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85
85. 독거미의 숲을 벗어나
소영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금화부인이 흑혈 주
인을 알게 되었나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있을 때 굵은 음성이 들려
왔다.
“저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은 바로 중주이고 중의 상팔과 소영…”
그 소리를 들은 금화부인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소영이라? 그 자는 우리와 영 마음이 통하지 않는 자인데 오늘
만일 당신에게 생포되었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일
일 뿐더러 또한 강호를 진동시킬 만한 대사로군요.”
흑혈 주인이 말을 이었다.
“저 소영은 개성이 강해서 우리 흑혈문하에 들어오기를 거절하니
어쩔 수 없이 저들을 둘러 싸고 있는 휘장을 열어서 혈승의 배나
채워 주도록 해야겠습니다.”
금화부인은 마치 소영에게 들으라는 듯 고의로 목청을 높여서 말
했다.
“그렇게 하면 너무도 아까운 것 같군요.”
그러자 흑혈 주인은,
“아까울 게 뭐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금화부인은 그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소영이 오늘날 강호에서 날리고 있는 명성을 알고 계십
니까?”
그녀의 묻는 말에 흑혈 주인은 머리를 저었다.
“근 몇 해 동안 저는 흑혈에서 떠나 본 일이 드물어 단지 딴 사
람에게 소영이라는 자의 이름을 전해 들었을 뿐 그 자세한 내정은
모르고 있지요. 그러나 중주이고만은 옛날에 한 번 만나 본 일이
있었지요. 확실히 크게 이름이 나 있는 인물이더군요.”
상팔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 자가 나와 한 번 만났다고?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이때 금화부인의 말이 들려 왔다.
“소영은 강호에서 이름을 날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명성
이 전 무림에 쟁쟁하게 퍼져 있는데 만일 당신이 혈승으로 하여금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를 빨아 먹게 하였다면 딴 사람이 그 사
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걸요.”
그 말에 흑혈 주인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금화부인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소영의 명성이 너무도 크게 알려졌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정말
로 그를 죽였다 해도 딴 사람이 못 믿는 것 뿐만 아니라, 나 금화
부인 역시 그를 친히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가 혈승에게 갇혔다
는 사실을 못 믿겠군요.”
흑혈 주인은 핫하 하고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니 소영을 죽일 수가 없다 그 말
씀이군요?”
다시 금화부인은 수긍했다.
“그렇소. 당신이 그를 생포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당장에 사해
(四海)에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며 강호를 호령하게 되지요.”
흑혈 주인은 득의에 찬 음성으로 긍정했다.
“그렇게 되겠군요.”
금화부인은 잘라서 말했다.
“제가 한 말은 전부가 사실이지만 만일 당신이 믿어 주시지 않는
다면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소영이라는 자는 워낙에 성질이 누구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자라 나의 흑혈문하에 들어 오지를 않으니 남겨 둬 봐야 화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하는 흑혈 주인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 말에 금화부인은,
“그를 생포하려면 역시 꾀를 써야지요. 시간을 끌면 소영은…”
하더니 갑자기 음성을 낮추어 무어라고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그
래서 더 이상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 흑혈 주
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부인의 말씀이 옳소. 과연 부인의 고견은 실로 대단하시군요.
소생으로 하여금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하십니다.”
이 말을 듣자 상팔은 소영의 귀에다 입을 바짝 대고 이렇게 속삭
였다.
“금화부인이 틀림없이 형님을 구해 낼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도 조용히 대꾸했다.
“저 여인의 속셈은 도저히 예측하기가 힘드는군요. 도대체 그녀
가 무슨 연극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료.”
상팔은 더욱 자신있게 말했다.
“아마 제 말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딴 사람에게는 악
독하지만 형님에게만은 특별히 대해 주거든요.”
다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멀찍이서 갑자기 일진의 괴
이한 소리가 전해지자 휘장에 달라 붙어 있던 혈승들이 돌연 하나
도 남아 있지 않고 전부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 보니 햇빛이 나무 위에 비스듬히 내리 쬐
고 있는 것이 아마 정오경쯤 된 듯 싶었다.
소영이 초조한 듯이 막그 휘장을 들치고 나가려 할때 장자안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형, 잠시 기다렸다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왜요?”
하고 소영이 반문하자 장자안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 흑혈 주인은 혈승을 숨겨 두는 흑룡(黑龍) 검은색 새장 비슷
것이 있지요. 만일 그가 나무 뒤에 숨어서 당신이 휘장을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혈승을 풀어 놓는다면 그 때는 이미 다시 이곳
으로 피해 오려 해도 그럴 여유가 없을 것이오.”
소영이 그 말에 그만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흉측한 위험을 한 번 치러야 될 판인데 이 휘장 속에서
멍청하게 갇혀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하고 휘장을 들치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 부드럽고 가
느다란 음성이 귓가에 들려 왔다.
“빨리 휘장 속으로 다시 물러 가시오.”
소영은 대번에 그것이 금화부인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화
부인이 전음지술로써 자기에게 위험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깨달은
소영이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어 몸을 돌려 다시 휘장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것을 본 상팔이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휘장 밖에는 역시 매복이 있었나요?”
