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68
약먹는 천재마법사 968화
금제(23)
자색과 흑색의 마력이 회전하며 들끓는 지하공동.
빛조차도 빨아먹고 잡아당기며, 공간을 왜곡시키는 블랙홀의 구현으로 지하 일대가 빨려 들어가듯 요동친다.
빅터의 손끝에서 그것이 현현하여 존재했던 시간은, 오감으로는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찰나.
하지만 금단의 무구를 사용해 빚어낸 기적은 그 존재만으로 아나테마가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땅에 파묻혀서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폐허.
풀썩, 풀썩!!
“푸우우!!”
흙더미 사이로 힘겹게 부리를 휘저은 펠릭스의 얼굴이 솟구쳤다.
산소를 찾아 헤매듯 빠르게 숨을 들이쉰 새머리가, 땅에 파묻힌 채로 고개를 휘저었다.
“반? 귀희?”
“펠릭스. 여기다.”
벌컥!!
그 순간, 펠릭스의 머리 위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레녹이 손을 내밀었다.
“술식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저택은 피해가 크지 않아. 올라와라.”
“……예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엉망진창이 된 펠릭스가 기절했다 눈을 뜨고, 먼저 깨어 있던 레녹이 펠릭스를 수습하는 상황.
폐쇄구역에서 있던 일을 떠올린 펠릭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레녹의 손을 잡고 힘껏 당긴 순간.
쿵!!
레녹의 몸이 그대로 문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반?!”
펠릭스가 경악하며 허둥지둥 레녹의 머리를 받친 사이, 레녹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섰다.
“미안하군. 반중력 조작을 깜박했다.”
“……괜찮은 겐가?”
펠릭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지.”
정작 그렇게 말하는 레녹의 표정 역시, 어딘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찌푸려져 있다.
펠릭스가 그 모습을 미심쩍은 기색으로 바라보는 사이, 우그러진 실드를 복구한 레녹이 중력의 사슬을 걸고 펠릭스를 잡아당겼다.
쿠궁!!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펠릭스의 거체가 땅 위로 끌려 나왔다.
흙먼지를 털어낸 펠릭스가 그제야 한숨을 토해내며 자택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응접실이…….”
처음 자택을 찾아냈을 때만 해도 깔끔하던 저택이, 토사의 역류로 흙더미에 뒤덮여 있다.
저택의 형상 자체는 멀쩡하지만, 실내에 흙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막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늦었잖아, 새대가리.”
“…….”
응접실 소파 위에 드러누워 있던 페이샤가 펠릭스를 보며 쏘아붙였다.
“그깟 토사 하나 피하지 못해서 땅에 묻힐 정도면, 질식해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면목이 없군. 쓸데없이 크고 무거운 몸인지라.”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
풀이 죽은 펠릭스의 어깨를 두들긴 레녹이, 응접실의 의자를 가리켰다.
반쯤 기울어진 자택. 발아래 흙더미가 수북이 깔린 너저분한 행색.
주변의 풍경이 많이 변했지만, 신전으로 향하기 전 그랬던 듯이 모여 앉는다.
하지만 응접실에 앉은 일행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침묵이 흘렀다.
“…….”
생각에 잠긴 레녹의 옆모습을, 펠릭스와 페이샤가 조용히 곁눈질하고 있다.
마치 레녹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기분을 살피려는 듯한 묘한 모습.
“……음?”
그제서야 뒤늦게 두 사람의 반응을 눈치챈 레녹이 피식 웃었다.
“편하게 앉아라. 왜 잘못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지?”
“흠흠, 그것이…….”
“네가 금기병장을 빼앗기고 빡쳐 있을까 봐 그런 거잖아.”
펠릭스가 헛기침을 하는 사이, 페이샤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웬 도둑놈 새끼들한테 느닷없이 물건을 빼앗겼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야 정상이지. 나였다면 진작 이 저택부터 때려 부쉈을 거야.”
“아,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였군…….”
레녹이 말끝을 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팔짱을 낀 페이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 기분 나쁜 가면쟁이.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술식을 사용하더군.”
“…….”
“중앙에서 조작술사를 몇 명 만나보기는 했지만, 그놈만큼 이상한 재주를 부리는 놈은 없었어. 어떻게 된 거야?”
“근래 판데모니엄에 새롭게 영입되었다는 특질계 술사일세.”
펠릭스가 착잡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굉장히 오만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인 데다, 조작술식을 다루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녔다더군.”
