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81
약먹는 천재마법사 281화
빛과 그림자(2)
이본가의 대리인이 교단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윌터와 같은 외부인이 성채 고위 인사들에게 대접받기 위한 방법이라면, 결국 8가문의 대리인 신분이 가장 적합했을 테니.
이본가주와 손을 잡은 것과는 별개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가장 좋은 명분이었을 것이다.
“거대도시에는 참 실력 있는 술사분들이 많군요. 부럽습니다.”
윌터가 웃었다.
“얼마 전에는 웬 정령술사를 하나 만났는데, 솜씨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역시 세상은 넓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이 도시에 걸음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업의 일환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깃발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윌터는 레녹을 향해 달려들기는커녕,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그에게서는 어떤 종류의 살기나 의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싸울 생각이 없다면 팔찌를 벗고 내려가는 게 나을 텐데.”
레녹이 말했다.
“계속 떠들기만 할 생각인가?”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무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윌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리전이 이렇게 팽팽한 양상으로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
“다른 가문들 구경꾼으로 세워두고, 일원을 내세워 대리전의 의식을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는데……. 외부인 하나가 가문들을 규합해서 명분 싸움을 걸어오는 바람이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지 뭡니까.”
윌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뻔했다. 여기까지 상황이 흘러온 것 자체가 상정하지 않았던 결과.
원래라면 제대로 뭉치지도 못한 팔둔과 삼영, 오륜을 상대로 형식적인 대리전을 거두고 곧바로 채주 자리를 얻어내야 했을 테니까.
서로 다른 목적과 동기를 가진 가문들을 주무르고 휘둘러 새롭게 판을 꾸린 것은 오로지 레녹의 몫이다.
명분과 자격, 그리고 힘의 증명이라는 그 모든 절차를 다른 가문들의 견제가 들어오기도 전에 해치우고 판을 뒤집었다.
3 대 1로 몰린 대리전의 열세를 혼자 힘만으로 뒤집고 대장전까지 끌고 오지 않았다면, 윌터가 직접 나서야 할 일조차 없었겠지.
“그 때문에 각 가문의 대리인들의 전력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이런 화를 불러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쓰게 웃은 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패착이군요. 그렇기에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거래라…….”
놀라운 일이다. 설마 이 시점까지 와서 본색을 드러내기는커녕, 이쪽을 회유하려 들 줄이야.
그건 아마 레녹을 상대로 두고 원래 계획했던 일들이 제대로 진행되기 힘들 거라는 내부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여기저기 귀동냥을 다녀보니, 바깥에서는 이미 유명하신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계시더군요.”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윌터가 빠르게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중에서도 지명의뢰의 보상으로, 시간계열의 유물이나 술식에 대한 단서를 요구하고 계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아마 이 성채에 들어오신 목적도 그것이겠지요?”
그는 마치 레녹이 원하는 목적 따위는 훤히 다 알고 있다는 것인 양 너그러운 미소를 띠면서 손을 내밀었다.
“저희에게 협력을 해주신다면, 일원가의 대리인으로서 특별히 경매장이 열리기 전에 입찰될 상품들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개 중에는 당신이 원하시는 시간계열의 아티팩트도 약간이나마 존재하고 있죠.”
“…….”
“어떻습니까. 고작 당장의 전투를 포기하는 대가로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레녹은 윌터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신, 가만히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했다.
바로 지금 이 윌터의 대응 자체가 일방적인 정보 우위가 가져다주는 특권의 풍경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녹이 에반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이미 유적지에 관한 정보를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윌터는 지금처럼 레녹을 회유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을까?
두 개의 신분을 완벽하게 구분하고 철저하게 알리바이를 세워 움직여왔기에, 교단의 주교조차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부질없는 공수표를 던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조차 지킬 생각이 없는 허황된 약속들을.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단가가 많이 안 맞는데.”
레녹이 웃었다.
“그 제안을 들어주기에는 내 신앙이 많이 부족하군.”
파지지지직……!!
레녹의 발밑에서 피어오른 새파란 전격이 그대로 윌터를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지상에서 튀어 오른 벼락의 폭격에 순식간에 지축이 흔들리고 사방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마지막 대리전이 시작되었다 생각한 관중들의 격한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다른 가주들의 표정이 크게 일변했다.
