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016
약먹는 천재마법사 1016화
이정표(3)
지평선 끝을 뒤덮으며 다가오는 암흑의 해일.
거대한 흑관이 나타난 순간, 어둠은 전조도 없이 천지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흘러내리는 어둠을 타고 짓밟힌 수풀과 초목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고 시들어간다.
어둠 속에서 눈길을 건네는 것만으로 목숨을 거두고, 그 자리에 죽음을 대신 채워 넣는다.
관문도시 사방에 펼쳐진 초원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어둠에 휩쓸린 인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탑의 마법사, 용병부대. 이능개화전단의 척살대. 교단의 사제와 헤드로 군벌의 마물.
그 모든 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가오는 어둠을 피해 몸을 웅크린 순간.
형체 없는 어둠의 폭풍이 지평선을 완전히 뒤덮고, 관문도시 전역의 시공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
헤아릴 수 없는 암흑의 파도가 의념을 깎아내고 서슴없이 인간의 명줄을 움켜쥔다.
분명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할 텐데, 귓가가 먹먹해지고 고막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끄읍……!!”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버티던 연맹의 술사들이 하나둘씩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는다.
준비하던 술법진마저 내팽개친 채, 양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머리를 처박았다.
“제식부대는 포격술식을 중지하고 술식을 변환하라!!”
“예장술사 전원 앞으로 전진. 의념을 펼쳐 각자 정신을 보호해라!!”
이변을 인지한 연맹 측에서 즉시 마력을 조작해 술법진의 형상을 변환하기 시작했다.
관문도시를 포격하기 위해 펼쳐진 술법진이 둥글게 구부러지며 술사들을 보호하는 장벽이 된다.
이미 완성된 술법진의 구성을 변조시켜, 포격에서 방벽으로 전환하는 뛰어난 기예.
“흐아, 흐아아……!!”
버티지 못한 초능력자가 휘청이다 넘어진 순간, 그 몸이 순식간에 백골로 변해 고꾸라졌다.
피부와 살점을 도둑맞은 것처럼 잃어버리고, 뼈마디만을 남기는 듯한 기괴한 모습.
엎드린 채 죽어버린 그 유해가, 이 관문에 있던 장생종의 시체와도 겹쳐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그 끔찍한 참상을 본 다른 세력들도 즉시 대응에 나섰다.
“외방기도문 33절. 간이성역 선포까지 13초!”
“살아남은 척살대 대원 모두 역장을 펼친다. 집체 정신망 연결. 의식병기에 시동을 걸겠다!!”
창백한 성역을 전개한 교단 측과, 역장을 두르고 정신망을 연결하는 전단의 모습.
용병부대와 헤드로 군벌,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 제각기 아이템이나 방비 수단을 꺼내 들지만 역부족이다.
“살려, 살려줘……!!”
“빌어먹을, 흑마법을 막을 수 있는 법보라고 했잖아!!”
“끄아, 아아아악!!!!”
연맹, 교단, 전단. 마탑과 용병부대를 가리지 않고 어둠에 휩쓸린 이들이 사방에서 죽어나간다.
관문도시를 포위하고 레녹을 위협하던 전력 일각이 무너지며,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갔다.
일말의 전조조차 없는 학살. 등장과 동시에 중앙전선의 판도를 바꿔버리는 압도적인 광기.
이를 악물고 버티던 레녹이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비행……!”
채비를 더하는 여정이라 하여 가비행(加備行).
명이 대륙을 배회하며 행하는 파괴를 박사는 이 대륙에서 가장 추악하고 숭고한 의식이라 말했다.
한동안 멈춰 있다고 들었던 가비행이 어째서 이 시점에 다시 시작된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레녹이 위치해 있던 첫 번째 관문을 가장 먼저 향한 것인지.
그 모든 의문에 대해 답을 내리기도 전에, 전조도 없이 자리한 어둠이 공간을 비틀었다.
