 있는 건 아닐까?
기남은 위화감을 느끼고 반응했다.
결론을 보고, 원인을 파악했다.
불멸자에게 육감과 직감은 경고등이었다.
솜털을 쭈뼛 서게 만든 원인을 예민한 오감으로 찾는 것.
순혈 정가가 살아 있는 레이더로 불리는 이유다.
난 기남이를 보고 깨달은 걸 적용했다.
인베이더 무리 출현, 들리는 소리, 그리고 느껴지는 위화감.
“여기 인베이더 애들은 밖이랑 좀 다릅니까?”
급히 물었다.
“다를 건 없는데…….”
대답은 까칠이가 했다.
동시에 기남이와 눈이 마주쳤다.
인베이더 무리는 기본적으로 눈앞에 적이 있다면 무작정 덤빈다.
개중에 머리를 쓰는 놈들도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전략은 무리지.
놈들은 고압 지뢰 지역을 피해서 야습을 감행했다.
“본부에 연락해 주십시오. 이상 현상입니다.”
기남이가 말하고 기관단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그와 동시다.
퍽.
동작 감지기가 작동하기도 전에 뭔가가 날아와 초소의 라이트를 깼다.
상황 파악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와 기남이가 느낀 위화감이 초소 안을 채웠다.
인베이더는 이렇게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
대리님이 버튼 무전기를 쉬지 않고 연신 눌렀다.
“그건 무슨 신호예요?”
궁금해서 물으니.
“더럽게 급하다는 거요.”
대리님이 답했다.
마구잡이로 누르면 일이 제대로 터졌다는 거다.
작전 코드로는 ES.
긴급 상황 발생이란 소리다.
어차피 버튼 누르는 거로 정확한 상황 전달은 무리.
이게 최선이란 거다.
“지금부터 현 초소는 이상 현상에 대비, 전투 상황에 돌입합니다.”
대리님도 말하고 제 무기를 꺼냈다.
산탄총을 초소 벽에 세우고 소총을 들었다.
까칠이도 탄창을 확인하며 소총을 겨누고.
난 오른손에 소총, 옆구리에 정글도, 왼손에는 4번 타자를 들었다.
“온다.”
기남이가 말했다.
부웅, 부웅, 부웅.
공기를 가르는 세찬 소리가 들렸다.
꽝!
기남이 서 있던 유리에 도끼가 꽂혔다.
돌도끼다. 끝이 붉게 빛나는 도끼날이 보였다.
파슥, 파슥.
돌도끼 날의 붉은 빛이 점등하며 빛났다.
“미친, 발화석.”
아무리 급한 순간이라도 불멸자는 소리치지 않는다. 버릇이었다.
대리님이 말함과 동시에, 난 기남이를 잡아채 뒤로 던졌다.
까칠이가 문을 발로 깠다.
쾅.
문을 까는 소리와 함께 발화석이 폭발했다.
* * *
삐삐삐삐.
본부에 비상 신호가 터졌다.
당직 과장은 반쯤 졸다가 눈을 떴다.
“뭐야?”
“긴급 상황 신호입니다.”
“장난질이면 죽는다.”
이계 전초 기지라고 해도, 프런티어 뱅가드는 아니다.
경계의 선봉은 언제나 개척 탐사팀이 맡는다.
이곳은 이계에서도 안전지대.
어지간해서는 위험한 일이 터지지 않는 곳이었고.
이것 또한, 당직 과장은 입사한 이후 처음 듣는 신호란 소리였다.
“어디?”
“2초소와 3초소입니다.”
과장은 머릿속에 이계의 지도를 떠올렸다.
개척한 지역, 미개척 지역.
1초소와 4초소는 그나마 본부와 가깝다.
정확히는 홀이 위치한 곳과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2초소와 3초소는 미개척 지역의 코앞이고.
그렇다고 해도, 2초소와 3초소 너머에 깔린 고압 지뢰만 수십 개다.
인베이더 무리가 넘어오는 순간, 초소에서 보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오롯이 인베이더의 시신으로 점철된 그런 학살.
“기후 변화는?”
“없습니다.”
모래 폭풍도, 붉은 벼락이 친 것도 아닌데 이상 신호가 왔다면, 하나뿐이다.
‘인베이더.’
대량의 인베이더가 출현했거나, 그에 준하는 일이 발생했거나.
“내 무장 가져와.”
과장은 몸을 일으켰다.
2초소는 마침 유광익과 정기남이 간 곳이다.
본래 근무자였던 이들도 당황할 만한 일이 벌어졌는데 신입 둘이라니.