소영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금화부인이 전음지술로써 나에게 휘장 속으로 다시 들어 가라고
하는구료.”
그 말을 듣고 상팔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 됐어요!”
소영은 상팔의 말에 눈이 휘등그래지며 반문했다.
“아니 무엇이 됐다는 말이오?”
소영이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자 상팔은 태연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다면 절대로 형님에게 휘장 속으
로 되돌아 가라고 일러 줄 리가 없다는 이야기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이오?”
하고 소영이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팔은 차근차근 말하였다.
“그 금화부인은 몹시 영리한 사람이며 전신이 극독일 뿐 아니라
매서운 하수를 할 수 있는만큼, 만일 아직 계책에 만전을 기하지
못했다 치더라도 그녀가 형님을 구해 낼 생각만 갖고 있다면 필연
코 무슨 방법을 생각해 낼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돌연 금화부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동생, 부상을 당하지 않았겠지요?”
하고 물었다.
소영은 곧 입을 열고,
“아무 이상 없습니다.”
하며 대답했다. 이때 그녀의 옥같이 하얀 손이 뻗쳐 오더니 휘장
을 들추었다.
“이제 나와도 괜찮아요.”
소영이 앞장서서 휘장 밖으로 나오자 상팔도 소영의 뒤를 바짝
따라 나왔다.
햇빛 아래서 보는 금화부인의 안색은 창백하여 핏기라고는 한점
도 없어 보였으며 머리는 어지럽게 흐트러져서 마치 잠에서 갓 깨
꺼난 듯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몸을 지탱하지 못
하는 듯 비틀거렸다.
“누님의 상처는 좀 나아졌습니까?”
그의 물음에 금화부인은 가냘픈 미소를 입가에 띠며 대답했다.
“괜찮아, 설마 죽기야 할라구?”
소영은 이이 무위도장 등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그녀가 살려 주
었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라 몇 마디 감사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러나 갑자기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그 흑혈 주인은 어찌 됐습니까?”
“내가 몰래 독사를 풀어 그를 물게 했으니 그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반나절 이상을 지탱해 내지 못할 것이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방이 옆에서 불쑥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흑혈 중에는 일남일녀가 있어 만일 남주인이 부상을 당했을
때에는 여주인이 가만히 있지 알을 것이외다.”
금화부인도 그것을 시인했다.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빨리 이곳을 도주해야 되지요. 내가 알기
로는 그 흑혈 중에는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있는 것 같던데….”
소영은 궁금한 것을 다시 물었다.
“누님께서 어찌 그 흑혈 주인을 알고 계십니까?”
금화부인은 잘라 말했다.
“말을 하자면 길어지며 또한 한두 마디로써 될 이야기가 아닐 뿐
더러 이곳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도 못 되니 빨리 피신처를 먼저
물색해 놓은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때 옆에 섰던 장자안이 나섰다.
“만일 그 흑혈 여주인이 혈승을 갖고 당신들의 뒤를 쫓아와서 그
것을 풀어 놓게 된다면 아마 이 천하에 당신들이 몸을 숨길 곳이라
고는 한 군데도 없을 것이오.”
그 말에 금화부인은 차디찬 웃음을 띠고 대꾸했다.
“혈승이 비록 악독하기는 하지만 나 금화부인이 보기에는 그토록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고 봐요. 당신은 천하 만독이 서로 제압하고
중화할 수 있다는 원칙을 모르십니까?”
장자안은 대답했다.
“소생이 알고 있는 바로는 묘강(苗彊)에 있는 인면(人面) 거미만
이 그 혈승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자 금화부인은 슬쩍 그를 바라 보더니 웃음을 띠고 말했다.
“맞았소. 보아하니 당신의 견식은 좀 넓은 것도 같구료. 내 몸에
는 바로 그 묘강의 인면 거미를 갖고 있지요.”
장자안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시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셔야요. 지금 이곳에서 만
일 흑혈의 여주인이 그 혈승을 풀어 낸다면 당신네들이 아무리 인
면 거미를 갖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막아 내겠소이까?”
그 말에 금화부인도 끄덕였다.
“이 사람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되도록 빨리 몸을 숨길 만한 곳
을 찾아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소영이 곧 호응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누님을 안고 길을 재촉하도록 하겠습니
다.”
상팔은 소영을 힐끔 쳐다 보며 물었다.
“장형도 모시고 가야겠지요?”
그러자 장자안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소생은 이미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어 행
동이 불편하니 당신네들이나 빨리 도주하시오.”
상팔이 불쑥 앞으로 한 발 다가서더니 일장을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자안이 앉아 있던 나무 의자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자아! 소생이 장형을 업고 길을 떠나기로 하겠소이다.”
미처 장자안이 무어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그 반쪽 난 의자와 그
위에 앉은 장자안을 들쳐 업더니 큰 걸음으로 앞을 향해 전진하였
다. 왕방이 가슴을 쓱 내밀고 나섰다.
“제가 앞장서서 길을 열겠습니다.”
