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41
약먹는 천재마법사 841화
인수인계(9)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딜런과 함께 샬로테의 화장품 공장부지를 달리며 차오르던 숨도,
난생처음 보는 악어거인의 등장과, 비현실적이었던 괴력과 흉성도.
그리고 레녹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에이전트의 차가웠던 시선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기억을 모두 덮어쓸 만큼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 가치와 중요함과는 별개로, 스쳐 지나가듯 부질없으면서도 끝내 눈에 밟히는 기억들.
자정을 넘어선 새벽. 고요한 달빛 아래 선명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
탁 트인 벌판 아래서 레녹을 바라보는 그 시선조차 그러했다.
“이런 곳에서 시작해도 괜찮겠나?”
연초를 한대 문 채로 주위를 둘러본 레녹이 물었다.
33번 구역 끄트머리에 위치한, 한때는 동물원이었던 걸로 추정되는 버려진 벌판.
잔뜩 낡아 녹이 슬어진 우리와 철창이 사방에 드문드문 꽂혀 있는 황량한 풍경.
하지만 레녹은 이런 무대조차 두 사람을 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할 생각이라면, 이걸로는 한참 모자랄 텐데.”
각자 다른 방식으로 위계를 초월한 8레벨 극위능력자들의 대전.
하물며 경지에 오르는 동안에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구도자의 싸움이다.
레녹이든 이벨린이든, 어느 한쪽이라도 전력을 다한다면 이 에이리어 전체가 휩쓸려도 이상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벨린은 그런 사실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상관없어.”
철컥!!
손목 위로 장착한 단궁의 시위를 조정하고 바이저를 눌러 쓴 이벨린이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알아서 조절할 거라고 믿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이냐?”
“왜, 못하겠어?”
“…….”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듯한 그 목소리에, 레녹은 대답하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이벨린이 지금 레녹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사실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레녹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를 속이 풀릴 때까지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패서 마음이 편해지고 싶은 것도 아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절한 무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폭력이라는 수단 자체를 선호하지는 않았으니까.
이벨린 마르시아를 움직이는 것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의무와 긍지다.
그녀와 같은 천고의 궁사가 에이전트라는 특무기관에 묶여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의 의지.
스스로의 재능과 무위를 질서라는 규칙 아래 놓아두어야 한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레녹은 그런 이벨린의 방식에는 동의하지도, 또 공감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기지가 더할 나위 없이 고되고 고결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가지 않은 길이기에 눈부시고, 가지 않을 길이기에 동경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벨린 역시,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마법사에게 계속해서 시선이 끌렸을지도 모르지.
“…….”
메마른 풀밭 한복판에서,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본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던 이벨린의 입술이 조용히 달싹였다.
“멋대로 집을 찾아온 건 미안해. 숨기고 싶었을 텐데.”
“괜찮다.”
레녹이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발칸 최고의 에이전트가, 승천자의 공능을 빌려 발품을 팔아야만 발각될 정도라면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다는 증거일 테니까.”
“…….”
이벨린이 레녹의 저택을 찾은 것은 등대라는 승천자의 공능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하물며 등대의 능력을 빌리고도, 이벨린 정도 되는 순찰자가 특유의 관찰력을 사용해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라면.
그건 오히려 레녹의 연구실과 거주지를 숨기기 위한 노력이 완벽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겠지.”
“어째서?”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으니까.”
레녹이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들켜도 괜찮을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여지를 남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그래도 이해해 줄 거라고 멋대로 기대했을지도 모르지.”
“…….”
“혼자 이해하고, 또 기대하고 실망하면서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있던 거야.”
떨어지는 별빛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다시 눈을 맞춘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반.”
아무렇지도 않게 이벨린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골라, 그녀의 폐부를 찌른다.
스스로 선택해놓고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녀의 등을 밀어주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이벨린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사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인 것과는 반대로.
수천 개의 마법을 다룰 줄 알아도 한 사람의 고민에 제대로 답하지 못해 여기에 있다.
분명 이것이, 레녹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겠지.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대답을 듣겠다고 했었지. 네 말이 맞아.”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연초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키이잉……!!
동시에 레녹의 손끝을 타고 저릿한 마력이 피어올라, 천천히 피부 위를 뒤덮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짓이 더 와닿을 때가 있는 거지.”
“…….”
“와라, 이벨린 마르시아.”
