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398
398.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
당연히 실패를 인정하고 물량을 털어내라고 할 줄 알았던 데이비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포지션을 계속 가져가라는 말씀이십니까?]“그래요.”
재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비극적인 참사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연쇄 테러라면 비료공장이 아닌 다른 곳을 노렸을 거예요.”
[저 역시 테러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게 시장의 불안감을 폭발시키는 방아쇠가 될 여지는 충분할 겁니다.]“물론 충격은 있을 거예요. 하지만 금방 다시 올라올 거라는 것이 내 판단이에요.”
[테러 우려에다가 경제 지표가 다 저조한데도 말씀이십니까?]“그러니까 오히려 더 반등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군요.]“여러 가지 악재들이 산재해 있지만 최근 세계 증시가 충격에 크게 반응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연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요.”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경제와 증시가 이렇게 불안하다면 재정긴축에 나서려던 연준도 쉽사리 움직임을 보일 수 없지 않겠어요.”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서 오히려 양적완화(QE)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대할지도 모르죠.”
[지난 몇 년간 양적완화로 돈이 풀릴 때마다 증시가 크게 상승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말씀이시군요.]“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경제 지표가 안 좋을수록 주가에는 더 긍정적인 신호가 될 거예요.”
데이비드가 낮게 탄성을 흘리며 말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당장은 공포에 주식을 내던지겠지만 평정심을 되찾게 되면 다들 이걸 눈치채고 다시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할 거예요.”
[으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일단 지금은 변동성이 큰 만큼 홀딩만 하고 있다가 바닥을 찍으면 그때 집중 매수를 하도록 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리고 골드원도 자동매매를 하고 있죠?”
[물론입니다.]자동매매란 말 그대로 미리 짜둔 프로그램에 따라 컴퓨터가 알아서 주식을 사고파는 걸 뜻했다.
실수를 할 수 있는 인간하고 달리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고 빠르게 매매를 벌이기 때문에 효율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월가 같은 경우에는 전체 거래량의 85% 정도가 사람이 아닌 컴퓨터 자동매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골드원 역시 슈퍼 컴퓨터급 장비를 이용한 자동매매를 처음부터 도입해 쓰고 있었다.
“당분간 자동매매를 통한 매도 기능을 꺼두도록 해요.”
[갑자기 그건 왜…….]의아해하자 재성이 미리 생각해 둔 이유를 댔다.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자칫 엉뚱한 요인으로 대량 매도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걸 대비하려는 거예요.”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 사건이 재발되는 걸 우려하시는 거군요.]“그래요.”
플래시 크래시는 2010년 5월 6일 다우지수가 별다른 악재도 없이 장 마감 15분을 앞두고 갑자기 1,000포인트 가까이 폭락해 전 세계 경제를 흔들었던 사건이었다.
현재까지 투자은행 직원 한 명이 거래 단위를 잘못 넣었는데 거기에 프로그램 매도가 쏟아지면서 폭락이 촉발된 걸로 알려졌다.
‘몇 년 뒤에 사실은 의도적인 시세조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이때 사람이 아닌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 매매의 취약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대학 때 플래시 크래시에 대해 강의를 들으며 배웠던 기억이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텍사스 비료공장 폭발 사건이 터지자 함께 떠올랐다.
“정말로 플래시 크래시가 발생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다우지수가 단기간 140포인트 이상 급락하면 매수를 하도록 알고리즘을 넣어두도록 해요.”
[설마 그런 일이 또 생기겠습니까?]“혹시 모르는 일이죠.”
[……미리 대비해 두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 말씀대로 해두겠습니다.]통화를 끝낸 재성은 TV에서 나오는 뉴스 속보에 시선을 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지도 모르겠네.”
* * *
[테러 공포에 다시 빠져드는 미국!] [탄저균 우편물에 이어 텍사스 비료공장 폭발까지 연쇄 테러 공포에 미국 패닉.] [반등하던 미국 증시 다시 폭락!]예상대로 시장이 열리자 미국 증시는 다우와 나스닥을 가리지 않고 전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모건 스탠리 22달러 30센트 2만 주 매도!”
