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80
약먹는 천재마법사 880화
운명을 보는 눈(16)
등대지기의 사명을 물려받은 이들은 대대로 누구보다 멀리 보는 초견(超見)의 공능을 계승받는다.
단순히 눈이 좋다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보다 먼저 위기를 내다보고 위기를 예지하는 이들에게 주어졌던 힘.
아주 오래전, 문명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유달리 눈이 좋은 보초 한 명에게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재능.
하지만 장구한 시간이 흐르고, 바다와 대륙의 위치가 바뀌며, 수십억의 생명이 피어났다 죽어가는 사이에도 기적처럼 끊어지지 않고 계승되어 온 힘은 그만한 시간과 생명의 무게를 품고 권능의 개념으로 화해 있었다.
그저 멀리 보는 것만이 전부였던 재능은 어느새 현재를 넘어 과거와 미래를, 이 세계를 넘어 끝없는 암흑의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 힘의 주인에게 등대지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거창한 사명을 부여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그 시작 자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라피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물려받은 이 권능의 본질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인생도, 기억도, 과거도, 운명도. 보여주려 한다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
설령 원하지 않더라도 보여주고, 또 보게 되는 이 힘을 때론 저주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지금, 라피스의 앞에 앉은 청년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
서늘한 분위기가 감도는 무표정한 얼굴. 대충 쓸어넘긴 어두운 흑발.
겉으로 보이는 외견은 꽤 젊어 보이지만, 소문대로라면 실제 나이는 그 몇 배 이상이겠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말없이 연초를 태우는 모습.
“후우…….”
나른한 듯 의자에 기대앉은 그 모습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감돌았다.
등대지기이자 초견의 공능자, 라피스 팔시어가 이 남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사용하는 마법도, 마력의 흐름도, 근원심상은 물론이고 사소한 의념의 편린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인간의 형태를 띤 허무한 공허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묘한 위화감.
이 남자가 바로 거대도시에서 가장 미쳐 있다 불리우는 대마법사.
그리고 라피스를 지키던 에반을 날려 버리고, 그녀를 여기까지 납치해 온 장본인이었다.
“시선이…… 제대로 닿지 않는군요.”
이 거대한 흑요석 공동 어디에서도, 라피스 자신의 의념이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공간 전체가 의념을 빨아들이듯이 흡수해, 그대로 소멸시키는 듯한 기이한 현상.
견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력이 떨어진 채로는 공능을 사용하기 어렵겠지.”
“…….”
라피스가 무리하게 공능을 사용하다 그 반동을 겪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미 진작에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보란 듯이 라피스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린 라피스가 조용히 물었다.
“여기는 어디죠?”
“탑의 지하공동.”
견뢰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권역의 심처 안쪽이다.”
“…….”
8레벨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가 선포한 권역.
그렇기에 라피스같은 사명자의 의념조차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침잠하고 있는 것인가.
라피스는 견뢰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이 공간에 가둬두기만 할 뿐, 그 의중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실제로 수인을 맺을 수 없게 양손을 묶어둔 것 빼고는, 라피스를 속박하는 어떠한 구속도 없다.
당장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 공동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괜찮을 정도.
하지만 라피스는 일어나 견뢰에게서 도망친다는 멍청한 생각을 집어치우고, 곧바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중앙에서도 꽤 유명하죠.”
“…….”
“마드리치 오니온을 죽이고, 기계도시를 혼자 뒤집어놓고, 데드라이즈의 장성을 격파했다고.”
견뢰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많은 초인을 죽인 마법사라고…….”
다만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혼탁한 시선으로 라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그 안에서 아무런 감정이나 의지도 읽어낼 수 없다.
“저와 당신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을 텐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하지만 라피스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를 지켜주던 에반이 당한 시점에서, 무력으로 이 남자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피스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지닌 이 등대지기의 사명을 이어받을 계승자를 위해서.
최악의 경우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초견의 공능만큼은 주시자의 업을 받은 이에게 넘겨야 한다.
그 사실 하나만을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며, 라피스가 말했다.
“이번 일로 중앙에서는 제가 발칸을 방문했다는 건 물론이고, 이 만행까지 인지하겠죠. 이 도시를 둘러싸고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건가요?”
“…….”
“제 영혼을 파괴하고 권한을 빼앗을 생각이라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적어도, 이런 과격한 방식으론 절대로-”
“널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견뢰의 무심한 대답에, 라피스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청년이 던진 그 말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 자신이 있었기 때문.
그래, 어쩌면 기약 없는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저 말을 듣고 싶어 굳이 먼저 질문을 던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반과 파티샤가 다시 라피스를 구하러 와줄 거라는 기적을 기대하는 대신, 결코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하지만 견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부탁도 받았지.”
다 태운 연초를 손짓 한 번으로 증발시킨 견뢰가 나른한 기색으로 의자에 기댔다.
품 안에서 새로운 연초를 꺼내 불고, 불을 붙인 견뢰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뭐라구요?”
어떻게 방금 그 설명에서 그런 결론이 도출된단 말인가.
순전히 제멋대로인 대마법사의 대답에 황당한 듯 눈을 깜박이는 라피스를 두고, 견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팡이에 기댄 채 돌아선 견뢰가, 서늘한 시선으로 라피스의 하늘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널 여기 묶어두면 그 마법사를 비롯해 귀찮은 일을 편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
대번에 그 말을 알아들은 라피스의 표정이 확 변했다.
견뢰가 말하는 그 마법사가 누구인지, 라피스 역시 곧바로 이해해버렸기 때문.
