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7
그 찰랑거리는 머릿결과 차분한 눈매,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가 누구인지 곧바로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마주쳤던 야채상인. 항공점퍼를 입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번 스쳐지나간 정도의 인연에 불과했지만, 레녹의 비상한 기억력은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시정부 직속으로 일하는 엘리트일 줄이야.
돈을 많이 번다고 하던 그 말도 허언이 아닐것이다.
“음?”
하지만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눈동자를 녹색으로 빛내면서 레녹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군.”
레녹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얼굴도 마법으로 바꾸고 딜런을 따라 이상한 마스크도 뒤집어 쓴 상태다. 이벨린이 그를 알아보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레녹의 마스크를 투시라도 할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뭐, 다른 사람이겠지. 마력 패턴도 너무 다르고.”
마법을 사용할때마다 조금씩 마력 패턴을 바꿨던게 도움이 된 건가.
그녀와의 만남에서 얻은 교훈을 두번째 재회에서 써먹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이벨린은 레녹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자마자 흥미를 잃었는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난 저 영감을 적당히 쫓는 척 해야하니까 알아서 가 봐.”
“직접 잡지는 않는 건가?”
레녹의 공손한 대답에 이벨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능력도 형편도 안돼. 복마전이 우리쪽 수사기관에 로비하는 돈이 얼만데. 저 악어가 도시 한복판에서 은행을 털어도 경찰이 출동할 일은 없을걸.”
평이한 어조로 설명하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발칸의 수사기관 역시 상당히 부패한 모양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기에 레녹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니까 놈들이랑 엮일때는 조심해. 죽기 직전까지 몰려도 누군가 도와주는 일은 없을테니까.”
그녀는 마지막까지 차분한 음색으로 레녹에게 조언을 남기고는 훌쩍 뛰어 크로켄이 걸어간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레녹의 근처까지 걸어온 딜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운이 좋았어, 마법사 나으리.”
“……”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딜런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결과적으로 딜런이 공장안에서 빨리 도망치지 않은 동안 크로켄이 도착하는 바람에 이런 사단이 난것이 아닌가.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맞아놓고 정작 크로켄을 상대로 시간을 번 건 레녹이었으니 짜증이 나는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보수에서 꽤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할거야.”
만약 거부한다면 하반신만 꽁꽁 얼려서 이 자리에서 버리고 갈지 고민을 좀 했겠지만, 딜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목숨을 구해줬으니 천만 셀만 빼고 모두 넘기지. 4천은 그쪽이 가지라고.”
“……..”
돈을 뜯어냈는데도 뭔가 손해를 본듯한 찜찜한 기분. 정작 딜런은 기분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이번에는 정말 아슬아슬했어. 설마 샬로테에서 그 노친네를 고용했을줄이야….. 룸에 처박혀서 술만 퍼마시는걸로 유명한 영감인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레녹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품안에서 연초를 한대 더 꺼내 물었다.
“또 담배를 피는거야? 정말 어지간히 좋아하나보군.”
“시끄러워.”
크로켄을 상대하는 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바닥까지 끌어 쓴 상태다.
이대로라면 족히 이주일 정도는 부작용으로 고생 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하니, 연초에 손을 대는건 어쩔 수 없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나도 마려워지잖아. 한 개피만 달라고.”
“…….”
이제는 파트너가 아니라 짐꾼처럼 느껴지는 딜런의 말에 레녹은 인상을 썼지만, 결국 품안에서 남은 연초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번에 그가 해낸 일은 7만 셀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니, 충분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데 열중했다.
“…맛있잖아?”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이 폐허가 된 공장 위를 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두번째 신분
“아까 그 여자는 뭐였지?”
“여자? 이벨린을 말하는거야?”
레녹의 질문에 딜런이 연기를 흘려보내면서 대꾸했다.
“뭐, 알고 있는건 그리 많지 않은데. 내가 아는건 그 여자가 시정부의 직속 에이전트 중에서도 최정예라는 것 뿐이야.”
“에이전트라고?”
“시정부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직접 관리하는 무력대원이지. 아까 그 여자가 입고 있던 슈트, 그것도 다 시정부에서 투자하는 공공재야. 가격으로 따지면 50억 셀은 가뿐할걸.”
“50억…..”
레녹으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거액이다. 그런 돈으로 덕지덕지 바른 슈트를 입고 있으니 크로켄과 같은 괴물의 힘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것일까.
“본인의 실력도 굉장히 뛰어난데다, 손속이 잔혹한걸로 유명해서… 웬만해선 부딪히면 손해야. 영감도 그렇게 느꼈을걸.”
“그 괴물의 손에 죽을뻔했는데도 그렇게 부르는건가? 재밌군.”
레녹이 조소를 흘리자 딜런이 킬킬 웃었다.
“용병이란게 그런거지. 특히 전쟁용병은 돈만주면 동료도 죽이고 다니는 족속이야. 제정신이면 이런 사무소에 들어가는 일도 없다고.”
“……..”
딜런은 스스로를 비웃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레녹은 어쩐지 남일같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돈을 바라보고 무슨 일이든지 할 생각을 하고 있는건 그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레녹이 침묵하자 딜런은 그의 어깨를 적당히 두드리면서 말했다.
“뭐, 어쨌든 일은 성공했고 목숨을 챙겼으니 이제 돈만 받아 챙기면 되는거 아니겠어? 빨리 가서 제니한테 맡겨놓은 돈을 받아오자고.”
“먼저 가봐.”
“어?”
“일단 쉬러 가야겠군. 대금은 나중에 찾을테니 제니한테 말이나 전해줘.”