코트를 젖히고 한 손을 뒤로 가져다 댄 레녹이,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네가 궁금해하던 것이 정답인지, 직접 확인해 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바이저 너머로 비춰지는 이벨린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았을 뿐.
그것이 공사와 상리를 넘어선 사냥꾼의 시선이라는 것을 레녹이 깨달은 순간.
쐐액!!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한줄기 섬광이 미쳐 날뛰었다.
허공에서 비틀리듯 춤을 추며 회전하다, 레녹의 신형을 향해 내리찍힌다.
두 눈으로 보고 반응하면 늦고, 두 귀로 듣고 움직이면 뒤쳐진다.
레녹의 저열한 오감 따위는 시작과 동시에 뛰어넘어 앞서나가는 궁사의 일발.
언제나 그렇듯 화살은 그녀가 지닌 미련과 고민마저도 시원스레 떨쳐내고 내달렸다.
[점멸(點滅)]파앗!!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공간을 도약한 찰나, 레녹이 서 있던 자리를 검은 섬광이 관통했다.
화살대 전체가 땅 아래 박혀 그대로 사라지는 섬찟하고 강렬한 가속.
애매하게 막으려고 하면, 또 어중간하게 피해내려 하면 그 자리에서 꿰뚫릴 뿐.
그녀와 같은 실력자를 상대로 수단을 아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점멸을 사용해 선공을 피해낸 레녹이 어깨를 주무르며 시선을 돌렸다.
‘이벨린 마르시아가 원거리 사격을 사용하는 방식은 세 가지.’
맨손으로 화살을 던지는 투척. 손목에 부착한 단궁을 사용하는 속사. 그리고 그녀의 몸보다 큰 대궁을 통한 저격.
하지만 화살을 시위에 걸지 않고 던진 방금 그 선공조차, 평범한 궁사의 역량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다.
‘조준과 사격에 걸리는 딜레이가 아예 없다. 궤적을 읽지 못하는 순간 피격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화살을 꺼내 쥐는 그 순간이 레녹이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 동작.
그 이상을 읽어내려 들었다가는 외려 타이밍을 빼앗기고 공방의 주도권을 내주고 말겠지.
예나 지금이나 이벨린의 전투 방식과 스타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위계를 초월하기 전에도 이미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 재능을 완벽 이상으로 갈고 닦아 수단과 방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힘으로 만들었을 뿐.
“…….”
이벨린은 중심을 잡고 돌아서는 레녹을 말없이 바라보다,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던 녹색의 눈동자가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기척이 그 자리에서 지워졌다.
사악……!!
레녹의 마력감지로도 겨우 그 흔적만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흐릿하기 그지없는 존재감.
8레벨에 도달한 뒤에도 이리 완벽하게 기척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힘과 위계를 완벽한 통제 아래 놓아두고 있다는 증거.
어둠 속에서 이벨린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가속하며 순식간에 자리를 바꾸는 것이 느껴진다.
레녹의 마력감지를 완전히 피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좌표와 방향을 전환하며 감각을 혼란시키고 있는 것.
타탁!!
풀밭을 스치는 희미한 발소리. 그곳에 내려앉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가벼운 걸음.
녹이 슨 철창 사이를 스치는 이벨린의 손끝이 희미하게 비틀리고, 모습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느낀 찰나.
서로 다른 세 방향에서 동시에 검은 화살이 회전하며 쏘아졌다.
쐐애애액!!
귀청을 관통하는 파공음. 공기저항을 뛰어넘은 속도와 궤적.
시위에 매겨지지 않음에도 그 속도는 의념을 사용한 영창이나 참격을 한 발 앞질러 나간다.
거리를 두고 조준해 명중이란 결과를 만드는 궁술을, 단 하나의 공정으로 압축해 휘두른다면 이러할까.
휘익!!
무릎 아래를 스치는 섬광이 둘.
등골을 빗겨나가는 화살대가 셋.
옆구리와 갈빗대를 노리는 의념이 다섯.
검은 눈물처럼 떨어지며 늘어나는 화살의 개수와 궤적이 쉴 새 없이 뒤바뀌며 감각과 예측을 어지럽힌다.
관성을 조작해 화살의 궤적을 바꾸고 속도를 조절하는 이벨린 마르시아의 소우주.
이벨린은 이 싸움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깨닫고도 두 눈을 감은 채로 느릿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코앞에서 쇄도하는 화살의 속도에 비하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아도 될 법한 느릿한 고동.
