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16
약먹는 천재마법사 216화
누설
3층으로 이루어진 제니의 술집 건물.
겉으로 보기에는 지하 1층에 있는 바를 제외하고는 숨겨진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바 안쪽에서 사무실로 올라가는 통로의 반대편.
벽면에 걸려 있는 낡은 거울의 뒷면을 들추고 나면 지하수로로 통하는 비상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이크 사의 도움을 받아서 그쪽이 가진 공장부지를 여러 번 경유했어. 최종적으로는 49구역에 가둬두기는 했지만…… 물리적인 방식으로 놈의 위치가 발각당할 일은 없을 거야.”
수로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걷다 희미한 비상등이 깜박이는 관리실 앞에서 멈춰선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에 기대고 있던 대머리 거한 아이크가 하품을 하다가 그녀를 보고 씩 웃었다.
“빨리도 왔군.”
“안쪽은?”
“킬리안이 먼저 들어가 있어. 그 친구 알고 보니 굉장히 야성적이던데. 나도 괜히 부러워지더군.”
“…….”
뭐, 외견은 물론이고 애초에 성격부터 반쯤 양아치나 다름없는 남자다.
레녹을 일단 제니를 올려보내고 버려진 관리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기본적으로 수로 관리시설을 조작하던 관리실과 유리창 안쪽에 버려진 파이프들이 놓인 창고가 있었다.
창고 안쪽에 마련된 의자에, 사지가 단단히 묶인 채로 고개를 푹 숙인 기라드가 앉아 있었다.
그의 팔다리에 묶여 있는 것은 마력사용자들을 위해 특수제작된 구속구로 혈관을 파고들면서 사지를 조여 마력의 작용에 간섭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오래 착용하고 있다가는 손발이 괴사하면서 삽시간에 사지를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십상이지만, 강력한 실력자를 살려둔 채로 묶어두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선택이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따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킬리안이 레녹을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레녹이 그의 옆에 서면서 물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징조는 없나?”
“없어. 의식을 차린 것 같기는 한데 딱히 반항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근데 저게 정말 맞는 거냐?”
킬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들어 기라드의 어깨에 꽃혀 있는 주사기를 가리켰다.
“네 말대로 대충 마력 사용자에게 먹히는 재생력 증강 앰플을 하나 꼽아주기는 했는데, 굳이 뒤져가는 놈을 치료해 줄 이유가 없잖아.”
“상처를 입을수록 괴력을 내는 성질의 마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괜히 힘쓸 일을 만드느니, 치료해놓고 입을 열게 만드는 게 편해.”
“허, 믿기 힘들군. 그런 괴악한 방식의 성질변화가 존재한다니…….”
킬리안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레녹은 그 말의 뒷면에서 다른 것을 읽고 고개를 돌렸다.
“마력의 성질변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동안 개인적인 수련을 거듭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분명 킬리안은 레녹과 함께 시거 뱅 갱단을 처리할 때만 하더라도 그런 종류의 경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레녹과의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알아들을 정도라면 그 역시 꽤 많은 경험을 쌓아온 모양이었다.
“뭐, 그렇지. 이 바닥에서 일하려니까 절로 귀에 들어오는 정보들도 있고…… 거기다 내 고향에서 익힌 기술들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웨어울프들이 사용하는 증강기술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는 어렵지만, 비슷해. 물론 내가 그만한 경지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건을 걸고 한계를 뛰어넘는 근본적인 원리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
킬리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런 식으로 자기 파멸을 추구하는 방식은 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저런 식으로라도 괴물이 되어야 하는 건가.”
“그럴 필요는 없을 거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기라드 같은 경우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가 맞아.”
레녹이 창고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마력의 성질변화는 6레벨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점일 뿐, 원래라면 자연스럽게 흘러 지나가야 할 수순이지.”
“…….”
“그런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자신에게 제약이나 조건을 걸어서 마력의 성질변화를 비틀린 방식으로 재현하면 이와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는 거다.”
“너 같은 괴물 자식이나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지…….”
킬리안이 구시렁거렸지만, 레녹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기라드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놈처럼 부상당하는 정도에 따라서 근력을 증폭시키는 방식은 이질적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력을 자신의 상승욕구나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또 발현하는 방식도 일반적으로 유사한 방향을 띄지. 그럼에도 주력이나 정신력과 같은 다른 에너지원이 아니라 마력만으로 이런 식의 비틀린 성질변화를 이뤄냈다는 건…….”
