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012
약먹는 천재마법사 1012화
접합술주(13)
“하아, 하아……!!”
얼어붙은 빙판길 위로 앙헬이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들쳐메고 엉망진창이 된 성채 밖으로 벗어난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가 앙헬이 서 있던 자리에 내리 찍혔다.
콰아아앙!!
“우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빙판길 위로 쭉 미끄러지는 앙헬의 모습.
아슬아슬하게 폭심지를 탈출한 앙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후아, 후아!!”
“고생했다, 앙헬.”
온몸에 검댕을 덕지덕지 묻힌 버나드가, 엎드린 앙헬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도시 주민들의 대피는 끝났어. 사상자가 발생할 일은 없을 거다.”
“푸하앗!! 하하핫……!!”
앙헬이 거칠게 숨을 들이쉬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텔에 몸담은 뒤로도 구호활동에 힘을 써본 적은 없는데…… 오래 살고 볼 일 아닙니까.”
“도시에 주둔하던 다른 세력과 뜻이 맞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버나드가 복잡한 표정으로 관문도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만큼 지금 저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규격을 벗어난 비상사태라는 거다.”
“…….”
그 말에 앙헬 역시 입을 다물고 도시 저편에 솟구친 참상을 바라보았다.
지상과 하늘을 이어붙이며 타오르는 장대한 화염.
관문도시 위로 솟구친 검붉은 불기둥이 흐린 하늘을 꿰뚫고 회전하고 있었다.
쿠오오오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화염의 꽃잎이, 관문도시를 휘감고 몰아치며 타오른다.
화염 꽃잎이 나풀거리면서 지상을 메우고, 하늘의 구름마저 잡아먹고 불살랐다.
마력공명으로 인한 폭주. 관문도시를 잡아먹고 흘러넘치는 마력의 바다.
관문도시 한복판에 피어난 화염꽃이 만개하며 솟구치는 불기둥.
수백만 갈래로 분화된 꽃잎이 퍼져나갔다 모여들면서 장엄한 염주(炎柱)를 구축했다.
다가가기는커녕, 오래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광채와 열기.
태양을 주물러 지상에 내리꽂는다면 저런 모습일까.
지옥의 기둥을 뽑아 천지를 불태운다 해도 저렇게 위태롭지는 않겠지.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과, 천번 에반 마르티네스의 일대일 결전.
관문도시 전역을 무대로 삼은 두 술사의 전투가,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난 것인지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에돈 육좌가 그렇게 되어버린 시점에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떨떠름한 표정으로 앙헬을 돌아본 버나드가 물었다.
“저런 괴물이 발칸에서 한번 날뛰었는데도 도시가 멀쩡하게 돌아갔단 말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수천미터 밖에서 그 정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에반 마르티네스의 힘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탐험가로서 세상의 많은 기적과 신비를 보아온 버나드조차도 처음 목도하는 재능.
그렇기에 저런 마법사가 전력을 내고도 패배했다는 사실을 버나드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법의 스케일이나 규모만 놓고면, 내가 평생동안 본 술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인 것 같은데.”
“…….”
“저런 마법사를 발칸의 견뢰가 한차례 상대해서 이겼다는 말이지…….”
황당한 듯한 목소리로 버나드가 중얼거렸다.
“카르텔에서 얌전히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가 있었군. 그 도시에 대체 무슨 괴물이 살고 있는 거야?”
“딱히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았는데요…….”
억울하다는 듯 항변한 앙헬이, 버나드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제가 예전에 상대했던 천번의 힘은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가 사용하던 자성영역은…….”
도시의 하늘 위를 온통 뒤덮고 흩날리는 아득한 꽃잎의 바다.
마치 벚꽂처럼 아름답게 빛을 발하면서도, 접촉하는 모든 것을 불살라 재로 돌려 버린다.
도시 한복판에 피어난 화염꽃을 말없이 바라보던 앙헬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보다 마력량이 더 늘었어요. 그래서 영역의 크기도 비례해서 더 커진 겁니다.”
“…….”
“저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반 님에게 패배한 뒤, 어쩌면 본신의 힘이 더 강해진 것일지도…….”
거대도시 전역을 뒤흔들었던 천번과 견뢰의 결전.
하지만 앙헬의 걱정이 무색하게, 천번은 견뢰에게 패배한 뒤에도 그 무력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등대지기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그날보다도, 훨씬 더 강해지고 위험해진 자성영역의 심상.
