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81
약먹는 천재마법사 881화
운명을 보는 눈(17)
“농담이에요, 농담.”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마디. 날선 표정으로 거리를 벌리는 라피스를 보며 제니가 손사래를 쳤다.
“뭐, 나도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청의 눈의 행보를 존중하기도 하고.”
영 믿지 못하는 라피스를 두고 제니가 웃었다.
“하는 일 때문인지, 현실적인 타협안을 굉장히 선호하는 편이라. 그런 점에서 등대지기의 사명에는 공감하는 바가 있죠.”
“…….”
“상황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 말하고 싶지만…….”
그 순간, 어딘가 의욕이 없어 보이던 제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도 난 반의 편이라서.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겠어요.”
“…….”
청의 눈이 세계 곳곳에 등대를 세우는 이유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사적인 감정으론 움직이지 않는 성정인가.
탑의 관리를 맡고 있는 데다, 그 미친 마법사가 일을 맡기고 갈 정도라면 굉장히 뛰어난 수완가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처럼 견뢰가 떠나자마자 라피스의 앞에 나타난 것 역시, 분명히 미리 의도된 언동이겠지.
호의를 사려는 걸까, 경고를 주려는 걸까.
스스로를 제니라고 소개한 여자를 더욱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말과 태도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
아마 이런 식의 설득과 거리조절에 굉장히 경험이 많고 능숙하기 때문이겠지.
라피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순간, 제니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눈, 별로 안좋다면서요? 시력보조용 아티팩트나 안대같은 거 필요하지 않아요?”
“아뇨. 문제는 없어요.”
시력이 조금 떨어지고 공능 사용에 제한이 걸리기는 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일에는 문제가 없다.
애초에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에 얽매이기에는, 라피스 자신의 위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니.
“뭐, 그렇다면야…….”
제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서야 들고 있던 짐꾸러미를 라피스의 곁에 내려놓았다.
“미리 말했지만 탑 안에선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아요. 반이 허락했으니 막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외부인과 연락을 시도하거나, 접촉하는 일은 자제해줬으면 좋겠어요.”
품 안에서 작은 담요와 물병, 간단한 먹거리를 의자 옆에 내려놓은 제니가 걸음을 돌렸다.
“난 사람을 죽여본 적이 많지 않아서, 반처럼 고통 없이는 보내주기 힘들 것 같거든.”
“…….”
스스로를 제니라고 밝힌 여성이 한 말은, 라피스에게 겁을 주기 위한 협박 따위가 아니었다.
별로 하고 싶지만, 필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
그렇기에 라피스는 외려 제니가 말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동을 나가는 계단은 저쪽에 있어요. 일단 반 몰래 만들어두긴 했는데, 보이는 족족 철거해 버리니까 오래 남아있는 게 없네.”
제니가 계단을 타고 걸어 올라가며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그리고 먹이는 30분에 한 번씩 줘야 하니까 다 떨어지면 말해줘요.”
“……뭐라구요?”
납치된 인질을 대하는 게 아니라, 마치 탑의 허드렛일을 맡기는 듯한 제니의 설명.
심지어 먹이라니, 이 지하공동에서 누구의 먹이를 라피스가 챙겨줘야 한다는 말인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라피스가 머뭇거리며 의자 옆에 놓인 물과 먹거리를 집어 든 순간.
라피스의 등 뒤, 공동의 어둠 저편에서 푸르스름한 안광이 번뜩였다.
* * *
[꺄악……!!]지하공동 저편에서 들려오는 라피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제니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탑의 수호령수와 붙여두면 그래도 잠깐은 저 등대지기의 시선을 끌 수 있겠지.
라피스의 눈이 마탑을 구석구석 살피기 전에, 마저 처리해야 할 이들이 한참 남아 있었다.
“……정신 나갈 것 같아.”
라피스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은, 어느새 피로에 절어 녹아내릴 것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반이 라피스를 납치해 마탑에 구금해둔 시점에서 마탑에 도착한 공문이 500통을 훌쩍 넘는다.
시정부의 직속 공기관이나 에이리어의 구청, 경찰과 군대만 헤아려도 그 정도였으니, 음지쪽 연락을 더하면 얼마나 될까.
반이 21구역에 나타나 도시를 뒤집어놓은 순간부터 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전화기가 떨어진 적이 없다.