그 순간,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라드가 번개처럼 레녹의 목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따아아악!!
“……자신이라는 내면을 이루는 기본적인 심상 자체가 비틀려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력으로 증폭시킨 기라드의 치악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그 시도조차 레녹의 실드 앞에 가로막히고 허무하게 앞니가 아작난다.
반으로 부러진 이빨을 뱉으며 기라드가 웃었다.
“들어오면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아주 철학자가 따로 없군. 뭐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라도 함께 해드리면 될까?”
입안이 피범벅으로 변했는데도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 듯한 그 얼굴에 킬리안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쁠 건 없지.”
레녹이 희미하게 마주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결국 나 자신을 마주 보는 것이 선행될 수밖에 없거든. 너처럼 뒤틀린 인간과 대면하는 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거기에 같이 휩쓸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그 태연한 대꾸에 처음으로 기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레녹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라드의 목에 느슨하게 걸려 있던 염주를 회수해서 손목에 걸었다.
자연스럽게 레녹의 손목에 맞춰져 줄어드는 염주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기라드가 음침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히히히힛!!! 이래서 마법사랑 오래 상대해 주면 안 되는 건데. 병신같이 또 실수했어.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법구를 지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야아.”
확실히 그의 말은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 기라드는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라도 마력의 성질변화를 이뤄낸 6레벨의 강자.
그럼에도 그가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생포당한 것은, 레녹이 정토신해진언과 같은 강력한 구속법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시킨 것은 레녹의 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만큼 강력한 아티팩트가 아니었다면 기라드가 이런 꼴이 되는 일도 없었을 터.
“그만한 물건이 시장에 나왔다면 틀림없이 이쪽에서도 난리가 났을 텐데, 아무런 낌새가 없었다 이거지……. 발칸 내부에서 움직이던 물건이 아니군. 도시 밖에서 가져온 귀물이야.”
기라드의 추측은 날카로웠지만 레녹은 무시하고 그의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네 입으로 듣고 싶은 말은 그리 많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정보만 깔끔하게 전달해 주면, 목숨을 부지하는 선에서 너를 놓아줄 수도 있다.”
“아하하하하핫!!!”
레녹의 말에 폭소를 터트린 기라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짙은 눈화장이 지워지면서 이상한 몰골이 되었지만, 우스꽝스럽기보다는 기괴하기만 했다.
“당신에게 들었던 농담 중에서는 가장 웃긴 말이었어.”
“첫 번째. 기라드 너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이사진 간부들의 명단과 거주지 정보.”
“마음에 안 드는 놈 한둘 정도는 당신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겠군.”
기라드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레녹이 두번째 손가락을 폈다.
“두 번째. 카르텔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네 명의 사장단. 버질을 비롯한 네 명의 신상정보.”
“미친 새끼세요?”
기라드가 참지 못하고 낄낄 웃었다.
“진지하게, 정말 카르텔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거였어?”
“…….”
“사장단은 족히 수십 년전부터 회장님을 따르던 창업공신들이야. 하나같이 세월을 뛰어넘은 괴물들인 데다, 자기 자신을 마주 보는데 성공한 사람들뿐이라고. 사장급 간부가 마지막으로 실전에 투입된 게 족히 10년 전의 일인데……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길쭉하게 휘어진 기라드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넘어가자고.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반 당신이라는 비대칭전력을 이용해서 우리와 사업구조를 타협하는 일뿐이라는 걸. 사실상 그걸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것 아니었나?”
틀린 말은 아니다.
레녹이 아무리 강력한 재능과 오성을 앞세워 상식 이상의 성장을 이룩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정말로 규격을 뛰어넘는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
사장급 간부였던 버질조차 레녹이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카르텔의 정점에 서 있던 회장의 레벨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현실적으로 레녹이 카르텔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만한 괴물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조직이나 에이전트와 같은 세력들의 견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 틈을 노려서 이쪽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뿐.
하지만 레녹은 기라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우웅!!
“마법사다운 방식이네.”
기라드가 웃었다.
“지배력으로 찍어 눌러보겠다는 거야? 유감이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는…….”
자신만만하게 웃던 기라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레녹의 마력이 기라드의 체내를 거침없이 파고들면서 입자 단위로 마력을 장악해나가고, 끝내 골수까지 그 마력을 뻗었다.
