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97
순진했던 남초록?
추측대로 며칠간 하눌 엔터의 분위기는 바짝 얼어 있었다. 스케줄 가느라 멀리 있어서 얼굴을 뵐 순 없었지만, 우리 부모님도 다녀가셨다고 들었다.
엄마는 ‘인사차’ 들렀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눈치껏 알고 있었다.
범무 형도, 박하네 어머니도 다녀가셨다고 했다. 기분 탓인지 직원분들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 섞인 태도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심지어 오늘은 초록 형의 아버지이신 남경욱 배우님도 하눌 엔터에 직접 행차하셨다.
온라인 콘서트 관련해서 급히 논의할 사항이 있어서 들렀던 우리는 초록 형의 아버지, 남경욱 배우님과 마주치게 됐다.
“안녕하세요. 남경욱 배우님 팬입니다. 사인 부탁드려도…?”
남경욱 배우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민 직원분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초록 형은 남경욱 배우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회사 전체에 알려지지는 않은 상태라 일부러 모른 척 연기하는 듯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마 벌써 심증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눌 엔터와는 연이 없는 ‘천만 배우 남경욱’이 계약 시즌도 아닌데 다른 소속사에 올 일이 딱히 없으니까
똑같이 ‘남 씨’라는 흔하지 않은 성을 가진 연예인이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주위 상황을 살펴본 남경욱 배우님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빈 회의실 문을 열었다.
“잠시 시간 빌려도 되겠습니까, 테오라 여러분들?”
뒤쪽에서 아쉬워하는 탄성이 들렸지만, 문을 꼭 닫았다.
“테오라 남초록이라고 합니다. 성이 같아서 그런지 친근감이 드네요.”
“하…! 이놈의 자식이.”
“대배우님이라고 하셔도 초면에 반말은 실례십니다.”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초록 형은 재미가 없어졌다는 듯이 싱글대던 표정에서 힘을 풀었다.
“재미없네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어요? 언제는 아이돌 아들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서요.”
“그…!”
남경욱 배우님이 우리 멤버들을 힐끔 보고는 입술을 꾹 다무셨다.
차마 아이돌 얼굴 앞에서 아이돌을 비하할 수는 없었던 게 아닐까?
“멀쩡하게 잘 있는 거 봤으니까 됐다. 괜히 왔구나. 네 수완이면 이 회사 사람들도 진즉에 구워삶아서 멋대로 반죽하고 있을 텐데. 쯧.”
역시 혈육이라선지 초록 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다.
“내가 대표 만나서 똑똑히 얘기해뒀으니까 조금은 편해질 거다.”
자기 영향력을 알고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어른의 태도였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배우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배우 전문 소속사로 시작한 하눌 엔터에서는 ‘혹시나 우리 회사에…?’라는 생각이 들만하다. 가망 없는 희망이라도 매달려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니까.
초록 형과 남경욱 배우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를 포함한 멤버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말에 가시가 들어가 있어서 사이가 나쁜가 싶다가도, 친근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분위기라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남경욱 아들이라고 알리지 않고 아이돌로 성공해보려고 했는데. 제 계획 다 망가졌네요. 어떻게 보상해주실래요?”
“내가 너 때문에…! 됐다. 집에나 자주 들러라. 네 엄마가 너 집에 안 온다고 귀 따갑게 구니까.”
대화만 들어선 평범한 가정의 대화 같았다.
“네, 뭐. 안 바쁘면 그럴게요.”
“어이구, 아들자식 키워 봤자 다 소용없지. 첫 만남에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하군요. 초록이 아빠 남경욱입니다.”
남경욱 배우님의 뒤늦은 인사를 얼떨떨하게 받아들였다. 아들에게 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젠틀하셨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혼이라고 합니다. 초록이는 제가 잘 챙길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아역 배우 서혼?”
“네. 어릴 적에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아까운 인재가 여기 또…. 다시 배우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초록 형이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서혼 형을 잡고 배우로 전향시킬 기세셨다.
“안녕하세요.”
