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74
약먹는 천재마법사 974화
어둠의 서고(2)
녹스 비블리오.
그 단어를 언급한 순간 틸리언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굳어버린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
‘어둠의 서고라…….’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모든 사술(邪術)을 모아둔 아카이브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올리비에라가 어째서 레녹을 이 던전에 데려온 것인지는 이해가 간다.
구세계의 술법 중에서도 사특한 의념을 사용해 작동하는 온갖 술식들을 보관하고 기록해 둔 아공간.
올리비에라는 외겁도시로 가는 방법을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러한 아카이브를 지키고 있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틸리언이라는 사실은 의외였다.
위성도시 에타노크에서 진행된 극위능력자들 간의 회담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아나테마의 현신 직후 엑스큐셔너에게 당해 먼저 퇴장했던 흑마법사.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란듯이 이 던전 안에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그때 모습이 전력은 아니었다는 의미겠지.
“나의 공방에 맨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메이즈.”
올리비에라를 노려보던 흑마법사, 틸리언이 늙은 목소리로 노성을 토해냈다.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를 울리는 섬뜩한 위화감.
“내 지난 십수 년간 카르텔의 일에 일체 간섭한 적이 없을지언대.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하고 더럽혀……!!”
[그 말에는 어폐가 있구나, 샨도레이.]화려한 도포 위로 팔짱을 낀 올리비에라가 대꾸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따지자면 족히 수십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할진대.]“웃기지 마라. 회담에 직접 참석하지도 않은 겁쟁이가 누구에게 망언을 지껄이는 것이냐!!”
쿵!!
틸리언이 손을 내리치자 그의 몸을 휘감은 흑마력이 묵직하고 강렬하게 요동쳤다.
스스로의 존재 자체로 이 거대한 던전의 심장 역할을 하는 듯, 선명하고 무게감 있는 의념.
으레 모든 술사가 그렇듯이, 틸리언의 힘 역시 이 던전 안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겠지.
그 사실을 틸리언 역시 모르지는 않는지, 흉흉한 살기를 뽑아내며 올리비에라를 노려보았다.
“홀로 찾아온다 해도 들여야 할지 고민이 될 지경인데, 감히 저 어린 마법사까지 데려와?”
[회담의 일을 전해 들었기에 견뢰를 데려온 것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올리비에라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네 입으로 회담을 위해 사도살해자의 식견이 필요하다 말한 적이 있을 텐데.]“…….”
[일의 순서는 상이했으나, 결국 이 남자는 사도살해자가 되었다. 네놈이 그렇게 원하던 전문가를 이 자리에 데려왔으니, 감사인사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회담에서 틸리언은 견뢰가 아니라 사도살해자인 천번이 왔어야 한다며 레녹을 한차례 도발한 적이 있었다.
올리비에라는 직접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그 사실을 꺼내 들며 틸리언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
틸리언 역시 회담의 일을 잊지는 않았는지 분에 찬 기색으로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큭, 나를 능멸하고 싶은 것이냐……!!”
틸리언의 외침을 칼같이 잘라낸 올리비에라가 베일 너머로 마안광을 번뜩였다.
[네놈 같은 영악한 술사가 망나니에게 그리 쉽게 당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나테마의 현신 직후 쓸데없는 일에 말려들기 싫어 자리를 피한 것이겠지.]“…….”
[무엇보다 교단의 주구들이 위성도시까지 기어들어 오는 동안, 이 땅굴에 숨어 있던 네놈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올리비에라의 추궁이 이어진 뒤, 레녹은 그녀가 어째서 틸리언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인지 이해했다.
분명 틸리언은 회담 도중 엑스큐셔너에게 당해 먼저 퇴장했지만, 올리비에라는 애초에 그것 자체가 틸리언의 의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거기에 교단의 세력이 위성도시까지 진입해 온 것 자체가, 틸리언의 묵인하에 벌어진 일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럼 나의 던전이 발칸을 지키는 봉화라도 되었어야 한다는 게냐?”
하지만 틸리언 역시 할 말이 없지는 않은지, 순식간에 표정을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네 부탁이라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지. 암, 어림도 없고말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손으로 위성도시를 박살 내버렸을 거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틸리언의 얼굴이 음울하게 일그러진다.