“끄으으, 으윽……!!!”
여유롭게 대꾸하던 아까와는 달리 전신에 핏대를 세워가며 기라드가 발버둥쳤지만, 레녹은 그의 체내에 흐르는 마력을 역류시키는 것으로 대답했다.
우두두둑!!
“!!!!!”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라드의 오공에서 새카만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일반적으로는 마력의 흐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는 일은 없다.
하지만 레녹은 자신의 마력으로 기라드의 마력의 흐름을 잡아 세우면서 내부에서 강제로 마력끼리 충돌을 일으켜 소규모 폭발을 일으켜 버린 것이다.
이올라로부터 습득한 정지계 마안의 작동원리.
마안을 발현하지 않아도 마력조작능력으로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일은 레녹에게 어렵지 않다.
마력사용자에게 어떻게 해야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을 안겨줄 수 있는지, 레녹은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체내에서 발생한 막대한 압력이 내장을 짓누르고 터트리면서 순식간에 온 몸의 혈관을 걸레처럼 쥐어짠다.
신체기능이 망가지면서 몸을 구성하는 연료가 진액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캬, 하아아……!!”
이 정도로 부상을 입은 순간 기라드의 체내에서 마력의 성질변화로 인한 비약적인 신체능력의 증강이 이뤄져야 할 터.
당장이라도 구속구를 박살 내고 레녹에게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그는 힘없이 떨기만 할 뿐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기라드의 심정을 훤히 내다보고 있다는 것처럼 레녹이 중얼거렸다.
“못하겠지?”
“…….”
“체내에서 마력 자체를 터트려버렸으니 성질변화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지. 네가 가진 의념의 축이 얼마나 비틀려 있는지 몰라도, 결국 연료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머리칼을 잡아 들어 올린 레녹이 기라드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타협에 들어간 시점에서 승리를 논하는 게 아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쿨럭!”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발악하고, 또 노력해야만 타협이라도 할 수 있는 거야. 지금 널 여기서 죽여버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카르텔의 협력사업체들을 줄줄이 박살 내면서 레녹은 카르텔이 얼마나 이 거리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는지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마법사 하나, 그리고 브로커 하나가 함께 시작한 사업 하나만으로는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까지도.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고된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목표만큼은 정확하게 상대를 겨누고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최소한 그 아래 위치한 열매 정도는 쟁취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제서야 레녹이 정말로 자신을 죽여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기라드가 미친듯이 웃었다.
“크흐흐흐흐흐!!!!”
뚜둑!! 뚝!! 뚜두두두둑!!
손가락을 미친듯이 꺾으면서 당장이라도 구속구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발버둥친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몰아붙여서 육체능력의 증폭을 꾀하는 것과 동시에, 손을 통째로 뭉개서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발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격렬한 움직임을 멀리서 지켜보던 킬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레녹은 싸늘한 얼굴로 그 마지막 발악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섯 손가락과 손목, 팔목과 팔다리의 관절을 모두 꺾어가면서 구속구를 벗어나려던 기라드의 움직임이 천천히 사그라든다.
그의 몸을 불태우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마력마저 바닥나고, 온전히 저항의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확인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이고.
휙!!
그대로 미련없이 등을 돌려서 창고 밖으로 나섰다.
“…….?”
당황한 킬리안이 재빨리 다른 사람을 불러서 기라드를 감시하게 두고 레녹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큼 돌아 술집으로 향하는 레녹을 따라잡은 킬리안이 물었다.
“반, 저거 안죽여도 되겠어?”
“입을 열었는데 뭐하러?”
“입을 열었다고……? 언제?”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는 킬리안의 말에 레녹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카르텔정 도 되는 조직의 고위간부라면 거의 틀림없이 기밀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몸속에 품고 다니겠지. 놈의 체내를 마력으로 헤집을 때 느껴졌던 이질적인 마력과 혀에 박혀 있던 문신을 생각하면, 아마 위치추적과 기밀누설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특정한 ‘조치’가 몸속에 있는 거야.”
위치 추적 정도는 레녹이 사용했던 정토신해진언과 이 근방에 설치해 둔 결계로 막아낼 수 있다고 해도, 기밀누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심문을 했던 거냐?”
“기라드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능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거기다 기라드의 언동을 보면 조직과 자신을 별개로 놓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식의 협박이 먹힐 확률은 꽤 높았지.”