“18구역에서 26구역까지 소속 구청의 협조요청. 구속영장, 압수수색 내용 증명서. 또 뭐가 더 있었지?”
까마득히 높은 마탑의 원형 복도를 걸으며 제니가 쉴 새 없이 휴대폰을 두들겼다.
걸려오는 전화는 모조리 수신거부를 때리고, 탑의 구성원에게 전달할 대응 매뉴얼을 실시간으로 수정해 배포한다.
“중앙의회와의 거래에선 이번 일을 모른 척해야 해. 그쪽에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할 텐데…….”
당장 이번 일에서 제니를 비롯한 마탑 관계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아니, 당장 마탑과 시의회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해선 안 되겠지.
반이 어떻게 움직여 이 사건을 처리하는지와는 별개로, 마탑이 주관하는 아이템 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비대해져 있다.
제니와 반이 그만큼 탑내 협력사업을 성공적으로 유치해, 도시 안팎의 사업체들을 적극적으로 끌여 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제 와선 시의회조차 마탑에 부여했던 특권을 회수해 가는 것조차 어렵겠지.
무리해서 권한을 회수한다 해도, 한번 구축된 수요는 사라지는 일 없이 음지로 파고들 뿐이란 사실을 중앙의회가 모를 리가 없다.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은 제니가 빠른 속도로 말을 토해냈다.
“벨버, 나야. 반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했어?”
-30번대 구역 쪽으로 가는 것만 봤어. 최근에 재개발이 확정된 유흥시설들이 대거 위치한 쪽이지.
“그럼…….”
-등대지기를 노리는 놈들이 자신을 찾아올 걸 아는 거지. 아무래도 정말 제대로 두들겨 부수려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벨버의 목소리에 희미한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후우…… 이걸로 30번대 구역의 재개발 속도가 빨라지면, 내가 미리 투자해 둔 부동산도 덩달아 상승장에 진입을-
“미친 새끼야.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을 때야?!”
-후후…… 난 깨닫고 말았어, 제니. 결국 이 도시에서도 플로어가 높은 투자방식은 형태가 없는 주식이 아니라, 절대 사라지지 않는 부동산-
“죽어!!”
폭언을 쏟아낸 제니가 그대로 통신을 끊고 다른 용병들에게 빠르게 다시 연결했다.
“펠릭스, 라피스와 만났어. 스텔라한테 얘기해서 인센티브를 조건으로 40번대 구역의 경계수준을 좀 더 끌어올리는 걸…….”
“수련. 삼영가주와 협상 끝났지? 성채 가주들이 증원 규모를 결정하면 바로 연락해 줘. 여차하면 탑 내 인력을 성채쪽으로 대피시키는 방안도-”
“밀라, 나야. 딜런이랑 연락이 닿았으면…… 라피스의 경호마법사랑 혼자 싸웠다가 패배했다고?!!”
제니가 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라피스가 들을까 봐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네가 말한 그 마법사 흔적을 추적하다 찾았는데, 26번 구역 외곽에 개처럼 패배해서 기절해 있더라. 아주 꼬라지가 말이 아니야.
“……딜런은 발칸에서 가장 강력한 재생능력자 중 하나야. 그 녀석을 상대해서 기절만 시켜놓고 도망쳤다고?”
-나야 어떻게 싸웠는지 모르지.
밀라가 부산스럽게 들썩이는 소리와 함께 이어폰 너머로 대꾸했다.
-근데 이 자식, 술냄새가 진짜 역겨울 정도인데. 설마 한잔 걸치고 싸운 건가? 갑자기 나도 좀 땡기는 걸.
이어폰 너머로 이어지는 설명을 듣던 제니의 표정이 순간 괴상하게 변했다.
“술을 먹고 싸웠다고? 아니, 아무리 딜런이라도 좀…… 너무 쓰레기 같아서 안 믿기는데.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봐야겠어.”
-그래, 무인택시 불렀으니까 40구역까진 금방 도착할 거임. 빨리 갈게.
“…….”
밀라와의 연결을 끊은 제니가, 바로 다음 대상에게 통신을 걸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평소에는 경우 없는 양아치에 알코올 중독자처럼 굴지만, 일적인 측면에서 딜런은 굉장히 신의 깊은 용병이다.