전장의 모든 것을 짓밟아 불태우면서도, 단 한순간도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앙헬이 기억하는 그때의 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그는 중앙전선에 도착한 순간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앙헬을 힐끗 바라본 버나드가 물었다.
“넌 빙결능력자잖나. 이 불길을 뚫고 천번에게 접근할 수 있겠어?”
“미쳤습니까? 지금 이걸 뚫고 천번에게 가라구요?”
앙헬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콰직!!
손을 타고 뻗어나간 얼음이, 성채 인근의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이건 물질이 아니라 성질을 태우는 불꽃입니다. 억지로 버티려 하면 제 능력 자체가 망가질 거예요.”
“…….”
“천번 본인이 직접 길을 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관문에 접근하지 못할걸요.”
“……허. 어쩔 수 없군.”
나직한 한숨을 흘린 버나드가, 품 안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뭘 하려는 겁니까?”
“첫 번째 관문이 저렇게 된 시점에서, 천번 본인도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말이잖아.”
버나드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단말기를 두들겼다.
“반나절만 지나도 전선 전역에 관련 정보가 퍼져 나갈 거다. 이쪽에서 그 동향을 먼저 확인하고 정보를 알려줘야 해.”
“동향이라면…….”
“오늘부터 관문을 통해 퍼져 나갈 소문이란 단 한 가지 정보밖에 없겠지.”
쓴웃음을 짓는 앙헬을 두고 버나드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에반 마르티네스가…… 주문연맹의 접합술주를 쓰러뜨렸다.”
* * *
눈앞의 모든 것이 검붉은 형태로 불타 사라진다.
일렁이는 불바다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살덩어리조차 이내 힘을 잃고.
접합술주가 전개한 생명권역이 생명력을 잃고 한 줌의 재로 화하기 시작했다.
자성영역 천화만리향의 만개.
예열이라는 속박을 통해서 위력을 끌어올린 영역의 힘은 하늘과 지상을 불태우는 기적이지만.
이 자성영역의 진가는 바로 그 어떤 영역도 따라올 수 없는 반영구적인 지속성에 있었다.
화르륵!!
만화경의 심상 중에서도, 전개 직후 시간을 추가로 소모한다는 극도로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끌어올린 영역.
시간에 제약을 걸고 전개한 천화만리향은, 만개한 뒤에는 더 이상 시간에 속박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면서 대상을 불태우는 영역.
레녹이 지닌 영역 중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출력을, 대상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끊임없이 쏟아붓는다.
접합술주를 상대로 어떠한 영역을 사용해야 하는지, 레녹은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정해두었던 것이다.
쿠과과과과과!!!!
“……아아.”
천지를 불태우는 화염꽃의 중심에 파묻혀, 전신이 갈려 나가는 접합술주의 모습.
수백만 갈래로 나뉜 꽃잎이 스치고 회전하며,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그 몸을 갈아 태워 버린다.
영역의 불길에 그 몸을 남김없이 소각당하고, 반대로 불사능력으로 재생한다.
재생과 소각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뇌를 들쑤시는 고통에 반영구적으로 노출된다.
불사능력을 접합한 술주의 육신조차, 끝없이 타오르는 영역의 불꽃 앞에서는 장작에 불과하고.
레녹이 구축한 법칙의 우월성 앞에서 선천이능의 근간마저 불타 소멸한다.
“너는…….”
쿠오오오……!!!
헤아릴 수 없는 화염 꽃잎의 폭풍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레녹이 술주를 향해 걸어나왔다.
피범벅이 된 옆구리를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면서도 균형을 잡는다.
끝없이 타오르는 장엄한 불꽃에 갈려나가는 술주와, 피를 흠뻑 뒤집어 쓴 레녹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파앗!!
두 사람은 어느새 장엄한 불꽃의 전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멀쩡해진 자신과 레녹을 번갈아 바라본 술주가,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의식공간인가.”
“같은 레벨의 술사라 그런지 이해가 빠르군.”
고위계 초인의 의식을 개조하거나 이어붙여 임의로 구축하는 모의의식공간.
“블레이버 마탑에서 사용하는 의식공간의 이미지를 빌려서 조금 개조했다.”