“그만한 실력과 배경을 지닌 특질계 술사가, 아직까지 제대로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판데모니엄 내부에서도 흘러나오는 정보가 극도로 적다더군. 애초에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 분명 굉장히 특수한 내력을 지닌 괴물이겠지.”
페이샤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답하던 펠릭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복마전의 큰 작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몇 번 있어서, 군단 정도 세력에서는 진작 정보가 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장성직에 올랐으면서 몰랐던 건가?”
“아니, 그건…… X발, 내가 현장에서 일할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주절주절 변명하던 페이샤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걸 감안해도 마지막에 사용한 블랙홀. 그거 말이 안 되잖아. 고작 무구 하나 손에 넣었다고 중력을 뽑아 쓰는 게 가능해?”
“그만큼 위험한 술사의 손에 위험한 무구가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눈을 감은 펠릭스의 표정이 숨길 수 없을만큼 착잡하게 변했다.
“그건 말 그대로 개념을 조작하는 형태의 기적이었네.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반의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던 것이 아니겠나.”
빅터의 화신으로 마지막에 사용했던 초소형 블랙홀.
지하신전 위로 그 진체가 드러난 것은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지만, 펠릭스와 페이샤같은 초인이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할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만한 개념의 집속으로 이루어진 힘이기에 현실에는 아주 잠깐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조작술식의 진가를 목도하고 이해할만한 실력과 안목을 갖추었기에, 그 격차를 느끼고 더욱 허탈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대륙은 넓군.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재인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마법사. 어떻게 할 건데.”
페이샤가 삐딱한 어조로 물었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아직 여기 남아있는 거 아니야?”
펠릭스나 페이샤의 입장에서는, 레녹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허탕을 친 것으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레녹이 애초에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설계하고 유도해 냈다는 사실을 여기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레녹이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당분간은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신경쓰지 말라고?”
“한두 번의 실패는 놀라운 일도 아니지. 오늘 당장은 시행착오라 생각하면 인내할 만해.”
“…….”
“나중에 이 빚은 판데모니엄에게 갚아주면 되지 않겠나.”
레녹의 태연한 대답에, 페이샤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눈 앞에 둔 것만 같은 기묘한 반응.
“왜 눈을 그렇게 뜨지?”
“……이건 내가 아는 그놈의 인내심이 아닌데.”
“…….”
묘하게 날카로운 페이샤의 질문.
뚫어져라 레녹을 바라보던 페이샤가 대뜸 말했다.
“난 안 갈 거야.”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네놈이 갑자기 헤까닥 돌아버려서 복마전을 쳐죽이러 간다고 해도, 날 끌어들이지 말라는 말이다.”
“…….”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길래 그렇게 여유롭게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노리는 바가 있으니까 그렇게-”
“판데모니엄을 상대로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얘기하지.”
끌려다니는 일에 한이 맺히기라도 한 듯, 빠르게 토해내는 페이샤의 말을 끊은 레녹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당장은 오늘 얻은 수확에 집중하자.”
“수확? 수확이 어디 있어? 뭐 손도 대보지 못하고 다 털렸는데.”
애초에 아나테마의 신전에 있던 모든 유물을 보고도 가져오지 못했기에, 페이샤마저도 레녹의 눈치를 보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레녹은 페이샤의 말에 굳이 반박하는 대신, 말없이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우우웅!!
심술궂은 독두꺼비와, 냉기를 흩뿌리는 반지가 동시에 테이블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이럴 수가.”
심드렁한 기색으로 누워 있던 페이샤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펠릭스가 기가 막힌 기색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복마전의 주구들이 빼앗아간 유물이군. 대체 언제부터……?”
아나테마의 신전에 본래 보관되어 있어야 했지만, 각자 소류와 에르몽의 손에 들어갔던 얼음작인과 저주아귀.
레녹은 그 두 가지 유물을 판데모니엄의 손에서 빼앗아 신전을 탈출했던 것이다.
판데모니엄을 상대하면서 그러한 일을 해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경이로운 것은 같은 편이었던 페이샤와 펠릭스마저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신전을 탈출하기 직전에 놈들이 사용한 술식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는 틈이 있었다.”
[구에에엑]요란하게 울어대는 독두꺼비의 머리에 손을 얹은 레녹이 말했다.
“금기병장을 회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결국 이 두 가지 물건은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
빅터의 화신으로 금기병장을 회수한 직후, 바로 떠나지 않고 레녹과 대치하게 만들었던 이유.