끼기기긱……!!!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그 의지를 지상에 향하는 것만으로, 넘실대는 암흑이 질량을 갖추고 공간을 짓눌렀다.
쿠르르르릉……!!
어둠으로 물든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암흑거인들이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암흑으로 빚어낸 거인들이, 끝없이 뻗어나오는 어둠의 해일을 타고 걸음을 옮긴다.
쿵!! 쿵!! 쿵!!
지평선 끝에서부터 초원 전역을 휩쓸고 이어지는 암흑거인의 행진.
발을 내리찍을 때마다 암흑의 파동이 폭발하고, 수백에 달하는 인간들이 가볍게 쓸려 나간다.
“아아…… 아아악!!”
“크르르극……!!”
“지옥이다, 지옥이……!!”
크기만 해도 수십 미터를 가뿐히 뛰어넘는 거인들에게는 형태도, 의지도, 감정도 없다.
단지 이 초원에 도래한 어둠을 따라서 고행하듯 느릿하고도 확실하게 지상을 짓밟을 뿐.
거인들이 움직이며 이동하는 자리마다, 시든 풀잎과 백골이 쌓여 기괴한 정취를 이루고.
짙은 죽음의 냄새와 함께 모든 것을 지옥으로 떠밀어 삼켜 버렸다.
콰아아아아!!!
“으아아……!!”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앙헬이 온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버나드와 제벽 역시 사태를 인지한 순간부터 쏟아지는 어둠을 버티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
“앙헬, 정신 차려!! 이건 우리를 직접 공격하는 술식이 아니다!!”
이를 악문 버나드가 소리쳤다.
“흑마력에 살의를 섞어서 무제한으로 방사하고 있을 뿐……!! 정신망이 잠식당하면 끝이야!!”
지금 이 초원을 가득 메운 어둠은 누군가를 특정해 공격하려는 의지가 아니다.
형태 없는 살의를 마력에 섞어 흩뿌리는 압도적인 초월의 잔흔에 불과할 뿐.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신망이 예민한 초능력자들은 오히려 그에 영향을 받기 쉬워지는 것이다.
“하아, 하하핫……!!”
숨을 헐떡이던 앙헬이 창백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토해냈다.
“미쳤어……!! 이게 판데모니엄의……!!!”
콰우우우웅!!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관문도시의 크기를 뛰어넘는 무언가 솟구쳤다.
지상을 짓밟으며 학살을 시작한 암흑거인의 등 뒤에서 떠오르는 장대한 어둠의 누각.
칠흑 같은 어둠을 빚어 만든 그것은 흑관처럼, 혹은 어둠 속을 부유하는 선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흘러 떨어지는 어둠의 누각을 타고 관문도시의 상공을 유영한다.
후우우……!!
어둠 속을 부유하는 거대한 누각의 정점에서, 무언가가 흐릿한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
흘러 떨어지는 흑마력 속에 반쯤 녹아든 채, 얼굴조차 내보이는 일 없이 아른하게 일렁였다.
지상에 만개한 죽음에는 관심조차 없이. 지평선을 물들인 어둠조차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하나 무저갱의 끝에서 퍼 올린 것처럼 끓어오르는 흑마력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정체를 고하고 있었다.
흑마법의 정점에 선 대마법사.
그 존재만으로 초월의 문 앞에 도달한 괴물.
대륙 전역을 망라하는 여정 끝에 망가져 버린 파괴자.
판데모니엄의 명왕.
“가비행이 다시 시작된 건가…….”
버나드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힘겹게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시작부터 중앙전선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건, 설마……!!”
쩌저저적!!!
암흑의 해일이 지상을 내리누르고, 산천초목이 말라붙어 그 생명을 빼앗긴다.
시들어 죽어버린 초원 위로, 검게 물든 나뭇가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파리 하나 없이, 검은 가지만을 앙상하게 내보인 죽은 나무의 숲이 만들어졌다.
명이 이 자리에 당도한 것만으로, 중앙전선의 삶과 죽음이 반전되면서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고 있던 것.
