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25
약먹는 천재마법사 225화
담판(4)
“…….”
“칩거하고 있던 당신이 직접 나섰다는 건, 이번 일을 수습할 사람이 정해졌다는 거군요?”
기라드는 버질의 얼굴을 보고도 주눅이 드는 일 없이 평온했다.
이미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까지도.
“이거 참…… 그 마법사 머리가 너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냥 적당히 정보를 흘려내면서 시간을 끌 생각이었는데, 조직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까지 인지하고 그걸 역으로 거래에 써먹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건데 말입니다.”
“시답잖은 연기는 그만두지. 그런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까.”
버질이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넌 반과 상대하고 난 뒤에야 줄을 잘못 탔다는 걸 인지하고, 곧바로 노선을 갈아탄 거야. 네 상급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훨씬 커질 테고, 책임 소지가 아래쪽까지 번질 거라는 걸 예측했을 텐데?”
“…….”
“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상무이사 아비드 로웰이 이끌던 예하부대가 단 한 사람의 손에 궤멸당했으니…… 그 남자는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하는 게 아니야. 마법사로서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하하하하하!!”
빤히 버질의 얼굴을 쳐다보던 기라드가 뜬금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멍한 표정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아오고, 두 눈동자에 희열이 가득 들어찬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그 모습이 무색하게 본래의 광기를 되찾은 기라드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버질을 올려다본 기라드가 입꼬리를 주륵 끌어올렸다.
“다들 머리가 너무 좋아요. 뭐, 나야 말이 잘 통해서 편하긴 하지만…… 이거 무서워서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겠어요?”
“…….”
“뭐,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군요.”
기라드가 물었다.
“살려주실 겁니까?”
따지자면 반에게 산채로 붙잡힌 순간부터 기라드의 목숨은 존재하지 않던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한 채로 카르텔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기라드가 주위 상황을 잘 살피고 재빠르게 행동했기 때문.
“재밌는 놈이군. 너처럼 곱게 미친놈도 한 명쯤은 필요한 법이지……”
버질이 웃었다.
“내 기준으로는 합격이지만…… 그 전에 확답을 받아야겠다.”
“무슨 확답을?”
“회장님을 배신한 반역자를 잡아내는데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이지.”
그 말과 함께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으며 날카로운 살기가 기라드의 정수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네 직속 상사, 1 사장 맥퀸이 카르텔을 배신하고 텐 카운츠와 결탁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40번대 구역의 협력사업체를 관리하던 너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
믿고 싶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나온 모든 정황증거가 단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카르텔의 창설과 함께하던 창업공신이자, 네 명의 사장단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첫 번째 사장.
회장의 부재시 전권을 대리하는 부회장의 지위를 역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카르텔의 최정예 무력부대를 직접 관할하는 권한을 거머쥔 원로중의 원로.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회장을 모시고 충성을 바쳐왔던 남자가 조직을 배신하고 등을 돌렸다.
굳이 마법사 반을 건드려서 혼란을 자초하고
실로 오랜만에 나타난 대적자에게 시선이 쏠린 사이 내부의 비자금을 빼돌렸으며.
기라드를 비롯한 휘하 이사들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일을 바로잡으려 했고.
종국에는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한 단 한 사람.
“일을 수습하겠다고 나섰던게 그런 뜻이었단 말이지…… 맥퀸, 가만두지 않겠다.”
버질의 두 눈이 선글라서 너머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기라드는 그 모습을 보고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그럼 슬슬 이 구속구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족히 일주일을 넘게 여기저기 묶여만 있었더니 관절이 썩어버릴 것 같아요.”
“…….”
“……버질 님?”
“일단 내가 생각한 수용조건은 여기까지고.”
버질은 그렇게 말하며 기라드의 수갑을 쥐고 길쭉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회장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들어봐야겠지.”
그 말을 듣자마자 시큰둥하던 기라드의 안색이 싹 변했다.
고분고분하게 버질을 따라 걷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회, 회, 회장님 말입니까?”
“그래. 회장님이 너를 직접 보고 싶어하신다.”
“자, 잠깐만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왜 갑자기 제가 회장님을…….”
“조직 내부의 배신자. 그것도 주동자의 처분을 결정하는 일이다.”
