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80
약먹는 천재마법사 280화
빛과 그림자(1)
8가문의 가주들 중에서 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어렵고 까다로운 지명의뢰들만을 골라 성공시키면서 급격하게 명성을 끌어올린 마법사.
엄청난 재능을 가진 고위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무력은 전사들과 비견해야 할 정도로 뛰어나다 했던가.
카르텔의 사외이사.
에이전트의 외부고문이라는 굵직한 자리들을 꿰찬 뒤에도 프리랜서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반의 실력을 그 무엇보다 적나라하게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거대도시의 음지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플라톤 용병사무소.
험난한 거리에서 살아남아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이 접근전에 취약한 술사를 상대로 단 한 번의 공방도 겨뤄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 과정에서 반의 오른쪽 팔목에 채운 팔찌가 경종을 울리지 않았다면, 순전히 군위급의 마력만을 기용해서 애덤을 찍어눌렀다는 말이 아닌가.
뛰어난 실력일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
그 과정에서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가주들도 동요할 수밖에 없다.
기절한 채 실려 나가는 용병, 애덤 브로벡을 내려다보던 가주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 마법사가 맞기는 한 건가?”
“담력이 장난이 아니군. 공격이 들어오는 걸 알면서도 저만한 마법을 지근거리에 내리꽂았어.”
“마력강직도도, 위력도 완벽하게 조절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실제로 팔찌는 무사했다. 그걸 몰랐기에 저 용병도 그대로 당해 버린 거야.”
이 자리의 모두가 이본의 눈치를 보는 것과는 별개로, 8가문의 가주들은 제각기 뛰어난 전사들이다.
거대도시의 삼두령 중에서도 육탄전력에 관해서는 단연코 압도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성채의 가주들이 방금 있던 전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근접전투에 이골이 났을 권사가 고작 한번의 마법에 전투불능이 되어버렸어.”
“위력도 위력이지만, 영창속도에도 눈길이 가는군. 저만한 빙결계통의 물리공격을 순식간에 구현했다.”
“대리전이라는 핸디캡을 안고서 이 정도라면…….”
가주들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하는 것을 눈치챈 이본이 입을 열었다.
“바로 다음 의식을 시작하죠. 이번에는 제 대리인이 나설 차례군요.”
“이본가주의 대리인이라면…….”
“예.”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한 다른 가주들을 돌아보며 이본이 웃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친구죠.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니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한 남자가 장원의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애매하게 굽은 등허리. 사방을 살피는 날카로운 눈빛.
마치 지금 이 장원에 쏟아지는 햇빛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몸을 움츠리는 그 모습은, 평생 동안 양지와는 연이 없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레녹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렇군……. 대리전이 시작된 건가. 난 가주님의 명에 따라 불려 나온 거였군.”
“…….”
그는 멍하니 하늘위로 시선을 던지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임무를 실패한 뒤에도 죽지 못하고 그분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가. 그것도 이 가문의 일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다.”
뒤늦게 자신이 지금 어디 서 있는지 실감하는 듯한 그 모습.
레녹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대신, 가만히 팔목에 차여 있는 팔찌를 응시했다.
상대의 팔찌에 들어온 불빛은 하나. 레녹에게 부여된 팔찌의 불빛은 여섯.
대리전의 승패와 기권을 주고받는 사이 다섯명의 대리인이 그 자격을 잃었다.
이제 두 개의 사슬에 불빛을 더 채우면, 레녹은 정식으로 이 성채의 주인을 결정할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그것은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엄연히 결계로서 존재하는 성채의 관리권한을 직접 제어하게 된다는 의미.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린 이상, 이본가주는 무조건 레녹을 패배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이 대리전의 결과를 무마시키려 할 터.
레녹은 대리전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하자.”
때앵!!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그 직후 장원의 흙바닥 아래서 알 수 없는 물체 여러 개가 빠르게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상대가 술식을 준비할 시간을 줄 생각은 없다.
이본의 대리인이 그가 생각하던 상대가 아니라면, 이 다음의 상대가 바로 레녹이 기다리던 그 자일 터.
빠르게 끝내고 일을 마무리짓는다.
직후 마른 하늘 사이로 희미한 섬광이 번뜩이고, 굵직한 낙뢰 한줄기가 그대로 레녹 옆에 서 있던 얼음의 주먹에 내리꽂혔다.
파지지지직!!!
콰아앙!!
그 충격에 두꺼운 얼음조각들이 수백 갈래로 깨져나가며 내리쬐는 햇빛을 난반사, 장원 가득히 강렬한 섬광을 흩뿌렸다.