레녹이 말했다.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빌려서 현현하는 편이 소모를 아낄 수 있을 테니.”
“탑주의 말대로 너는 선대 마탑주의 유지를 물려받은 외도였군.”
술주가 차분한 안색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천화만리향이 만개하기 전 보여주던 흥분이 거짓말처럼, 놀랍도록 담담하게 결말을 받아들인다.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던 술주가 무기질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산밖에 없었어. 어떻게 그런 몸으로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
“진둔의 결계술이었군. 이미 시작부터 나의 술식에 대한 대비를 해두었던 건가.”
증오나 분노를 쏟아내기는 대신, 이미 끝나버린 전투를 복기하는 술주의 질문.
이 싸움에 결착이 난 시점에서, 어떠한 수를 써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음을 이해한 것일까.
하지만 레녹은 그런 술주의 지적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술주와 조우하기 직전 미리 전신에 펼쳐두었던 열 종의 대결계.
방어와 조화에 특화된 정륜결계. 탐색과 경계에 특화된 유선결계. 배제와 거부에 특화된 출성결계.
도합 9종으로 이루어진 대결계 위에 마지막으로 전개했던 신격결계(身隔結界)의 진짜 능력.
그것을 술주가 인지했다는 사실을 레녹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결계를 펼친 시점에 체내 신진대사와 신체기능 정보를 기록하고, 저장해서 ‘격리한다.”
레녹이 대답했다.
“신체능력이 소실될 경우 기록해둔 정보를 불러와 마력으로 재현.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몸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지.”
“부상과는 별개로, 죽는 순간까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이능이었군.”
“단점은 두 가지. 정보를 기록한 시점에서 그 이상의 재현은 불가능하고, 마력으로 신체기능을 재현하기에 소모가 막대하다는 것. 적색성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유지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화륵!!
연녹색의 불길을 피워올린 레녹이 말했다.
“너와 싸우게 된 시점에서, 한 번쯤은 반드시 그 접합술식을 직접 받아내야 했을 테니까.”
8레벨에 도달한 특질계 접합술식. 레녹과 정면에서 승부가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체술.
수천 마리 키메라를 자유자재로 부리면서, 일회성으로 발동하는 다양한 계통술식.
불사이능을 접합해 손에 넣은 초재생과 공간 자체를 접합해 다루는 감각까지.
레녹이 상대했던 강자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위험한 능력을 완벽하고 다채롭게 다루던 초인은 없었다.
대상지정 저항을 이용해 술식의 반동을 터트리고 시작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까다로운 전투가 되었을 터.
그렇기에 레녹은 술주의 접합술식을 한 번쯤은 직접 받아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벼이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옆구리와 등허리, 어깨와 팔뚝의 혈관과 근육. 내장기관의 부상을 무시하고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신체기능을 신격결계의 능력으로 대체하고, 그 뒤로는 치유의 불씨로 몸을 수복한다.
천화만리향을 터트린 시점에서 영역 내부의 모든 술식은 수십 배에 달하는 증강효율을 얻는 바.
지금이라면, 치유의 불씨가 지닌 효과를 증폭시켜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료할 수 있다.
“죽지 않는 것을 잡아 죽이는 것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지.”
레녹이 손짓하자, 불꽃의 전당이 회전하며 두 사람을 휘감았다.
화르르륵!!
“사도를 죽인 힘을 이용해서 너를 상대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아마 지금 같은 결말은 아니었을 거야.”
레녹이 교단에 입교하여 무해(無海)의 사도로서 각성한 만화경의 분기점.
광라무해궁(狂裸無海宮)을 사용한다면, 술주의 불사능력을 무시하고 그를 죽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알면서도 천화만리향을 선택해 술주를 정면에서 갈아버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암리타나 도래와의 전투에서 무해궁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선정의식이라는 아주 강력한 계기가 존재했기 때문.
그러한 서포트 없이 무해궁을 사용하려면 전투에 앞서 교단과 관련된 힘이나 권한을 다듬어야했다..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영역전개 직후 아주 강력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겠지.
“네 생명권역 안에서 싸우는 바람에 키메라의 보급을 감내해야 했지만, 반대로 네가 술식을 대규모로 사용하는 것도 제한할 수 있었지.”
“…….”
“너 역시 마지막에는 그걸 깨닫고 전장의 위치를 바꿔보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네 자성영역의 준비가 끝나있었군. 이해했다.”