거대한 아기의 얼굴이 기괴하게 주저앉으면서, 흉악한 악귀의 형상처럼 음영이 졌다.
쿠구구구……!!!
“나를 너무 자극하지 마라, 메이즈.”
[…….]“술식을 공유하고 연구하던 그 시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수십 년 전의 일을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마력이…….’
틸리언의 의념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흥미로운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회담 당시에는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실감하지 못했지만, 술식의 완성도가 상상 이상이다.
명의 흑마법과는 궤가 다르면서도, 나름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갈라지고 분화되어 완성된 흑마법.
아마 틸리언이라는 저 흑마법사가 거대한 아기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겠지.
무엇보다 틸리언이라는 성.
그건 레녹이 오래전에 한 차례 상대했던 흑마법사, 크레이그 틸리언의 이름과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지 않았던가.
적어도 지금 흑요석 관에 앉아 있는 저 거대한 아기가, 시의회에 반기를 들었던 크레이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올리비에라는 그런 틸리언의 말을 듣고도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군…… 네가 익히고 있는 건 제대로 된 흑마법이 아니었다.]“…….”
[너는 그 사실을 감추고 내게 마법을 가르치려 했고, 나는 거부했지. 그 시점에서 완전히 끝난 일이었을 터인데.]“하지만 너는 그럼에도 이렇게 보란 듯이 먼저 나를 찾아왔구나.”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틸리언이 눈을 번뜩였다.
“나는 네게 녹스 비블리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너는 나를 저버리고 카이세의 편에 붙었다.”
“…….”
틸리언이 떨리는 손끝을 들어 레녹과 올리비에라를 가리켰다.
“너희 둘 모두 자격이 없다. 사술사가 아닌 네놈들은 어둠의 서고에 접근할 권리가 없단 말이다……!!”
[아니. 열쇠지기인 네놈에게는 선택권이 없다.]올리비에라의 대답은 냉정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다.”
틸리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
후우욱!!
그 순간, 틸리언의 손이 어둠 속에 잠기더니 검은 기름으로 범벅이 된 열쇠를 꺼내 들었다.
들고 있는 것만으로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불길한 의념을 내뿜는 열쇠를, 떨리는 손으로 올리비에라에게 건네준다.
그 동작 자체가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처럼 불쾌한 기색으로 몸을 덜덜 떠는 모습.
그 강제적인 속박에, 레녹은 올리비에라가 무엇을 행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틸리언은 서고의 열람을 요청하는 행위 자체를 거부할 수 없는 건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틸리언은 서고를 열람하려는 사람에게 무조건 열쇠를 건네주어야 한다.
아마 그 키워드는 분명 녹스 비블리오라는 단어를 상대가 언급하고 열람을 요청하는 것이겠지.
올리비에라는 그 사실을 알고, 틸리언이 처음부터 부탁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견뢰, 받아라.]하지만 올리비에라는 기름이 떨어지는 검은 열쇠를 받자마자 레녹에게 던져주었다.
미련없이 틸리언에게서 돌아선 올리비에라가 곧바로 요람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설명하지. 열쇠는 소모성 아티팩트다. 서고를 열면 그 자리에서 소멸하지.]어두운 복도를 거꾸로 되짚어 걸으면서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그러니 서고에 들어가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되어야 한다. 녹스 비블리오에 진입한 뒤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휙!
던전의 입구 앞에 위치한 깎아지른 절벽.
절벽 사방에 빼곡하게 매딜린 백골의 벽 바로 앞에 멈춰선 올리비에라가 등을 돌렸다.
[바로 중앙전선 장막의 공전주기를 임의로 바꿀 수 있는 천체술식을 ‘대여’해 오는 것이다.]“아니. 난 모르겠군.”
올리비에라가 짜증스레 시선을 돌렸다가, 싸늘한 표정의 레녹을 보고 말을 멈췄다.
마치 아군이 아니라 적을 대하는 것처럼, 희미한 예기마저 섞인 레녹의 반응.
휘오오오!!
깍아지른 절벽 위로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며, 벽에 매딜린 백골이 흔들린다.