이 사람은 그 흑혈 주인을 매우 존경하고 또한 두려워하는 것 같
더니만 지금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이 보였다.
상팔은 장자안을 등에 업고 왕방의 뒤를 따랐으며 소영은 금화부
인을 부축하고 맨 끝에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금화부인은
두 다리에 워낙 힘이 없어 길을 걷기에는 너무도 무리인 듯했다.
소영은 하는 수 없이 금화부인을 두 팔로 꽉 껴안고 달렸다.
금화부인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소영에게 물었다.
“동생, 이렇게 나를 안으면 딴 사람들이 시샘할 것이 염려되지
않아?”
소영은 빙긋이 웃으며 속으로,
‘지금 이렇게 위급할 때에도 농담을 할 여유가 있다니.’
하고 생각하며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누님께서 길을 걸을 수 없으시기에 소제가 수고를 좀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앞에다 대고 소리쳤다.
“당신들이 이곳에 들어 온 길을 기억하고 있다면 빨리 그 길로
나갑시다. 우리는 동굴 속으로 우선 피신을 해야 되니까요.”
상팔은 길눈이 밝았다. 길을 기억하는 재주는 강호에서 그를 따
를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그는 연방 앞장 선 왕방에게 이
리 가라 저리 꺾어라 하고 뒤에서 소리쳐 알려 주었다.
그들 일행은 약 반 시간 정도 길을 재촉하여 숲가에 도착했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고, 높은 산마루에도 한 조
각 걸려 있었다. 그 한 조각은 마침 절벽 위의 한 곳을 뒤덮고 있
었다.
상팔은 가느다란 탄식을 하더니,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했다. 소영은 돌연 손불사와 무위도장 등이 머리에 떠올라 속으
로 흠칫 하였다.
“안 되요. 우리는 빨리 길을 되돌아 가야 됩니다.”
장자안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직 험지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왜 또 그 호랑
이 아가리에 뛰어 들려고 하십니까?”
소영은 상팔을 똑바로 바라 보며 말했다.
“L우리는 그 험지를 벗어났다 할 수 있겠지만 무위도장과 손불사
등 여러 사람은 그 혈승의 독함을 모르고 있는데 혹시 숲 속으로
우리를 찾으러 들어 가게 되면 필시 흑혈 주인에게 당할 것이 아니
겠소.”
금화부인이 물었다.
“아! 그들도 전부 왔나요?”
“예, 그 분들은 전부 숲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저와 상형이 사
나운 개를 따라 숲 속으로 쫓아 들어 왔지요.”
“동생이 쫓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 사람이에요?”
“저의 부모……”
하다가 뚝 그치더니,
“누님께서 그 흑혈 주인과 잘 알고 계신 모양인데 혹시 그가 어
떤 사람을 생포한 것을 못 보았나요?”
금화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흑혈 내외의 실정을 모르고 있지.”
“그렇다면 그가 어째서 누님을 구해 주었습니까?”
‘내가 길 옆에 까무러쳐 있을 때 백화산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출되었지. 아마 심목풍은 나를 아직 크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
는지 고수들을 파견하여 해독약을 갖고 나의 행방을 쫓았었지. 어
쨌든 내가 죽을 때가 아니었던지 그들에게 발견된 것이야.”
소영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누님께서는 왜 그 흑혈 안으로 뛰어 들었지요?”
“이 누나가 기절하여 혼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이 이곳으로 업어
왔어. 그래서 나는 이 흑혈이 백화산장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야.”
상팔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맞았어요! 맞아…..”
소영은 의아한 얼굴로,
“무슨 일인데요?”
하고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옛적에 천하 고수들이 심목풍을 밀림 속까지 쫓
았으나 밀림 속에서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
러니 아마 틀림없이 그 흑혈 속에 숨었던 모양이지요?”
그 말에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러면 그 흑혈은 심목풍의 본 소굴인 모양이군.”
금화부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매우 넓고 큰데 칠흑같이 어둡더군요. 내
생각 같아서는 그 안에 많은 문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그러자 소영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흠! 내 양친께서 틀림 없이 그 흑혈 속에 갇혀 계신 모양이로
군.”
상팔이 소영의 말을 받았다.
“만일 두 어르신네께서 정말로 그 흑혈 안에 갇혔다면 그것은 아
마 막 날이 밝을 무렵일 겁니다.”
하며 눈길을 금화부인의 얼굴에 박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인께서는 언제 깨어나셨나요?”
“나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요. 나는 깨어난 뒤 바로
그 흑혈 속을 더듬으며 빠져 나왔지요. 흑혈 속에는 통로가 하도
많아 복잡하긴 하나 내가 있던 곳이 마침 그 동굴의 입구에 가까운
곳이었기에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게 되었던 것이오.”
하더니 소영을 보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 누나가 누구라고, 비록 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딱 짐작이
갔었지. 더구나 그는 나를 모르고 있었거든.”
상팔이 다시 물었다.
“부인의 말씀을 들어 보니 소대협의 양친께서 납치되었다는 사실
을 몰랐던 모양이지요?”
