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84
약먹는 천재마법사 884화
운명을 보는 눈(20)
먼지 쌓인 어두운 뒷골목을 한줄기 화염과 형광빛의 창날이 번갈아 교차하며 질주했다.
등 뒤로 화염을 분사하며 가속하는 마법사와 창대를 입에 물고 네 발로 뛰는 소녀의 모습.
두두두두!!!
하지만 놀랍게도 속도가 더 빠른 것은, 팔과 다리를 번갈아 땅에 박차며 질주하는 메릴다 쪽이었다.
“징그럽게 빠르군.”
지면을 스치듯이 낮게 비행하며 질주하던 레녹이, 순식간에 뒤로 따라붙는 메릴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몸으로 4족보행을 하면서 그만한 속도를 낼 수 있다니, 관절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내가, 멈추라고 했지!!”
드드득!!
창대를 이빨로 문 채로 온몸의 축을 비틀어 허공에서 회전시킨다.
길쭉한 창날이 환수종의 악력에 반응해 번뜩이고, 가속하는 레녹의 등허리를 정확하게 구부러진 찰나.
파아아앙!!
화염 날개의 출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레녹의 신형을 한 차례 더 빠르게 밀어 올렸다.
이미 한껏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수행해 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유연한 2중 가속.
불의 나선을 그리듯 퍼져나가는 화염줄기가, 버려진 길목에 남아 삽시간에 사방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콰아아!!
“……!!”
사방에서 레녹을 조준하고 있던 처형부대조차 순간 움직임을 놓칠 정도의 분사력.
코앞에서 다 따라잡았다가 순식간에 레녹을 놓쳐버린 메릴다가 표정을 와락 찌푸렸다.
“빌어먹을, 염화술사 주제에 무슨 속도가……!!”
환수종의 혼혈로 태어나, 놀고 먹고 자는 짐승의 본능에 충실한 그녀지만 허투루 사장단에 오래 재직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올리비에라를 따라 카르텔의 일을 도맡아 처리해 온 메릴다 역시, 다양한 술식에 대해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바.
순수술식계 속성마법 중에서도, 염열계 마법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는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염열계 술식이 예열과 점화에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저 영창속도와 기동력은 비정상적인 수준.
이대로는 무작정 저 마법사의 꽁무니를 쫓다가 허탕을 칠 판이다.
창을 홱 돌려세운 메릴다가 근처 건물 벽을 번갈아 박차고 튕기듯이 옥상 위로 솟구쳤다.
골목 사이를 불태우는 화염을 피해 이동하는 처형부대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소리쳤다.
“구역 밖으로 나가서 출입 통제해. 예정된 경계선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광범위 포화에 특화된 염화마법사가 기동력을 갖추고 있다면, 조직으로 움직이는 처형부대와는 극상성에 가깝다.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기보단 차라리 구역 내외곽을 통제하고 변수를 차단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 나을 터.
[하달하겠습니다!]메릴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지는 처형부대를 두고, 품 안에서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야, 앙헬!! 듣고 있냐!!”
-예~ 듣고 있다구요.
통신기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꽥 소리를 지르는 메릴다의 목소리에, 반대편에서 나른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일단 막아!! 네 능력이면 얼릴 수 있지?!”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앙헬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쪽은 불이고, 전 얼음이라구요. 메릴다는 학교 과학 시간에 뭘 배운겁니까?
“학교 안 갔거든!!”
메릴다가 통신기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 저편에서 강렬한 굉음과 함께 흐릿한 물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을 뿐.
앙헬과 마법사가 조우했음을 직감한 메릴다가 혀를 차며 속도를 높였다.
* * *
“후우.,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메릴다와의 통신이 끊긴 것을 확인한 앙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욱……!!
내뿜는 숨결마다 차갑게 성에가 끼고, 얼어붙은 서리가 달아오른 공기를 식혀간다.
비좁은 뒷골목을 한참 돌아나와,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치한 폐쇄된 댐의 잔여시설.