“BOA와 시티은행도 동반 하락 중!”
“애플도 다시 4% 넘게 떨어지고 있어!”
골드원이 롱포지션을 잡자 시장을 관망하던 투자자들까지 버티지 못하고 투매에 나서면서 증시는 원역사보다 더 크게 주저앉았다.
한번 꺾인 주가는 다시 반등하지 못하고 결국 사흘간 전고점 대비 4.1%나 떨어지는 폭락을 기록했다.
그리고 막 장이 끝난 골드만삭스 트레이딩 룸.
며칠 새 눈에 띄게 얼굴이 초췌해진 조셉이 모니터에 띄워진 주가 그래프를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반등할 때는 좋았지만 더 크게 떨어지면서 막대한 손실을 기록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수천만 달러가 날아갔고 앞으로 금액이 얼마나 더 커질 줄 모르는 상황인데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테이크아웃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조셉은 어느새 다 마시고 비어 있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제대로 일이 풀리는 게 없다니까.”
제길, 하고 조셉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동료 트레이너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시장이 완전 망가졌는데 골드원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롱포지션을 잡고 있다며?”
그러자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누군가 대답했다.
“실패한 걸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그래도 손해가 엄청날 텐데.”
“듣기론 벌써 손실액이 십억 달러를 훌쩍 넘겼다 하더라고.”
소곤거리는 대화에서 고소하다는 기색이 한껏 드러났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타율 10할 타자라고 거들먹거리더니 꼴좋게 됐어.”
“맞아. 골드원도 한 번은 피를 볼 때가 됐지. 어떻게 매번 이길 수 있겠어?”
조셉은 귀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든 한창 잘나가던 사람이 한번 고꾸라졌을 때 그걸 보며 좋아하는 성격 나쁜 인간이 있는 법이었다.
조셉은 저런 부류는 딱 질색이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까.’
그사이에 좀 조용해지려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있었따.
“이런데도 아직 골드원만 쳐다보는 머저리가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면 정말 한심해.”
“아, 그 녀석 말이지.”
저들이 말하는 머저리가 누굴 가리키는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셉은 울컥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골드원이 한창 잘나갈 때는 자신처럼 다들 따라서 거래를 하더니 이제 와서 조롱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이 바닥은 실적을 내지 못하는 것이 죄다.
아무리 인성이 개차반이더라도 실적만 따라준다면 범죄가 아닌 대부분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다.
오히려 성질이 더러울수록 능력자로 포장되어 추앙받는 게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조셉은 괜히 반발하고 나섰다가 상황이 더 악화될까 봐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번엔 내 판단이 틀린 걸까?’
의심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제라도 포지션을 정리해야 되는 건 아닌지 자꾸만 약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이제 와서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지.”
조셉은 모니터에 띄워진 주가 차트를 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손실이 데드라인을 넘은 상황이다.
뒤늦게 손절한다고 해도 이만큼의 손해를 입힌 조셉을 회사가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회사에서 내쫓기는 결말밖에 없다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는 오기가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조셉이 살 수 있는 길은 골드원이 베팅한 대로 주가가 반등하는 것뿐이니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이판사판이야.”
조셉은 인생에서 제일 큰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 보고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에 모니터도 그냥 꺼버렸다.
“부탁한다고. 제발 기적이라는 걸 보여주라.”
조셉은 빈 테이크아웃컵을 손으로 우그러뜨리며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이틀 뒤.
크게 하락한 채 횡보하던 증시는 이탈리아 의회가 6번에 걸칠 투표 끝에 폴리타노 현 대통령을 다시 재선출하면서 살짝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조되던 유로존 위기가 조금 진정된 가운데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에서 “재정긴축을 하기에는 최근 나오는 경제지표들이 너무 실망스러워 연준이 양적완화를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대폭 늘릴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투자자들에게 보냈다.
