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09
약먹는 천재마법사 909화
청문회(5)
“발칸의 시장이라…….”
청문회에 시장이 참석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콘라드의 전언.
레녹은 그 말을 쉬이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시에 온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시장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생각해 보면 애시당초 발칸에서 시장의 존재가 언급되는 일 자체가 극히 드물었으니.
대부분의 업무가 중앙의회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시장이 나설 일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레녹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폐쇄구역 25번 구역에서 만났던 과거의 카이세.
그가 블랙컨슈머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깊게 엮여 있는 관계자들 중 하나로 시장을 언급했던 것을.
“발칸의 시장이 공식석상에 직접 나서지 않은 지도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어.”
콘라드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말했다.
“그가 왜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는 알지 못해. 상원의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 원로원 정도나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시장이 여기 와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는 말이군.”
“이번 일이 일이니만큼, 심판규약의 대가를 생각하면 청문회에 와 있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아.”
레녹의 반문에 콘라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시장은 아주 오래전에 직위를 인계받아 유지하고 있는 만큼, 그 얼굴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어. 그러니 조심하도록 하게.”
“…….”
“만에 하나 그가 정말로 이 자리에 왔다면,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청문회에 개입하려 할지도 모르니까.”
“글쎄.”
레녹이 피식 웃고,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베니아가 움찔거렸다.
“시장이 정말로 청문회에 와 있다면,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다.”
“멍청한 짓이라니, 그가 가진 권한은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내가 이 청문회에 참석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후욱……!
휠체어에 앉아, 안타레스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도 마법사의 기척이 콘라드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희미하게 굳은 콘라드의 얼굴을 보면서 레녹이 웃었다.
“이 청문회에서 시의회 측은 내게 이길 수 없어. 모른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
견뢰 스스로 확신할 만큼 아주 강력한 인과가 이미 그의 편에 자리하고 있단 말인가.
콘라드는 그에 대해 더 묻고 싶은 듯 잠시 입매를 꿈틀거리다, 이내 시간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더는 무어라 경고할 이유는 없겠군. 부상에 대해서는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겠나?”
팔짱을 낀 채로 힐끗 회장으로 향하는 문을 돌아본 콘라드가 말했다.
“원한다면 사전협의를 통해 그쪽 관련 질문이나 언급을 줄여볼 수 있네.”
청문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절차나 과정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레녹은 그런 콘라드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좋아.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인 콘라드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본인의 출석을 확인했으니 준비가 되면 바로 시작할걸세. 여기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들어오게나.”
“이해했다.”
“행운을 빌지.”
콘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복도 옆에 나 있는 쪽문을 열고 사라졌다.
아베니아가 그의 뒤를 따라 묵례한 뒤 모습을 감춘 순간, 레녹의 앞에 있던 문이 크게 울렸다.
쿵!!
느릿하게 떨리면서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문의 형상. 안타레스가 곧바로 휠체어를 밀며 걷기 시작했다.
화아악!!
새하얀 빛이 두 사람을 파묻고 몰아치듯 회전하다, 이내 거대한 신전의 풍경을 그렸다.
투명하기 그지없는 눈부신 대리석. 굵직한 기둥이 양옆에 빼곡히 세워진 거대한 신전의 홀.
양옆에 자리한 참관석에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정면에는 십수 명의 시의원들이 둘러앉아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다.
회장 중앙에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주변에는 수십에 달하는 참관인과 시의원들이 중앙을 내려다보는 구조.
신전의 사방에는 수백 대가 넘는 카메라와 기록장치들이 실시간으로 청문회장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 견뢰가 왔군…….”
“안타레스 용병단장이다. 몇 달 넘게 발칸을 떠나 있다고 들었는데.”
“청문회에 견뢰와 동행하기 위해 도시로 복귀한 건가.”
“신기한 일이로군. 겉으로 알려진 두 사람의 성향 자체는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친분이 있는 거지?”
철컥.
미리 의자가 치워진 테이블 앞에, 휠체어를 멈춰 세운 안타레스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레녹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옆에 기댄 채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중앙의회와 원로원, 사법부의 책임자들이 각자 한 명씩 자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들 중에서 발칸의 시장이 청문회장에 자리하고 있다면, 과연 그는 어디에 앉아서 레녹을 지켜보고 있을까.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앞 열에 앉아 있던 늙은 재판관이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법전을 펼치며 말했다.
“심판규약 서약서를 앞으로.”
그 순간, 화려한 예복을 입은 어린 소년들이 석판을 짊어진 채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재판관과 동일한 예복을 입은 소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의 앞으로 나와, 조용히 석판을 내려놓았다.
