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6
“충돌하게 된다면 쉬운 상대는 아닐거야. 다이크 쪽이랑 협력해서 적당히 머릿수를 맞추는 걸 추천해.”
갱단, 갱단이라….
기업, 용병, 범죄조직이나 스캐빈저를 상대로 다양한 의뢰를 받아왔지만, 갱단을 상대하는 건 아므낙 제약회사 당시를 제외하면 처음이다.
어느정도 룰을 지키고 뒷세계의 질서에 어울리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태생부터 무법자들이고 폭력으로 이루어진 자극에 절여진 범법자들.
상대한다면 어느정도의 부담을 각오해야 할까.
다이크 쪽에서 들어오는 지원이 도움이 될 확률은?
레녹이 각오가 된 것과는 별개로, 준비에 있어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파노아의 지원이 일체 닿지 않고, 그가 혼자서 시거 뱅을 상대하게 되었을 경우를 상정하고 지금부터 준비를 조금씩 시작해야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터.
그것은 적어도 다이크의 두번째 의뢰가 시작되기 전에는 이뤄져야 하는 일이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레녹이 위스키 잔을 집어드는 사이 제니가 노트북 한대를 가져와서 화면을 거꾸로 돌렸다.
“잠깐 이것 좀 봐봐.”
“뭐?”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뿌리는 무기명의뢰랑, 반 당신을 대상으로 들어온 지명의뢰를 모두 합쳐서 대략 5개 정도를 정리해놨어. 일단 확인해봐.”
아직 몸을 추스릴 생각이라 일을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제니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무런 생각없이 하는 말은 아니겠지.
레녹은 곧바로 노트북을 붙잡고 그녀가 정리해놓은 의뢰 목록들을 쭉 살펴보았다.
기업쪽에서 두개. 사무소에서 하나.
앞의 세가지 의뢰는 이 바닥에서 벌어지는 흔한 분쟁에서 마법사의 화력을 필요로 한다는, 흔하다면 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의뢰들이다.
네번째는 또다시 스캐빈저 쪽에서 들어온 의뢰로, 지하수도 탐사에 자원할만한 쓸만한 색적계열 마법사를 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이름을 발견한 레녹이 멈칫하고, 가만히 제니를 올려다보았다.
“……”
세바스찬.
저번에 그에게 명함을 안겨주고 갔던 브로커의 이름이 거기 적혀있었다.
정확하게 반의 이름을 내건 지명의뢰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당사자가 확실하겠지.
“요즘 브로커끼리는 이런식으로 영업을 하나?”
“글쎄. 하지만 내건 액수만 보면 단순히 영업을 하려는건 아닐거야.”
레녹을 섭외하기 위해서 세바스찬이 내건 선수금이 무려 2천 2백만 셀이다.
이 정도라면 단순히 레녹의 관심을 끌기위해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마 정말로 정식으로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반 당신을 찾는 것 같은데.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흠…..”
레녹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클라이언트의 등장에 호기심이 이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 제니에게 들었던 말에 따르면 그가 주로 상대하는 고객들은 조직이 아닌 돈많은 개인들이 상당수.
그리고, 그런 고객들 중에는 틀림없이 기업의 생리에 밝은 이들도 적지않게 존재할 것이다.
만약 세바스찬을 통해서 그런 기업들, 특히 다이크의 내부사정을 엿들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수 있겠지.
“괜찮겠어?”
“나는 상관없다니까. 반 당신이 그 남자랑 일할 생각이었으면 진작 찾아갔겟지. 그리고….”
“그리고?”
“딥웹에는 당신 담당 브로커로 이미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고.”
장난스레 씩 웃는 제니의 표정을 본 레녹도 무심코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그렇게 살벌한 손님을 떠나보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말장난을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 신경이 굵은 사람이다.
그리고 레녹은 그런 그녀의 성격이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좋아. 그럼 한번 다녀오지.”
“수락 신청을 넣어놓으면 좋다고 연락을 걸어오겠군. 저번에 소집령에 불려갔을때 세바스찬이 얼마나 날 귀찮게 했는 줄 알아?”
그가 모르는 사이 이미 물심양면으로 작업을 넣어놓고 있던것인가.
레녹은 대꾸하는 대신 한번 웃어주고는 그대로 술집을 나섰다.
#
45구역.
세바스찬의 사무실이 위치한 작은 번화가.
