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07
약먹는 천재마법사 507화
중간결산(8)
암리타의 사망에 대한 정보가 어떤 식으로 조정치를 높게 끌어올렸는지.
그리고 그 사실을 레녹이 왜 이야기할 수 없었는지 스스로 추측하고 납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적어도 이렇게 흘러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레녹이 더 이상 의심이나 추궁을 받을 일은 없겠지.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로기어의 등 뒤에서 가볍게 손을 털고 있던 마이야가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조정치가 8단계까지 나온 이유도 다시 추측해 볼 수 있겠어.”
“……마이야, 무슨 뜻이지?”
“암리타의 사망이란 사실 그 자체보단, 어떻게 죽었는지 그 정황 자체가 유의미한 조정수치라면 어떨까?”
“…….”
마이야는 박사의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완전히 끝나 닫힌 줄 알았던 구세계의 인과가, 아직 이어져 있다면 무의미한 일은 아니겠지…….”
‘날카롭군.’
레녹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마이야의 직관에 감탄했다.
그 말은 레녹이 암리타의 사망을 이 자리에서 공개한 근본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추측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암리타의 사망은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핵심은 고위사도가 외신과 유사한 불멸성을 획득하고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
외해를 부유하는 종말들은 세계의 순환과 멸망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그들의 행적이 구세계의 인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분명한 일.
레녹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신들의 행동에서 파생된 암리타의 죽음이 구세계의 인과 조정치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야는 극동지부에서 외신들이 한시적으로 모여 레녹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인과변동성이 지나치게 강한 이유가 암리타의 사망 전후로 발생한 일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추측해냈던 것.
언령술사인 사브리나가 레녹의 미묘한 뉘앙스를 고찰한 그 의견 한마디를 가지고 거기까지 생각해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
기계도시 마키나에서도 최고의 집행자로 손꼽히던 실력자다운 통찰이라 해야 할까.
자연스럽게 마이야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리타가 사망한 이유, 혹은 사망한 방법 자체가 구세계의 인과 변동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군.”
“그런 의미라면 빅터가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해는 가지만…….”
“본인이 보증하지 못하는 이상 의미 없는 일이다.”
소류가 차갑게 말했다.
“그것보다는 암리타의 사망으로 인해 대륙 곳곳에서 벌어질 소란에 대비하는 게 최선이겠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중앙전선에서 교단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 테니까.”
“주문연맹과 휴전협정을 맺었다고 했었지. 이 사실이 퍼져나가면 그쪽에서도 움직임을 보일까?”
“당장은 아닐 거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보고 난 뒤에야 결정을 내리겠지. 어려운 문제야.”
“오래지 않아 소식이 곳곳으로 퍼질 거다……. 당장 사도술식을 사용하는 신도들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의심하는 이들이 늘어날 테니…….”
“……중요성에 비해 값어치가 급락할 정보라 이거군.”
“그런 정보로 8단계의 조정치를 챙겼다 이거지…….”
“처음 결산에 참가하는 거 확실해?”
그제서야 레녹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치가 떨어질 정보로 최대한의 이득을 챙겼다는 것을 깨달은 멤버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암리타가 사망했고, 사도술식이 봉인되었다는 정보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고 귀중하지만.
그 의미가 교단에게 있어 숨길수 없을만큼 너무 중요하기에 오히려 금방 공개되어 버릴 정보.
그런 정보를 판데모니엄보다 한발 앞서 입수한 능력을 존중해야 할까, 아니면 가치가 없어지기 전에 적절한 시기에 털어버린 수완을 경계해야 할까.
레녹은 그런 감정들이 손에 잡힐듯이 뚜렷하게 읽히는 것을 알면서도 가면 안쪽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라도 굳이 시간을 내어 판데모니엄의 중간결산에 참여한 것이었으니.
“그럼 바로 정산을 시작하지. 원하는 사람부터 나와라.”
“내가 먼저 할게.”
박사의 말에 따라서 냉큼 자신이 손을 댔던 신상의 팔 앞에 서는 사브리나의 모습.
신상이 굳게 움켜쥐고 있던 주먹이 펼쳐지는 것과 함께, 그 안에서 빛이 바랜 종이 몇 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브리나에 이어 로기어, 체비엔까지 차례대로 손위에 펼쳐진 종이를 챙겨 드는 모습.
버논은 그 대열에 합류하는 대신, 레녹의 옆에서 속이 타는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번 결산에서는 2세계의 양주 제조법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여과기 때문에……!!”
레녹의 여과기를 손에 넣는 대가로 이번 정산의 대가를 레녹에게 양도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제서야 정산이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레녹이 버논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과조정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구세계의 정보를 보상으로 교환해 주는 느낌이군.”
“당연하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딴 짓거리를 왜 한다고!”
버논이 독한 알코올 냄새를 줄줄 풍겨대며 소리쳤다.
“이번 내 정산 조정치는 그렇게 많이 높지는 않았으니까. 피눈물을 머금고 그쪽 여과기랑 교환한 거야. 원래라면 이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정보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버논, 특질계 술사한테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사브리나가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집어넣으며 비웃었다.
“네 걱정이나 잘 하라고. 술에 쩔어가지고 괜히 오지랖 부리다 뒤지지나 말고.”
“사브리나. 넌 이번에 뭘 받았지?”
“내가 미쳤어? 왜 그런걸 알려줘야 하는데?”
사브리나가 날카롭게 코웃음을 쳤다.
“생각없는 버논같은 사람이나 뭘 받았는지 떠벌리고 다니는 거지, 진짜 실력자들은 마지막까지 자기 의도를 숨기는 법이야.”
“하!! 보나 마나 구세계의 언어체계나 문자배열 같은 사료들이겠지.”
“…….”