그러나 마력을 다루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속도나 반응의 개념이 아니다.
인지하는 순간 이미 그곳에 있다. 이해하는 순간 이미 시동한다.
내면에서 회전하는 마력과 의념은, 이미 속도의 개념을 뛰어넘어 선제의 영역에 이르고-
파바밧!!
두 번의 점멸. 세 번의 뒷걸음질. 그리고 열다섯 번의 완벽한 회피와 여섯 번의 충돌.
온 몸을 꿰뚫을 듯 쇄도하던 화살이 마법사의 신형을 휘감고 비틀리다 엇갈리며 튕겨져 나가고.
카가가가각!!!
유리가 깨져 나가는 소음과 동시에 레녹의 몸이 무수한 화살의 궤적 사이로 일렁이듯 빠져나왔다.
단 한 번의 반격조차 없이, 세 번의 점멸과 다섯 번의 실드 영창으로 8레벨의 궁사가 쏘아낸 모든 공세를 파훼하는 신기.
부서진 실드 파편과 화살의 그림자가 뒤엉켜 레녹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져내린 그 순간.
키릭……!!!
어둠 저편에서 이벨린이 레녹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레녹을 제대로 겨누는 것도 아닌,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손등을 내보이는 형태.
팔목에 매달린 단궁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은, 굳이 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직 화살을 쏘아낸다는 기능 하나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장점과 특징을 희생한 간소무장.
타고난 궁사인 그녀가 ‘궁술’이라 정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
하지만 그것을 레녹을 향해 겨눈 그 순간, 레녹은 자신이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천부적인 이성과 무수한 전투 끝에, 재능과 경험을 남김없이 갈고닦으며 완성된 마법사의 직관.
쿠웅!!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소환술을 영창해, 거대한 갑각방패를 눈앞에 불러냈다.
사도 마르티네스의 갑각파편 위로 이벨린이 쏘아낸 화살이 충돌한 그 순간.
“……!!!”
레녹은 오감을 넘어선 직관이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직후 방패 안쪽에서 어두운 섬광이 번뜩이며, 그대로 목덜미를 스치고 실드를 깨부수며 빗나갔다.
카가가각!!
사도의 갑각방패. 여지껏 크로켄 아실러스 말고는 손상조차 내지 못했던 불가침의 장벽이, 관통당했다.
하지만 레녹은 마력감지를 통해, 이벨린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그 자리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
“다중격발. 방패 안에서 한번 더 추진력을 얻는 셈인가?”
이벨린의 소우주, 관성편향은 물체에 가해지는 관성의 힘을 의념의 힘으로 비틀어 편중시키는 능력.
그 심상은 그녀의 육신을 다루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손끝을 떠난 화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방패 안에서 다섯 번이 넘는 관성중첩으로 관통력을 끌어올렸어. 화살의 형태조차 잃어버린 파편을 무기로 삼았군.’
갑각방패가 관통당한 자리에는 화살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벨린은 애초에 화살 자체가 방패에 가로막힐 것을 예측하고 충돌 직후 화살을 분쇄.
그 파편이 비산하는 관성을 모조리 한 점에 그러모아 관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그 과정을 찰나의 순간 다섯 번 넘게 중첩시킨 결과, 갑각방패를 관통한 것은 머리카락보다 얇은 파편 하나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레녹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알고 있다.’
이벨린은 레녹이 인지할 수 없는 빠른 선공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고 있다.
레녹이 사용하는 마법과 장비, 그것을 다루고 휘두르는 방식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반과 에반. 그 두 가지 신분으로 움직이는 사이 함께 싸워온 유일한 동료이자 강력한 초인.
서로 목숨을 구하고, 또 구해주었던 시간만큼이나 레녹이 어떤 마법사인지 그녀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패를 관통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시간을 끌고 다음으로 준비하는 것은-
‘대궁을 이용한 초장거리 저격.’
파앗!!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점멸을 사용해 물러나며 양손을 모으고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천부적인 궁사인 이벨린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성명절기와도 같은 필중의 마궁.
단궁으로 쏘아낸 방금과는 달리, 정면에서 막는 것 자체를 상정하지 말아야 한다.
키이잉!!
마력감지를 넓고 얕게 펼쳐서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전해 듣는다.
전조조차 없이 시작되는 저격을 피해내기 위해서라면, 발사 직후 그 방향과 궤적을 읽고 움직여야 수싸움에서 앞서나갈 수 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진둔의 결계를 펼쳐 자신의 주변에 영창해 두르려던 순간.