40번대 구역은 상대적으로 개발진척이 적은 탓에 치안이나 복지쪽에서 시정부의 혜택을 많이 받지는 못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버려진 50번대 구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거리의 구성원들이 그리 좋은 시민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소 윤리의식이 부족하더라도 똑같이 사람사는 동네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세바스찬의 사무실은 굉장히 이색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그의 첫인상과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었다.
평범한 빌딩 대신 건축가를 불러서 직접 디자인한듯한 형이상학적인 디자인.
차라리 10번대 구역 안쪽에 위치했다면 그럭저럭 납득했을법한 부드러운 유선형을 띈 건물의 앞에서 세바스찬이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서오게. 그때 바에서 본 뒤로는 처음이지?”
“……여기가 그쪽의 사무실인가?”
“그럼 내가 남의 사무실로 사람을 불렀을까?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지.”
미술관을 방불케하는 화려한 로비를 지나서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오르니 새하얀 대리석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꾸며진 사무실이 보인다.
사무실의 문 앞에서 서성이던 한 남자가 일어나서 엉거주춤 인사를 건넸다.
“아, 반갑습니다.”
낡은 정장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다.
이쪽 바닥에 어울리기보다는 평범한 직장인에 가까운…. 제약회사의 세이지가 나이를 먹는다면 저런 모습이 될까.
어울리지 않게 입술에 피멍이 든 모습이 눈에 뜨인다.
세바스찬이 아주 자연스럽게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이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 사무실을 찾아주신 매디슨 씨. 여기는 마법사 반. 아주 실력있는 프리랜서지.”
언제 같이 일해봤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레녹은 대충 매디슨이라는 남자가 먼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게 내버려둔 뒤 세바스찬에게 속삭였다.
“딥웹에 걸어놓았던 선수금, 세바스찬 당신이 아니라 이 사람의 몫이었군.”
“눈치챘나?”
사무실 문 밖에까지 나와서 레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새로운 손님이 있다면 이야기는 뻔하다.
세바스찬은 단지 레녹을 고용하고 싶어서 이런 수를 써서 그를 2중고용한 것이다.
레녹의 지적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그가 능숙하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대꾸했다.
“아는 브로커들끼리는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방법이지. 일단 딥웹에 등록된 브로커를 바꾸는 일은 굉장히 번거롭고, 임시적으로 고객을 빌려쓰는 방식이 훨씬 편하게 먹히거든. 어차피 우리끼리 보수를 주고받으니 큰 문제도 되지 않고 말이야.”
“아직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안했는데.”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면 되는 문제 아니겠나?”
세바스찬이 커피 세 잔을 준비하고 자리에 앉자 매디슨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설계도
그는 발칸에서도 꽤 유명한 자동차 회사, 오터블의 개발부서 팀장으로, 회사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새로운 모델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프로젝트 막바지에 완성시킨 모델의 설계도를 운반하는 도중에 연원을 알 수 없는 프리랜서 일당에게 그것을 강탈당하고 말았다는 것.
얼굴에 난 상처는 그 과정에서 강도들과 투닥거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가능한 온전하게 설계도를 회수하고 싶지만, 그게 아니라면 유출된 설계도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을 조건으로 일을 맡기고 싶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와중에도 안절부절하는 매디슨을 세바스찬이 부드럽게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 마법사님은 지금까지 단 한번의 의뢰도 실패한 적 없는 아주 유능한 실력자입니다. 분명히 큰 도움이 되어주실 겁니다.”
“……….”
그 허무맹랑한 장담에 레녹이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지금까지 꽤 열심히 살아오기는 했지만, 애초에 의뢰라고 할만한 굵직한 일이 열건이 채 안되는데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매디슨은 그 말에 적지않은 위안을 얻었는지 금세 안색을 회복했다.
세바스찬은 그 뒤로도 매디슨을 아주 정성스럽게 어르고 달래가면서 의뢰에 필요한 정보들을 뽑아냈고, 종국에는 아주 평온해진 직장인을 곱게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했다.
은색으로 빛나는 세단을 타고 멀어지는 매디슨의 모습을 바라보던 세바스찬이 말없이 품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물었다.
허공에서 둥둥 떠오른 라이터가 알아서 불을 밝히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레녹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저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비스업의 고단함이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레녹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레녹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매디슨이라는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말고 알 수 있는게 있나?”
“……그걸 알고 있다면 길게 말할 필요가 없겠군.”