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권역을 첫 번째 관문과 접합하는 것이 술주의 목적이었던 만큼, 권역 안에서는 술주 역시 규모가 큰 술식을 사용할 수 없다.
하물며 천화만리향의 결계로 권역을 가둔 시점에서는, 장생종의 시체가 훼손되는 것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바.
레녹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권역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술주와 교전을 시작했고.
끝내는 영역을 만개시키는데 성공해 싸움에 마무리를 지었던 것이다.
파삭!!
의식공간에 서 있던 술주의 왼쪽 어깨가 흩어지듯 소멸한다.
술주가 힘겹게 팔을 지탱하고 일어서려 했지만, 균형조차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쿵!!
“이건…….”
의식공간에 존재하는 술주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술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찰나.
“천화만리향의 불길은 만개한 뒤로 멈추지 않는다.”
레녹은 쓰러진 술주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각대상은 영역전개 직후 결계 안에 존재했던 모든 것. 너와 네 권역은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든 소각을 피할 수 없었지.”
“…….”
“넌 이미 죽었어. 다만 현실의 결과가, 이 의식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내가 멈춰두고 있을 뿐이다.”
“……그렇군. 처음부터 이건 내게 남은 보너스 타임이었나?”
술주 역시 그것을 깨달은 것일까.
힘겹게 일어서려던 그가 의식공간 안에 벌렁 드러누웠다.
턱을 긁적인 술주가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칼 젤리히가 아니라 다른 소체를 접합할 걸 그랬군. 재생능력을 믿고 네 마법을 받아내는 게 아니었는데.”
“…….”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해 뒀는데 결국 절반도 쓰지 못했나…… 아쉽게 됐다.”
자신의 패배와 죽음을 마주하고도, 접합술주의 태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연했다.
레녹의 말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기는 커녕,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상황을 분석하는 모습.
살아생전 무수한 인간을 잡아 키메라로 개조하고 사용해 온 술주답다 해야 할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유예를 두었다면 빨리 끝내지.”
파사삭……!!
술주의 오른팔이 순간 재로 변해서 흩날린다.
순식간에 소멸한 자신의 팔을 보며 술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많지는 않아 보이는군.”
“…….”
영역의 주인인 레녹의 의지로 인해 아직 의식공간에 그 형태만을 남겨두고 있을 뿐.
언제고 의지마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술주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복기하는 술주의 질문에 레녹이 답해준 것 역시, 반대로 술주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있기 때문이었을 터.
“너는 주문연맹에서 대연결을 이루는 축 중 하나였을 텐데.”
레녹이 물었다.
“연맹에서 대술주가 사망하면 어떻게 되지?”
“적합한 후계를 선정해서 자리를 대신한다.”
술주가 대답했다.
“술식까지 전승되지는 않기에, 새로운 술주가 터득한 술식을 축으로 대연결을 조정하게 되지.”
“조정 과정은?”
“복잡하군.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언령을 엮어 영성을 자극하는 의식도 있고…… 선천이능 적성도 필요하다.”
파삭!!
술주의 양다리가 소멸한다.
“최종 인가는 맹주를 거치긴 하지만, 그는 대연결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 그가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거든.”
“……무대라고?”
“이 세상의 모든 주문을 하나로 엮어서 연결한다면, 그것을 놓아둘 장소 역시 필요하지 않겠나?”
술주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것이 맹주가 맡은 역할이다. 애초에 그는 그런 일밖에 할 줄 모르기도 하고.”
“…….”
중앙전선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 중 하나인 주문연맹의 수장.
맹주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비밀을 전해 들은 기분이 든다.
아니, 접합술주가 설명한 맹주에 대해서 그 이상의 기시감이 든다면 착각일까.
어쩌면 맹주가 마련하는 ‘무대’라는 것은-
파삭!!
레녹이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술주의 상반신이 소멸했다.
복부, 갈비뼈, 심장과 쇄골, 어깨.
장기와 피부, 뼈를 가리지 않고 한줌의 재로 화해 흩어진다.
“이걸로 끝이다, 에반 마르티네스.”
“…….”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어. 내게 보여준 재능도 경이로웠지만, 네가 그리는 대답은 그 이상이었음을 알았으니.”
얼굴 반쪽만이 남은 술주가 레녹을 향해 얼굴을 눕히고 웃었다.