“예, 몰랐어요. 내가 그 흑혈에서 나오자마자 당신네들이 그 혈
승에게 갇혀 있는 것을 보게 된 거지요.”
소영이 금화부인에게 물었다.
“그 흑혈은 땅 속 깊이 있는 하나의 동굴이겠지요?”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 가자면 얼마나 많은 문호가 있는지 그 수
를 알 수가 없으며 그 안이 얼마나 깊고 긴지 만일 그곳의 내정을
모르는 사람이 흑혈에 발을 들여 놓게 되면 그들에게 생포되지 않
으면 암수에 걸려 죽게 마련이지.”
소영은 그 말에 이마를 찌푸렸다.
“그 흑혈 속에는 많은 함정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군요?”
“함정이 매복되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동굴 속의
어둠이란 심야보다도 더 캄캄하더군. 그 흑혈 안에서는 아무리 좋
은 시력이라도 석 자 밖의 물체를 분간해 낼 수가 없을 정도였어.
그러니 무슨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사람의 암
습만이라도 막아 낼 궁리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소영이 또 물었다.
“그 흑혈 안에는 사람이 많습니까?”
“나는 그 흑혈 안에서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어. 그러나 내
감각으로는 많은 사람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더군.”
“저에게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고 소영이 말했다.
금화부인은 눈으로 그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흑혈 내에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어떻게 물건을 분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금화부인은 잠시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무공은 이 누나가 연마해 보지 않아 장담을 할 수가 없으
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 흑혈 속에서 계속 여러 해를 살아 왔다면
흑암중에도 물건을 분별할 수 있는 특수한 안력을 연구해 낼 수도
있는 문제겠지.”
상팔이 다시 화중에 끼여 들었다.
“그들의 안력은 야밤에도 물체를 볼 수 있도록 연마해 내지는 못
할망정 최저한도 그 흑혈 중의 형세에 익숙하여질 수는 있는 문제
니까. 만일 그들이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겨 암습을 해 온다면 역시
막아 내기가 힘들 것이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장자안이 돌연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는 빨리 혈승을 방비해 낼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흑혈 속의 사람이 쫓아 오기라도
한다면 사방에 이렇게 아무런 방비도 없는 이곳에서 틀림없이 당하
고 말 것이외다.”
금화부인은 고개를 쑤욱 빼고 절벽 밑을 한번 살피더니 소영에게
물었다.
“동생은 이 절벽을 내려갈 수 있겠나?”
소영도 밑을 한번 살펴 보았다.
“아마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금화부인은 절벽 밑의 모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일 이 절벽 밑에 우리가 숨을 만한 동굴이 없다면 우리는 저
모퉁이를 이용해서 그 혈승을 막아 내야 해요.”
상팔은 재빨리 등에 업고 있던 장자안을 내려 놓고 장삼을 벗더
니 쭉쭉 찢어서 마디마디 붙잡아 동여 매었다. 그렇게 해서 제법
튼튼한 밧줄을 만들고는 금화부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께서 먼저 절벽 밑으로 내려 가시오.”
하더니 소영을 한번 쳐다 보고,
“형님께서도 모험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금화부인은 입가에 웃음을 짓더니 장삼을 찢어서 이은 헝겊 밧줄
을 잡고 천천히 절벽 밑으로 내려 갔다.
소영도 장자안을 안고 역시 그녀의 뒤를 이어 절벽 밑으로 내려
갔다. 제일 나중에 남은 상팔은 그 밧줄의 한쪽 끝을 나무에 매어
놓고 자기도 그것을 잡고 밑으로 내려 섰다.
그 절벽 밑은 이백 평쯤 되는 아담한 분지였다. 그리고 삼면이
일곱 길쯤 되는 절벽으로 둘러 싸였으며 단지 일면만이 밖으로 통
할 수가 있는 곳이었다.
금화부인은 주위를 눈여겨 살펴 보았으나 동굴은 눈에 띄지 않았
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모퉁이를 찾아서 좌정했다.
상팔은 금화부인을 쳐다 보며 물었다.
“부인! 이곳은 그 혈승을 막아 낼 수 있을 만한 곳입니까?”
“아마 그런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무위도장을 한번 불러 보도록 하죠.”
하더니 목청을 높여 길게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 휘파람소
리는 마치 용의 울부짖음과도 같이 구름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그러
자 조금 후에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상팔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그 분들이 찾아 왔습니다.”
하고 다시 얼굴을 치켜 들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소리가
멎기가 무섭게 한 마리의 호랑이같이 사나운 개가 쏜살같이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나운 개의 뒤에는 두구와 사마건이 따르고
있었다.
상팔은 소리 높여 불렀다.
“두제, 큰형님은 이곳에 계시네!”
두구와 사마건은 곧 대답을 하고 달려 왔다.
소영은 그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께서는 어디로 가셨소?”
“그 분들은 개를 앞세우고 숲 속으로 형님을 찾으러 들어 갔지
요.”
그 말에 소영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황급히 외쳤다.
“아차! 큰일났군! 그 분들이 만일 흑혈 안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
면 혈승에게 큰 화를 당하게 될 텐데…..”
