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92
약먹는 천재마법사 292화
메시지의 의미(2)
중요한 것은 마력을 동력원으로 삼아 시간과 공간에 간섭하기 위한 조건을 파악하는 것.
그 조건을 완벽하게 해석해내지는 못하더라도, 패턴을 파악하고 데이터를 손에 넣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늘어난다.
시간과 공간을 성립시키는 원리. 그것을 마력으로 간섭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구축과 전제조건확립.
바로 이런 일련의 행위 자체가, 레녹이 창조계열 고유마법을 만들때마다 해냈던 일이기에.
허무맹랑한 가능성으로만 남겨두었던 희망이 다시 머릿속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레녹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변하고, 등허리가 바르게 선다.
도핑의 후유증으로 골골대면서도 연구를 멈출 수가 없다.
억지로 끌어올린 것도 아닌데 예리하게 곤두선 집중력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자성영역을 한 번 더 전개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
유적지의 흔적을 연구하고, 균열을 들여다보는 모든 순간이 고통보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목숨을 걸고 강적과 겨루는 것만큼이나, 이렇게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순간 역시 즐겁고 반짝인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이 세상에서 눈을 뜬 것 역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일원가의 저택은 밤새 불이 꺼지는 일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건방진 녀석 같으니.”
수염을 쓰다듬던 오렌이 거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성채를 한번 뒤집어놓고도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나갈 생각이었느냐.”
“그런 몰골로 혼을 내봐야 별로 와닿지도 않는데.”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수척한 안색으로 화를 내봤자 진심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니, 애초에 진심조차 아니겠지.
오렌 역시 더 이상 레녹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 욕심이라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레녹이 명목상으로 거머쥔 직위는 단순히 카르텔의 사외이사 직함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오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낮은 웃음을 흘렸다.
“뭐, 그렇겠지. 대리인의 신분을 가지고도 내게 거래를 걸던 녀석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
“그러고 보니 다른 가주들이 네놈에게 세외가주 직함을 주는 일에 대해서 의논해 보라고 하더구나.”
뭔가 생각난 듯한 오렌의 말에 레녹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쪽이 바라는 가주가 될 일은 없을 텐데.”
“말이 가주지, 사실상 성채의 중한 귀빈들에게 쥐여주던 자리다. 대리인의 신분도 사라졌으니, 성채에 계속 드나들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직함이 필요할 테지.”
하긴, 이미 말뿐인 직함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데 거기 하나가 더 추가된다 해도 탈이 될 일은 없어 보였다.
대충 레녹이 코트의 어깨 부근을 가볍게 훑어 손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이건?”
그의 손에는 그림자 깃털로 짜여진 얇은 외투가 걸려 있었다.
아스이가 마지막 결전 당시 오렌의 수중에서 빼내 와 레녹에게 건네주었던 방어구.
하지만 오렌은 그것을 보고도 순순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주된 자로서 한번 하사한 물건을 빼앗을 수는 없지. 줬다 뺏는 것이 가장 경우가 나쁜 법이 아니겠느냐.”
“…….”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가문 창고에 비슷한 아티팩트가 있다. 그것으로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을 더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군.”
“그래…….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순순히 그림자 깃털로 만들어진 외투를 받아 챙겼다.
오렌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이 외투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레녹의 기준으로 보기에 이건 생각보다 굉장히 쓸모가 많은 물건이었다.
그림자 계열의 술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조건하에 외형변경과 보온, 통풍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들어진 물건.
의류 계열의 아티팩트 치고는 내구도 자체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 편의성 자체는 상당한 수준이다.
당장 레녹이 입고 있는 코트의 형상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도 가능했으니, 그림자 술사들에게 허락된 특유의 편의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겠지.
“그래서, 유적지에서 수확은 있었나?”
오렌이 나른한 표정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물었다.
“일이 끝나고도 한동안 저택에서 요양하던 네가, 이제야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뛰어난 술사들이 다들 그렇듯이, 오렌은 레녹이 다른 마법사들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는 뛰어난 학자이자 연구자임을 알고 있었다.
유적지라는 비경을 마음껏 연구해볼 기회를 손에 넣은 레녹이라면, 웬만한 결실을 손에 쥐지 않고선 쉽사리 성채를 나설 리 없을 터.
오렌이 레녹과 같은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레녹도 대충 그 생각을 눈치채고 웃었다.
“세계의 단면을 엿본 것만으로 술사들에게는 큰 기연이나 다름없지.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다. 남은 건 돌아가서 데이터를 정리하는 일뿐이야.”
“단면이라?”
레녹은 오렌에게 유적지에 숨겨진 균열과 세계의 단면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다.
교단이 얽혀 있는 만큼 모든 것을 들려줄 수는 없지만, 추후 유적지를 또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어야 할 테니.