쿵!!
고대 문자로 적혀 있는 복잡한 규율과 석판 끝에 손을 올려두는 서명란의 모습.
레녹이 말없이 석판을 바라보는 사이, 재판관이 노쇠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아르스노바에서 정해진 약속으로, 본 청문회에 성실하게 임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그러지.”
“그렇다면 석판에 손을 가져다 댈 수 있도록.”
레녹이 석판 위에 손을 가져다대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손등 위로 뒤덮이는 것이 느껴졌다.
카가각!!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레녹의 손을 묶고, 그 내면까지 속박하려는 듯한 기이한 구속.
‘대상지정저항을 사용하면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콘라드의 말대로라면 심판규약은 레녹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책임자들이 대가를 바쳐서 시동을 거는 기아스.
만약 여기서 레녹이 규약을 받아들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즉시 규약이 제대로 묶이지 않았음을 알게 되겠지.
우우웅……!!
레녹이 그 속박에 굳이 저항하지 않고 지켜보던 찰나, 레녹이 타고 있던 휠체어가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레녹의 내면을 묶으려던 세 갈래의 사슬 중 하나가 그 자리에서 느슨해지더니, 이내 힘을 잃고 사라졌다.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심상의 사용을 금하는 속박의 무효화.
하지만 레녹은 기아스의 조정이 이뤄지는 순간, 심판규약의 다른 규칙들이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규약 자체가 분명 레녹에게 걸려 있음에도, 레녹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것은 질문에 답하고 싶다는 가벼운 충동 정도.
만화경의 심상을 가진 레녹에게 있어, 애초에 정신을 속박하는 기아스 자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일까.
석판에서 손을 뗀 레녹이 손목을 매만지며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던 사이, 노인이 재차 말했다.
“대마법사 반의 출석을 마지막으로 확인. 진행을 위한 모든 인원들이 맹세를 마쳤음을 대법원장의 이름으로 여기에 공증한다.”
“…….”
“지금부터 견뢰, 반이 발칸에서 자행한 모든 혐의에 대한 증언청취를 시작한다.”
* * *
“청문회라고는 하나, 구체적인 절차나 방식에 대해서는 설명을 듣지 못했는데.”
눈앞에 놓인 석판을 두들기며 레녹이 물었다.
“적어도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 건지는 너희들의 입으로 직접 설명해야 하지 않겠나?”
“걱정하지 마라, 견뢰.”
그 순간, 상석에 앉아 있던 시의원들 중 누군가 답했다.
“심판규약에 서명한 이상, 그대는 바라지 않아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의 질문에 답하게 될 테니까.”
“…….”
“물론 그대가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나, 사생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원이 눈짓으로 석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판규약을 통해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청문회의 직접적인 안건과 관련된 질문뿐. 따라서 우리는 그대가 발칸에서 저질렀던 온갖 범법행위에 대해서만 질문을 던지고, 그 혐의를 인정할 것인지만 결정할 수 있지.”
“그래?”
레녹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마키나에서 했던 일들은, 이 청문회에서 애초에 논의조차 되지 않을 예정이었다는 말이로군.”
“…….”
레녹이 적당히 던진 그 말이, 이번 사태의 보이지 않는 내막을 정확하게 찌르기라도 한 걸까.
말문이 막힌 재판관들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자신이 그간 이 도시에서 어떠한 일을 저질러왔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군.”
“내 기억력을 의심하기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늙은 재판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피아를 가리지 않는 그 무분별한 폭거에 논리를 붙이기는 어려웠으니.”
“…….”
“지난 날의 적을 아군으로 삼고, 또 새로운 적과 싸우고 죽이기에 급급했지. 이성과 논리를 일체 찾아볼수 없던 그 모든 만행이 자네가 제대로 판단하고 기억한 결과라는 말인가?”
재판관이 물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대체 어째서 이 청문회에 스스로 출석한 거지?”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마치 우발적인 행동이기를 바랬다는 어조로군.”
레녹이 웃었다.
“모든 일을 철저하게 계획한 적도, 충동적으로 아무나 붙잡고 싸우고 다닌 적도 없다.”
“…….”
“지금까지 내가 한 일에는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렇기에 모두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만의 이유로 사회규범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치안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니. 그것이야말로 광인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모르겠나?”
심판규약에 레녹이 서약을 했다 판단했기 때문인지, 재판관의 단언에는 거침이 없다.
레녹이 미쳤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서슴없이 단언하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듣고도 화를 내는 대신 심드렁하게 고개를 젖혔다.