흡족한 미소와 함께 매디슨이 앉아있던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세바스찬이 레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에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식의 뿌듯함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설계도를 빼앗으려는 강도와 싸우다 다친 상처가 고작 입술에 피멍이 드는 정도라니, 허풍도 정도가 있지….. 듣기 거북해질 정도던데.”
오터블 기업의 새로운 프로젝트.
그 설계도의 존재를 알고 강탈하려고 찾아온 강도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대놓고 드러내고, 정작 매디슨은 멀쩡하게 놓아준다?
심지어 한차례 주먹다짐을 해놓고 고작 입술에 피멍만 들게 만들어 곱게 돌려보낸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레녹이 알고 있는 발칸의 생태계는 그렇게 상냥하고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가지가 있겠지.”
테이블 아래쪽에서 와인을 꺼내든 세바스찬이 능숙하게 잔 두개에 내용물을 채워내며 말했다.
“매디슨이 강도들과 내통한 채 거짓말을 하고 있다. 혹은ㅡ”
“내통했다가 역으로 배신을 당했다.”
“정확해.”
단순히 강도들과 한통속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면 굳이 세바스찬을 찾아올 필요도 없다.
선량한 피해자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이 바닥의 인물들은 조연 역할조차 해줄 수 없는 이들뿐이니.
하지만 그가 설계도를 빼돌리기로 해놓고 그 일행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회사에도, 강도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혼자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리랜서가 필요한 상황.
딱 세바스찬이라는 브로커의 도움이 닿을 수 있는 분야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매디슨 씨에게는 유감이지만, 난 오터블 기업의 사장과도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네.”
세바스찬은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들은 모두 녹음되어 고스란히 사장의 메일함으로 보내질 예정이지. 아마 매디슨 씨는 내일 경찰을 만나느라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어질거야.”
“………”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뱃속에 칼을 품고 있다는 말이 실로 어울리는 사람이다.
레녹이 생각하기에는 세바스찬의 모습이 오히려 제니보다 일반적인 브로커의 이미지에 가까워보였다.
세바스찬은 그런 레녹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듯 재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물론 우리 마법사님을 상대로 이런 개수작을 부릴 생각은 결코 없네. 이걸 눈앞에서 직접 보여준것도 내 패를 까고 신뢰를 얻기 위함이기도 하고. 내가 미쳤다고 마법사를 상대로 전자기기를 들고 헛손질을 하겠나?”
…..말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온다는건 제니와 또 비슷한 면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매디슨이 정말로 설계도를 빼돌리려다 역으로 뒤통수를 맞은거라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있었다.
“결국 구해야 하는건 매디슨의 자백이 아니라 강도들의 행적이 되겠군.”
“밥먹듯이 현상범을 잡아들이던 바운티헌터, 반의 실력이 필요한 시점이지.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나?”
왜 하필 그를 불러서 이런 일을 맡기나 했더니, 현상범을 잡아들이던 반의 커리어를 보고 내린 결정이었나.
물론 그가 레녹이 어떤 방식으로 현상범들을 추적해 다녔는지는 몰랐겠지만, 꽤 날카로운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매디슨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고, 어떤 방식으로 의뢰를 풀어나가야할 지 모두 생각을 마친 뒤에 레녹을 호출할 생각을 했다는 말이니.
이 정도로 신중하고 판단력 좋은 브로커라면 한번쯤 같이 일해봐도 괜찮겠지.
때로는 의뢰의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결심이 설때도 있는 법이다.
레녹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대신 현금이 아니라 다른 걸 보수로 받고 싶군.”
“흠, 돈이 아니라 다른걸 원하는 손님은 까다롭기 마련인데. 일단 들어는 보지.”
세바스찬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녹이 이런 요구를 해올 줄 알았다는 양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당장 세바스찬에게 모든 정보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 판에 끼어들려는 기업들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말해두어야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다이크 입장에서는 이런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건 레녹이 알 바가 아니었다.
처음 작전을 이따위로 설계한 뒤로 레녹은 이미 파노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 상태로 굳이 신용을 지키겠다고 입을 꾹 다무는것은 멍청한 짓이다.
오히려 레녹은 앞으로 적극적으로 다이크의 이름을 슬쩍 흘리면서 적당한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이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 마주쳤던 시거 뱅의 벡같은 이들이, 레녹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드는 대신 그 뒷배에 신경을 쓸수밖에 없도록.
아무리 원한관계를 감수하겠다고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수고를 감내해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맡은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파트너를 상대로는 더더욱.
적당히 사정을 축약한 레녹의 설명에 세바스찬이 천천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