“으윽!!”
“안 보여!!”
이본의 대리인조차 그 섬광을 피해 눈을 감은 한순간.
대리인을 둘러싼 얼음의 결정들이 모조리 터져나가면서 싸늘한 한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두두두두두!!!
레녹은 코트에 손을 꽂아넣은 채 물끄러미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대리인들간의 전투. 시합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주의 권한을 승계하기 위한 의식 때문.
그렇기 때문에 이 대리전의 중재자들은 전투가 끝나도 장원을 정리하거나 무대를 청소할 생각이 없다.
마지막 한명의 대리인이 남을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독과도 같은 의식.
그 과정에 일체 간섭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
하지만 레녹도 냉기의 폭풍을 헤치고 걸어나온 상대의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수인을 맺을때만 하더라도 하나였던 대리인의 모습이, 어느덧 여섯 명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 분신술인가!!”
“저쪽도 이것저것 준비해 온 모양인데!!”
“이제야 좀 재밌어지는군!”
순식간에 늘어난 대리인의 모습에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변했다.
하지만 레녹은 물끄러미 대리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분신술이라……. 적어도 그것보다는 훨씬 더 기괴하고 이질적인 기술이군.”
“…….”
“산 자의 의식을 붙잡아 억지로 만들어낸 육체에 부여하는 강령술인가.”
다른 사람은 냉기의 폭풍에 정신이 팔려서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지만, 레녹은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남자가 장원 아래쪽에서 끌어올린 다섯개의 나무토막에, 순식간에 각기 다른 영이 깃들어 남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모습을 바꾸었던 것이다.
인간의 기억과 행동원리를 억지로 무생물에 때려 박아 기동하게 만드는 기이한 방식.
거기에 전원이 마력의 성질변화를 깨달은 6레벨의 경지다.
술식의 공정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효율이 높은 그 점을 생각해 본다면 생명을 대가로 효율을 끌어올리는 교단의 기술일 가능성이 높겠지.
아마 저렇게 강령시킨 혼을 그대로 쓰고 내다 버리는 방식의 인령공양일 가능성이 있었다.
“6대1이라……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나?”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만지작거리면서 레녹이 중얼거렸다.
성위마법사인 레녹이 본 실력을 내는 것을 방해하고, 같은 군위의 경지에서 머릿수로 찍어누른다.
꽤 단순하고 뻔한 수작이지만, 효과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가장 왼쪽에서 일어선 남자가 몸을 추스리며 말했다.
“성채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사술이든 꺼리지 않겠다.”
“…….”
“외부인을 상대해 가문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가문에 힘을 다하지 못한 내 사명일 터!”
파바바바밧!!
그 말과 함께 여섯명의 신형이 그대로 안개처럼 흩어지며 순식간에 장원의 무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다른 여섯 갤래 시선의 끝에서 교차하는 마법사 한 명.
얼굴이 똑같은 여섯명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품 안에서 무수한 양의 암기를 꺼내 들었다.
표면에 술식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단검과 표창, 그리고 무수한 사제폭탄 더미가 장원의 중심을 향해 폭격처럼 쏟아져 내렸다.
두두두두두두!!!
단순히 폭발물을 던지는 수준이 아니다.
성채의 물밑에서 암약하며 다양한 은신술과 암기술을 익혀온 이본의 실력자들이 던지는 암기는 가히 총알과 같은 속도로 쏘아지며 사방을 압박했다.
그와 동시에 손에서 빠져나간 암기들의 표면에서 술식문자가 발광.
퍼버버버버벙!!
장원 무대를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우와아아악!”
“여, 열기가……!!”
장원 무대 가까이 앉아 있던 성채 주민들이 기겁할 만큼 강렬한 폭발.
쉬지 않고 연달아 터져 나오는 화염이 어찌나 뜨거운지 무대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가주들과 휘하 수행원들. 이 혼란 속에서도 그 열기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실력과 안목을 지닌 이들만이 눈을 부릅떴을 뿐.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섯 명의 대리인이 일제히 수인을 맺고 마력을 찍어낸다.
우우우웅!!
여섯 갈래 마력이 서로를 향해 순식간에 교차하면서 장원 바닥에 그려내는 거대한 육망성.
그 안에 빼곡하게 담긴 무수한 기호와 문자들이 발광하면서 단 한 사람을 지워내기 위해 회전했다.
지본계열 고유술식.