댐의 돌담 끝에 선 앙헬을 향해, 화염의 날개를 두른 청년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청의 눈을 이끄는 등대지기. 승천자의 혈족을 단신으로 경호하던 염화마법사.
이제는 견뢰에게 납치당한 주인을 되찾기 위해 거대도시를 휘젓고 다니는 괴물.
“자, 거기서 잠깐 정지! 여기서부턴 속도 제한 구역입니다……!!”
쩌저적!!
앙헬이 양손을 마주 잡고 한발을 얼어붙은 돌벽 위로 내리찍은 순간, 얼음의 장벽이 거꾸로 일어서 레녹의 앞을 가로막았다.
직후 온몸에 화염을 휘감은 레녹의 몸이 장벽 위로 충돌. 불길과 얼음이 뒤섞여 녹아내리며 엄청난 수증기를 내뿜고 폭발했다.
콰아아앙!!
흐르는 물처럼 녹아내리며 무너지는 얼음벽 너머로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며 삐져 나온다.
살아 있는 짐승의 혀처럼 얼음을 부드럽게 핥아먹고, 삽시간에 냉기를 뚫어내며 다가오는 모습.
치이이익!!
무표정한 마법사의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한 앙헬이 식은땀을 흘렸다.
“하핫, 무슨 열량이……!! 불의 정령이라도 되는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염구(炸炎球)] [삼중화(三衆化) – 반발(反撥)]레녹의 손에서 떠오른 세 개의 화염구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한 점으로 밀집.
그 직후 서로 반발하며 엄청난 양의 열기를 정면으로 내뿜듯이 쏘아냈다.
[혈화선(血化線)]뻐어어어엉!!
실재하는 충격량을 갖춘 화염의 광채가 부채모양으로 뻗어나가며 눈앞의 모든 것을 불사른다.
“으아아앗!! 녹는닷……!!”
속수무책으로 증발하는 서리안개 사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앙헬의 모습.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앙헬은 기민하게 체내의 수분을 끌어다 혈화선의 열기를 어떻게든 빗겨내고 있었다.
콰르르르륵!!
길게 늘어진 댐의 경계선을 따라, 수 미터 크기의 화염 날개가 일렁이며 가속한다.
구조물 위로 스쳐 지나가는 화염의 파문을 휘감고 눌러 앉히듯, 사방에서 끌어당긴 서리안개가 번뜩였다.
쿠구구구!!
마치 댐을 중심으로 자연현상 자체가 이상을 일으키는 듯한 두 속성 능력자들의 격돌.
뒤늦게 처형부대가 그 화려한 불과 서리의 춤사위를 보며 안색을 창백하게 굳혔다.
“말도 안 돼. 앙헬 님은 성위급의 선천이능력자인데……!!”
“속성 조작에서 초능력자와 비견되는 자질을 가진 건가!!”
치이이익!!
얼음이 녹아내리며 물이 출렁이고, 그 위로 앙헬과 레녹의 신형이 뒤엉켜 그대로 미끄러진다.
손 끝에 타오르는 불길을 용암처럼 건져 올려, 앙헬이 내뿜는 얼음덩어리를 녹여 버린다.
각자의 주먹에 불길과 얼음을 두르고, 의념과 술식을 얼리고 녹이며 분사하는 모습.
하지만 레녹이 터트리는 술식의 화력이 너무나 폭발적이라, 격돌할 때마다 앙헬의 등 뒤로 폭염이 터져 나오며 그 몸을 형편없이 날려 버렸다.
뻐어어엉!!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터져 나와 얼음의 장벽을 소멸시키는 것을 보며 앙헬이 비명을 내질렀다.
“끼야악!! 전 접근전은 젬병이란 말입니다!”
“그래 보이는군.”
딜런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 레녹의 입장에서, 앙헬이 휘두르는 주먹은 굳이 눈여겨볼 필요도 없을 정도.
애초에 술식의 출력에서 이쪽의 압도적인 우위다.