“됐으니까 시작하지. 당신이 설명한 대로라면 준비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재촉하지 말도록.”
그제서야 청문회의 질의응답을 담당하는 재판관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대의 답변이 심판규약에 의거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청취를 시작할 것이다.”
이번 청문회를 주관하는 것은 중앙의회의 시의원이 아니라, 대법원에 소속된 재판관들의 일.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간 불분명하게 추정되어온 견뢰의 혐의를 공식적으로 제시할 권한을 가진 것이 그들이라 해야 할까.
그 사이 견뢰와 재판관이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던 참관인들이 말을 주고받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멀쩡해 보이는데. 정말 미쳐 있다는 거 맞아?”
“말이 통한다는 건 예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지. 견뢰의 악명은 그가 저지른 일에서 비롯된 부분이 커.”
“17구역의 프로파일러들은 견뢰가 정상적으로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위험하게 평가했어.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금부터 지켜봐야겠지.”
“의사소통이 되는 괴물이 더 위험하다는 말인가. 호러 영화가 따로 없군.”
헛기침을 한 재판관들 중 누군가 프로젝터 사이로 판결문을 밀어넣자, 화질이 흐릿한 동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파직, 파직!] [콰아아앙!!]낡은 발전소의 위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벼락과 산산이 쪼개져 박살 나는 건물의 형상.
그 충격파로 발전소 사방의 거리와 도로들이 무차별적으로 박살 나 으스러진다.
부서진 수도관 사이로 물줄기가 솟구치고, 순식간에 일대 거리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영상은 그대가 음지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할 당시, 시정부 관할 공공시설을 습격한 혐의를 기록해 둔 영상일세.”
짤막한 기록영상 재생을 마친 재판관이 말했다.
“당시 발전소의 파손으로 근방 40번대 구역 일부가 완전히 정전됐고, 산하 시설을 관리하던 직원 4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
“…….”
“이 사태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전격마법사는 아무런 처벌이나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유유히 현장을 떠나버렸네. 어떻게 생각하지?”
재판관이 엄중한 시선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레녹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마법사, 반은 발전소 시설 직원 학살과 시정부 산하 공공기관의 파손 혐의를 인정하고 형량을 받아들이겠는가?”
한껏 무게감이 어린 재판관의 말에, 청문회장에 앉아 있던 시의원과 기자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발칸에서 가장 피에 미쳐 있다 알려진 대마법사.
그가 자신의 혐의를 공식적으로 마주하고 인정하는 첫 번째 질문.
그 사실에 대해 견뢰가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
당연한 일이지만, 시의회 역시 이제와서 그때 파손된 기물이나 공공시설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배상이나 책임을 따지면, 견뢰보다도 먼저 책이 잡힐 이들이 이 도시에 널려 있을 테니.
지금 이 질문을 통해 의회 측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견뢰의 대응 그 자체.
그가 이 청문회에 참석한 진의에 있다.
“아…….”
그리고 턱을 괸 채로 물끄러미 영상을 시청하던 레녹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났다. 에덴이란 전격마법사를 죽였을 때의 일이었나. 꽤 예전 일을 가져왔어.”
“해당 혐의를 인정한다면-”
“그런데 오래된 일이라 그런지 틀린 부분이 좀 있군.”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재판관이 멈칫거린 순간. 레녹이 태연하게 말했다.
“40명이 아니라 103명이었다. 발전소를 점유하고 있던 갱단의 반항이 거세서 고생을 했었지.”
“…….”
“이름이 시거 뱅 갱단이었던가. 두목이었던 전격마법사의 마력을 발전소의 출력으로 보조하려 했던 기억이 나는군.”
조용해진 회장을 두고 레녹이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발전소의 출력이 지나치게 강하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구청에 뇌물을 주고 다른 구역의 전력을 무단으로 끌어다가 사용하고 있-”
삐-
그 순간, 레녹의 목소리를 전달하던 마이크가 뚝 끊겨 버렸다.
청문회장에서 상황을 중계하던 관계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오자 오디오를 끊어버린 것.
하지만 레녹의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마이크의 작동 중단에도 불구하고 꽤 선명하게 잘 들렸다.
“그때 죽인 전격마법사가 해당 구역 출신 시의원과 결탁하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분명 하텐-”
“잠깐, 잠깐!!!”
그 순간, 재판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레녹의 말을 끊었다.
그제서야 회상에 잠겨 있던 레녹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시끄럽군. 자꾸 말을 끊지 마라.”