처음부터 레녹은 얼음작인과 저주아귀를 판데모니엄의 손에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레녹은 화신체를 움직여서 탈출 직전까지 복마전을 돕게 한 뒤.
반의 뇌창으로 보석계단이 부서지는 순간 저주아귀와 얼음작인을 빼돌리고 금기병장을 장착.
초소형 블랙홀을 전개하며 신전을 무너뜨리는 것과 동시에 두 유물을 레녹의 손에 넘겨 버렸던 것이다.
은밀하다 못해 기척이 존재하지 않는 마력사 조작과, 무기물을 공간전이시킬 수 있는 대천사의 연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마지막에 그만한 기술을 사용해 판을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소류와 에르몽 역시 유물이 빼앗겼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겠지.
“내게 소유권이 이전된 물건을 두 눈 뜨고 모두 빼앗길 수는 없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레녹이 웃었다.
“그래서 당장 잃어버린 물건보다는, 이 두 유물의 활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활용법이라니. 우리 중에서 이 유물을 써먹을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다고.”
페이샤가 코웃음을 치며 독두꺼비를 홱 빼앗아 들었다.
[궤에에엑]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버둥거리는 독두꺼비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두꺼비의 입을 벌리면서 말했다.
“이거, 생명체가 아니야. 원념의 덩어리로 만들어진 주물이지.”
“…….”
“고대의 주술사나 샤먼이 만든 물건일 거야. 고위 주물의 제작법은 실전된 게 많아서, 현대의 주술사들은 거의 사용하지 못하거든. 주술사들도 아티팩트에 의존하고 있는 게 주술계의 처참한 실정이지.”
“주물에 대한 연원은 처음 듣는 사실인데. 주술에 대해 식견이 상당하군.”
페이샤의 유창한 설명에 펠릭스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인적으로 따로 주술을 공부하기라도 했던 건가?”
“X발, 그럴 리가 있겠냐? 이런 귀찮은 술식을 언제 배워서 써먹어?”
시큰둥하게 대꾸한 페이샤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는 주술사가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주술을 전파하고 가르치려고 지랄하는 정신병자지. 그놈한테 들었다.”
“…….”
페이샤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레녹은 그 주술사의 존재에 주목했다.
페이샤의 성격상 자신에게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는 술사를 곱게 놔둘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바.
그렇다면 페이샤의 머리에 주술정보를 강제로 주입한 그 주술사가, 페이샤조차 어찌하지 못할 실력자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군단 내부에서 그만한 실력과 위상을 지닌 존재라면 분명-
“나나 새대가리처럼 주술이나 흑마법에 소질이 없는 놈들한테 이건 단순히 기분 나쁜 장식품일 뿐이야.”
두꺼비의 입을 잡고 양쪽으로 쭉 벌린 페이샤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얼음작인이라는 반지는 더하지. 여기서 빙결계 혈계이능을 익힌 놈이 어디 있어?”
“…….”
“그 왕자라는 새끼가 말하는 걸 보면, 아마 그쪽 왕족에게 맞춰진 특화 장비인 듯 한데. 이런 물건에 괜히 손댔다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받는다.”
페이샤가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로 고개를 젖혔다.
“둘 다 쓸모없어. 뭐, 나중에 경매장에 따로 팔아치우면 눈깔이 삔 손님이 사갈지도.”
“으음…….”
한나절 넘게 꼬박 사투를 벌여 손에 넣은 것이, 세 사람 모두가 사용하지 못할 소득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 사실에 펠릭스가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하고 침음성을 흘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네, 반. 그 자리에서 내가 조금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 도래의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썼다면-”
“마이야를 상대로 한방 먹인 걸로 충분했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마이야가 내던진 저주아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페이샤가 지껄인 헛소리는 잊어버려. 이건 당장 우리 모두에게 꽤 쓸모가 있는 물건이니까.”
“뭐, 이 자식아?!”
“에르몽이라는 흑마법사가 저주아귀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면, 이건 특정한 저주나 원념을 먹어치우는 물건이다.”
독두꺼비의 머리를 탁탁 두들긴 레녹이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슨 물건을 먹여도 저주나 원념만을 빨아먹고 남은 건 뱉어내는 물건이지.”
에르몽은 어떻게 저주아귀를 사용해서 마이야와 혈노를 신전 지하에 불러낼 수 있었을까.