마치 아들을 꼬드긴 질 나쁜 패거리를 보듯 매서운 눈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스캔하셨다.
“흠, 우리 아들놈이 꼬드겨서 이 길로 들어온 건 아니겠지?”
반대였구나. 하긴. 초록 형이 수동적인 위치에 설 리는 없다. 소소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지온이 말문을 열었다.
“언제 멤버들이랑 같이 집에 놀러 가도 되나요? 아저씨.”
“…뭐? 아저씨?”
“친구 아버지는 아저씨 아닌가? 초록 아버지라고 불러야 해요?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와서 몰랐어요.”
콩을 두부로 만들 줄은 알지만, 호칭은 정확히 모른다는 설정이구나. 초록 형은 안면 근육이 아픈지 입가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언젠가 지온이 초록 형에게 남경욱 배우님을 만나면 ‘남초록 아빠’라고 불러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준 것이다.
“‘초록이 아버지’라….”
남경욱 배우님은 몇 번이고 그 낯선 호칭을 곱씹으셨다. 보통은 이미 익숙해져 있을 호칭이었다.
지인들에게서 ‘남초록’이 아니라 ‘배우 남경욱의 아들’로 불렸을 초록 형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셨을까?
우리가 작정하고 초록 형을 감싸고 있다는 걸 남경욱 배우님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맹랑한 것들.”
그런 우리 멤버들을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기특해하는 듯 느껴졌다. 착각이라기엔 우리를 보는 시선에 온기가 돌았다.
“이번에 영화 들어가니까 그거 끝나면 놀러 와라.”
“한동안 쉬신다면서요, 아버지.”
“그렇게 됐다. 영원이 신작이니까 나중에 카메오라도 출연해 보든지. 나는 그럼 가 보마. 다들 몸조심하고.”
남경욱 배우님은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우리를 회의실에 두고 자리를 떠나셨다. 초록 형은 그 뒷모습에서 쉽게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초록 형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미간까지 좁히고 있었다.
“왜 그래?”
“이상해서.”
“뭐가?”
“아버지가 주영원 감독님 영화에 들어간다는 게. 연기나 연출에 관해서 몇 날 며칠 밤도 새면서 토론하시기도 하고, 내가 삼촌이라고 부를 만큼 친분이 깊은 사이긴 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버지가 주영원 감독님, 그러니까 영원 삼촌이랑은 작업 스타일이 안 맞으시거든. 주영원 감독님은 애드리브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시고, 아버지는….”
“찰진 애드리브로 유명하시지.”
서혼 형이 대신 말을 끝맺었다.
“다시 주영원이랑 영화 찍으면 장을 지지겠다는 게 아버지 말버릇이었거든? 그런데 영원 삼촌 신작에 들어가신다니까 이상해서. 무슨 약점이라도 잡히지 않…!”
초록 형이 뭔가 떠오른 듯 눈동자를 굴리면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게 단순한 친분에서 비롯된 호의가 아니었어. 내가 한참 순진했구나….”
초록 형이 자기를 순진했다고 한탄하게 만들다니. 도대체 주영원 감독님과 남경욱 배우님, 초록 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초록이 형! 무슨 일이야? 나만 이해 못 해?”
“영원 삼촌은 진작부터 아버지를 캐스팅하고 싶어 했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극구 거절하니까 수를 쓴 거였어. 테오라 데뷔 뮤비 말이야.”
“우리 뮤비? 주영원 감독님이 찍어주셨던 그거?”
“그래. 영원 삼촌이 나랑 친분이 있어서 흔쾌히 촬영해주신 줄 알았지만, 그게 ‘배우 남경욱’을 섭외하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면?”
“이런. 초록이 너를 도와줬다고 하면 남경욱 배우님이 거절하기 힘드시겠구나.”
“그렇겠지. 아직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게 더 말이 되지. 먹여 살릴 제작진이 있는 분이 먼저 재능 기부를 제안한 게 놀랍긴 했으니까.”
