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7
“이건…. 꽤 흥미로운 이야기군.”
“………”
“반 당신이 직접 이야기한 사실이라면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사실 그동안 기업들이 이쪽에 손을 대지 않았던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니야.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 판에 뛰어들 생각이라면 나도 좀 바빠지겠는데…..”
세바스찬은 얼굴을 싹 굳히고 쉴새없이 손에 쥔 유리잔을 흔들었다.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얼굴주름이 확 펴지고, 갑자기 그가 씩 웃었다.
“좋아. 일단 설계도를 되찾고 난 뒤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고. 그동안 나도 다른 기업들에 대한 정보를 좀 모아보겠네.”
“가능할까?”
“물론이지. 자치령과의 협정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이 행보는 굉장히 과감해. 무모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 정도 일이라면 틀림없이 사내 역학관계에 문제가 생긴 기업이 틀림없네. 내가 아는 임원들을 흔들면 뭔가 우수수 떨어져 나올걸세. 나도 오히려 흥미가 가는군.”
“……..”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집어드는 세바스찬의 모습은, 술 한잔에 헤실거리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라보였다.
“왜 그렇게 보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난 이만 가보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은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바스찬이 곧바로 그가 원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로 결심했으니 레녹도 오래 미룰 필요는 없었다.
매디슨의 증언에 따른 강도들에 대한 단서는 휘발적이고, 그것을 뒤쫓기 위해서는 되도록 빠르게 움직여야 할테니.
“지금 바로 출발하지. 매디슨의 녹음파일을 나한테도 보내줘.”
#
매디슨의 증언에 따르면 설계도를 강도들에게 빼앗긴 지역은 35구역 어느 건설사의 아파트단지.
30번대 구역은 일반적으로 발칸의 시민들이 살아가는 주거지역이 대거 위치한 곳이다.
레녹도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이쪽 구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치안 부분에서 40번대 구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데다, 레녹이 원룸에서 진행하는 마법연구를 생각하면 보안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
따뜻한 공기가 풍기는 계절.
거리를 걸어다니는 한무리의 가족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
“………”
한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으면서도, 이제는 터무니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평온한 풍경.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매디슨이 말한 장소를 찾았다.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봤을때 설계도를 되찾으려는 의도 자체에는 거짓이 없었을테고, 그렇다면 진술할때도 굳이 두 사람을 속일 이유는 없다.
재개발이 예정되있는 허름한 아파트단지의 뒤쪽.
작은 민둥산이 위치한 비좁은 산책로.
먼지가 잔뜩 쌓인 벤치에 잘게 흩뿌려진 혈흔을 확인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블러디체이스]손아귀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마력이 구체적인 염상을 그리고 순식간에 검붉은 마법진으로 화한다.
혈흔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느릿하게 회전하던 마법진이 어느 순간 한줄기 붉은 실로 화하고ㅡ
뚜욱!
끊겨서 사라진다.
“…….”
현상범을 추적할때는 단 한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추적마법이 통하지 않은 셈이지만, 레녹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블러디체이스는 생각보다 굉장히 그 공정이 단순한 수준의 마법이고, 아주 작은 변수에 의해서 추적이 끊기거나 중단되는 일이 허다했으니.
여태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운이 좋았던 셈이다.
레녹은 오히려 이 혈흔을 추적하는 마법이 끊겼다는 사실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단순히 이 피가 매디슨의 것이었다면 시작부터 마법이 중단되었을 일이 없었을테니.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설계도를 빼돌린 그 강도들 역시 여기 혈흔을 흘리고 떠났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블러디체이스가 끊겼을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가지.’
이 혈흔의 주인이 레녹이 추적마법을 사용한 즉시 그 이상을 알아차리고 간섭을 끊어버릴만한 실력자거나.
여기 뿌려진 이 핏자국에 섞인 피의 주인이 한명이 아닐 경우.
그리고 레녹이 보기에는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보였다.
그가 구현한 마법을 즉시 눈치채고 캔슬할 정도로 수준이 높은 마법사가 여기 왔었다면 애초에 이런 흔적따위를 남겨놓지는 않았을테니.