하자 두구가 물었다.
“어떻게 생긴 혈승인데요?”
상팔이 대뜸 나섰다.
“지금 이렇게 경황 없는 중에 자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시간이 없네. 자네들은 여기서 형님을 모시고 있게. 나는 이 사나
운 개의 힘을 빌려 그 분들을 찾아 올 테니까…..”
장자안이 한쪽 구석에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으로는 가실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만일 그 분들이 혈
승의 떼를 만났다면 당신이 갔다고 무슨 도움이 될 것도 아닐 테니
가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팔은,
“무림의 일에 대해서 장형은 아직 모르고 있소.”
하더니 몸을 재빨리 일으키며 그 사나운 개의 엉덩이를 한 번 탁
치며 사람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또 한번 수고 좀 해 주어야겠다!”
이때 왕방이 크게 소리쳤다.
“상형! 잠깐만!”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것 봐! 혈승이 다가 오고 있소. 자세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봐요. 틀림 없이 부웅부웅 하는 소리가 들려 오니까.”
상팔은 눈살을 모으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과연 그렇군. 틀림 없이 혈승이 날아 오는 소리다!”
하고 재빨리 두 손으로 개를 덥석 안더니 제자리로 뛰어 왔다.
금화부인은 긴장된 얼굴로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당신들은 저 구석진 곳으로 가서 한데 모여 계시오.”
하고 당부했다.
소영 등은 이미 그 혈승의 무서움을 알았던지라 그 말에 재빨리
물러 나서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러나 두구와 사마건은 혈승이 도
대체 어떤 독충인지를 몰라 과히 두려운 기색도 없이 천천히 그들
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구석에 모여 자세히 바라 보니 금화부인은 침착한 솜씨로
품 속에서 한 개의 옥함을 꺼내더니 그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
고 위로 한 번 쳐 드니 전신이 벽록색(碧綠色)인 네 마리의 복숭아
씨만한 거미가 일제히 옥함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들이 피신한 모
퉁이에는 작은 나무들이 많이 서 있었다.
옥함에서 나온 네 마리의 큼직한 거미는 그 작은 나무 사이를 왔
다갔다 하며 빙빙 돌았다. 순식간에 몇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절
벽 모퉁이는 거미줄로 엉켜 버렸다.
금화부인은 거미줄이 엉킨 것을 보자 그제서야 엷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동생, 이 거미줄이 튼튼하고 밀집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혈승의
수가 워낙 많아 혹 한두 마리가 그 거미줄을 뚫고 들어 올지도 모
르니 각별히 주의를 해 주기 바라오.”
왕방은 손을 내밀어 억센 잡초를 한 줌 뽑아 들고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상팔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한 움큼 꺾
어 들었다.
두구와 사마건은 서로 얼굴을 바라 보더니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서서히 풀숲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미줄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일러 주었다.
“당신들은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절대로 그 거미줄에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돼요.”
그 말에 상팔이 되물었다.
“왜요? 이 거미줄에도 극독이 있습니까?”
금화부인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핏기라고는 한 점도
없는 창백한 안색이었으나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을 한 채 마치 생사
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상팔의 물음에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 대답했다.
“그 거미줄의 독은 과히 독하지는 않으나 저 독거미에게 굉장히
예민한 반응을 주지요. 그 거미줄에 어떠한 물체든지 닿기만 하면
저 독거미는 사람을 물어 버리게 되지요.”
“만일 그 독거미에게 물리게 된다면 구출할 방법이 없습니까?”
금화부인은 상팔의 물음에 잠시 주저하더니 애매한 대답을 했다.
“저 독거미의 뱃속에 든 독은 굉장하지요. 만일 실수하여 그것에
물렸다 하면 구할 방법이 전혀 없지요.”
“부인의 말씀은 구할 기회가 도저히 없다는 이야기신가요?”
금화부인은 끝까지 물어 오는 상팔에게 힐끗 눈길을 보내더니 대
답했다.
“내가 최고로 짧은 시간 내에 물린 사람에게 저 독거미의 독이
퍼지지 않게 하는 약물을 먹이기 전에는 어렵지요. 그러나 그 짧은
기회란 너무도 순간적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만일 독거미에게 물렸
다 하면 구사일생 정도라고 생각하면 틀림 없어요.”
그 말에 상팔은 음성을 높여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러분, 모두 들으셨겠지요? 우리 서로 저 거미줄에 닿지 않도
록 각별히 조심합시다.”
소영과 상팔은 전신에 단단히 공력을 모으고 한동안 기다렸으나
혈승은 날아 들지 않았고 거미줄만 더욱 단단하게 얽혀 가고 있었
다. 두구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어째서 그 혈승인가 하는 독충이 나타나질 않는가?”
왕방이 정신을 모아 귀를 기울여 봤으나 그 부웅부웅 하던 혈승
의 날개소리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그 혈승이 이곳까지
날아 왔다가 다시 돌아간 듯하였다.
소영은 언뜻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안색이 변하며 소리쳤
다.
“그 혈승떼가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을 만난 것 같은데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가서 알려 드려야 하지 않을까?”