견적을 내려다 그만둔 레녹이 힘으로 찍어누르기 시작하자, 앙헬의 신형이 속절없이 날아가 댐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아뜨뜨……!!”
재빠르게 제 손에 숨을 불어넣어, 댐 끝 가장자리와 손을 얼려 붙여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레녹과 앙헬이 길게 미끄러진 댐의 얼어붙은 수면은, 두 사람이 지나쳐온 사이 어느새 들끓어 오르는 강이 되어 있었다.
부글부글!!
“호들갑을 떠는 것 치곤 꽤 잘 버티는군.”
팔팔 끓어오르다 증발하는 물 위를 걸어 매달린 앙헬을 내려다본 레녹이 말했다.
“이 와중에도 선천이능의 출력이 떨어지지 않는 건 칭찬할 만해. 정신력이 흔들리지 않는 건 타고난 재능인가?”
“…….”
초능력이란 모든 선천이능 중에서도 가장 사용자의 정신력에 의존하는 재능.
그렇기에 가장 불안정하면서도 때로는 술식의 법칙을 뛰어넘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앙헬은 레녹의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면서도, 능력의 통제를 한 번도 잃지 않았다.
레녹과 단신으로 싸우면서도, 이능의 기반이 되는 정신력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증거.
“반대로 능력의 출력 자체는 다소 기이하게 증폭되어 있군. 어딘가에서 도핑이라도 따로 하고 온 모양이야.”
“하핫, 이런 식으로 듣고 싶은 칭찬은 아닌데요…….”
레녹이 대번에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깨달은 앙헬의 표정이 머쓱하게 변했다.
품 안에서 시가를 한 대 꺼내 문 레녹이 말했다.
“너희들을 살려주고 싶어서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게 아니야. 그러니 적당히 생색만 내고 비켜주지 않겠나?
앙헬을 내려다보는 레녹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일이 잘못되어 돌이킬 수 없어진다면, 그땐 이렇게 끝내지 못할 것 같거든.”
당연하지만, 카르텔의 사장단을 여기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왜 이들과 싸우고 사상자를 내지 않을 최소한의 명분은 필요한 바.
라피스의 이름을 빌려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앙헬은 의외로 그 말에 퍽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좋은 대답이군요. 청의 눈이 얼마나 좋은 조직인지, 그 말 한마디만으로 알 것 같습니다.”
“…….”
“예전에는 저도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있었답니다. 그래서 중심을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끼긱!!
앙헬이 가볍게 숨을 내쉬자, 그의 주변 공기가 급격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신이 상대하려는 마법사는 그런 논리와 애환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희는 경계하고 있지요.”
매달린 채로 레녹의 얼굴을 바라보는 앙헬의 눈빛이, 순간 깊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우수하고 뛰어난 만큼, 외려 잘못된 방향으로 그를 자극하는 게 아닐까 하고…….”
“…….”
“반 님의 성품을 개인적으로는 존경하지만, 언제 어떻게 뒤틀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 분명합니다. 등대지기에게는 미안하나 그녀의 사정까지 감안해 줄 수는 없겠군요.”
앙헬이 나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르텔의 기조는 정해졌고, 저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당신의 불꽃이 이 도시에서 스러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어쩔 수 없군요.”
“그렇군.”
화르르륵!!
레녹이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자,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떠올라 스스로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레녹의 통제를 벗어난 마력이 순식간에 주체할 줄 모르고 술식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주먹만 했던 불덩어리가 앙헬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대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염열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융해조형
[참열마검(斬熱魔劍)]콰우우우!!
“미친…….”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마력만을 장작으로 삼아 피어오르는 화염.
하지만 그 열기는 앙헬이 조작하는 빙결계 선천이능을 통째로 증발시킬 만큼 처연하고 강렬하다.
불타는 대검이 앙헬의 머리 위에 회전하며 추락한 찰나, 죽음을 직감한 앙헬이 남은 정신력을 끌어모아 초능력을 발동.