버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라드를 질질 끌고 걸으며 대꾸했다.
“심지어 그 주동자가 맥퀸이라면 회장님께서 오랜 외유를 끝내고 돌아오시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나?”
“나중에, 나중에 뵙죠……. 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실 텐데 왜 굳이 저를 보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살아 돌아온 기백은 온데간데없이, 희미한 공포에 질린 기라드의 모습에 버질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말은 됐으니,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제야 기라드는 이 넓고 긴 복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고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늦었다.
마치 성문처럼 웅장한 아치형의 문이 두 사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돌로 만들어진 문에는 온갖 형이상학적인 모양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조각 하나하나를 고른 심미안은 이미 범인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니리라.
앉은 자리에서 족히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
이 거대한 도시에서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발칸의 그림자 위에 군림하던 노괴.
카르텔의 회장,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의 집무실이 기라드의 눈 앞에 있었다.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두 사람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버질과 기라드는 그녀의 심처 안에 있었으니까.
수십년 동안 펼쳐지지 않은 채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책의 무덤, 그 위로 오롯이 솟아오른 황금의 계단.
그 위에 놓인 화려한 옥좌에 앉은 여자와 시선을 마주친 기라드가 곧바로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쿠우웅!!
“기라드 오제트가 회장님을 뵙습니다!!!”
올리비에라는 그 말을 무시하고 옆에 서 있던 버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름이 뭐라고?]입을 열지도 않았다. 단지 의지에 맞춰서 공명하는 마력이 그녀의 의사를 대변했을 뿐.
버질이 대답했다.
“기라드. 기라드 오제트입니다. 협력사업체들의 경영대리인들 중 하나고, 인사과에서는 그간의 공적을 고려해 이사진으로 편입되는 식으로 재계약을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력은 이미 진작에 검증되었지만, 조직에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승진이 늦어진 편입니다.”
“…….”
사장의 입으로 자신의 인사고과에 대해 직접적으로 듣는 것만큼 가슴떨리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기라드는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할 만큼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선천적인 심상을 비틀어가면서, 온갖 발악을 하면서 겨우 마력의 성질변화를 성공시키고 6레벨에 도달한 그이기에 알 수 있다.
지금 그가 마주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이미 종으로서의 생명이라는 굴레를 한꺼풀 벗어던지고 진정으로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일궈낸 초인.
남들과는 전혀 다른 시간선에 올라타, 까마득하게 먼 풍경을 내다보는 시대의 거인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올리비에라의 눈동자가 기라드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찬연한 무지갯빛의 광채가 그녀의 두 눈동자 안에서 아름답게 흘러넘쳤다.
기라드는 그저 멍하니 그 광채 속에서 시선을 빼앗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그저 그녀는 기라드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볼 뿐’.
그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버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칠채보(七債寶)의 마안……. 언제 봐도 소름 끼치는군.’
시선에 담긴 일곱 가지 광채. 그것은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가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술식의 총체나 다름없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술식내성이 없는 이들이라면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정보량에 머리가 터져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기라드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그 수준을 짐작해 낼 증거.
하지만 내면이 살심으로 비틀린 기라드조차 그 눈동자를 오래 쳐다볼수는 없었다.
“아그그극……!!”
쿠우웅!!
거품을 물고 덜덜거리며 쓰러진 기라드의 모습을 본 올리비에라가 그제서야 피식 웃으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아마 수십 년 전에 흥미로운 실험체 하나를 잡아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조정을 시켰던 것 같은데……. 성질변화를 깨우치기 위한 기아스를 강제로 부여하는 방식이었던가.]버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흐린 기억속에서 굳이 이올라라는 또 다른 표본을 떠올리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뭐, 아무래도 좋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 일어서거라.]“허, 어헉……!!”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기라드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제대로 그녀를 올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네 기억을 들여다보다보니, 그 벌레같은 인생 속에서 다소 특이한 마법사가 하나 보이더구나.]갑작스러운 선언에서 버질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역시, 올리비에라 정도 되는 술사가 그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애당초 기라드를 이곳으로 불러낸 것부터가,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49구역의 마법사. 반이라는 남자에 대해 네가 보고 느낀 것을 모조리 들려다오. 네 기억으로 들여다보는 대신, 그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 * *
-네가 요청했던 1사장 파르덴 맥퀸의 신상정보를 확보했어.