“어떻게 할까…..”
벤치에 뿌려진 혈흔을 채취해서 미리 준비한 비닐에 담은 레녹이 고민에 빠졌다.
혈흔을 매개체로 해서 대상을 추적하는 공용마법을 그가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피에 대한 지식자체는 일천하기 그지없다.
결국 이 분야에서는 레녹 혼자서 해결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조력을 받아야한다는 말인데….
생각나는 선택지는 몇가지가 있었지만, 어느쪽이든 추가적인 비용소모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까 교환했던 세바스찬의 번호로 전화를 걸면서 레녹은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추가적인 부대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곧바로 40번대 구역으로 향한다.
44번 구역.
왠지모르게 불길해보이는 숫자에 걸맞게 이쪽에는 오컬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직종들이 주로 자리를 잡은 지역이다.
주술쪽에서도 굉장히 음침하고 마이너한 촉매를 다루는 계열이나,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은밀한 술식들.
혹은 예언이나 점성학처럼 사람의 미래에는 그리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법한 학문을 다루는 이들도 거부감없이 돗자리를 펼칠 수 있는 곳.
그 중에서도 유난히 짙은 비린내가 풍기는 구역의 거리로 접어든 레녹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코끝을 감도는 냄새로 보아서 제대로 찾아온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입구를 찾지 못하겠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후욱..!
별 수 없이 마력을 넓게 퍼트려서 사방을 살피자, 그제서야 부적이 잔뜩 붙여진 곳에 숨기듯이 가려진 입구가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색 종이에 흘러내리는 붉은 잉크로 그려진 기묘한 문양.
저 잉크가 단순히 색소를 함유해 만든 제품이 아니라는건 뻔한 일이었다.
혈법사
주저없이 부적을 걷어내고 입구 하나를 골라 안쪽으로 들어서자, 문을 등지고 향을 피우던 사람 하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다고는 믿기지 않는 어린 외모와는 달리, 표정은 굉장히 차분해보인다.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어린 동업자를 마주한 건 처음이라 레녹은 신기한 눈길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 역시 대놓고 레녹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무심한 어조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장사한다고 한 적 없는데.”
“입구가 열려있으면 손님을 받는 것 아닌가?”
“……..”
왠지 모르게 불퉁한 시선으로 레녹을 쳐다보던 소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좌식으로 설계된 작은 방 안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레녹은 품안에서 채취해온 혈액을 꺼내들었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다. 이 혈흔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싶어.”
블러디체이스를 끊어버리는 혈흔을 들고 레녹이 찾은 곳은 바로 혈법사들의 소굴이었다.
연구소같은 시설에 혈흔을 맡기고 피를 성분분석해서 추적하는 방법도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피에 관한 술식을 전공으로 다루는 이들의 도움을 받는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테일러 에반스를 쫓을때도 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것을 생각해본적은 있지만, 그때는 인건비가 상당하다는 제니의 말에 단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보다 전문적인 수준에서 피에 관한 정보를 추출하고 다루는 분야에서 혈법사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3백만 셀, 선금. 이후 추가작업에 따라 비용이 붙을거다.”
레녹이 말없이 혈액 옆에 현금다발을 내려놓자 소년이 곧바로 돈과 혈흔을 주워들었다.
혈액샘플을 낡은 탁자위에 올려놓은 소년이 천천히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혈흔에서 뽑혀나온 새빨간 광채가 소년의 손가락으로 스며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의 피가 섞여있군.”
“셋이나 되나?”
“40대 남성 하나. 20대 남녀 하나씩.”
매디슨과 강도 두 사람인가.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소년은 뜸들이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40대 남자는 마력을 익힌 흔적이 없고, 다른 두 사람의 마력농도는 상당한 편이다. 다친 부위는 세사람 모두 손가락 끝. 쇠냄새가 섞인것으로 보아 칼날로 일부러 상처를 낸 것으로 보이는군.”
“……뭐?”
“혈흔이 외부에 노출된 시간은 대략 30시간 정도. 20대 남녀 둘은 마력을 다루는 놈들이라 한번 더 마법을 사용해야겠지만…. 40대 남자는 지금 당장 그 위치까지 적어줄 수 있지.”
