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40
약먹는 천재마법사 840화
인수인계(8)
-격투장에서 벌어진 사태는 어느 정도 수습이 끝났다.
자정에 가까워진 어두운 하늘.
레녹은 저택 옥상에 걸터 앉아 휴대폰을 든 채 머피의 설명을 전해 듣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일단 보류. 구체적인 평가는 현장에 와 있던 디자이너들이 전부 대피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지.
“클라이언트들은?”
-대부분이 동의했다. 아마 너 때문이겠지.
다소 끈적하게 느껴지는 힘없는 청년의 목소리.
-견뢰와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많아서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어. 당분간 이번 일로 뒷말이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당분간?”
-그 자리에서 네놈의 폭거를 지켜본 눈이 수천 개가 넘으니까. 입막음을 대가로 찔러준 돈이 떨어지면 소문이 돌지 않겠나.
“돈을 찔러줄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무슨 대단한 비밀을 들킨 것도 아니잖나.”
지하격투장에 있던 다른 모든 관중들에게는 적당한 돈을 찔러주는 것으로 입막음을 한 것인가.
경기를 지켜보던 클라이언트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자금을 마련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겠지.
레녹의 말에 머피가 그제야 음침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겠지. 네 악명을 생각하면 아무리 입이 가벼운 놈이라고 해도 한동안은 닥치고 있을 테니까.
“…….”
-소문으로 질리도록 듣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더군. 확실히 그따위로 깽판을 놓고 다닌다면 온갖 괴담만 잔뜩 끌고 다닐 수밖에 없겠어.
“본의는 아니다. 알고 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군.
피곤함에 절여져 있던 머피의 목소리에 조금 활기가 도는 듯했다.
-넌 스스로가 어느 정도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아. 그건 위계를 오르는 반동으로 미쳐버린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광기지.
“…….”
-나는 정신의학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것이 아주 극도로 특이한 종류의 자기암시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번 일에 협력해 줘서 고마웠다.
레녹이 입을 다문 사이 머피가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재능의 ‘기준’을 과소평가했어. 인정하지. 내 패착이다. 기회가 있을 때 서두르고 싶었던 오만이었지.
“…….”
-결과적으로 잘 수습되어서 다행이지만, 어쩌면 난 오늘 기껏 쌓아 올린 내 고객들과의 신뢰를 저버려야 했을지도 몰라. 그건…….
머피는 무엇을 목적으로 매혈을 비롯한 도핑사업에 뛰어들어, 대륙 각지의 권력가들과 라인을 만들고 있을까.
그건 그가 아르스노바에서 탈출한 뒤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멸망한 중앙도시에서 머피는 무엇을 보고 도망쳐 나왔기에. 의미를 잃어버린 대륙의 중심에 무엇이 남아 있기에.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머피가 수화기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진기록은 추후 통신으로 보내주지. 약속대로 데이터베이스를 한 번 더 사용할 용량을 남겨놓을 테니 원하는 때 찾아오도록. 기다리고 있겠다.
뚝!
대답을 듣지 않고 끊어진 전화. 아마 다시 건다 해도 받지 않겠지.
애초에 저쪽에서 먼저 통화를 걸어온 적이 있었는지나 의심스럽다.
그만큼 이 사업 자체가 머피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 터.
하지만 레녹은 당장 알아낼 수도 없는 머피의 과거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휴대폰을 집어넣고 걸음을 돌렸다.
은은한 월광이 비추는 저택의 응접실 발코니 끝에서, 그를 찾아온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달빛 아래 선명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걸어 나온 레녹이 웃었다.
“오랜만이다, 이벨린. 잘 지냈나?”
* * *
어두운 방 안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 유령처럼 희미하고도 흐릿한 기척.
아니, 굳이 따지자면 요르타의 군령들보다도 그 존재감을 숨기는 솜씨는 완벽했다.
레녹조차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이민 순간에야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을 만큼.
“좋은 집이네.”