이걸 기점으로 매수세가 살아나면서 보스톤마라톤 테러 발생 8일 만에 미국 증시가 반등에 성공했다.
여기에 미국 최대 군수산업체인 록히드마틴을 시작으로 항공사인 델타 에어라인과 US에어웨이스, 그리고 액세서리 브랜드 코치(Coach)가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면서 상승세에 기름을 부었다.
증시가 반등하자 조셉의 어깨도 동시에 살아났다.
억 단위로 넘어가려던 손실을 회복하고 수익으로 돌아서니 센터장에게 칭찬까지 들었다.
조셉은 밝은 표정으로 센터장실을 나와 제자리로 돌아가다가 며칠 전 자신을 비웃던 동료 두 명이 죽상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셉과는 반대로 하락에 베팅했다가 주가가 반등하면서 크게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그날 가림막 너머에서 들었던 말들이 떠오른 조셉은 한껏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동료들에게 걸어갔다.
“둘 다 손해를 크게 봤다며?”
동료들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슬쩍 시선을 피했다.
분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걸 보니 어쩐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러게 나처럼 골드원에 맞서지 말라(Don’t Fight the Goldone)는 교훈을 잊지 말았어야지.”
위로하는 척하며 툭툭 어깨까지 두드린 조셉은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입가에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역시 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골드원 만만세다 이 자식들아.
* * *
한편 월가 중심부에 위치한 골드원 역시 증시가 전고점을 돌파하자 축제 분위기였다.
자칫 창립 이후 첫 투자 실패를 기록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판이 뒤집힌 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형 모니터가 세 개나 설치된 책상 앞에 몸을 뒤로 기댄 채 앉은 데이비드는 상승 중인 다우지수 그래프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이번에도 오너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네.”
이렇게 빨리 반등할지 모르고 두 번째 폭락 때 성급하게 포지션을 정리했다면 어찌됐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새삼 재성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하면서 매도 타이밍을 언제로 잡을지 고심했다.
그때 컴퓨터에서 불길한 신호음이 울렸다.
띠링. 띠링.
“응?”
무심코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본 데이비드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뭐. 뭐야!”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던 다우지수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일직선으로 쭉 아래로 빠지고 있었다.
금방 마이너스 100포인트가 깨지고 어느새 150포인트를 넘겨 버렸다.
뭔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모습에 데이비드는 황급히 한쪽에 있는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치프 트레이너인 샤피로가 연결되자마자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갑자기 주가가 왜 이러는 거야!”
[백악관에서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나 라출라 대통령이 중상을 입었다는 속보가 AP통신 SNS 계정에 뜨자 주가가 폭락하고 있습니다.]“그게 사실이야!”
백악관이 공격당하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메가폰급 핵폭탄이 터진 것과 마찬가지의 충격이었다.
[AP통신 계정을 통해 소식이 나온 건 맞는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이상하다니?”
[이런 큰 테러가 발생했다면 속보가 사방에서 쏟아져야 되는데. 블룸버그와 로이터 통신은 물론이고 일반 뉴스 채널에서도 아무런 보도가 없습니다.]그러고 보니 책상 위에 설치된 양대 통신사 단말기에서 아무런 속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지수가 하락하는 건 프로그램 매매로 컴퓨터가 물량을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순간 며칠 전 재성이 했던 지시를 떠올린 데이비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설마.”
그때 블룸버그와 로이터 통신 단말기에서 긴급 속보 메시지가 들어왔다.
[백악관 테러는 없었고 AP통신이 자사 SNS 계정이 해킹당해 가짜 뉴스가 유포됐다고 밝힘.]긴급 속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주가가 거짓말처럼 수직으로 반등했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다우지수가 무려 160포인트 넘게 빠졌다가 다시 회복된 거였다.
데이비드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한참 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정말로 플래시 크래시가 발생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