“……….”
도움이 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고작 피 몇방울에서 뽑아내는 정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구체적이다.
물론 이런 정보만으로는 피의 주인을 특정하는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뒷세계의 이런저런 정보력과 사건정황이 합쳐진다면 그 후보군을 대폭 줄이는 일도 가능하겠지.
바로 이런 장점 때문에 혈법사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대가로 지불해야한다는 치명적인 디메리트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고, 또 결코 마르지 않는 수요를 받아내고 있다.
제니의 말로는 시정부의 수사기관들도 이 거리를 종종 찾을 정도라고 하니, 피라는 매개체가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이들이 가지는 유용성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것이 아닐터.
물론 이런 모든 장점들도 레녹처럼 강력한 대상지정 저항능력을 가지지 않은, 이른바 큰 실력이 없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지만.
이 거대한 도시에서 하루에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느닷없이 입을 꾹 다물더니 레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추가비용이다.”
“추가비용?”
“20대 남녀 둘의 위치를 찾아주는데 천 이백만 셀. 40대 남자는 4백만 셀.”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운 비용임에는 틀림없다.
아니, 이건 제니에게 들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비싼 금액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섞인 혈흔을 각각 분류하는 비용은 얼마지?”
“뭐?”
거꾸로 되묻는 소년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품안에서 현금다발을 더 꺼내들었다.
턱!
오는길에 직접 은행에서 뽑아온 현찰 5백만 셀.
선금을 지불하고 남은 돈을 모두 낡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레녹이 말했다.
“섞여 있는 혈액을 정확하게 세 사람의 것으로 각자 분류하는 비용까지 해서 5백만 셀.”
피가 섞여있지만 않는다면 블러디체이스를 이용해서 어느정도 방향을 특정하는것이 가능하다.
혈마법으로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해주는 만큼 효율적이지는 못하겠지만, 쓸데없는데 돈을 지출할 필요는 없었다.
레녹이 먼저 강하게 나오자 소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살짝 부족한데.”
“……..”
“단순히 돈이 좋아서 이런 흥정을 하고 있는게 아니야. 돈이 아니라면 그만한 대가를 제시해봐.”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어투 자체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단순히 강짜를 부리는게 아니라, 정말로 레녹이 제시한 돈이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대가라…. 레녹이 지금 그에게 지불할만한 대가가 뭐가 있을까.
애초에 한곳에만 머무르며 손님을 받아 돈을 버는 술사들을 상대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하면….
레녹의 머릿속에서 이벨린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건 어떻지?”
“말해봐.”
“조만간 40번대 구역에서 장사하는 술사들을 상대로 검문이 있을거라고 하더군. 그쪽같은 혈법사들에게는 꽤 중요한 정보일 것 같은데.”
이벨린은 마치 선심쓰는 듯 검문에 대한 정보를 풀었지만, 레녹은 검문에 대한 정보가 그녀가 말했던 것만큼 중요한 정보는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경찰이 하는 일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고, 심지어 40번대 구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차피 검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쯤이면 온갖 곳에 소문이 다 퍼진 뒤겠지.
실제로 잡혀가는 술사들 대신, 뒷돈이 오가는 돈잔치가 열릴것이 뻔하다.
값어치가 없어지기 전에 또 다른 사람에게 이 정보값을 팔아먹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것 같았다.
물론, 소년이 이 모든 말들을 믿어준다는 전제하에.
레녹의 말에 소년이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농담하는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말을 믿으라고?”
“………”
“헛소리를 할거라면 가 봐. 실력없는 술사에게 그런 말을 들어봤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후우…..”
희미한 멸시가 섞인 그 차분한 대답에 레녹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뻔히 알면서도 종종 잊어버린다.
이 거리에서 좋은 말로 해결할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신뢰를 줄 때는 이런 식으로 하는게 아니다.
들려주는게 아니라, 보여줘야 했다.
단숨에 마력을 일으켜세워 눈앞의 탁자를 거세게 내리찍었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