“계속 그렇게 숨기기만 할 거야?”
등 뒤에서 이벨린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 려퍼졌다.
흑색의 화살 한 자루를 역수로 움켜쥔 채로, 어깨를 비틀어 쏘아 올리는 가벼운 손짓.
이벨린의 손이 그대로 레녹의 그림자를 풀어헤치듯이 내리그어 휘저으려던 찰나.
레녹의 형상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며 자세와 방향을 뒤바꾸어 피해냈다.
“……!!”
파바밧!!
허공에서 번뜩이며 엇갈렸다 사라지는 두 사람의 그림자.
제자리에서 점멸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벨린의 지근거리 공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
이벨린이 알고 있는 레녹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유려한 근거리 반응과 회피.
그것만으로 입매를 일그러뜨린 이벨린의 마력이 일순 강하게 회전하고, 손을 떠난 화살이 음속을 뛰어넘어 레녹의 턱 아래 꽂혀 들었다.
점멸을 사용했다 다시 나타나는 자리에 때려 박은 예측 투사.
파아아아앙!!!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레녹의 신형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내 이벨린의 바로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벨린의 공격이 완벽하게 허공을 스치며 빗나가고, 녹색의 안광이 유려하게 흔들렸다.
“후우……!!”
진둔의 요람에서 손에 넣은 파이겐바움의 반지.
사용자를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허수공간으로 강제로 이동시켜, 모든 공격을 회피하게 만들어주는 유물.
방금 레녹은 이벨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는 쿨타임을 지닌 아이템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건 레녹이 이벨린의 공격이나 판단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이벨린의 움직임이 서로 알고 있는 전투논리에 따르지 않은 비상식적인 것이었기 때문.
“……너.”
레녹의 방패를 뚫어내 신경을 돌린 직후, 이벨린이 했어야 하는 판단은 대궁을 사용한 초장거리 사격뿐.
그녀가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자, 전투가 시작된 직후 벌어진 거리를 사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궁을 사용해 저격을 시작하는 대신, 오히려 거리를 좁히고 화살대를 직접 휘두르는 접근전을 선택했다.
언뜻 보기에는 허를 찌른 것처럼 보이지만, 레녹과 같은 전투마법사에게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기습.
레녹 정도 경지에 오른 전투마법사는 거리를 좁힌다고 흔들리지 않는다.
외려 가까운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즉발 영거리 고화력의 영창을 때려 박아, 상황을 뒤집을 수도 있었으니.
그러기 위한 회피수단도, 구명의 방법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벨린이 모를 리가 없을 터.
실제로 레녹은 파이겐바움의 눈동자를 사용해 이벨린의 공격을 피해낸 직후, 얼마든지 치명적인 반격을 쑤셔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드러낸 허점을 알면서도 먼저 움직이지 않은 것은, 이벨린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이벨린은 레녹을 죽이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상을 입히고 싶어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수천 미터 저편에서 대궁의 저격만이 날아들었을 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8레벨의 초인끼리 제대로 붙어보자고 말했으면서도, 주변의 여파를 고려해야만 하는 이 에이리어를 무대로 잡은 것도.
궁사에게 외려 불리한 수준까지 거리를 좁히고, 규모가 큰 기술을 사용해서 무작정 날뛰지 않는 것도.
이벨린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또 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지금까지 전격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레녹 역시 알고 있을 거라고, 진작에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더 할 수 있잖아.”
이벨린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잖아.”
“…….”
레녹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깊게 알고 지내는 사람일수록 그 능력과 재능을 더욱 고평가한다.
세간의 소문으로 부풀려지기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 그릇을 따라잡지 못하며, 외부의 평가로 재단하기에는 기준이 한계를 가늠하지 못한다.
레녹이 숨 쉬듯이 보여주는 그 모든 행적과 시간이 명성보다 더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에.
그리고 이벨린은 그런 레녹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보아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과 어떤 적수를 상대로든.
레녹은 상상하는 것 이상을, 기대받는 것 이상을 해낼 수 있다.
환경과 장소, 조건을 가리지 않기 위한 레녹의 노력은 오래전부터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래.”
고개를 끄덕인 레녹이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뗀 그 순간.
사락……!!
새카맣게 물든 마력사가 손끝을 타고 흘러내리며, 섬뜩하고 흉포한 기세로 공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