아무리 밖에서 날아다닌 신입이라고 해도, 그 순혈 정가라고 해도.
이런 일에 익숙할 순 없는 법이다. 이곳은 아더 사이드, 이계다.
환경이 다르고, 가진 장비의 수준이 다르다.
“곧바로 2초소로 간다. 지원 병력 보내. 대기조 전부 투입하고.”
그리 말한 과장은 제 무장을 챙기고 밖으로 뛰쳐나와 전기 스쿠터를 찾았다.
차량은 부피가 크다. 그래서 대체 이동 수단으로 가져온 게 전기 스쿠터였다.
오돌토돌하게 특수 제작된 타이어로 시속 50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초소까지는 금방이었다.
“대기조 인원 다섯이 전부입니다.”
오늘은 지원 나온 인원과 함께 정찰조가 떠난 날이었다.
하필 이런 날에 일이 터졌다.
“비상 신호 울려서 전투 가용 인원 확충해. 상황 파악하고 버틴다. 초소를 버릴 수는 없다. 반씩 나눠서 내 쪽에 둘 보내고, 제훈이 오더로 3초소 수습해.”
“넵!”
부하가 외치고 자기도 무장을 챙겨 입었다.
부웅.
과장은 곧바로 스쿠터 손잡이 액셀을 당겼다.
곧 진흙 사막 위로 독특한 타이어 자국이 그가 간 자리에 길게 자국을 남겼다.
* * *
꾸-웅.
도끼가 부풀어 오르는 게 보인 순간, 난 그 앞을 막았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양손으로 도끼를 감쌌다.
폭발이 일어난다. 몸이 뒤로 밀려나려 한순간, 양손에 낀 장갑의 마법이 발동했다.
코트에 걸린 마법은 헥사곤 필드.
육각 결계다.
초능국의 왕자는 내 코트를 빌려 쓰고 이 장갑을 선물했다.
그리고 코트 따위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만했다.
내 양손에 낀 장갑은 왕자의 자존심이 담긴 선물이었다.
코트가 육각 결계라면.
이 장갑은 갤럭시 필드.
고위 방어 마법, ‘은하 결계’가 걸려 있다.
일정 충격 이상이 감지되면 자동 발동이다.
장갑의 마법이 발동하며 허공으로, 우주에 점점이 떠오른 별을 그린다.
은하수가 눈 앞에 펼쳐짐과 동시에.
꽈아아앙!
폭발이 터지며 결계 안에서는 불꽃 갈라 쇼가 펼쳐졌다.
폭발이 터질 때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으로 그 배가 되는 압력이 생성되는 법이다.
꾸아아앙!
기남이가 있던 쪽 창문이 박살 난다. 귀퉁이 벽을 까맣게 그을리며 바깥쪽에 화염을 뿜어냈다.
끄르르르!
인베이더가 내는 신음이 귓가에 잡혔고.
폭발이 끝난 순간, 난 두 손을 거뒀다.
후끈한 공기가 볼을 스치기에 페이스 가드를 내리고 산소통을 붙였다.
“초소를 포기하면 위험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엉거주춤 밖을 향하던 까칠이와 대리님,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기남이가 날 빤히 바라봤다.
“뭐 해요? 안 싸워요? 인베이더 오는데 또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게?”
그 말에 셋이 제 무기를 챙겼다.
“그 장갑은, 그거 뭐냐?”
다가온 기남이가 물었다.
“선물 받았어. 착하게 살면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양말에 넣어 주곤 하니까, 좀 착하게 살아라.”
“미친 새끼가.”
긴장이나 풀라고 말했다.
다행히 내 목소리에 셋은 금세 자세를 잡았다.
그걸 보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인베이더 무리가 보였다.
이건 뭐냐.
대략 고블린 열 마리 내외, 그 뒤에 선 건 넘버링 12 오크다.
고블린이 야비하다면 오크는 무식하다.
달리 말하면 고블린은 영리하고, 오크는 저돌적이다.
녹색 근육질을 가진 근접 전투를 즐기는 인베이더다.
마지막으로, 그런 오크보다 더 큰 인베이더도 보였다.
넘버링 15 트롤이다.
그 변신족 새끼들이 불멸자 친구 인베이더라고 부르는, 고속 재생이 가능한 괴물이다.
고블린이 연초록, 오크가 진녹색, 트롤이 청록색이다.
각각 열다섯, 열, 셋.
총 스물여덟.
판타지 몬스터 3종 세트, 톨킨 선물 세트였다.