꼭 제니가 중개한 일이 아니더라도, 지명의뢰에는 꽤 성실하게 임하는 탓에 딥웹 내부에서도 등급이나 신뢰도가 굉장히 높을 정도.
하물며 딜런은 술에 취하고 나서도 반에게 굉장히 큰 도움을 받은 것처럼 종종 말하곤 했다.
그런 딜런이 하필 반이 직접 나선 일에서 술을 먹고 일을 망치려 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오면 확인하자. 오면.”
“총무님!”
그 순간, 탑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다급히 제니를 불렀다.
반이 직접 제작한 비밀서약을 통해 최근에 마탑에 하나둘씩 고용되기 시작한 마법사들.
그 중 대외적인 업무와 소통창구 부서 쪽에 영입한 마법사의 호출에, 제니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미구엘, 연락이 온 거야?”
“네, 그쪽입니다.”
미구엘이라 불린 남자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대답했다.
“접선 방식은?”
“아무것도 필요 없답니다. 자신들이 직접 연결할 테니, 풀 한 포기 자랄 정도의 공간만 결계를 풀어달라고…….”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풀어봐.”
“괜찮겠습니까?”
“이런 사태에 미리 반응을 살피기 위해 만든 곳이야.”
제니가 미구엘을 따라, 복도 끝에 위치한 널찍한 제단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저쪽에서 먼저 눈치를 챘다면, 직접 대응해야지. 시작해.”
“……알겠습니다.”
쿠르르릉!!
미구엘의 옆에 서 있던 수행원들이 제단 옆에 부착된 레버를 돌리자, 결계법진이 갈라지며 텅 빈 공터가 나타났다.
레녹이 제니의 부탁을 듣고, 마탑의 결계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회색지대를 예전에 만들어준 것.
마탑의 결계범위가 제단 위 공터를 중심으로 빗겨나가며, 외부의 접촉에 잠시나마 노출된 그 순간.
사라락!!
제단 위로 무수한 수풀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옥한 토양 아래 씨앗을 뿌리고 발아해,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 성장하는 과정을 수백 배로 압축해 재현하는 듯한 기묘한 모습.
동시에 제단 사방으로 저릿하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힘이 가득 차오르는 듯하다.
영성이 뛰어나지 않은 제니는 표정을 찌푸릴 뿐이었지만, 마법사인 미구엘은 달랐는지 기겁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엄청난 주력이다. 이건 분명 대수림의……!!”
드드득!!
제단 위로 자라난 수풀과 나무가 순식간에 공터 전역을 뒤덮을 듯이 무성해진다.
자연과 주력의 조화로 극대화된 성장력에 범벅이 된 탑의 제단.
그 공터 위로 자라난 나무등걸 사이에서, 무언가 갈라지듯 쪼개지며 솟구쳤다.
“…….”
갈라지며 쪼개진 나무등걸이, 마치 살아 있는 입의 형상처럼 변한 것을 제니가 눈치챈 순간.
나무등걸로 만들어진 입이 달싹이며 낮은 여성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거야.]“…….”
[지금 이렇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건, 우리의 인내심이 이해의 바다처럼 깊어서가 아니라는 걸.]담담한 어조와는 반대로, 격정을 감추지 못해 끓어오르는 듯한 격한 음색.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강렬한 살의를 겨우 눌러 죽이고 있음을 알면서도, 제니가 차갑게 웃었다.
“청의 눈에서는 다른 조직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대화방식을 즐겨 사용하는 모양이군요.”
[…….]“일부러 당신들을 위해 소통할 공간을 마련해 주었는데, 간단한 통성명조차 없는 건가요?”
[그리샤. 한낱 보잘것없는 주술사 나부랭이지.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지?]그리샤가 나무등걸의 입을 빌려서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선 실로 가당치도 않은 일일진대.]“…….”
[잘 들어라, 마탑의 관리자. 지금부터 세 가지 질문을 할 거다. 만약 하나라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뿌득.
나무등걸이 비틀리며, 기괴하게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그리샤의 의념이 끓어올라 폭주하기 직전에 도달했음을 제니가 직감한 순간, 그녀가 선포하듯 말했다.
[청의 눈 본대는 지금부터 중앙전선에서 물러나, 발칸을 향해 회군할 예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