그 당시 회사에서 주영원 감독님을 떠올리고 접촉하긴 쉽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뮤비 촬영 비용과 주영원 감독님의 몸값을 감당하지 못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하눌 엔터의 자금력은 생각보다 훨씬 탄탄했다. 테오라를 데뷔시키고도 타격을 입지 않을 만큼.
“내가 아무리 약았다고 해도 어른의 노련함에 비비기에는 모자랐던 거지. 분발해야겠어.”
초록 형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떡밥을 깔고 회수하기까지 긴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1년이 넘는 시간을 참아낸 집요함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만큼 배우 남경욱을 간절히 원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버지가 넘어가셨겠지만, 그래도 그 결정에 부성애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빚을 진 거네. 아버지와 영원 삼촌 두 분에게. 어떻게 갚아드려야 하나?”
초록 형은 아마 함무라비 법전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배려엔 배려로, 미끼엔 미끼로.
천만 영화감독이 뮤비를 찍어주는 건 분명 테오라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서 아버지를 낚는 미끼가 됐다는 점은 초록 형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힐끔 초록 형의 표정을 살폈는데 평소보다 흉흉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초록아…? 왜 불이 붙었어?”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차에 최선을 다해서 계획을 세워야 상대할 수 있는 목표가 나타났잖아. 신나지 않을 수 있겠어?”
멤버들은 초록 형의 옆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우리에겐 누구보다도 든든한 리더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 * *
케이블 방송사 M.com의 사옥.
모던한 사옥의 최상층에 있는 대표실에는 레코드판이 돌아가면서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클래식 애호가들이나 겨우 존재를 아는, 한국에 단 하나뿐인 희귀 음반이었다.
“임 비서, 왜 요즘 함이원 소식이 없어? 어떻게 돼 가고 있는데?”
“…대표님. 상황이 어렵게 됐습니다. 클리어리 때와는 달리 테오라는 이미 인기 아이돌이라서….”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하눌 엔터 투자 건은 무산됐습니다. 하눌 대표가 투자가 필요하지 않다면서 거절해왔습니다.”
곱게 거절은 해왔지만, 투자자가 되어서 그 영향력을 휘두르겠다는 이쪽의 시커먼 속셈이 다 읽혔다고 꾸짖음 당하는 기분이었다.
손중기 대표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대표에게는 그걸 전달해봤자 심기만 거스를 게 뻔해서 생략했다.
“손쉬운 방법은 날아갔네. 돈 쓰는 게 제일 간단한데.”
“가짜 소문으로 평판을 떨어뜨리려고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반박 증거가 올라와서…. 계속 시도는 할 예정입니다만, 성공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아이돌 하나 거꾸러뜨리는 게 그렇게 어려워? 임 비서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무르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스케줄이 취소되도록 압박도 넣어봤습니다만 그게….”
“그게 뭐. 나 답답하니까 본론부터 얘기해.”
“일단 저희 회사에 잡힌 일정부터 취소되도록 압력을 넣어서 성사까지 됐지만, 그쪽은 타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루 비워야 했는데 잘 됐다고 반기는 분위기였답니다.”
괜히 시청률이 보장된 아이돌 게스트를 놓치게 된 프로그램 제작진은 그 원망을 대표에게 돌렸다. 비서인 자신이 누구 명령을 받고 일하는지 모를 리가 없을 터였다.
‘스폰 제의 거절이라도 했나 보네.’
제멋대로 생각하며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게 보일 정도였다.
“…걔들이 그렇게 잘나가?”
“MBS 예능 ‘관계자 외 관찰 금지’에 출연했다는데 거기서 화제가 되는 바람에 지금 몸값이 최고로 치솟았답니다.”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
히스테리를 부리던 대표는 곧바로 차분해져서 옷차림을 다듬었다.
“그럼 일단 걔들 약점이라도 파 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까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네. 알겠습니다.”
더러운 짓을 제 손으로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 누리는 풍족함을 한순간에 잃고 쫓겨나기는 싫었다.
임 비서는 좋지 않은 예감을 애써 지워내며 대표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