이벨린이 무심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말이,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장급 간부 전원의 신상정보를 넘겨주는 건 기밀상 너무 위험해. 그나마 히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1사장의 정보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을 거야.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휴대폰을 어깨에 끼우고 손을 놀리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아마 이번 일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거야.”
발칸의 번화가에 세워진 시립중앙도서관.
이제는 완전히 레녹과 아리스가 대학 업무를 보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는 도서관의 복도에서, 레녹은 손에 든 답안지를 빠르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 있었던 원소학부의 중간고사. 대학의 모든 학생들이 빠짐없이 참여하는 큰 행사에서 레녹과 같은 조교수들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덕분에 레녹은 아리스가 들고 온 시험지 수백 장을 그녀와 함께 나눠서 채점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영역에 대한 토의가 중단된 셈이지만 레녹에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레녹 본인이 어떤 성취를 얻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아리스에게는 조언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결국 아무리 도와주고 끌어준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한걸음을 내딛는 것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
같은 마법사이기에, 그리고 같은 풍경을 지나쳐왔기에 레녹은 그것을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약선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라다.
약의 부작용을 이용해서 레녹이 얻어낸 기연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새롭게 재편시켜주었으니.
-오늘 이후로는 아마 당분간 연락이 어려울거야.
“에이전트 쪽도 많이 바쁜가 보군.”
-최근 들어서 이쪽에 할당되는 업무 범위가 급격하게 넓어지고 있어. 너무 선을 넘는 일은 내 선에서 쳐내고 있지만, 그만큼 거대도시 바깥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야.
“…….”
-반 네가 도시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흥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르텔과의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거야. 발칸 시의회가 외부에 시선을 돌리고 싶어 한다면, 일단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부터 싹 정리하고 싶어 할 테니까.
“글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지만…….”
레녹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쥐고 있던 빨간 펜으로 시험지에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
아리스가 같이 보라면서 쥐여준 답안지는 어느새 뒷전.
시험지 아래쪽에 다섯 줄이 넘는 채점 근거와 해설을 달아주는 사이, 이벨린이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혼자서 카르텔의 처형부대를 쓸어버렸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는데, 이상한 겸손을 떠는것 같네.
“운이 좋았지.”
-……처형부대의 수장이자 상무이사였던 아비드 욘센은 지하세계의 쾌락살인마들 중에서도 잘 알려진 마법사야. 그 정도의 술사를 전장으로 불러내서 일대일로 손을 섞는 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죽여놓고는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내가 아는 술사들이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데.
“…….”
-뭐, 좋아. 그날 내가 구해준 애송이 마법사가, 사실 힘을 숨기고 있던 비전마법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니까. 중요한 건 카르텔과의 일을 잘 마무리 짓는 거라는 거, 잊지 마.
술집에다가 채소 몇 박스 보내놨으니까 제대로 수령하는 거 잊지 말고, 하며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던 레녹이 헛웃음을 지었다.
웬일로 그 지긋지긋한 야채 이야기를 듣지 않나 싶었더니,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있었던 모양.
하지만 방금 이벨린과 나눴던 대화의 의미 정도는 기억 속에 담아둘 만하다.
이벨린은 처음 공장에서 크로켄에게 죽을 뻔했던 레녹의 모습과 지금 레녹의 위상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관계자들 중 하나.
그녀 정도의 고결한 궁사라면, 지금 레녹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와 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레녹의 실력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대신, 야채 따위의 이야기로 전화를 끊는 행동거지는…….
‘언젠가 이벨린과도 따로 대화를 해볼 필요가 있겠군.’
흘려 지나쳤던 사소한 말들조차 레녹의 머릿속에서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자치령에서 그리샤와 함께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던 순간, 그녀가 등대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며 예시로 들던 몇몇 인물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칭호가 있던 것을 기억한다.
녹보석의 궁사.
만약 그리샤가 말했던 조력자가, 레녹이 생각하는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면…….
최악의 경우, 에반과 반의 신분을 단 한 사람을 상대로 공유해야 할 수도 있다.
그 상황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 전에, 레녹도 준비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