폭발의 여파에 휘말린 얼굴에 검댕이 묻은 고블린이 날 보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캭캭- 적의를 보인다.
구경만 하면 뭐 하나.
난 소총을 들어 놈의 머리통을 쐈다.
탕! 퍽.
총알을 피하는 건 진짜 고급 테크닉이다.
불멸자나 변신족의 피지컬 정도가 아니면 정말, 정말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내 총탄이 고블린의 머리에 구멍을 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발화석 투척 도끼라니.”
“대리님, 저 이런 거 처음 보는데요.”
“나도 처음이야.”
뒤에서 혼혈 대리와 까칠이의 대화가 들렸다.
“특이종의 개입이다. 그거밖에 없어.”
기남이 말했다.
인베이더가 넘버링과 네임드만 있는 건 아니었다.
네임드가 보스라면, 그 사이에 중간 보스 같은 놈도 있었다.
넘버링이면서도 특이한 습성을 가진 놈들.
불을 뿜는 고블린이라거나, 빙결 초능을 지닌 오크라거나 하는 것들이다.
“지뢰 지대를 피하고 야습하는 인베이더라.”
상식을 깨부수기에 특이종이다.
이 무리는 고압 지뢰 지역을 피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어떻게?
머릿속에서 상대가 취한 행동의 순서를 정리했다.
고압 지뢰는 충전식이다. 사용하면 충전해야 했고, 그걸 위해 개척 탐사팀 중 일부 인원은 끊임없이 지뢰 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유심히 관찰할 머리만 있다면 지뢰 지대를 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다.
지대를 피하고 소리를 죽이고 접근, 이후 동작 감지가 라이트를 부순 뒤, 초소 무력화를 위해 불도끼 투척.
상황 정리 끝이다.
“대리님.”
난 혼혈 대리를 불렀다.
현 상황에서의 최고 명령권자.
그녀가 대피를 명한다면 적당히 치고 빠져야 옳다.
과연 저 인베이더 무리가 우리를 그냥 놔줄까 싶긴 하지만.
다른 안이 있다면, 버티는 거다.
발화석을 폭탄으로 쓰는 돌도끼가 초소 내에 폭발을 일으켰다면 밖에서 놈들과 싸워야 했겠지만.
내가 막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초소가 있고, 무기가 있다.
놈들이 손에 든 무기는 둔기에 가까운 쇠붙이와 둥근 돌이 대부분이다. 위험한 건, 발화석 도끼가 전부다.
“지원 올 때까지 적과 교전합니다.”
혼혈 대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철컥.
말과 동시에 소총을 깨진 창문틀에 올렸다.
그걸 본 오크 몇 마리가 칵칵거렸다.
듣기 껄끄러운 저주파 고함이다.
저 음성을 크게 내지르면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피어가 발동한다.
피어는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인베이더의 기합에 몸이 굳는 현상을 말하는 건데.
훈련받은 불멸특수대원이 겨우 오크가 내지르는 피어에 당할 리는 없었다.
크아아아!
오크 몇 마리가 동시에 저주파 함성을 내질렀고, 동시에 불도끼 몇 개가 허공을 격하고 날아왔다.
호흡을 참고 복부에 힘을 줘 저주파 기합에 저항하면서.
“오른쪽 둘.”
동시에 입을 열고 집중 사격이다.
타다다다다당.
연발로 갈긴 총탄이 허공에 뜬 불도끼를 연타한다.
꽈과과꽝!
허공에 폭죽이 터졌다.
모르고 당했다면 모를까, 이미 아는 건데 또 당하겠냐?
불멸자에게 날아오는 거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날아온 불도끼는 네 개였고.
내가 두 개, 기남이가 하나, 대리님이 하나를 떨어뜨렸다.
까칠이는 그사이 소총 한 자루를 견착, 조준 사격을 했다.
땅.
정면에 선 오크를 노렸는데, 놈의 앞에 트롤이 손바닥을 펼쳤다.
퍽.
5.56mm 탄이다. 관통력을 위해 특수 제조된 게 아니란 거다.
트롤의 피부는 질기고 질겨, 어지간한 총탄은 관통하지 못했다.
뚫린 손바닥 위로 불쑥 탄이 솟아나서 떨어지고, 놈의 손바닥 살이 꿈틀댔다.
고속 재생, 트롤의 장기였다.
불도끼가 실패하자, 놈들은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다들 어디서 주워 왔는지 편편한 돌이나 쇳조각 따위로 몸을 감싼 무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