버논의 말에 갑자기 사브리나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레녹은 다소 한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버논이 그럴줄 알았다는 듯 킬킬 웃었다.
“뭐, 언령술사가 바라는 구세계의 정보라면 뻔하지 않겠냐. 다분히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본신의 위계와 관련된 정보일건 너무 뻔하지.”
“호오.”
레녹이 웃었다.
“그 말은 네 힘이 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발언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버논이 하는 말에서 자기 자신이 예외가 아니라면, 그가 이상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니겠나.
생각해 보면 레녹과 처음 마주친 이후로 버논은 단 한번도 술을 마시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지독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것 치고도 굉장히 이상하기 그지없는 행동.
그것이 술에 취한 상태로 그가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종의 조건이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버논은 그런 레녹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오히려 킬킬 웃었다.
“엥, 그게 그렇게 되나? 이거 나도 모르게 비밀을 다 불어버린 건가?”
“…….”
“뭐, 농담이야. 당연히 그쪽이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나.”
가면 너머로 빛나는 담담한 레녹의 시선에 버논이 낄낄거렸다.
“나같은 경우는 애초에 내 상태나 조건을 숨기기도 어려우니까,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공개하고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더군.”
“웬 주정뱅이가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렇군…….”
버논과 사브리나의 말을 레녹은 이해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위계를 숨기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애초에 숨기기 어려운 술식이나 소우주를 손에 넣었다면 그것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다.
차라리 대놓고 보여주면 신중한 이들은 외려 그것이 만들어진 허점이라 생각해 경계하겠지.
레녹 역시 신분과 정체, 위계를 숨기는 일에 대해 항상 고민하는 만큼 의외로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어딘가 미적지근한 레녹의 반응에서 감이 잡히는 바가 있었을까.
슬쩍 레녹의 눈치를 보던 사브리나가 조용히 그를 향해 손가락을 휘저었다.
동시에 손가락을 타고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나오는 희미한 문자배열.
[그런 의미에서 우리 좀 더 정보를 교환하지 않을래?]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건가.
레녹이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하는 사이 사브리나가 다시 문자를 자아냈다.
이미 만들어진 문자배열을 재배치하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10사도 암리타의 사망같은 정보 말이야. 사실 꽤 충격적이었어.]“…….”
[개인적으로 그렇게 중요성이 높으면서도, 휘발성이 강한 정보가 필요해. 뭔가 알고 있다면 좀 더 교환하고 싶은데.]결산이 거의 다 끝나가는 만큼 따로 시간을 내서 레녹과 정보를 거래하고 싶다는 말인가.
다른 멤버들이 하는 것을 보고 어느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사브리나가 가장 먼저 접근해 올 줄은 몰랐다.
언령술사의 경우에는 다양한 곳에서 힘을 빌려줄 수 있는 만큼, 정보의 부재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일은 많지 않을 줄 알았건만.
레녹은 조용히 그 문자배열들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톡톡 건드렸다.
동시에 사브리나의 문자들 사이에서 떠올라 새로운 문장으로 변하는 대답.
설마 그녀의 문자를 건드려서 대답을 할 줄은 몰랐을까.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가면을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멀뚱멀뚱 서 있던 버논이 코를 파며 물었다.
“그럼 빅터. 내 몫을 어떻게 사용할래? 먼저 나가서 정산을 받고 올까?”
“……아니.”
레녹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내 조정치부터 먼저 사용하지.”
버논이 제출한 구세계의 유물, 만년필의 조정치는 4단계. 레녹의 조정치는 8단계다.
일반적으로는 버논의 몫으로 할당된 4단계 조정치를 레녹이 먼저 사용해 감을 잡고 8단계 정산을 받는 것이 합리적일 터.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알면서도 버논보다 앞서 앞으로 나섰다.
레녹이 곧바로 신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소류나 마이야, 혈노와 같은 이들은 결산을 확인받지 않은 상황.
신상의 머리 위에서 뒹굴던 털뭉치, 박사가 레녹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이들과 달리 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군.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듣겠나?”
“듣지.”
“좋아. 기본적으로 자신이 입력한 인과 변동성 조정치에 따라 상응하는 구세계의 지식이나 데이터를 출력한다. 저울대를 생각하면 편해. 신상 내부에 보관된 데이터에 큰 변동을 일으켰으니, 반대로 그만한 데이터를 뱉어내 안정화시키는 방식이지.”
“…….”
“어차피 자기 입으로 이야기했으니 사브리나의 케이스를 예로 들자면, 1세계의 고대문자 배열 같은 경우가 좋은 예시다. 멸망한 세계의 생활상이나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구세계의 유물이나 정보를 통해 수집하기 어렵지 않고, 그녀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지식.”
박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반대로 말하자면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네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목표나 다루는 술식이 드러나기 쉬워지지. 잘 선택해야 할 거야.”
“이해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니, 바로 가지.”
레녹이 거침없이 신상의 여덟 번째 팔 앞에 살짝 자세를 숙이고, 한 번 더 마력을 불어넣었다.
신상의 눈동자 여덟 개가 동시에 뜨이는 것과 함께, 천천히 여덟 번째 팔을 레녹의 앞으로 내밀기 시작한다.
쿠구구궁……!!
다른 멤버들 역시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산이 제대로 작동하는군. 신상 자체의 기능에는 역시 문제가 없어.”
“8단계의 조정치를 먼저 사용해서 대체 뭘 얻어낼 생각이지?”
중간결산에서도 단 세 번밖에 나오지 않은 8단계의 조정치.
그 전부를 소모해서 레녹조차 알지 못하는 구세계의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키리릭……!!!
레녹이 신상의 손 위에 올라서 수인을 맺고, 의념을 불어넣는 것과 동시에 선명한 문자배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