육각형의 거대한 얼음방패가 만들어지며, 떨어지는 대검의 칼날과 격돌한 순간.
쿠화아아악!!
댐을 모조리 뒤엎고도 남을 법한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터져 나와 사방을 새하얀 물안개로 물들였다.
“콜록, 콜록!!”
경사진 댐의 꼭대기에서 떨어진 앙헬이 쉴 새 없이 기침을 내뱉으며 나뒹굴었다.
온몸의 절반 정도가 흐르는 물처럼 녹아내린 기묘한 광경.
제 몸을 서리로 바꾸어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자조차, 방금 레녹이 내던진 열량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앙헬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건 그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 한계 이상의 능력을 끌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라우더, 늦었잖아요!!”
“이런, 죄송합니다.”
치렁치렁한 도복을 걸치고,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체격의 청년이 안개 저편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큼지막한 두루마리를 들고 선 남자가 널브러진 앙헬을 보며 웃었다.
“최근에 인계받은 제약사업부가 워낙 바쁜지라. 여기저기 손댈 구석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앙헬이 침을 퉤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라우더를 돌아본 앙헬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물었다.
“회장님과 버질 사이에서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일에 별로 나서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닙니까.”
“이 거대한 카르텔의 주인은 버질 님이 아니니까요.”
라우더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수긍했다.
손목을 가리는 품이 넓은 도복을 걷어붙이자, 라우더의 팔뚝 위로 온갖 복잡한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팔뚝에 새겨진 문신과 두루마리를 번갈아 두들기자, 스크롤 위로 문신과 같은 형상이 빠르게 새겨진다.
키이잉!!
순식간에 온갖 형상을 그러모아 술법진 하나를 두루마리에 완성한 라우더가 돌아서며 말했다.
“사장단의 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일에 굳이 나설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새로 오신 6사장님은 카르텔 내부 구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앙헬이 구시렁거렸다.
“버질이 회장님과 의견 차이를 보인다고 해도, 그 신뢰가 깨질 리가 있겠어요?”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지요.”
웃고 있던 라우더의 눈빛이 순간 묘하게 빛난 듯했다.
“회장님이 이번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결국 저희는 아무것도 전해 듣지 못하지 않았나요?”
“…….”
“뭐, 그렇다 해도 앙헬 님의 조언은 감사드립니다. 때론 대가없는 발품을 미리 팔아두어야 할 때가 있지요.”
펄럭!!
저주계열 고유술식
성질변화 촉매증강
[귀백(鬼魄)] [재희집골(災喜輯骨)]라우더가 두루마리를 펼치고 마력을 불어넣은 순간, 거대한 보라색 해골의 형상이 솟구쳐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직후 머리 위에서 흐르듯이 떨어져 내린 화염의 파도가, 두 사장이 서 있던 자리를 휩쓸었다.
염열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확산연소
[포적련화(浦赤連火)]콰아아아!!
보라색 해골의 형상이 화염의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마모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해골이 불타 소멸할 때마다, 음침한 의념이 골수처럼 터져 나와 타오르는 화염을 붙잡고 진화시켰다.
열기가 약해지는 찰나, 해골의 뒤통수 쪽으로 얼음길이 펼쳐지며 앙헬과 라우더가 미끄러지듯 빠져 나왔다.
콰아앙!!
직후 화염의 분사를 휘감고 내리 찍힌 레녹의 신형이 해골 머리를 산산이 박살 내며 추락했다.
“평범한 계통술식이 아니군.”
팔뚝에 장착한 배열장치를 눌러 열기를 배출한 레녹이, 주변에 낭자한 음습한 의념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주술사인가?”
“25년 전 타라샤스 대화재에 불타 죽은 희생자의 원념을 재료로 삼아 만든 저주지요.”
라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못 인간이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매개체나 대상에 집착하는 한심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인이나 계기를 되짚어보기보단, 단순하게 자신을 죽인 무기, 형상, 이미지에 집착하고 기억하려 하지요.”