발코니에 기대선 채로 멈춰선 레녹을 두고 이벨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중심구역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도, 생활구역에 가까워서 쓸데없이 눈에 뜨이지도 않고.”
“…….”
“오래된 저택을 편법으로 리모델링한 물건이라 거래 가능한 매물로 잡히지도 않지. 꽤 예전부터 현물로만 거래되어 왔을 거야.”
소파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앉은 그녀가 말했다.
“근래 시정부에서 30번대 구역까지 거주민 등록을 세심하게 처리하고 있어서 이런 곳은 구하기 어려울 텐데. 용케 손을 썼네. 재주도 좋아.”
“몇 번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더군.”
혼자 살아가기 위한 은신처를 구하는 것은, 레녹이 발칸에 도착한 당시부터 꾸준히 해왔던 일이다.
이제는 다비의 도움까지 받아 전산상의 추적이나 기록까지 피해오고 있으니, 이벨린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겠지.”
침묵하던 이벨린이 수긍했다.
“넌 어디서 뭘 하든 항상 요령 있게 처리했으니까.”
“…….”
무언가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이벨린의 말.
레녹이 식재료가 들어 있는 봉투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품 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문 채로, 편하게 기대 불을 붙인다.
치익!
“어떻게 알고 왔지?”
연기를 훅 뿜어내며 레녹이 물었다.
“네 말대로 여긴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매물이야. 나름 신경을 써서 구했지.”
“…….”
“거래 내역이든 현물이든 세탁을 몇 번 거쳐서 꼬리를 잡기는 어려웠을 텐데. 역시 에이전트 출신은 다른 건가?”
“아, 그건 아니고.”
이벨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라피스한테 도움을 받아 등대를 사용했어.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말하니까 바로 도와주던걸.”
“……뭐?”
레녹이 다소 황당한 듯 반문하는 사이, 이벨린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내가 아는 너라면 거주지를 옮길 때 흔적을 아예 남기지 않을 것 같았거든. 또 그러면서 개인연구를 위해 비교적 넓은 부지를 지닌 매물을 원할 테고, 전입 과정에서 아무런 티가 나지 않게 처리하겠지.”
“…….”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발칸 중심지대를 돌아보며 발품을 팔았을 뿐이야.”
이벨린의 입이 순간 삐죽 튀어나왔다.
“설마 저택과 연구실을 분리해 버릴 줄은 몰랐지만. 그것 때문에 시간이 예상보다 다섯 배는 더 걸린 것 같은걸.”
등대의 능력을 사용해 2, 30번대 구역을 한 번에 내려다보면서 레녹이 원할 법한 부동산 매물을 일일이 찾아다녔다는 말인가.
사실상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 레녹의 주소를 찾아낼 거의 유일한 방법임은 틀림없지만, 그조차도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했으리란 사실은 분명했다.
“다섯 배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레녹이 연초를 문 채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네겐 시간이 많을 테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군.”
“비꼬는 거야?”
“그럴 리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강한 백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농담이다.”
차갑게 변한 이벨린의 표정에 레녹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헛기침을 하며 연초를 문 레녹이 한쪽 무릎에 기댄 채로 대답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이벨린과 함께 일했던 때가 언제였던지. 기억을 돌이켜 보면 꽤 오래전의 일이다.
오히려 이벨린과 한판 붙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더 먼저였을 정도.
랜덤박스를 막 만들었을 당시 이후로는 사실상 직접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자리를 비웠다. 오랫동안 답장을 못 한 건 미안하군. 이제 괜찮아.”
“정말?”
이벨린이 투명한 시선으로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뭘 묻고 싶은 거지?”
불이 꺼진 거실 위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레녹을 응시하던 이벨린이 눈짓했다.
“계속 아프잖아. 그렇지?”
“…….”
“이제는 오니온의 일 때문만은 아니야. 네 문제들 중 상당부분은 너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들이지.”
“그건…….”
“계속해서 대륙을 여행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대체 뭘 찾으려고 하는 거야?”