“불가해를 해체하는 마법과, 시간을 속박으로 거는 자성영역…… 어느 쪽이든 우리 같은 술사에게 있어 불가능한 이상의 현현이나 마찬가지. 이미 너는 그러한 기적을 두 가지나 손에 넣었군.”
“…….”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런 기적을 지닌 네가 견뢰에게 패배했다는 것이겠지.”
얼굴 전체가 흩어 사라지면서도 술주가 미소지었다.
“발칸에서 네가 경험한 패배와, 견뢰의 존재가 너무나도 궁금하군. 나를 대신할 술주도, 너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접합술주. 거짓말은 거기까지 하지.”
레녹이 참지 못하고, 술주의 반만 남은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콰직!!
얼굴이 밟힌 채로도 웃고 있는 술주를,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넌 처음부터 뇌의 좌반구만을 사용해 전투에 임하고 있었지. 나머지 반절의 존재를 내가 잊었을 것 같나?”
“…….”
“네가 미리 적출해 둔 ‘우뇌’. 버리거나 폐기했을 리가 없지. 어딘가에 숨겨두고 부활의 단초로 삼을 생각이었을 거야.”
레녹이 술주의 머리를 날려버린 시점에서, 이미 접합술주의 머리에 우뇌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칼 젤리히의 우뇌를 자신의 좌뇌에 접합하기 위해서 미리 조치를 취해둔 것이겠지만.
접합술주가 적출해둔 자신의 우뇌를 제 손으로 폐기하지는 않았을 터.
그리고 술주의 뇌 반쪽이 살아 있다면, 분명 어딘가에서 술주가 부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레녹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술주는 레녹의 지적에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에반 마르티네스. 인간의 뇌가 얼마나 복잡한 장기인지 모르는군.”
“뭐라고?”
“우뇌를 적출해 연결을 끊은 순간, 좌뇌가 체험한 정보는 우뇌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정보를 전달하는 뇌량(腦梁)자체가 끊겨 있기 때문이지.”
술주가 말했다.
“오늘 너와 나의 싸움은 또 다른 나에게 이어지지 않아…… ‘나’는 이 자리에서 완전히 죽는다.”
“…….”
“물론 이건 신경과학과 뇌의학에 기반한 설명이고, 마도의학으로 들어가면 의식개념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지만-”
레녹과 시선을 맞춘 술주가 투명한 웃음을 지었다.
“그 부분에 대한 즐거움은, 살아남은 내게 맡기도록 할까.”
“……아베스타 채프먼.”
“너를 죽이려 할지, 호의를 가질지. 너를 보고 무엇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술주의 머리가 완전히 흩어져서 사라진다.
그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고요하게 맴돌았다.
“죽기 전에 모든 문제를 다 풀고 가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지.”
“…….”
“그런 미혹 하나 정도는 마지막까지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 않나?”
레녹은 술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순간 두 사람이 함께하던 의식공간은 소멸해 사라지고.
화염꽃의 폭풍 속에서 소멸하는 술주의 유해만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쿠과과과과과과!!!!!
입자 단위로 소각당한 술주의 육신이, 끝내 재생능력을 잃고 한 줌의 잿더미가 된다.
피부와 근육, 신경과 골격. 끝내는 그 정신과 영혼마저 불태우고.
파아앗!!!
사방으로 비산하는 꽃잎과 함께 그 유해가 산산이 흩날렸다.
어두운 관문도시의 하늘 위로 눈부시게 빛나는 꽃잎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상공. 장막 전체를 뒤덮은 화염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면서 화염의 커튼처럼 베일을 드리우고.
지상과 하늘을 양분하며 그 불길을 따스한 햇빛처럼 비추어 녹여냈다.
“…….”
술주가 마지막 순간 받아들인 결말은, 스스로 언급한 완전한 죽음일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문에서 쓰러진 뒤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초연했다.
스스로 답을 내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후련함인지, 아직 숨겨둔 미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우뇌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레녹 역시 자신의 정보를 유출당하지 않기 위해 판을 조정해 왔으니.
말없이 술주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레녹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돌려세웠다.
접합술주와는 별개로, 아직 술주의 생명권역은 그 원형을 남겨둔 상황.
술주와의 결전에서 승리한 지금 그 안에서 챙겨야 할 보상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