“끄, 그극……!!”
“꺼억……!! 숨이……!!”
주문연맹의 술사들이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쓰러져, 그 생명을 어둠 속에 빼앗긴다.
이능개화전단의 능력자들 역시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특별한 술식이나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그 어둠을 주변에 흩뿌리고 있는데도.
헤아릴 수 없는 수련을 거듭한 마력사용자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쓰러져 죽어나간다.
사방에서 죽어가는 초인들을 바라보던 레녹이 걸음을 뗀 순간.
“미친, 놈 같으니…….”
턱!!
레녹의 뒤에서 숨을 헐떡이던 제벽이 그의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움직이지 마라…….”
“바르바리아.”
“보고도 모르겠느냐? 저건……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야.”
창백한 안색으로 거칠게 숨을 내쉬는 제벽의 모습.
접합술주의 수술로 인해 컨디션이 대폭 떨어진 상황이다.
그러지 않아도 죽음과 가까웠던 제벽이, 얼마나 어렵게 버티고 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바.
하지만 그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로 사방에 나자빠진 시체들을 가리켰다.
“이대로 버티면, 명왕은 지나갈 거다…… 연맹이나 전단 놈들이, 우리를 대신해 죽어나가겠지…….”
“…….”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더냐?”
제벽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고는 있다.
현재 관문도시를 포위한 전력 대부분은 레녹에게 있어 잠재적인 적이나 마찬가지.
접합술주가 사망한 지금 첫 번째 관문에서 유의미한 이득을 챙기기 위해 움직인 세력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관문도시를 둘러싼 각축전은 명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의미를 잃고 혼란에 빠진 상황.
명이 이끄는 어둠이 이대로 관문을 짓밟는다면, 다른 세력의 피해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될 터.
오히려 가비행이 지나간 뒤의 상황은 레녹에게 유리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했느냐?”
찌푸린 표정의 제벽을 내려다보면서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 사이로 스쳐 흐르는 어둠을, 모래처럼 쥐어 부순 레녹이 말했다.
“이 어둠. 단순히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물질이 아니야. 따지자면 마력과 사념(死念)의 혼용에 가깝지.”
“…….”
“의념의 물질화…… 명왕이 이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나?”
분명 이것이 명이 지니고 있는 가장 위험한 비밀들 중 하나겠지.
명 혼자만으로는 결코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한 막대한 양의 사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초월적인 성장 속도와,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할 만큼 비대해진 흑마법.
초월의 문 앞에 멈춰선 채로 그는 기다리고 있다.
다시 가비행을 시작한 명이 지금 레녹의 앞에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레녹은 그 어둠 속을 마주한 뒤로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가야 한다.”
“천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안 돼.”
버나드가 굳은 표정으로 만류했다.
“가비행 도중 명왕과 의사소통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지.”
“…….”
“최악의 경우 접근하자마자 죽을 수도 있어. 지금 네 컨디션으로 명왕의 힘에 저항할 수 있겠나?”
“……생각해 둔 방법은 있다. 명왕에게 접근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지.”
레녹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그 정도라면 충분해.”
“제정신이 아니군. 대체 뭘 하려는-”
“에반……!!”
제벽과 앙헬의 외침을 뒤로하고 망설임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륵……!!
등허리에서 뻗어 나온 화염의 날개가 펼쳐지며 강하게 요동친 순간.
레녹의 신형이 제 자리에서 수직으로 암흑을 뚫고 솟구쳤다.
파앗!!
쏟아지는 암흑의 해일을, 화염날개에 의존해 돌파한다.
지평선을 타고 뭉개지는 어둠 속을 비행하며, 레녹이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사념의 밀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다……!!’
명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천지를 물들인 어둠은, 단순히 흑마력으로 인한 현상이 아니다.
죽은 자의 의념. 사념과 흑마력이 뒤섞여 부풀어 오르면서 끝을 모르고 폭주하고 있는 것.