닳아없어지고 마모되어 흔들리는 수백 구의 해골이 휘청대며 춤을 춘다.
그 절벽 아래 레녹과 올리비에라가 마주 선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해라, 올리비에라. 이런 식으로는 같이 일할 수 없겠군.”
올리비에라를 바라보는 레녹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설마 쿤다라에 도착할 때까지 이딴 방식으로 일관할 생각은 아니겠지?”
[…….]함께 일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파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레녹은 올리비에라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것은 레녹이 가장 기피하는 일.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모든 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올리비에라와 협업을 포기하는 게 낫다.
“금제의 핑계를 대며 입을 다물 생각이라면 여기서 끝내지.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고 혼자 방법을 찾겠다.”
[…….]레녹의 말을 들은 올리비에라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침묵했다.
마치 레녹의 단호한 거절을 받아들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한 묘한 반응.
올리비에라가 다시금 전성을 울린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좋다.]“…….”
[쿤다라의 일을 두고 내가 다소 성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느릿하게 말을 꺼낸 올리비에라가, 자신의 베일을 살짝 젖히면서 말했다.
베일 너머로 그녀의 투명한 뺨이 은은하게 빛났다.
“…….”
[지식의 전파와 전수에 있어 제한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기에, 자신이 모은 모든 지식과 술식정보를 제한 없이 공개했지.]“술식정보를 다른 술사들에게 공개했다고?”
[서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가 열람을 요청하면, 사서들은 서고 주인의 의지에 따라 열쇠를 넘겨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틸리언에게 요구한 거래의 내용이었고…….]힐끗 절벽을 바라본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이 던전의 존재는 서고를 열람하는데 있어 비교적 적합한 환경으로 조성되어 있지. 샨도레이 틸리언 본인이 외부사서를 맡아 녹스 비블리오의 술식정보를 열람하기 위해 던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고에 출입할 수 있는 횟수는 정해져 있어. 어떤 정보를 열람하고 ‘대여’할 수 있는지는 순전히 본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차분하게 가라앉은 베일 너머로 올리비에라가 레녹을 응시했다.
[나는 그 기회를 모두 다 써버렸다. 그러니 다음은 네게 맡길 수밖에 없군.]“……그렇군.”
빠르게 정보를 쏟아내듯이 설명한 올리비에라의 말에, 레녹이 뒤늦게 수긍했다.
대답을 고르기 전의 침묵은, 아마 지금 설명해야 할 내용이 금제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터.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올리비에라가 설명해 준 녹스 비블리오의 존재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정보의 공유와 지식의 전수를 과제로 삼은 초월자가 만들어낸 사술 아카이브라.
그러한 초월자가 존재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하필이면 샨도레이 틸리언을 사서로 삼았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기 그지없다.
비밀과 비전에 얽매이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선악의 구분조차 무의미한 수준에 달한 초월자가 아닐까.
“샨도레이 틸리언과 함께 술식을 연구했다던 건, 녹스 비블리오에 출입하며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서였군.”
레녹이 물었다.
“당신의 위계를 마안에 걸맞게 조정하기 위해 틸리언을 이용한 건가?”
[네놈의 호기심을 위해 지나간 일에 대해 변명을 덧붙일 생각은 없다.]그 순간, 올리비에라의 전성이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수십 년 전에 묻어두었던 일을 꺼내 든 것 자체가, 오직 쿤다라로 가려는 네놈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거늘.]“…….”
[중요한 것은 외겁도시로 향하는 방법을 찾는 것. 그 중에서도 장막을 뒤틀어 쿤다라를 드러내는 일 그 자체다.]올리비에라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베일을 드리워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납득했다면 열쇠를 절벽 위로 꽂아 넣어라. 시기와 장소가 맞는다면 서고는 언제든지 열람자를 환영하겠지.]“……그래.”
오래전부터 올리비에라는 대륙과 마탑을 떠돌며 다양한 마법을 익히고 연구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한때는 틸리언에게 흑마법을 배워서 자신의 구도에 이용하려 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그 과정에서 녹스 비블리오의 존재를 인지하고 서고에 출입해 보았다면, 그녀가 어째서 여기서 방법을 찾으려는지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리비에라가 최소한 레녹과 이번 일을 두고 협력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 있었다.