하지만 레녹의 설명을 들은 오렌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전대 채주가 살아 있던 시절, 나를 포함한 가주들은 몇 번이고 유적지에 드나들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닌 듯하군.”
“그런가?”
“그래. 채주는 유적지에 발생하는 현상과 비밀을 연구하는데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그걸 알고 있어야 추후 시의회의 늙은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이 가능하다 믿었지.”
“…….”
“이본가주가 유적지의 공유를 거부하고 자택에 틀어박히기 전까지는 유적지의 출입 자체는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젠 다 지난 일이군.”
오렌은 흐릿한 얼굴로 말없이 레녹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세계의 균열이라…… 그건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야.”
그가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눈에 담긴 풍경이 아니라, 앞으로 육방성채가 맞이하게 될 미래겠지.
무너져버린 삼두령의 권위. 밑에서 기어 올라오는 도전자들과 유적지의 존재를 두고 개입해 올 시의회의 존재까지.
앞으로 그가 책임을 지고 헤쳐나가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채의 주민들을 저버리지 못해 채주의 직위를 받아들인 것 역시 오렌 본인의 의지.
“하지만 다가올 미래 앞에서 무지 역시 방만에 불과할 뿐이겠지. 그 의미는 잘 알았다.”
오렌은 단호한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에 초점을 두고 나 역시 유적지를 연구해 보도록 하지. 너 정도 되는 술사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성채 내부에 만들어진 세 곳의 유적지의 존재는 아마 우연이 아닐 거다.”
레녹이 대답했다.
“귀도 교단이 이렇게까지 먼 거리를 감수하고 찾아와서 눈여겨볼 만큼 희귀한 비처. 그런 장소가 한 구역 안에 세 곳이나 몰려 있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이상한 일이지. 아마 인위적인 실험이나, 특정한 술식의 여파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 말은?”
“블랙컨슈머 프로젝트. 그 비밀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은다면 무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시의회의 늙은이들이 거대도시의 총력을 그러모아 선택했던 금단의 비술.
소문만이 무성하고, 여전히 그 내막은 감춰진 거대도시 최악의 기밀들 중 하나.
카르텔의 수장,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는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프로젝트의 기원을 카르텔이, 여파를 팔굉성채가 쥐고 있었다면, 처음과 끝 사이에 놓인 과정을 알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어쩌면 삼두령이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레녹은 거기까지 떠올리고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봤자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할 뿐일 테니.
하지만 오렌 역시 레녹의 말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 해묵은 금기마저 규율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겠지. 네놈의 말이 틀리지 않구나.”
그는 레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가올 시의회와의 협상을 위해서라도, 그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들을 긁어모으겠다.”
* * *
창백한 백색의 광채가 가득한 공간.
티끌 하나조차 용납되지 않는 청결의 끝에 다다른 새하얀 신전 내부 심처.
신전의 안쪽에 난 거대한 균열 사이로, 집채만 한 크기의 새파란 수정체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수정체의 앞에는 족히 수백 명이 넘는 사제들이 경건한 자세로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으고 있던 누군가 입을 열었다.
“128번째 사도 후보 윌터 마르티네스가 신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
“마지막으로 확인된 행선지는 대륙 남서쪽 평원지대에 위치한 거대도시 발칸……. 도시 외곽에 펼쳐진 방위선으로 인해 구체적인 정보는 획득하기 어려우나, 주교급 신도에게 주어지는 권한의 급격한 확장을 확인.”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제까지 같이 기도를 올리던 수백 명의 사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돌아보았다.
소름이 끼칠 만큼 무기질적인 시선.
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목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나직하게 말을 전했다.
“굉장히 높은 확률로 사도 강림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마경 같은 도시에서 거기까지 해냈을 줄이야…… 아까운 인재를 잃었어.”
사제의 뒤에서 뒷짐을 진 채 걷고 있던 남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두꺼운 안경과 섬세한 외모. 교단의 사제라기보다는 학자나 연구자의 인상에 가까운 신경질적인 분위기.
“멸목의 힘을 원했던 흑마법사와 함께 일했을 때도 생각했지만, 그 도시에는 참 이상한 사람들이 많군.”
남자는 가만히 자신이 손을 빌려주었던 흑마법사 크레이그 틸리언의 모습을 생각했다.
외해의 종말. 그중에서도 멸목 아크로트리니어의 보존 정보를 프로그래밍시켜 인공 영역 내부에서 그 형상을 재현시켰던 크레이그의 발상은 남자에게도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신의 교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려 드는 그 오만이 마음에 들어 힘을 빌려주었건만, 반이라는 프리랜서의 활약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고 말았었지.
그는 이번 사도 강림을 막아낸 사람이 그때의 마법사와 동일 인물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뭐, 어쨌든 사도 후보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면 새로운 선교자를 선출할 필요가 있겠어.”