설마, 이 피에 미쳤다는 마법사가 노리고 있는 건-
“에반 님은……!!”
라피스가 무심코 소리치다,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일과는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순전히 제 부탁 때문에 절 도와주신 것뿐이고요.”
“…….”
하지만 견뢰는 그런 라피스의 말에,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흥분했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네?”
“네가 말하는 가능성 역시, 필요하다면 마지막에라도 조치를 취해야 할 테니.”
이해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라피스를 두고, 견뢰가 그녀를 지나쳐 걸으며 고개를 꺾었다.
“주시자들의 사정에는 관심 없다. 그 업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기도 하고.”
“어, 어딜 가려는 거죠?”
당장이라도 탑을 떠나버릴 듯한 견뢰의 모습.
하지만 그에게 에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라피스로선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견뢰가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꿔먹어 당장 에반을 죽이려 들기라도 한다면-
견뢰는 막 지하공동을 나서려다, 라피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탑 내에선 자유로운 거동을 허락하지. 권능을 쓰지 않는 선에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게 무슨…….”
견뢰는 당장 라피스를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풀어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기대할 자격 따윈 라피스에게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결말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다.
견뢰가 알고 있고, 라피스가 아직 깨닫지 못한 에반에 대한 중요한 무언가.
라피스가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지금 이 사태와 연관 짓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하지만 그런 라피스의 고민이 제대로 형태를 맺기도 전에, 견뢰는 천천히 눈을 감아버렸다.
“바깥이 많이 시끄럽군.”
어떤 기미나 의중조차 읽을 수 없는 이 남자에게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엄청난 피로감.
그것이 육체의 부하를 뛰어넘는 정신적인 마모에 가까운 무언가임을 라피스가 깨달은 순간.
“회담의 관계자들인가…… 한번 경고를 해도 변하는 게 없다니, 자신감이 넘치는군.”
견뢰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그럼 직접 마중을 나가줘야겠지.”
“……!!”
등골에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지금까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저 마법사의 악명과 광증이, 그 한마디로 대번에 실감되는 듯하다.
언뜻 보기엔 대화가 통하는 것처럼 보이던 저 남자가, 이 도시에서 누구보다 미쳐 있다 불리우는 그 이유.
라피스가 그것을 비로소 통감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사이, 견뢰의 모습은 탑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
휘오오!
광활한 흑요석 공동 저편에서 불어닥치는 미풍.
탑의 지하면적이 차지하는 너비가 어찌나 넓은지, 라피스가 앉아 있는 의자에선 공동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라피스는 말없이 견뢰가 사라진 맞은편 의자 저편을 바라보다, 이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에반 님께 알려야 해.”
견뢰는 그녀에게 탑 내에서는 자유롭게 운신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건 아마 라피스 혼자서는 그의 권역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터.
그 광인이 던지고 간 직언을 거스르려 들었다간, 아마 그만한 대가를 감내해야 하겠지.
하지만 라피스는 이제 와 목숨이 아깝다는 이유로 행동을 멈출 생각 따위는 없었다.
스스로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실을 보지 못한 미련한 선택 때문에 실패하는 것도, 설령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켜주려 했던 마법사가, 자신의 부탁 때문에 화를 입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지하공동을 벗어나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면, 공능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아, 그쪽이 라피스 팔시어?”
두려움을 가라앉히며 공동을 둘러보던 라피스의 등 뒤에서, 심드렁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말이네. 사진으로 본 그 모습 그대로잖아.”
화들짝 놀란 라피스가 고개를 홱 돌리자,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를 한 손으로 꼬면서, 나른한 기색으로 시선을 삐딱하게 기울이는 모습.
“중앙전선의 유명인을 만나서 영광이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악수나 한번 할까요?”
“……누구죠?”
“제니시아. 제니라고 불러요.”
제니가 대꾸했다.
어딘가 불량해 보이는 걸음으로 라피스의 앞에 다가온 제니가 손을 쓱 내밀었다.
“당신을 납치한 무법자를 대신해 온갖 다채롭고 번거로운 수습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람이죠.”
“…….”
“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등대지기를 납치했는지, 아직도 난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제니의 표정은, 아직도 지금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애초에 지금 라피스를 구금해 둔 견뢰의 선택 자체가, 탑 내에 일절 알리지 않고 진행된 일이었단 말인가.
라피스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제니가 해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반이 하는 일이니까 마지막까지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난 진작 납득하는 걸 포기했어요.”
“…….”
“그러니까 그쪽도 마음 편하게 먹고 기다리는 게 좋아요.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경과라도 들려주면 다행일 테니까.”
“견뢰는 제 신변을 강제로 구금해서 여기 가둬두었어요.”
라피스가 살짝 몸을 움츠리며 경계하듯 말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제가, 당신들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글쎄. 이제 와서 반이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니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은 죽이려고 마음먹은 대상을 오래 지켜보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 정도 되는 마법사가 살인이라는 행위에 시간과 노력을 들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건.”
확실히, 그만한 인내심이 있었다면 견뢰가 피에 미친 마법사라는 악명을 달고 다니지도 않았을 터.
설명이 어찌나 그럴듯했는지, 라피스는 순간 납득해 버리는 자신을 느끼고 살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제니가 그 표정을 보며 순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어라, 안 넘어오네. 보통 이 말을 들으면 거의 다 안심하던데.”
“…….”
역시 이 여자, 방금 떠난 견뢰만큼이나 위험한 성격을 가졌음이 틀림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