장자안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미 늦었소이다. 만일 두 분께서 그 혈승을 만났다면 지금쯤
벌써 피와 살이 전부 빨려서 시체조차 분별치 못하게 되었을 것입
니다.”
두구는 여전히 냉연한 태도로 말했다.
“우리가 그 두 분을 찾아 가는 것은 덮어 두고라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독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 속에서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노
릇이 아니겠습니까? 이 거미줄이 점점 더 견고하게 쳐지는 것을 보
니 어쩌면 우리 역시 이 거미줄 속에 갇혀서 죽게 될지도 모르겠군
요.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그 혈승의 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거미줄 밖으로 나가서 그 분들을 찾아 보는 것이 좋겠소이다.”
장자안이 다시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근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잠
시 후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길을 재촉할 수 있게 되니까요.”
소영의 가슴 속은 몹시 암연하였다. 그는 긴 한숨을 후욱 내쉬며
말했다.
“우리 당당한 칠 척 장신들이 어이없게도 한 무리 혈승에게 발길
을 묶이고 또한 독거미줄의 힘을 빌려 목숨을 보전해야 된다니 정
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잠잠히 앉아 있던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동생, 너무 그렇게 영웅심만을 생각할 것 없소. 세상 일이란 전
부 무공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고쳐야 돼.
요. 이 누나만 해도 그렇지, 일생 동안을 각종 독물만 다루어 오면
서 용독지능(用毒之能)에 있어서 최고라고 장담하지는 못해도 공전
에 없었으리라 자부해 왔던 터인데 그러나 심목풍이 내 몸에 쓴 독
은 이 누나로서도 해독할 수가 없을 뿐더러 나의 모든 지략을 총동
원시켜서 연구를 해 봐도 그가 나에게 쓴 독의 조제법을 알아 내지
못했지.”
상팔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부인의 말씀은 이미 수중에 심목풍이 사용하는 독이 있다는 말
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꾀를 써서 심목풍이 사용하는 독물을 얻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 조제법을 알아 내지 못해 그 해약도 만들지 못하
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계속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 심목풍 외에 단지 독수약왕 한
사람만이 그 약의 조제방법을 안다고 하더군요.”
소영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독수약왕은 이미 그의 딸을 데리고 은거해 버렸지요. 행
방을 알 수 없으니 그 분을 찾을 길이 막연하지요.”
금화부인은 장자안을 똑바로 바라 보며 물었다.
“당신은 혈승이 절대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할 수 있
겠어요?”
“네, 소생이 혈승과 금시오공(金翅蜈蚣 : 지네의 일종)을 사육해
온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어 물론 장담할 수가 있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말을 믿겠소. 만일 혈승이 갑
자기 나타나면 당신의 몸으로 혈승의 배를 채우시겠어요?”
“좋소이다. 그렇게 되면 소생 죽어도 원이 없겠소.”
상팔이 금화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이 거미줄이 점점 더 밀접하게 엉키는데 언제 이것을 뚫
고 나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녀는 미소로 대답했다.
“그거야 여러분께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독수약왕이
독을 배합하는 능력은 나 금화부인보다 좀 위일지 모르나 독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나를 따르지 못할 것이오.”
‘무림 중의 사람들이 갖는 이 명예에 대한 애착과 승리에 대한
집념은 정말로 그 도수가 넘칠 정도구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녀
는 아직 자기의 독물 사용 능력을 자랑하고 있단 말인가?’
금화부인은 웃음소리와 함께 약간 비웃듯이 말했다.
“사람이란 태어난 곳과 묻힐 땅이 있어야 된다는 말은 당신네들
장부들이 자주 쓰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전부가 칠 척의 대장부이
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이 금화부인보다도 더 하십니
까?”
소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죽음이 가
치가 있나 없나를 따지는 것이지요. 만약 팔팔한 사지가 달린 장정
들이 그 혈승에게 피와 살을 빨리게 된다면 그것은 죽어도 눈을 감
지 못하게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지금 우리의 살 길은 광활하니 여러분께서는 마음 푹 놓고 담소
하시고 노래를 불러도 무방합니다.”
하며 거리낌 없이 크게 웃었다.
상팔도 따라 웃으며 크게 외쳤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사내 대장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슴
을 펴야 옳은 일이겠지요.”
상팔의 말에 모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우울한 생각을 날려 보
냈다. 그러나 소영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고 두
구도 괴이할 표정에 희색이라고는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날이 벌써 저물기 시작하였다.
상팔은 사방에 어둠이 깔리자 장자안에게 물었다.
“장형, 하늘에 별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제 출발해도 되겠
지요?”
“가도 되겠습니다.”
상팔은 다시 금화부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이 이 거미줄 좀 치워 주시오.”
금화부인은 미소를 띠고 장자안을 바로 보았다.
“틀림없겠지요?”
장자안은 또렷이 대답했다.
“틀림 없습니다.”
금화부인은 서서히 품 속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더니,
“여러분 중에 누구 횃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마건이 나섰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만 부인께서는 불로 이 거미줄을 태워 버
릴 작정이십니까?”