드드득……!!
레녹이 구축한 화염날개가 어둠 속에서 속절없이 마모되며 빛을 잃는다.
순식간에 추진력과 항력을 상실하고,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레녹을 대신해 뜯겨나갔다.
명이 이끄는 어둠의 해일은 형태 없는 현상이 아니라, 의념을 물질화시킨 실체가 존재하는 힘.
레녹에게 죽음을 강제할 수는 없으나, 그에 비견되는 물리력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쏟아낸다.
카가가가각!!!
“……!!!”
고도를 높이는 것만으로 전신이 갈려 나가는 듯한 격통이 밀려온다.
천화만리향의 영역 안에서 무한히 소각당하던 접합술주가 느낀 고통이 이러했을까.
반절 가까이 회복된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갈려 나가고, 몸의 감각이 실시간으로 사라져 간다.
억지로 버티다가는 기껏 회복시켜둔 몸이 더 악화되면서 부상이 심해지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전력으로 마력을 회전시켜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우두둑!!
명의 상태를 짐작하면서도 굳이 여기까지 접근한 이유.
이 장대한 어둠 속을 뚫고 하늘과 가까운 상공으로 날아오른 이유.
그건 하늘에서 장막을 불태우는 천화만리향의 힘을, 레녹의 의지로 다시 다뤄내기 위함이었으니까.
콰르르릉……!!!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검은 하늘 너머, 레녹이 피워올린 불꽃만은 빛을 발하고 있다.
장막을 불태우고 회전하는 화염의 고리가, 어둠 저편에서 개기일식의 흔적처럼 발광하고.
그를 향해 손을 뻗은 레녹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와라.”
여(餘) : 만리향
개문(開門)
끼기기기긱……!!!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과 그의 생명권역을 불태운 자성영역 천화만리향.
시간을 제약으로 삼아 만개한 불길은 여전히 하늘에서 장막을 불태우고 있다.
관문도시 상공의 장막을 불태우며 반영구적으로 환경을 개변하는 염열계 정점에 도달한 불꽃.
장생종의 시체를 대신해 새로운 [관문]이 된 불길을 조작해, 어둠을 관통하는 새로운 문을 만들어낸다.
쩌저저적!!!
검게 물든 하늘 위로도 빛을 잃지 않은 화염의 고리가 거칠게 회전했다.
레녹의 의지에 따라 새롭게 계승된 [관문]이 강제로 작동하며 움직이고.
화염이 하늘 위에서 양옆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문]의 형상이 되어 펼쳐졌다.
쿠오오오오!!!
하늘을 불태우는 화염의 관문이 양쪽으로 펼쳐지면서, 타오르는 어둠을 밀어젖혔다.
관문의 기능을 작동시켜 문을 열고, 그 여파로 명이 이끄는 어둠을 강제로 밀어내는 편법.
지상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연맹과 교단, 전단의 초인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천번이 가비행과 충돌해 방향을 바꾸었다……!!”
“그 명왕과 술식 대결을 하겠다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접합술주와 싸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활짝 열린 관문의 불꽃 사이로 몸을 밀어 넣듯이 가속.
어둠 속을 가로지른 불꽃의 꼬리가 길게 휘어지면서, 유성우처럼 내리꽂힌다.
암흑거인들의 군세 사이를 가속해서, 유영하는 어둠의 누각 위에 그대로 떨어졌다.
콰아앙!!
그 충격으로 흑관을 이루는 어둠이 넘실거리다 흩어지고, 레녹의 발 앞에 길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불꽃 섞인 숨결을 토해낸 레녹이, 이윽고 눈앞에 펼치진 어둠의 누각을 바라보았다.
“…….”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듯하다.
오감을 짓누르는 암흑 속에서 싸늘한 외해(外海)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면 착각일까.
온몸을 차갑게 굳히는 어둠 속에서, 레녹은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어둠과 하나가 된 흑마법사의 뒷모습을.