“…….”
“그런 성질을 이용해 불에 타죽은 인간의 원념을 저주로 가공하면, 불이라는 매개체에 집착해 달라붙으려 하지요.”
두루마리를 거둬들인 라우더가 말했다.
“발을 붙잡고 늘어지며 결코 떨어지는 일 없이 지독하게 들러붙는 것. 그것이 바로 저주의 본질이라고 전 생각하곤 합니다.”
저주를 이용해 레녹의 마법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대신, 철저하게 열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아 세운 것인가.
저주술사들이 대개 상대를 직접 타격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후방지원에 집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외려 태연하게 라우더의 말을 듣고 있던 레녹보다, 앙헬이 묘한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웩, 너무 기분 나쁜 거 아닌가요?”
“요컨대, 저주란 단순히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미워하는 개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라우더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인간의 추악함과 이율배반적인 면모에 이끌리게 되지요. 참 매력적인 술식입니다.”
“저주술사들이 인간혐오에 시달린다는 건 유명하지.”
레녹이 대꾸했다.
“너무 진부한 말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레녹이 비웃으며 걸어 나오자, 라우더가 즉시 두루마리를 다시 펼쳤다.
두루마리 위에서 완성된 저주가 이번에는, 반대로 앙헬을 노리고 뒤집어 씌워졌다.
“우우웃……!!”
앙헬이 기묘한 비명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그 몸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싸늘한 냉기가 터져 나왔다.
후우우우웅!!
몰아치는 냉기의 폭풍이 어찌나 강렬한지, 달아오르던 댐 하방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 붙일 정도.
화염을 휘감고 서 있는 레녹의 피부까지 그 냉기가 닿아, 순간 피를 차갑게 만들 지경이다.
방금 전까지 앙헬에게선 결코 느끼지 못했던 섬뜩한 수준의 한기.
“부정적인 감정과 단어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강력하게 자극하죠.”
그것이 본디 그에게 허락된 초능력의 출력을 뛰어넘은 도핑의 결과임을 레녹이 깨달은 찰나, 앙헬의 뒤에서 라우더가 말했다.
“하물며 자신의 정신에 기반한 선천이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라면, 강박에 가까운 저주를 정신에 주입했을 때 어떠한 상승효과가 일어날지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야, 라우더!!”
콰아앙!!!
그 순간, 차가운 냉기의 폭풍을 뚫고 빛살처럼 창날 한 자루가 내리찍혔다.
댐 하방 경사로 벽에 박힌 창대 위에 올라탄 소녀가, 앙헬과 라우더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딴 식으로 술식 사용하지 말랬지!!”
“메릴다 님. 그러니까 이건 범용적인 활용방법이라 몇 번이나 설명을-”
“저주를 적이 아니라 아군한테 거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어!”
“……말이 안 통하는군요.”
처음으로 라우더의 미소가 흐릿해지는 듯했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은 그가 레녹을 돌아보았다.
“뭐, 됐습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염열마법. 어떤 원리인지는 확인이 끝났으니까요.”
“확인?”
“염열계 술식과는 거리가 먼 비정상적으로 빠른 영창속도와 기동력. 그건 화력을 광범위에 투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좁은 곳에 집중시킨 결과겠죠?”
라우더가 물었다.
“술식의 범위를 넓게 펼쳐 공간을 점유하는 대신, 직접 몸을 움직여 저희를 불태우려 했지요. 그건 당신이 집중시킨 화력의 사정거리가 육체 주변에 한정된다는 증거. ”
“…….”
“아파트 단지를 불태운 화염폭풍은 강력한 마법이었지만, 정작 영창을 시작한 건 전투가 끝나기 직전……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전환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는 건 틀림없지요. 그렇다면-”
“으랴아아압!!”
쩌저적!!
메릴다가 박아넣은 창대를 힘껏 쥐고 비틀어버린 순간, 중심으로 댐의 경사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격돌하며 내뻗던 충격에도 굳건하던 폐쇄된 댐의 벽 자체가 무너지듯 흔들리고.