[육합공명(六合共鳴)] [괴산(壞山)]쿠구구구구구구!!!
장원의 아래쪽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뿌리줄기가 그대로 레녹의 신형을 휘감고 으스러트려 버렸다.
그 이름대로 본디 산을 무너뜨리고 주거지의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되던 파괴술식이 오직 한 사람을 부수기 위해서 쏟아져 내렸다.
철저하게 공세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 이대로라면 속절없이 짓쳐 드는 폭발의 향연에서 버텨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성위급 마력의 사용을 제한당한 상황에서 실격패를 당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무대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첸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하게 변했다.
“생각보다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어. 미리 계획을 대비해야겠는데.”
[무슨 개소리냐?]맨슨의 대꾸에 첸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반은 전투에 있어서 굉장히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판을 설계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세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지.”
단순히 레녹과 일적인 파트너로 함께했던 맨슨은 짐작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몇 번 조작을 당해봤던 첸은 레녹이 어떤 식의 전투를 선호하는지 알고 있었다.
“머릿수에서 밀리고 시작한 덕분에 전투 내내 공방의 총량에서 밀리고 있어. 내가 아는 반이라면 규모가 큰 마법으로 주위를 쓸어버리고 판을 다시 짜겠지만…….”
[관객들이 문제겠군.]“그래. 사실 이런 팔찌 따위는 레녹에게 있어서 큰 문제는 아닐 거야. 경지의 제한이 발목을 잡을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아닐 테니. 하지만…….”
지금 이 대리전을 구경하고 있는 성채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장원 가득히 몰아치는 폭염에 대항할 만한 마법을 꺼내 들 수 있는가.
철저하게 위력을 조절하지 않으면 없느니만 못한 반격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맨슨은 그런 첸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무슨 걱정을 하나 했더니, 반이 주위를 신경 쓰다 패배할까 고민하고 있던 거냐? 어이가 없어서.]“윽……. 충분히 할만한 고민이라 생각하는데.”
반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머리회전이 빠른 데다 판단력과 결단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지만.
냉철한 지성을 지닌 것과는 달리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않으면서도, 또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장기말로 던져버리는 무정한 사람은 아닌바.
이런 상황에서 판단을 잠깐이라도 그르쳤다가는 계속해서 주도권을 내줄 가능성이 높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끝이야. 채주 권한이 저쪽에게 승계되고 나면, 먼저 깽판을 쳐야 하는 게 우리가 될 수도 있다고.”
[사업을 한다는 놈이 사람 보는 눈은 영 엉망이군.]맨슨이 음울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고작 그런 고민 때문에 망설일 정도라면, 반이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리가 없지.]무기질적인 안광이 느릿하게 치솟은 뿌리 등걸의 중심부근을 올려다본다.
[고민을 할 생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저 마법사를 경외시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거다.]그 말과 동시에, 으스러지는 뿌리의 중심에서 수십 갈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가각!!
섬뜩하기 그지없는 절삭음과 함께 두꺼운 나무 뿌리가 모조리 잘려나가고 그 안에서 레녹이 멀쩡한 안색으로 걸어 나왔다.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여섯 명의 대리인을 빤히 내려다보던 레녹이, 느닷없이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그대로 발밑에 던졌다.
그 순간 레녹이 딛고 있던 수십 개의 뿌리줄기가 마치 기름 붙은 장작인 양 화려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장원 한가운데 느닷없이 피어오른 장대한 캠프파이어에 가주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본의 뿌리술식에 불을 붙인다고!!”
“말도 안 되는 염열마법이군……!!”
“아니, 잠깐 저건…….”
뿌리 줄기를 통째로 불태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뿌리 사이에 얽혀 들어간 수백 갈래 마력사를 따라 옮겨붙은 불이 그대로 뿌리줄기를 휘감고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 설치해두었는지 알 길이 없을 만큼 무수한 마력사 다발.
그 끄트머리의 일부가 자신들의 발목에까지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대리인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
발목에 묶인 마력사를 따라 옮겨붙은 불이, 순식간에 대리인의 육체까지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공세를 쏟아붓던 이들이, 레녹이 마력사를 따라 피어 올린 불길에는 맥을 추지 못하고 발광했다.
“그아아아아악!!”
“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온 몸을 비틀어대는 여섯 명의 대리인들.
그 몸에는 언제 붙여놓았는지 모를 레녹의 마력사가 달라붙어 끊임없이 꺼지지 않는 불길을 그 몸에 부어 넣고 있었다.