“불로 태워 버릴 수는 없지요. 저 독거미는 워낙 동작이 빨라서
만일 도망이라도 가게 되면 필연코 해를 입는 사람이 생길 테니 반
드시 저 네 마리의 독거미를 먼저 제거한 다음에 이 거미줄을 태우
도록 해야지요.”
사마건은 재차 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저 네 마리의 독거미를 제거하실 작정이십니
까?”
“가만히 계세요. 여러분께 좋은 구경을 하도록 해 드리지요.”
하며 갑자기 그 옥함을 열어 팔을 한 번 쑥 내밀었다. 한 줄기
흰 선이 거미줄 위에 있는 독거미에게 덮쳐 갔다.
일행은 일제히 그 흰 선을 주시했다. 그것은 뜻밖에도 한 마리의
흰색 작은 뱀이 아닌가?
네 마리의 독거미는 그 백사를 보자 갑자기 그 백사를 향해 다가
가더니 자발적으로 백사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마건이 횃불을 높이 치켜 들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전부 그 광
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지라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백
사의 몸은 몹시 작았기 때문에 연달아 복숭아씨만한 독거미 네 마
리를 먹고 나서 배가 불룩 튀어 나왔다.
이때 금화부인은 수중에 들고 있던 옥함을 다시 치켜 들고 그 뱀
을 한 번 건드렸다. 그러자 그 조그만 뱀은 순식간에 옥함 속으로
들어 가고 말았다.
금화부인은 서서히 뚜껑을 덮더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저 거미줄을 태우도록 합시다.”
사마건이 들고 있던 횃불을 거미줄에다 댔다. 순식간에 거미줄은
후두둑 하는 소리를 내고 깨끗이 타 버렸다.
상팔은 장자안을 업으며 말했다.
“장형은 거동하기가 불편하니 아무래도 제가 업고 길을 재촉하도
록 해야겠습니다.”
소영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금화부인을 돌아 보며 물었다.
“누님께서는 거동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 되겠소. 적어도 사흘쯤 휴양을 더 해야 될 것 같군.”
소영은 그녀가 자기의 목숨을 여러 차례나 구해 준 은혜를 생각
하고,
“소제가 부축해 드려야 마땅하지요.”
하면서 몸을 굽히더니 금화부인을 선뜻 등에 업었다.
이때 두구가 나서며,
“제가 앞장서겠소.”
하고 앞장서서 걸어 갔다.
분지를 나서자 소영은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제의했다.
“두형, 이 분들을 먼저 가게 하고 두형과 나는 손노선배님과 무
위도장을 찾으러 가도록 합시다.”
두구의 말투는 항상 건방지다. 누구에게나 듣기 거북할 정도로
말하였으나 소영에게만은 항상 공경하고 정중한 태도였다.
“소제는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소영은 사마건을 한 번 쳐다 보더니 부탁했다.
“사마형께서는 매우 수고스럽겠지만 제 대신…..”
금화부인이 그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이 분에게 나를 업히려고?”
“그렇습니다.”
“안 되오! 나는 이곳에 남아서 동생을 구해 주어야 해요!”
“누님께서는 몸도 자유롭지 못하신데 어찌 저를 도와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내가 비록 행동에 불편을 느끼기는 하지만 나는 전신에 독물이
있어서 만일 그 혈승떼를 만나더라도 내 몸에 있는 독거미로 도와
줄 수가 있으니 아무래도 동생과 함께 있어야 좋을 거야.”
두구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부인을 업고서 어떻게 적
을 맞이하겠습니까? 만일 부인께서 정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소생이
할 수 없이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어떠한 실례를 나에게 하겠다는 말씀이신지?”
“소생이 강제로 부인을 업게 되는데 어찌 실례가 아니겠소이까?”
그러자 금화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괜찮습니다.”
두구는 앞으로 두어 발 다가 서더니 금화부인을 업었다. 그리고
사마건을 쳐다 보며 부탁했다.
“사마형께서는 우선 이 분들을 데리고 십 리 밖에 있는 그 동백
나무 밑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세요.”
사마건은 곧 상팔 등과 함께 몸을 돌려 걸어 갔다.
소영은 밤하늘을 쳐다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두 사람을 찾지요?”
“소제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일정한 곳에 지키고 있으면서 저 사
나운 개를 풀어 그 분들을 찾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요.”
하고 두구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자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곧
동의했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두구는 금화부인을 업고 한 손으로는 그 사나운 개를 끌고 토롱
위로 올라 갔다. 그리고 갑자기 개의 엉덩이를 발로 탁 쳤다. 그와
동시에 나지막한 휘파람소리를 날카롭게 불었다. 그 큰 개는 컹컹
사납게 짖더니 몸을 날려 비호같이 앞으로 달려 갔다. 그 개의 속
력은 굉장했다. 곧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그 소리가 점
점 가까이 달려 왔다. 두구는 고개를 번쩍 들고 앞을 바라 보았다.
“소식이 오는군요.”
소영은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소식일까?”