무어라 말하려던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궁사는,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댈 수 있을 만큼 레녹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애매한 거짓말로 핑계를 대보았자 그녀 같은 실력자를 상대로는 무의미한 일.
레녹이 정기적으로 발칸을 떠나려고 한다는 것도, 그 이유가 단순히 부상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대화를 나누고,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무심결에 느껴지는 본능적인 추측과 확신.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고개를 돌려온 그 미묘한 간극과 위화감에 대해, 이벨린은 묻고 있었던 것이다.
“……꼭, 아파서만 그런 건 아니야.”
그렇기에 레녹은 어느 정도 진실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지. 틀린 말도 아니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찾고 있다는 거야.”
“블랙컨슈머 프로젝트를?”
“아니, 이유를.”
“…….”
레녹이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또 누구였는지. 위계를 초월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그곳에 있지.”
“그런 건…….”
이벨린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레녹의 재능과 역량에 대해, 그가 가진 잠재력에 대해 이벨린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프리랜서로 의뢰를 시작해, 샬로테의 공장에서 마주쳤던 그때부터. 8레벨의 대마법사가 되어 서로를 마주하기까지.
남들과는 궤가 다른 싸움과 경험이 있었다곤 해도, 레녹의 성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월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겠지.
이벨린 역시 알면서도 굳이 그것을 레녹의 앞에서 직접 지적하거나, 물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레녹 역시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기에 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르타와 마키나가 차례대로 흔들리고, 대륙 각지의 거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발칸도, 그 구역 사이에 섞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레녹과 함께하던 동료들과 레녹 본인마저도 그를 피할 수는 없겠지.
“네가 누구인지, 또 누구였는지…….”
하지만 이벨린은 그 말에 동의하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글쎄, 나는…… 이제 그 말을 믿지 못하겠어.”
“……이벨린?”
“요르타가 무너질 때,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레녹조차 순간 말문이 막힐 만큼, 갑작스레 들어온 추궁.
어느새 이벨린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라피스의 도움을 받아 등대를 빌렸을 때, 요르타에서 벌어진 일들을 봤어.”
“…….”
“내가 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러면서도 또 의심했던 누군가가 크로켄 아실러스와 싸우는 걸 봤지.”
품 안에 손을 뻗은 그녀가 새카만 장갑 한 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샬로테의 공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블랙팰리스 공방에서 제작하는 장갑이자, 레녹이 꽤 오랫동안 애용한 물건.
그리고 중간결산 당시, 빅터의 신분으로 이벨린과 충돌하며 남겨두고 왔던 물건이었다.
“한가지 입장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에반의 이름으로 라피스를 도와주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지.”
이벨린이 말했다.
“하지만 두 가지 신분을 공유하며 다른 시간을 살아가려 한다면, 네게 세 번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일까?”
“…….”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네 세 번째 얼굴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이야?”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벨린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레녹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반과 에반, 빅터의 세 가지 신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헤쳐오며 겹쳐가는 인과와 인연 사이에서.
이벨린은 레녹이 살아온 시간을 초창기부터 지켜본 극소수의 지인들 중 하나.
그렇기에 그녀는 오직 그녀만이 알 수 있던 단서와 정황들을 마음 한편에 소중하게 하나씩 모아오며,
마침내 그녀 자신조차도 외면할 수 없는 한 가지 대답에 도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벨린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 코트 안에, 흑요석 가면을 숨겨두고 있어?”
“…….”
“너는 누구야?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거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벨린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늘 너를 찾아온 건, 단순히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선명한 녹색의 안광이 번뜩였다.
“네가 말해주었으면서도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들. 애써 눈 돌리고 모른 척해왔던 비밀들.”
“…….”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야겠어.”
쐐액!!
레녹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색 화살.
어느새 전신에 슈트를 두른 이벨린이 레녹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서로 위계를 초월한 뒤로는 제대로 붙어본 적이 없었지.”
“……이벨린.”
“바깥으로 나와, 반.”
바이저를 움켜쥔 이벨린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대답이 있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