폭발의 흔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버린 고깃덩어리들뿐.
완전히 뭉개진 입술로 떨리듯이 물었다.
“서, 설마…… 처음부터…….”
“관객의 눈을 속인답시고 선공을 허락한 시점에서 끝난 일이었지.”
품 안에서 새로운 연초를 꺼내든 레녹이, 타오르는 불덩이 끝에 연초를 가져다 대고 불을 붙였다.
“신경 써야 할 상대를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닌가?”
교단의 술식을 사용하는 순간을 감추기 위해 레녹이 터트린 냉기폭풍을 허용했지만, 레녹은 이미 그 순간에 대리인 전원에게 마력사를 붙여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마력의 제한. 공세의 주도권. 한정된 전장. 전투를 지켜보는 관객들.
그런 잡다한 고민으로 선택지가 제한되기도 전에 레녹은 이미 승부의 기로를 선점해 놓았다.
남은 것은 적당히 놈들이 준비한 공세의 종말점을 기다리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간극을 찔러 들어가는 일뿐.
퍼버버벅!!
허공에서 나타난 얼음의 말뚝 여섯 자루가 순식간에 타오르는 고깃덩이들을 꿰뚫는다.
“꺼, 억……!!”
이본의 대리인들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고, 일으켜 세웠던 나무토막으로 돌아갔다.
처음 수인을 맺던 그 대리인의 육신마처, 천천히 으스러지면서 잿더미로 변해 사라진다.
흩어져 사라지는 육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가주님…….”
오오오오오오오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레녹을 향해 열렬한 환호성을 토해냈다.
성채 출신이 아닌 외부인. 이질적인 복색의 마법사라는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몰아치는 화염의 폭풍 속에서 레녹이 보여준 세련되기 그지없는 대응은 전투가 이어진 시간과는 별개로,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기예가 담겨 있었다.
“오륜의 대리인이라 했었나?”
“완전히 썩어빠진 놈들인 줄 알았는데, 대리인 하나는 괜찮게 구했군.”
“어차피 삼영 어르신 밑에 있는 놈들이야. 그분께서 채주가 되면 오히려 좋은 일이지.”
오륜의 안 좋은 이미지. 외부인이라는 출신을 오렌의 이름하에 대충 문대버린다.
반대로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던 가주들의 말수는 확 줄어버렸다.
“…….”
싸늘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이본가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다.
“수준급의 전격마법사라 들었는데……지금 보여준 마법들이 주력기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런 것 치고는 보여준 계통이 너무나도 다양했어. 마력에 제한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외부의 힘을 빌렸을 가능성이 있다.”
대리인들의 자격을 증명하는 팔찌는 굉장히 섬세한 물건이다.
레녹이 사용하는 것처럼 마력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다가는 순식간에 박살 나고 실격패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저쪽도 이본처럼 모종의 술수를 쓰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손을 쓰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대장전을 위해 힘을 아끼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정말로 이본이 패배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가주들이 일제히 불편한 기침을 내뱉었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이본 쪽에 붙어 있던 가주들의 시선이 슬쩍 다른 곳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삼영가주, 오렌을 향해.
반대로 본의 아니게 삼영 쪽에 합류했던 팔둔 가주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일원가주.”
침묵하고 있던 이본이 입을 열었다.
“예.”
“가주의 대리인이 마지막입니다. 준비는 되어있겠지요.”
순간 태오의 표정이 거세게 흔들렸지만, 빠르게 마음을 다잡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완전히 불타 황폐해져 버린 무대.
무너져내린 나무 뿌리 등걸을 등진 레녹의 앞으로, 두꺼운 로브를 입은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레녹의 앞에 올라온 로브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다짜고짜 대화를 시도하는 상대에게,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빤히 그를 응시했다.
굳이 인사를 나눌 이유는 없었다. 처음부터 레녹이 기다리고 있던 대리인은 눈앞의 상대 하나뿐이었으니.
이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계획해 온 것이 아니었나.
로브는 그런 레녹의 생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바깥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프리랜서라고 한다지요?”
“…….”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손을 들어 천천히 로브를 벗는다.
지긋한 나이의 장년 남자. 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금발.
입가에 걸린 이질적인 웃음과 창백하기 그지없는 피부.
혈관이 뭉친 것처럼 푸르딩딩한 목 아래쪽의 흔적을 레녹은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그 모습은 일전에 선교자의 심상을 역으로 파고들어 마주했던 외견과 판에 박힌 듯이 흡사했다.
“윌터, 윌터 마르티네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