레녹은 그런 반응은 일체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안개처럼 퍼져 나가는 흙먼지 속에서 섬뜩하게 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처음부터 내가 교단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
“날 가지고 놀다니……. 흐흐, 삼영가주의 능력이 예상 이상이었던 모양이군요. 뭐, 좋아요.”
폭심지의 중심에서 걸어 나온 윌터의 팔이 힘없이 덜렁거린다.
레녹이 쏘아내는 선공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한 모양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고통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덜렁거리는 손목에 걸린 팔찌 안쪽에 손가락을 걸고 힘을 주며 말했다.
“꼭 세상 일이 마음 먹은 대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차르르륵!!
사슬로 만들어진 팔찌가 박살 나는 것과 동시에, 윌터의 팔찌에 걸려있던 빛이 레녹의 팔찌로 전이되며 여덟 개의 사슬고리가 환하게 빛난다.
그것은 대리전의 의식이 끝나고, 비로소 레녹이 모든 가문의 지명권을 손에 쥐었다는 명확한 증거.
하지만 레녹이 오렌을 채주로 지명하려 움직이기도 전에, 윌터가 먼저 움직였다.
성채 주민 수천 명을 수용한 거대한 장원의 외곽부에서 창백한 광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아아아아아앗!!
그 거대한 장원을 통째로 뒤덮은 광채가 거대한 반구형의 결계를 하늘 위에 덧씌우고.
그 결계의 위쪽에서 마치 가위로 오려 붙인 듯한 이질적인 균열이 생겨났다.
쩌어어어업!!!
느닷없이 하늘에 그려진 균열이 천천히 열리는 것과 동시에, 장원에 있던 관객들의 몸에서 나온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희끄무레한 형체가 사람들의 몸에서 배출되어 결계 정상부로 빠져나간다.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목격한 관객들이 대번에 혼란에 빠지고, 순식간에 장원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줘!! 이게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작된 의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크고 본격적이다.
하늘에 열린 균열. 그리고 족히 수천명에 달하는 생명을 빨아들일 기세로 퍼져 나가는 창백한 광채.
라바테논 대학에서도 윌터가 시도했었던 대규모 공간이동술식, ‘암리타의 저울’.
일정한 양의 생명을 대가로 공양하고, 그 대가로 동일한 숫자의 생명을 이동시킨다.
술식의 포착범위는 이 거대한 장원 전체. 족히 수천 명의 사람들을 일시에 공양시키는 규모다.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효율성을 끌어올린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라면 사전에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일 터.
이본가주와 윌터는, 아예 처음부터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 성채 주민들을 전부 몰살시키고 귀도 교단원으로 그 자리를 채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유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창백한 광채의 기둥을 등진 윌터가 웃었다.
“당신이 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겠죠. 이건 모두 당신 때문입니다.”
“채주의 권한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성채의 존속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군.”
레녹이 윌터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물었다.
“그렇게도 그 유적지가 교단에게 중요한 물건인가?”
“……거기까지 알고 계시다면 더 말이 필요 없겠군요.”
윌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단순히 신기한 풍경을 가진 관광지가 아닙니다. 이 세계의 시간선과 괴리된 그 흔적은 틀림없는 구세계의 잔해……. 이 닫혀버린 하늘 아래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계의 ‘균열’이나 다름없는 셈이지요.”
“…….”
“신들과의 소통조차 어려워진 이 세계에서 극히 희귀하기 그지없는 바깥과의 소통창구…….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시겠습니까?”
“아니.”
레녹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건 널 이 자리에서 짓이겨놓고 천천히 들어보도록 하지.”
그 순간,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던 장원의 구석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솟아오른다.
화아아아아!!
아스이를 선봉으로 내세우면서까지 무리하게 장원 곳곳에 은밀하게 깔아두었던 그림자 술식의 잔해.
그 흔적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장원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두터운 흑색의 그림자 파편이 향하는 곳은 사방에서 뻗어나오는 창백한 광채의 기둥을 연결하는 접합부.