한 조직의 이사진에 속하는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레녹을 상대하려고 나타난 것.
그리고 회장이 자신의 얼굴도 모를지도 모른다는 과감한 발언과 역으로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초탈한 태도는 그의 성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만든다.
그 기괴한 취향에 걸맞게 상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성격.
조직에 크게 정을 두지 않고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로 상호간의 이득을 판단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본심을 가리고 적당하게 압박을 넣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조직의 정보를 누설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기라드는 방금 레녹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야, 레녹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방식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방금 놈이 마지막으로 한 발악은 내 발언과는 타이밍이 맞지 않은 뜬금없는 감이 있었고, 놈의 몸에 남겨놓았던 마력과 비교하면 꽤 어설프고 길었지. 결정적으로 관절을 모두 꺾어가면서 냈던 소리에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제서야 레녹의 말을 알아들은 킬리안이 입을 쩍 벌렸다.
“그, 그럼 놈이 헤링턴 부호를 사용해서 몰래 정보를 전달했다는 거냐?”
“…….”
여기서는 모스 부호와 같은 암호체계를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건가.
어쨌든 킬리안의 말대로 기라드가 선택한 것은 소리를 이용한 암호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협상에 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으로 정보를 불지 않았다는 식으로 발뺌이 가능한 데다, 관절을 꺾어가면서 발악하려고 하던 것뿐이었다는 식의 보여주기가 우선되기 때문.
당장 레녹보다 훨씬 더 오감이 날카로운 킬리안조차 그 맹렬한 기세에 눈이 팔려서 정작 기라드가 내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라드는 레녹이라면 그가 내는 소리의 패턴을 포착하고, 그 소리를 모조리 암기해서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하에 이런 대담한 정보누설을 감행했던 것이다.
“소리로 만들어진 암호문. 혹은 그 패턴만 알고 있다면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암호문에 대입해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레녹은 곧바로 제니를 대동하고 사무실에 위치한 컴퓨터를 통해 암기한 소리 패턴을 기록한 뒤, 그대로 킬리안이 말했던 헤링턴 부호로 해독했다.
“끝났다.”
“14일에 사업체 간의 회동. 16일에는 주주회의, 17일에는 89 사업체 신사옥 시연회……”
멍하니 해독된 암호문을 중얼거리던 제니가 말했다.
“맙소사, 이건 카르텔의 사업체들이 단체로 참여하는 행사일정과 장소잖아. 미친 새끼…….”
* * *
“기라드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통신 너머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민머리의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햇빛에 그을린듯한 갈색의 피부.
깍지를 끼는 것과 함께 두텁고 투박한 손가락에 잔뜩 끼워진 화려한 반지와 팔찌들이 찰칵인다.
[전투가 끝난 그 자리에서 생명반응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구속계열 아티팩트. 그것도 상당한 상급의 물건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술식을 이용한 추적은 불가능해 보입니다.]남자는 대꾸하는 대신 홀로그램 너머로 떠오른 경위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이크의 도움을 받아 외곽구역을 여러번 경유했다…… 그럼 해야 할 일은 간단하군.”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눈앞에서 홀로그램이 번뜩였다.
“처형부대를 움직여야겠다. 아비드에게 지령을 하달해다오.”
[……욘센 상무이사는 지금 다른 업무를 맡고 있을 텐데 말입니까?]“내 이름을 대면 적당히 알아들을 거다. 한시가 급한 일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문득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문신과 장신구로 치장된 그 몸은, 영욕으로 얼룩졌던 화려한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신을 새긴 피부는 주름지고, 그의 소중한 보물들은 조금씩 빛을 바래간다.
한평생을 바쳐온 충성을 저버리는데 필요한 시간은 얼마인가?
불멸이라는 허황된 희망에 매달릴 생각은 없다, 다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남자가 눈을 감았다.
“카르텔의 대표이사, 파르덴 맥퀸이 직접 승인하는 일이다. 마법사 반에게 사로잡힌 기라드 오제트를 추적 및 신병확보,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영원히 입을 막아버려도 좋다.
협력사업체들을 관리하던 기라드의 권한을 빌리기 위해서 그를 이번 일에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남자는 애초에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항상 재밌어 보인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고 있지만, 정작 판의 균형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배를 갈아탈 놈이었다.
이런 순간을 대비해서 놈의 몸속에 박아넣은 기아스가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직 회장님에게 자신의 배신을 들켜서는 안된다.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