연초를 연달아 피다보니 감각이 둔해져서 아직까지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필터를 쥐고있는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대로 제니의 술집에 들러 돈을 들고 오는길에 기절하면 그것대로 최악의 상황이 따로 없다.
돈을 나중에 찾더라도 지금은 일단 휴식을 취해야 했다.
살짝 당황한 표정의 딜런을 놔두고 레녹은 먼저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가 머무는 호텔이 위치한 곳은 34구역. 공장이 위치한 42구역에서 걸어가기에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다.
적당히 멀쩡한 거리로 나가서 싸구려 택시를 잡아탄 레녹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시트에 푹 뉘였다.
“후우….”
날이 어둡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광고판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레녹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공장의 폭발을 보고 나타난 이벨린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것이다.
의뢰를 받은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험이 있었고, 지금의 그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강자였다.
레녹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간절함과 노력은, 그 순간 결과와는 온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
이래서는 안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쌓아왔던 삶을 향한 의지.
생을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했던 간절함은 온전히 그의 힘과 자산이 되어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되어야 한다.
더 강해져야 했다.
더 발버둥치고, 더 애원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살아남고 싶다.
그 어떤 고난과 위험속에서도 버텨낼만한 힘과 의지가 필요했다.
레녹은 스스로에게 그럴만한 재능과 각오가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긴 사이 택시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방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샤워를 마친 레녹은 침대에 누워서 그대로 수면제를 하나 씹어먹었다.
물과 함께 삼키는 대신 씹어먹으면 약효가 빠르게 나타난다는것을 깨달은 뒤론 쭉 그래오고 있다.
낡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숫자를 세던 레녹의 표정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약을 먹었는데도 바로 잠이 오지 않는다.
“…벌써 내성이 생긴건가?”
불면증을 무시하고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한지 한달이 넘었다. 아직 내성이 생길만큼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너무 값싼 제품을 썼기 때문일까.
지금까지는 49구역 근처에서 파는 싸구려 수면제로도 충분했지만, 좀 더 효과가 좋은 약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4천만 셀. 돈을 받고 난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녹초가 된 몸을 달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레녹은 어느 순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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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웁…!”
이제는 익숙하게 내용물을 비워낸 레녹은 퀭한 눈으로 잡고있던 변기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속을 씻어내고 세면을 마친 뒤 바닥을 기다시피해서 침대로 돌아온다.
충분한 육체단련없이 마력으로 신체능력을 끌어올린 결과다.
거기에 [마나중독자]의 후유증까지 더해지자 정말로 숨을 쉬는것조차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후우….”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녹이 멍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블라인드가 쳐진 창 사이로 뜨거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샬로테의 공장을 폭파시키고 난 뒤로 열흘이 지났다.
그 시간 내내 레녹은 연달아 약을 피우고 몸을 축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아무리 과수원에서 부작용이 적은 약을 구했다고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몸을 쥐어짜서 힘을 발휘하는 부류의 제품이다.
마력과 체력을 거덜내면서 목숨을 부지한 만큼 그 반동도 상당했다.
일주일을 앓아눕고 사흘을 꼬박 지샌 뒤에야 레녹은 스스로의 몸이 조금씩 괜찮아지는것을 깨달았다.
“공장에서 탈출할때는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환경에서 더 질이 안좋은 약을 피우면서 버틴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때 몸을 무리하게 축냈기 때문에 지금 약의 반동이 더 심하게 찾아오는 걸지도 몰랐다.
“밥을 해먹어야 하는데.”
시장에서 사온 식재료들은 처음 요리를 했던 날을 제외하면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채로 냉장고에 쌓여있을뿐.
10일동안 그가 먹은것이라고는 구석에 쌓아놓은 보존식품이 전부.
병약한 몸을 케어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해볼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
일단 돈이라도 받아와야겠지.
레녹은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호텔을 나서 49구역으로 향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다. 어느새 레녹은 이 놀랍도록 허약한 스스로의 육체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마력을 일으켜 얼굴을 바꾸고 술집으로 내려가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제니가 그를 보고 씩 웃었다.
“우리 소중한 고객님이 오셨군. 열흘동안 뭘 하다 이제 온거야?”
“일이 좀 있었다.”
“아하, 죽어버렸으면 성공보수는 이쪽에서 챙길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네.”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도 이번 의뢰에서 레녹이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정도로 죽을만큼 아픈 사람은 아니야.”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면 파리한 안색을 대번에 들켰겠지만, 레녹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직 그녀는 레녹이 연초를 피우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만큼 약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사실을 굳이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제니의 맞은 편에 앉아서 위스키 한잔을 건네받고는 물었다.
“딜런은?”
“일이 끝난 그날 바로 찾아왔지. 너한테 4천만을 넘기기로 했다던데.”
레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가 지폐다발을 꺼내서 바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바리츠 쪽에서 추가수당을 얹어줬으니 확인해봐. 수수료는 딜런에게 걸어놨으니 걱정말고.”
제니의 말을 들은 레녹은 두툼하기 짝이없는 지폐다발을 들고 숫자를 세보기 시작했다.
100만 셀 짜리 지폐로 60장. 6000만 셀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딜런에게 돌아갈 돈까지 생각하면 적지않은 돈을 수당으로 얹어준 셈이지만, 목숨값으로는 턱도 없다. 발리츠 정도의 공룡기업 정도 되니까 이런 수당도 나오는 것이겠지.
거리의 밑바닥을 구르는 프리랜서들의 목숨값이 떨이에 가까운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빠르게 감정을 추스린 레녹은 그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에 제니를 올려다보았다.
“100만 셀 지폐라고?”
레녹의 물가 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만큼 거액의 화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