“두 마리 사나운 개는 이미 만난 모양입니다. 그 개가 아무 이상
이 없으니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께서도 아무 위험이 없었던 모양
입니다.”
그 말에 약간 안심을 하였으나 그래도 걱정이 되어,
“정말일까?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나.”
하고 반신반의하자 두구는 다시 힘있게 말했다.
“소제가 어찌 형님에게 거짓을 말하겠소이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과연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
가 쏜살같이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앞에서 달려 오는 것은 두 마
리의 사나운 개들이었으며 그 뒤에는 손불사와 무위도장이 바짝 따
르고 있었다.
소영은 반가워 마주 달려 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두 분께서는 그 혈승떼를 만나지 않으셨군요.”
그러자 손불사가 대뜸 대답했다.
“바로 그 왕벌같이 생긴 파리떼들 말인가? 무섭지 무서워! 만일
무위도장의 재빠른 기지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 목숨은 벌써 그 파
리떼의 먹이가 되었을 게야.”
소영은 그의 말을 들어 보니 분명히 그 혈승떼를 만난 듯한데 그
렇다면 맹렬히 달려드는 혈승떼를 이 두 분께서 무난히 넘기신 재
주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위도장도 입을 열어 손불사를 칭찬했다.
“그게 아니지, 노선배님의 두 번에 걸친 강맹한 장력이 아니었던
들 우리는 아마 그 혈승을 피해 낼 기회가 없었을 것이외다.”
하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혈승을 푼 사람이 가련합니다. 우리 대신 혈승의 밥이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손불사가 받아서 말했다.
“불쌍할 게 뭐 있소. 그들은 우리 생명을 노리던 자들인데 죽어
마땅할 일이지…..”
듣고 있던 소영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요.”
하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두구는 벌써 금화부인을 업고 상팔 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손불사는 소영에게 웃으며 물었다.
“자네도 그 혈승을 만났었나?”
“네, 후배도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셈이지요.”
하며 그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손불사는 묵묵히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금화부인은 정말 나쁜 길을 버리고 정도로 돌아 올 마
음이 제법 있는 모양이구먼?”
무위도장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다고 보지를 않습니다.”
“어디 그 고견을 들어 봅시다.”
“금화부인이 수차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이유는 전부 이 소대협 한
사람을 위해서였지요.”
하더니 소영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계속했다.
“저는 벌써 수 년 전부터 금화부인의 이름을 들어 왔지요. 그 여
인은 몹시 냉혹할 뿐 아니라 악독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추
호도 염두에 두지 않으며 반생 동안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전부가
자기 멋대로 했었지요. 심목풍이 그녀의 성격을 십분 알고 있지 않
았더라면 절대로 중원에 들여 보내지 않았을 것이오.”
“옳은 말이오.”
하고 손불사가 끄덕였다.
소영이 곧 이야기했다.
“그러나 심목풍은 그의 몸에 독을 썼답니다.”
그러자 무위도장이 대꾸했다.
“그것 또한 소대협과 관계가 있지요.”
소영은 무위도장을 향해 말했다.
“심목풍은 의심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절대 그 어느 사람도 믿지
를 않지요. 독수약왕의 몸에까지 역시 똑같은 수를 써 왔어요. 어
쨌든 백화산장 전체에서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심
목풍에게 암암리에 독수를 받았지요.”
무위도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다 하지만 만일 심목풍이 금화부인이 소대협에게 마음
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챘다면 그토록 악착스럽게 독을 쓰
지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그녀에게 직접 말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
오.”
소영은 아직도 몇 마디 더 항변하려고 했으나 손불사가 나서며
막았다. 그는 껄껄 웃더니 농담 비슷하게 말하였다.
“이 늙은 나도 눈치채고 있었지. 그 금화부인이 확실히 소제에게
한 가닥 특이한 감정을 갖고 있더군. 그 여인은 이름을 날린 지가
오래되니 따져 보면 아마 반백살은 될 듯 싶은데……”
그러나 그는 그녀의 나이를 말한 것이 너무 귀에 거슬릴 것 같아
서 돌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영은 더 이상 이들이 금화부인의 이야기를 꺼낼까 겁이 나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두 분께서 위험을 당한 경파나 말씀해 주십시오.”
손불사는 정색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소제의 행방을 쫓고자 그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 갔지.
그리고 반나절이나 헤매어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그 숲 속에서 맴
돌았었지. 그때 아마 개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숲 밖으로
달려 나갔지. 나와 도장은 이 개를 부르는 방법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그 개의 뒤를 따랐었지.”
하더니 잠깐 말을 끊었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숲 밖으로 나오자 그 큰 개가 땅에 착 엎드려서 꼼짝도 하
지 않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앞을 노려 보며 이상한 태세를 갖추고
있더군. 나는 항상 허둥거렸으나 그 때만은 정신이 바짝 들더구먼.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앞을 바라 보았더니…..”
말을 하다가 힐끗 무위도장을 한 번 쳐다 보며,
“그때 마침 이 무위도장도 내 옆에 다가 왔었지.”
하자 무위도장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노선배께서 그런 침착한 표정을 지으시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외다.”
손불사가 갑자기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