여기서 협력을 끊어낼 생각까지 하고 있던 레녹과는 달리, 적어도 그녀 역시 마지못해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적어도 외겁도시로 향하는 길까지는 그녀를 아군이라 생각해도 문제는 없겠지.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열쇠를 천천히 절벽에 밀어 넣었다.
찰칵!!
단단한 바위 틈새에 열쇠를 박았는데, 마치 자물쇠가 풀리는 듯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열쇠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절벽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촤아아아악!!
어두운 암흑으로 물든 거대한 절벽.
절벽 위에 매달린 무수한 해골들이 일렁이는 어둠을 등지고 춤을 추고 있다.
마치 거대한 암흑의 요람의 입구 앞에 홀로 마주한 듯한 섬뜩한 고독감.
레녹이 등을 돌렸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지?”
[놈과 마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팔짱을 낀 올리비에라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네가 서고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처리해두어야겠지.]“그는 당신에게 감정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던데.”
틸리언은 올리비에라와 대화하면서도,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던 시절에 미련을 두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녹조차 그 낌새를 인지했을 정도니, 올리비에라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겠지.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레녹의 말을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
[되었다. 네놈이 신경쓸 일은 아닐터.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다녀오기나 하도록.]베일 너머로 레녹을 바라보는 마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행여나 서고에서 천체술식을 대여해 오지 못한다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야.]후욱!!
바람같이 사라진 올리비에라의 모습을 뒤로하고, 레녹이 고개를 돌렸다.
사방에서 일렁이는 암흑. 절벽 위로 치솟은 무수한 백골들의 춤사위.
나직하게 숨을 내쉰 레녹이 한걸음을 딛은 순간, 천지가 뒤집히듯 일그러지며 공허가 눈앞에 펼쳐졌다.
파아아앗!!!
주변의 지형지물이나 풍경이 변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검게 물든 채 느릿하게 침잠하고 있을 뿐.
검게 물든 절벽이 레녹의 눈앞에 우뚝 서 있고, 절벽에 매달린 해골 역시 잘 보인다.
한가지 달라진 점이라 한다면, 어느새 절벽에 수만 권이 넘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는 것.
두두두두!!!
깎아지른 절벽 자체를 거대한 책장으로 삼은 것처럼, 높이를 알 수 없을만큼 아득한 서고가 레녹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온갖 사이한 기운을 내뿜는 마도서와 양피지들이 곳곳에 꽂혀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달그락, 달그락!!
절벽에 매달려 있던 백골들이 움직이며 서고의 책을 정리하고 실어다 나른다.
저 무수한 해골들이 이 서고를 관리하기 위한 사서로서 기능하는 듯한 기이한 모습.
그제서야 레녹은 이 던전이 녹스 비블리오를 열람하기 위한 환경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기이할 정도로 깊고 너른 절벽도, 절벽 위에 무참하게 내걸려 있던 해골 더미들도.
모두 이 어둠의 서고를 열람하고 관리하기 위한 환경의 일부였던 것.
끼이이익……!!
레녹의 머리 위로 펼쳐진 아득한 높이의 책장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부러지며 왜곡된다.
너비와 높이가 개념을 잃고 어그러지며, 책장 안에서 다시 새로운 책장이 솟아올랐다.
3차원의 감각이 이 공간에서는 방향을 잃고 흔들리면서, 시간을 넘어 서로 다른 축을 그려냈다.
서고 한복판에 서 있는 레녹의 옆으로 무수한 마도서와 양피지가 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
한참을 그렇게 서고 입구에 서 있던 레녹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반갑습니다.]레녹의 등 뒤에서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한참 책을 짊어지고 책장 사이를 오가던 해골 사서들 중 한 명.
턱을 위아래로 두들기며 흐릿한 안광을 빛낸 해골이 말했다.
“……오랜만이라.”
레녹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난 이 서고에 처음 왔는데.”
[아뇨.]해골이 뚝뚝 끊어지는 웃음을 흘렸다.
[분명, 예전에 한번 오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 해골 사서는 지금 레녹이 아니라 누구를 보며 과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레녹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해골 사서가 웃으면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가시지요. 늘 보고 계시던 술식서고 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