콰아아아앙!!!
두꺼운 돌벽이 우수수 부서지며 댐 안에 고여 있던 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낙후된 댐. 그 안에서 흐르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여, 녹조가 섞인 채로 오염된 폐수의 폭포.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장대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레녹이 미간을 찌푸린 찰나,
카가각!!
냉기를 두른 앙헬이 댐이 부서지는 균열을 향해 내달리고, 라우더가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메릴다 님!”
“시끄러워!!”
메릴다가 창대를 튕기듯이 떨치며 댐의 균열을 더 크게 벌리고, 떨어지며 라우더의 신형을 낚아채듯 회수했다.
라우더가 두루마리를 펼치고 마지막으로 완성한 저주법진을 작동시켰다.
저주계열 고유술법
촉매전이 의념간섭
[회람(悔籃)]45구역에 존재하는 이 댐은 폐쇄된 지 무려 십 년이 넘은 낙후시설. 그 안에 담겨 있던 물도 고여서 썩은 오염수
그 정도로 강한 부정의 기운을 가진 물질이라면 저주의 촉매로 삼아, 강제로 술식의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증폭의 대상은 미리 저주를 걸어두었던 빙결계 선천이능자 앙헬.
저주를 통해 한계까지 몰아넣은 정신, 주변의 오염수를 촉매로 삼아 강화시킨 선천이능.
의념의 강제적인 증폭과 선천이능에 최적으로 맞춰진 환경의 조성.
그를 통해 앙헬 자신의 정신력으로 평소에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위상의 술식에까지 손이 닿는다.
“위상영역 전이.”
위상영역 이능전이
빙결계열 심상증강
쩌저저적!!!
낙후된 댐 하방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이, 레녹과 앙헬을 둘러싸고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기둥 수십 개가 레녹의 주변으로 떨어지더니, 공간째로 격리시켜 감옥의 형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라 마치 거인을 구속하고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듯한, 댐 전체의 수량을 얼어 붙여 만들어낸 압도적인 스케일.
쿠구구구구!!!
실시간으로 구축되는 감옥의 영역 안에서, 불꽃의 열기가 빠르게 약해지고 있음을 깨달은 레녹이 피식 웃었다.
버려진 댐 근처에 사장단이 대기하고 있던 이유가, 처음부터 자신을 포획하기 위한 포석이었음을 이해했기 때문.
“특정한 공간을 지정하고 성질을 통째로 바꿔쓰는 개념인가? 자성영역과는 궤가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군.”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자성영역과는 달리, 공간의 좌표를 타인을 중심으로 지정해 사용하는 위상영역.
특정한 개념의 위상이나 우선순위 자체를 개변시켜, 속성계 초능력자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하는 힘인가.
댐의 오염수를 촉매로 삼아, 저주술사의 보조를 받아서야만 전개해야 할 정도로 사전준비가 까다롭다면, 위력 자체는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수준일 터.
“이런 식의 대처는 곤란한데…….”
“걱정하지 마시……길……!!”
스스로의 냉기를 버티지 못하고 안색이 보랏빛으로 변한 앙헬이 이를 악물었다.
“일단, 회장님의 앞에 데려가서…… 차후 일정에 대한 논의를……!!”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째로 사방을 싸늘하게 얼려가며 굳혀가는 공기 속에서, 레녹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라면 보여줘도 괜찮겠군.”
“……뭐라구요?”
허공에 손을 내밀듯이 부드럽게 휘저은 찰나, 거대한 염구(炎球)가 녹아내리듯 모습을 드러냈다.
쿠오오오오!!!
끝없이 발광하는 적색의 광채가, 거대한 염구 안쪽에서 격렬하게 회전하며 타오르고 있다.
막대한 용량의 화염을 인력으로 끌어당겨 강제로 형태를 구축한다면 이러한 모습일까.