“……본 청문회는 그대가 자행한 것으로 유추되는 혐의를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필사적으로 헛기침을 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던 재판관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갑자기 시의원이나 구청의 비리내역이 공개되는 것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기 때문.
“혐의 내용을 임의적으로 바꾸거나 수정하려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 특히 증거도 없이 진술을 번복하거나 왜곡하는 일은-”
“아, 증거가 필요했었나?”
털썩!!
그 말과 동시에 재판관의 눈앞에 낡은 수첩 하나가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집어 드는 재판관을 보며 레녹이 말했다.
“갱단의 두목이 죽기 전까지 적어둔 연구일지다. 거기 내가 말했던 내용이 적혀 있으니 잘 살펴보도록.”
“…….”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시점에서, 증거품을 훼손하거나 빼돌릴 만큼 재판관은 간이 크지 못했다.
낯빛이 창백해진 재판관이 연구일지를 다른 재판관들에게 넘기는 사이, 레녹이 턱을 괸 채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 전격마법사. 토르번 마탑 출신이었는데, 마력의 성질변화를 연구하다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더군. 일지 대부분은 그에 대한 기록이었다. 음지에서 조직을 꾸리고 무기시장에 손을 대려던 것 같은데, 발상과 수완은 좋았었지.”
“…….”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죽일 방법이 있었을 텐데, 갱단의 간부를 상대하다 전력을 과대평가했어. 그래도 마지막에 일대일을 강제한 판단 자체는 돌이켜봐도 나쁘지 않군.”
조용해진 청문회장 안에서, 레녹의 나직한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허어…….”
파리해진 안색으로 레녹의 말을 듣고 있는 시의원과 마법사, 그리고 기자들의 모습.
견뢰가 제출한 증거품보다도, 지금 견뢰의 대답에 더 놀라서 표정 관리조차 못 하고 있다.
어째서 지금 견뢰가 당시 있던 일을 회상하며 감상을 털어놓고 있는지, 그들 역시 알고 있던 것이다.
심판규약의 기아스로 인한 세가지 규칙.
지금 견뢰가 응답하는 저 모든 대답에 일말의 기만도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저 마법사가 말 그대로 싸움에 미치다 못해 몇 년이 지난 전투의 디테일을 기억하고 곱씹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 모인 모두가 방금 그 대답 한 번으로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다.
“……증거품의 진위확인이 끝났소. 보존마력의 측정 결과 증거품의 훼손은 없더군.”
그사이, 연구일지 분석을 마친 재판관이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정말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재판관이 마이크를 잡고 청문회장의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당시 안건에 하텐슈타인 하원의원이 엮여있음을 확인. 본 혐의에 대해서는 판단을 미루고 추후 중앙의회에 협조를 구하는 것으로 처리하겠소.”
“완전히 미쳤군…….”
“처음부터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청문회 시작부터 일이 이렇게 된다고?”
시작부터 중앙의회 시의원의 비리가 엮여 나올 정도면, 앞으로 저 마법사의 입에서 대체 어떤 말이 튀어나오게 될까.
당연하지만 여기 모인 시의원들 중에서, 어떤 의미로든 뒤가 구리지 않은 이들이 없다.
자신이 이 도시에 뿌린 온갖 비리와 부패의 결과물 중에 어떤 것이 저 마법사와 엮여있는지도 알 수 없다.
벌써부터 청문회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는 의원들을 뒤로 하고, 청문회가 재차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럼, 이번 안건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걸로 하지.”
재판관마다 맡고 있는 사안이 달랐는지, 처음으로 나선 재판관이 들어가고 젊은 재판관이 걸어나온다.
“아, 벌써 끝났나?”
그제서야 방금 전까지 에덴과의 일을 회상하고 있던 레녹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쉽게 됐군. 그때 있던 일에 대해서도 아직 할 말이 많은데.”
“…….”
“발전소 직원들을 사칭하던 갱단의 범죄자들이 어떤 식으로 뇌가 익어버렸는지는 혹시 궁금하지 않나?”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닌 듯한 대마법사의 말에, 젊은 재판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레녹의 앞에서 천천히 판결문과 프로젝터를 동시에 펼쳤을 뿐.
“뭐, 좋아. 다음으로 넘어가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내가 증언할 때 쓸데없이 말을 끊는 일이 없도록 해라.”
레녹이 그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슬슬 심판규약의 속박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적응이 되는군. 다들 기대해도 좋다.”
“…….”
청문회의 주객이 전도가 된 것만 같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레녹의 발언.
아르스노바의 서약을 계기로 삼아 오히려 입이 풀린 듯한 기이한 모습에 의원들 중 누군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 마법사가 아니라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