마치 이 술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광채를 정면에서 틀어막는 대신, 흑색의 장막을 치고 비스듬이 빗겨내며 결계의 흐름을 어그러뜨린다.
하늘에서 천천히 입을 벌리던 균열이 닫히고, 사람들의 생명을 빨아먹던 흐름마저 끊기기 시작했다.
“……!!!!”
처음으로 윌터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레녹과 오렌이 준비한 안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쿠우우우웅!!
장원의 관객석을 둘러싼 벽이 무너져내리고, 장원 밖으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물건이 아니다.
그림자를 물리적으로 형상화시켜 만들어낸 긴급 통로.
하지만 당장 자신의 생명력을 빼앗기고 있는 성채 주민들에게 크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사, 살았다……!!”
“빨리 도망쳐!!”
“가주님들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막아주실 거다!!”
순식간에 장원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하는 성채 주민들의 모습에 윌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터져 나온 그림자.
이번 일을 주도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윌터의 눈이 재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그림자를 조작하는 마력이 강하게 흘러나오는 위치는 두 군데.
무대 뒤쪽의 빼빼마른 청년.
그리고 8가문의 가주석에 자리하고 있던 삼영가주.
두 사람의 그림자술사가 서로 정신을 집중한 채로 그림자를 조작해 장원 내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방해하지 마!!!”
윌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무대 뒤쪽으로 내달렸지만, 등 뒤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충격파가 그의 몸뚱어리를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퍼어어엉!!
“……!!!”
팔이 떨어져나가는 것 까지는 감수하더라도, 육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될 정도의 손상은 피해야 했다.
너덜너덜한 어깨를 움켜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윌터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12종 교구 해석원리를 변형시켜 만든 흡령결계가 이렇게 쉽게…….”
“…….”
“삼영 측에 저희들과 접촉해 본 자가 있는 모양이군요. 술식의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확하게 균열의 발생만을 억제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 범인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윌터가 중얼거렸다.
라바테논 대학에서 윌터가 수육했던 방식. 동시에 기숙사 학생들의 생명을 대가로 열어젖히려 했던 대규모 공간이동 술식까지.
그 술식의 발동을 간파해서 파훼해 본 레녹은, 윌터가 성채 주민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벌인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바테논 마법대학에서 벌였던 일련의 소동은, 아마 성채 내부에서 비슷한 짓거리를 벌이기 위한 시범이나 다름없었을 터.
놈들이 술식을 발동한 직후 그것을 취소시키는 것은 어려울 지라도, 결계의 작동을 방해하고 효능을 약화시키는 것은 충분하다.
두명의 그림자술사, 오렌과 아스이는 그런 레녹의 지시를 완벽하게 이행할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너희만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지.”
허공에 붕 떠오른 윌터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레녹이 웃었다.
후우우웅……!!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오른팔에 차여 있던 팔찌가 박살 나고 일대의 지면이 묵직하게 짓눌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한산해지기 전까지는 나와 함께 놀아줘야겠다.”
* * *
대리전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었어야 할 계획.
귀도 교단과 손을 잡는 것을 무릅쓰고 설계했던 판에 균열이 생긴 것을 눈치챈 이본가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결계 안쪽을 뒤덮고 실력행사를 방해하는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본가주의 표독스러운 눈길이 빠르게 옆으로 향했다.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고 있는 오렌의 모습.
단순히 대리전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보이려는 허세의 일환이라 생각했거늘, 처음부터 이것만을 준비하고 있던것인가……!!
그제서야 자신들의 계획과 교단의 존재까지, 이미 오렌에게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이본가주가 분노에 찬 얼굴로 손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오렌이 앉아 있던 자리가 휩쓸려 나가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가주들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본가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서로 다른 파벌로서 상대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건……!!”
사군, 육령, 칠현이나 팔둔같은 경우, 적을 다른 곳에 두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같은 성채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애초에 대리전이라는 형태 자체가, 8가문의 직계혈족간의 골육상쟁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었는가.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다른 가주에게 손을 대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대리전의 명분을 한순간에 저버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본가주가 사나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삼영가주를 죽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