염구의 주변에는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술법진이 행성의 고리처럼 회전하며, 은빛의 광채를 더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마치 레녹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처럼, 술자를 태양으로 삼아 궤도를 그리는 인력의 불꽃처럼.
사선으로 느릿하게 회전하며 부유하는 첫 번째 염구 위로 손을 가져다 댄 순간.
“해방 개시.”
키이이잉!!
염구 주변을 행성의 고리처럼 둘러싼 술법진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그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레녹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이 폭발적으로 불어나며, 사방의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며 증폭되기만 하는 염열계 고유마법의 위력.
최대마력량을 크게 늘리며 여전히 통제에 들어오지 않는 레녹의 마력.
그렇기에 레녹은 끝없이 불어나는 마력과 영창의 위력을, 그 규모와 화력을 체내에서 통제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몸 밖으로 빼내어, 새로운 동력원의 개념으로 다시금 재정립했을 뿐.
쿠화아아아악!!!
“어라?”
“빌어먹을, 거리를 벌려!!”
“생존을 도모해라. 우린 절대로 버티지 못해……!!”
화염의 항성체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황급히 통신을 시도하는 처형부대를 돌아보며, 레녹이 생각했다.
카르텔의 1사장, 파르덴 맥퀸과 싸울 당시 레녹은 영역 전개에 필요한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마력노심(魔力爐心)을 사용한 적이 있다.
마력을 미리 담아두었다, 영창 직전에 사용하여 부족한 마력 소모를 충당하는데 사용하던 저장장치.
아티팩트의 일종으로 취급되던 그 개념을,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마력을 동력으로 삼아 재현한다.
영창과 예열을 마치고 장작을 찾아 발광하는 화염을 한계까지 압축하여 염구의 형태로 구현.
진둔의 결계술을 이용해 형상을 고정하고 노심(爐心)의 구조를 갖출 수 있도록 내부순환계를 정비.
그렇게 완성된 염구는, 말 그대로 에반 마르티네스 한 사람만을 위한 새로운 태양이 되어-
“잠깐, 이건……!!!”
빠르게 댐 주변을 돌아 달리던 메릴다의 등골에 섬뜩한 열기가 치닫는 순간.
손바닥 위에 주먹을 올려두고, 마치 염구를 향해 당기듯이 밀어올린 레녹이 속삭였다.
“만홍.”
염열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증폭극의
적색성계(赤色星界) : 태양기정점(太陽氣頂點)
제 3항성 : 귀합
[해태성천(該胎星泉)] [만홍(滿紅)]쿠과과과과!!!
쏟아지는 얼음의 위상영역의 아래쪽에서, 눈부신 주광(朱光)이 일었다.
빛의 무리는 번뜩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크기를 폭발적으로 부풀리며 사방의 공간을 잡아먹고.
이윽고 거대한 태양의 구체가 되어 지상에 현신하듯 내리꽂혔다.
직후 앙헬이 저주와 이능으로 증폭시킨 빙결의 감옥이 하늘 위에서 운석처럼 내리꽂히며 태양과 충돌.
파아아아아아아앗!!!
수증기조차 일지 않았다.
폐쇄된 댐의 수량 전체를 사용해 만들어낸 얼음의 감옥은, 만홍의 태양과 충돌한 순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다.
“……이럴 수가.”
스스로 만들어낸 태양을 등진 채로, 저 멀리서 멍하니 중얼거린 앙헬을 돌아보며 레녹이 천천히 한 손을 움켜쥐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곳의 전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지금 이 순간이 똑똑히 눈에 닿았을 테지.
염열계 술식 비의.
증폭계 성질변화의 정점에 도달한 비술, 적색성계(赤色星界).
이것은 레녹이 염열마법사로서 도달한 새로운 가능성.
통제되지 않는 화염의 술식을 극한까지 폭주시켜 손에 넣은 결과물.
이 도시를 장작으로 삼아 힘을 키우겠다는 에반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끝없이 불을 피워 번개까지 도달하려는 에반의 행적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납득시켜 줄 인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