지나가듯이 흘린 남자의 말에, 신전 내부에서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남자는 그런 싸늘한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웃었다.
“마침 이곳에 형제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이 자리에서 선교자 하나를 뽑아내도록 할까?”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사제들 중 하나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 이곳 교단 남서 지부는 발칸은 물론이고 자치령과 화산지대를 관측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 아닙니까.”
“계속 말해봐.”
안경을 매만지는 남자의 말에, 사제의 낯빛이 푸르죽죽하게 변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뒤다.
이를 악문 사제가 필사적으로 남자를 설득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푸른 수정체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은 다른 모든 사제들이 간절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불어 기계도시 마키나의 동향을 살피는 업무까지도 최근에 할당받은바……. 만약 신전의 사제들이 선교의식에 참여한다면 지부의 업무가 통째로 마비될지도 모릅니다…….”
외해의 신들을 섬기는 일에 대해 망설임은 없다. 광신이라는 말에 흔들리기에 사제가 자라온 환경은 너무나도 가혹했으니.
그러나 선교의식에 참여하여 선교자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사도 후보라는 말은 듣기만 좋을 뿐, 그 실상은 자신의 육체조차 잃고 정신만이 남아 다른 이의 육신을 탐하는 귀신이나 다름없다.
생명으로서의 도리와 상식을 완전히 벗어던진 탈태의 과정을 반기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사제의 항변을 듣고도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형제들. 잘 듣게나. 사제는 언제 어디서든 데려와 보충할 수 있어. 신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 아래 신앙의 불빛을 끌어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
“하지만 선교의 책무는 잠시라도 공백이 생겨서는 안 되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두가 잘 이해했으면 좋겠군.”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손에서 피어오른 희미한 광채가 신전의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아, 안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아아아아아악!!”
수백명의 사제들이 절규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지만, 남자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남자가 신전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에서 나타난 새하얀 복색의 전사들이 신전의 문을 닫았다.
선교자의 선출 의식이란 수백 명의 생명과 육신을 갈아 오직 하나의 의지만을 남기는 과정.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인력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윌터 마르티네스만큼이나 우수한 선교자를 선출하여, 행여 앞으로 가능할지도 모르는 사도의 의식을 성공시키는 것.
“흐아아아아아악!!!”
신전 안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 소리. 육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사투.
비릿한 혈향이 문 너머까지 강렬하게 퍼져나오며 사방을 끈적하게 적신다.
아직 살아남은 사제들이 필사적으로 신전의 문을 긁어내렸지만, 문을 막아선 전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 아쉬워.”
남자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일이 잘 풀렸다면 새로운 사도가 하나 더 탄생할 수도 있었다니……. 세상 일이 참 쉽게 흘러가지 않는군.”
“당신께는 큰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여성이 물었다.
“이미 선교의 업을 마치고 새로이 육신을 부여받은 분께서 무엇이 아쉽다고 새로운 형제를 찾으시는지.”
그녀의 입장에서 남자의 한탄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 사도로서 존속에 실패한 윌터 마르티네스와는 달리, 남자는 아주 오래전에 선교의 업을 마치고 사도의 육신을 부여받아 교단의 주축으로 우뚝 선 특기전력들 중 하나였으니.
스스로의 광신에 갇혀 행동이 뜸해진 대부분의 사도들과 달리, 활발하게 외부활동을 지속하며 이곳저곳에 교단의 영향력을 흩뿌리는 남자는 교단 내부에서도 여로모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길레느, 그건 참 무지몽매한 말이구나.”
남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종말의 의지를 내려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속세와 완전히 연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승천자와 같은 괴물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그렇다면…….”
“오히려 애매하게 그들이 부유하는 바다의 감각을 느낄 수 있기에…… 자신을 묶어두는 속세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등을 돌려 신전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형제가 필요해.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오래 줄타기를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파멸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에서 울려 퍼지는 마지막 절규가 천천히 잦아들고, 끝없이 밖으로 퍼져 나오던 혈향이 부자연스럽게 뚝 끊긴다.
일말의 숨소리조차 남지 않은 신전 안쪽을 관조하던 그가 천천히 문을 열어젖히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지. 그것 자체가 알카이드가 바라는 염원이었을지도…….”
“…….”
문 반대쪽에 찍힌 수백 개의 새빨간 손자국. 쓰러진 사람들 중에서 손톱이 남아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붙잡고 있던 전사들마처 흠칫할 만큼 섬뜩하기 그지없는 광경.
“마지막까지 세계의 결말을 지켜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수밖에.”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인간의 형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육편의 산.
피웅덩이 속에서 비틀린 영체 하나가, 이제 막 화려한 꽃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