그건 에르몽이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먹이고 순도 높은 흑마력을 대가로 받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마력을 저주아귀에게 먹인 뒤, 저주가 씻겨나간 마력으로 흑마법을 대신 사용했을 뿐.
“저주와 원념을 먹어치운다는 건 용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이 가능하지.”
펠릭스와 페이샤를 돌아본 레녹이 눈을 빛냈다.
“의념이나 마력의 정화. 사이한 기운이 깃든 물건이나 힘을 씻어낼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
페이샤의 말을 가로막은 펠릭스가,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크게 떨었다.
레녹과 시선을 마주한 펠릭스가 살짝 동요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도래의 마력을……?”
“그래.”
고개를 끄덕인 레녹이 저주아귀를 펠릭스에게 휙 던졌다.
얼떨결에 독두꺼비를 받아든 펠릭스를 보며 레녹이 말했다.
“도래의 마력에 담겨 있는 사특한 원념. 그걸 저주아귀에게 먹여서 걸러내면 마력의 순도가 훨씬 더 높아지겠지.”
“…….”
“마력을 사용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광증과 부작용이 문제라면, 그걸 정화시켜 버리면 더 편하게 훈련에 매진할 수 있지 않겠나?”
펠릭스가 사용하는 도래의 마력은, 본디 무구에 담겨 있던 마력을 따로 옮겨 손에 넣은 것.
하지만 본래 광전사로서 승천자에 오른 초인의 마력이기에, 그것을 사용하며 계속 부작용에 시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레녹은 저주아귀의 능력을 들은 순간부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고.
55구역을 완전히 탈출하기 전에 미리 그 능력을 실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펠릭스. 도래의 마력을 먹여서, 저주아귀가 마력을 정화시킬 수 있는지 확인해 봐라.”
“그건…….”
“일이 잘 풀린다면 깔끔하게 정화된 승천자의 마력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만약 그 순도가 타인이 이용해도 괜찮을 만큼 높기까지 하다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이샤나 나 역시 그 마력을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남한테는 일을 시켜놓고 혼자 어디가려고?”
“얼음작인의 능력을 시험해 볼 생각이다.”
냉기를 흩뿌리는 반지를 움켜쥔 레녹이 말했다.
“네 말대로 이건 카바힘의 왕족이 아니라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걸 물건이니까.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조사해 봐야지.”
“얼어죽고 싶어서 작정을 했군. 마음대로 해.”
페이샤가 다리를 꼰 채로 누워서 레녹을 향해 낄낄거렸다.
“뭐, 밖에 나가 죽어 있으면 모닥불 정도는 피워주지.”
“내가 실패하면 다음은 네 차례니까 준비하고 있도록.”
“…….”
벌레씹은 표정으로 변한 페이샤를 뒤로 한 레녹이, 곧바로 응접실을 벗어나 저택 뒤로 돌아 나왔다.
지하신전이 무너지며 저택 역시 반쯤 기울어져 있지만, 아직 완전히 매장당한 것은 아니다.
하수도 통로 아래쪽의 공터가 반파되기는 했지만 여유공간이 조금 남아 있는 상황.
이런 자리에서라면 얼음작인의 능력을 시험해 봐도 저택 안까지 냉기가 퍼지는 일은 없겠지.
“그럼…….”
하지만 레녹은 앞선 말과는 달리 곧바로 반지를 품에 집어넣고 땅에 기대앉았다.
기울어진 저택 벽면에 등을 대고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의식의 방향을 되돌린다.
두 사람에게는 자리를 비우기 위해 적당한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
“후우…….”
나직한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정신을 흘려보내듯이 빠르게 분산시킨 순간.
레녹의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급격하게 침잠하다 점멸하기 시작했다.
* * *
거대도시 발칸 21구역. 하이레아의 성당.
낡은 오르간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지는 예배당 위.
판데모니엄의 멤버들이 흑요석 가면을 쓴 술사를 둘러싼 채로 서 있었다.
날카롭게 달아오른 공기. 어딘가 적을 보는 듯이 경계심 어린 다른 멤버들의 시선.
하지만 레녹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왼손에 낀 유리색 건틀렛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건틀렛의 손바닥 위로 영롱하게 번뜩이는 금속광.
그 사이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듯이 도취된 듯한 묘한 반응.
“그래서.”
골치 아픈 기색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수녀, 하이레아가 말했다.
“이번 작전에 빅터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