고오오오!!!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흔들리는 어둠 속에 선 명의 모습을 확인한 레녹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상태가 나쁘군. 가망이 없는 수준인가……?’
가비행을 다시 시작한 만큼, 명의 정신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생각 이상이다.
레녹을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접근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듯한 모습.
지평선을 짓누르는 암흑을 발 아래에 둔 그는 더 이상 땅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단지 그 시선은 앞으로 향한 채, 계속해서 움직일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을 뿐.
지금 관문도시 아래서 벌어지는 참극에 대해 그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아직 죽음이라는 끝나지 않는 꿈속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레녹은 그에게 다시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세계의 결말에 앞서 하나라도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고 말했었지.”
명의 뒤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 그렇지 않나?”
“…….”
발칸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초창기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설프게 재현한 공용마법을 들고, 음지에 눌러앉은 범죄자들과 싸우던 나날.
시거 뱅 갱단의 전격마법사를 죽이고 금고 안에서 마주했던 흑마법사의 모습.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이제는 헤아리는 것조차도 아득하다.
하지만 레녹은 단 한순간도 그 어둠의 깊이에 대해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화륵!!
손안에서 불꽃을 피워올린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한 어둠이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않는 명을 두고, 사방에서 펼쳐진 어둠이 레녹의 몸을 공간째로 짓눌렀다.
불꽃을 터트려 어둠을 몰아낸다. 회전하는 암흑구체를 피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의지와 형태를 갖춘 암흑의 해일을 정면으로 뚫어내면서, 그 반동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뚜두두둑……!!
“쿨럭……!!”
마력과 의념을 두르고도 여력이 부족해 숨이 턱 막힌다.
몸에 치명적인 무리가 가지 않는 마지막 경계선. 여기서부터는 레녹도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명이 마지막까지 레녹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제 정말 가망이 없을만큼 망가져 버렸다면.
지금 이 모든 순간이 무의미한 헛수고가 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쩌저적……!!
몸을 잠식하는 어둠이 의념과 심상을 뒤덮고 잠식한다.
레녹의 굳건한 이성과 정신장벽을 느끼고 더욱 격렬하게 그 육신을 찍어눌러 두들긴다.
실드와 소결계, 화염의 장벽이 속수무책으로 으스러지면서 몸을 휘감고.
짓눌리는 어둠 속에서 명의 등 뒤에 선 레녹이 말했다.
“단장과 만났다.”
“…….”
“그리고 대답을 정했지.”
명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레녹이 고개를 젖혔다.
“당신에게는 말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확답을 줄 수는 없을 것 같거든.”
처음 명을 만난 순간부터, 그의 도움을 받아 판데모니엄에 입단하기까지.
몇 번에 걸쳐서 그의 도움을 받았고, 레녹은 그 호의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명이 세간에 어떠한 존재로 알려져 있든, 그는 레녹에게는 훌륭한 조력자이자 후원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답을 정한 순간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레녹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내 역할은…….”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던 레녹이, 이내 말끝을 흐렸다.
만약, 명이 그리는 미래가 레녹의 대답 안에 담기지 않는 것이라면.
그가 시작한 가비행이 레녹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대답이라면.
언젠가는 판데모니엄과 갈라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에게 말해주어야 했으니까.
다시 가비행을 시작한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레녹과 명에게 결말이 찾아오기까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언제가 마지막일지 알 수 없기에, 레녹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후후…….”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릿하게 늘어지면서도, 때에 맞지 않게 웃음기를 머금은 저음.
“……명?”
“네 말이 맞다, 반.”
흘러나온 명의 대답은, 레녹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명이 레녹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 버렸지.”
“…….”
“하지만 네 역할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레녹을 향해 돌아선 명이 말했다.
얼굴을 잠식하고 넘실대는 어둠. 신체의 일부마저 암흑과 하나가 되어 흘러내리는 형상.
“대답이 늦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레녹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만큼은, 처음처럼 맑은 정광을 띄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건 꽤 오랜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