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64
제164화
대륙의 권위 있는 가문과 귀족들이 전부 바스티안으로 모여들다 보니, 하루하루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사소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성국의 눈치를 보느라 큰 싸움으로는 번지지는 않던 상황.
아무리 바란의 국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아니고서야 성국을 상대로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는 없다.
“이제 장례식 기간이니 사고 쳐서는 안 된다.”
제국 사절단의 기사단장들이 기사들에게 엄숙하게 단속했고 그들 역시 장례 기간에는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어갔다.
특히나 렌과 제국 기사단장들의 갈등 이후 제국의 기사들과 브릴런트의 기사들이 마주칠 때마다 불똥 튀기는 신경전이 벌어졌지만, 거기서 불이 더 번지지는 않고 넘어갔다.
물론,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언제고 폭발할 것처럼 불안했지만 말이다.
“아오! 제국이면 뭐해? 그 밑에 놈들 인성이 저리 썩어 빠졌는데?”
“그러니까. 다른 왕국 사람들은 하찮은 벌레 보듯 본다니까?”
“망할 놈들. 저들이 황제야? 저들도 그냥 봉급 받으며 일하는 노예면서.”
“내 말이.”
브릴런트 쪽 준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 압도적인 수모를 당하는 건 브릴런트 쪽이었으니.
그나마 금사자 기사단은 기가 센 녀석들이 많아서 그다지 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덕분에 제국의 기사들과의 감정의 골은 더더욱 심하게 깊어졌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숙소로 돌아오는 앤드류와 금사자 기사단원들.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미닉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무슨 상황이 일어났었는지 뻔히 보이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싸웠냐?”
“아니, 그 망할 놈들이 우리 쪽 준기사들을 갈구고 있잖아? 그 꼴을 두고 봐?”
“뭐? 그 새끼들 점점 강도가 심해지네? 한 방 갈겼어?”
“아니, 실컷 갈구다가 우리가 오니까 비웃으면서 가던데? 내가 우리 대장군님과 단장님의 신신당부만 아니었어도 그냥 놈들 코를……!!”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팡팡 때리는 앤드류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를 못 갈구니까 밑에 애들을 건드네. 영악한 놈들. 당분간 애들도 어디 못 돌아다니게 해야겠다.”
“후우……. 장례식 동안만 참아야지.”
“그래, 그나저나 너도 철 많이 들었다. 옛날이었으면 그냥 들이박았을 텐데 말이야.”
“옛날이랑 같냐? 브릴런트가 이렇게 크고 있는데, 브릴런트 최고 기사단인 만큼 우리도 품위를 지켜야지.”
“그래. 맞지.”
도미닉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도통 통제 안 되던 앤드류를 렌이 단번에 휘어잡았다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금사자 기사단에 대한 프라이드가 매우 강한 앤드류를 이런 식으로 다룰 줄이야.
덕분에 부단장이 된 도미닉도 편해졌다.
“근데 막상 붙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도미닉이 새삼 걱정스레 물었다.
“너 바보냐?”
“뭐…, 바, 바보?”
앤드류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다니, 도미닉이 충격에 빠져 반박하지 못했다.
“우리는 북부의 그 괴물들도 죽이고 살아왔는데 저깟 놈들이 무섭냐?”
“……맞네. 그때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지. 매일이 생사를 넘나드는 수준이었으니.”
“그래. 그리고 우리 뒤에는 대장군님이 있잖아? 돌아오신 단장님도 있고. 우리가 지면 단장님과 대장군님이 다 조져주시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네가 웬일이냐? 맞는 말도 다 하고?”
도미닉이 새삼스러운 눈길로 앤드류를 보았다.
저 자존심만 강한 멍청이에게 옳은 소리를 다 듣는 날도 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금사자 기사단이 최고라고 대장군님이 그러셨지! 자기 밑에 있는 동안은 항상 최고만 생각하라고 말이야! 그래! 이게 바로 기사단이지! 우리가 최고가 되는 거야!!”
말을 하면서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앤드류가 벌떡 일어서서 주먹을 내지른다.
평소라면 도미닉도 그런 앤드류를 보며 고개를 저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동조했다.
“그래, 우리가 최고가 되자고. 다시는 무시 당하지 않게.”
“너도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시끄러워. 나 부단장이야. 인마.”
“우리 부단장님이 정신을 차리셨구만?”
“……됐다.”
* * *
아스테논 신전에서 진행되는 장례식. 교황의 영혼이 신께 돌아가기를 바라며 그 시신을 장례 동안 신전에 안치시키고 의식을 진행하며 사람들의 추모를 받는다.
각지에서 모인 추기경들이 첫날 장례식에 참석하여 종교 의식을 진행하고 기도를 드린다.
이후 사절단과 사람들이 추모를 위해 신전에 방문하여 기도하며 장례식이 며칠에 걸쳐 거행됐다.
이 기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바스티안 전체가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흘러갔으며 유력 가문의 귀족들과 바란 제국의 황실조차 추기경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렌 님.”
아스테논 신전에 온 브릴런트의 사절단이 안치된 교황의 시신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애스턴이 그들을 맞이하고 옆에 있던 저스틴 추기경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렌을 쳐다본다.
“브릴런트의 사절단 대표로 당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가볍게 웃음 지은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렌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가져다 댄 그가 작게 속삭였다.
“성하가 죽은 지하실에 뇌기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 렌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 듯 그의 얼굴을 살핀 저스틴이 실망한 얼굴로 뒤로 살짝 물러섰다.
렌은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 말에 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거창한 반응을 기대했던 저스틴이 어깨를 들썩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렌 경은 장의식이 끝나면 돌아가시는 겁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있을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간단한 대화를 마친 렌과 사절단이 신전 밖으로 나왔다. 렌은 무언가를 아는 듯하던 저스틴의 태도에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단순히 반응을 보려고 물어본 건가?’
이미 저스틴은 플레이크와의 싸움을 통해 렌이 뇌기를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교황과의 싸움에서 뇌기를 잔뜩 끌어다 썼으니 그 흔적이 남으리라는 것도 예상은 하고 있던 상황.
그럼에도 딱히 숨기지 않았던 건 뇌기 사용자가 대륙 전체로 따지면 적지 않다는 것이고, 렌 아르젠이라는 인물이 교황을 죽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세간에서 마스터라는 것도 대부분이 믿지 않는데, 교황을 죽였을 거라 누가 생각하겠나?
‘이번 세대에 암황이 나타났다지. 타이밍이 좋았어.’
그 철옹성 같은 대륙 대부호인 ‘코벳 레이먼드’의 호위를 뚫고 그를 죽였다.
하물며 그게 암황의 유물을 얻기도 전이었다. 코벳을 죽이고 지난 아비트라리의 경매장에 올라왔던 ‘비틀린 시간의 목걸이’를 가져간 것이었으니.
아마 대륙의 권력자 대부분은 교황을 죽인 유력 인물로 암황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근데 렌은 자꾸만 저스틴의 반응이 걸렸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 도대체 무얼 알고?
만약 정말로 렌을 의심했다면 추기경 회의나 다른 추기경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터.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기우인가.’
렌이 고개를 털어내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에, 신전의 바깥에서 브릴런트의 기사들이 바란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보였다.
‘바란쪽에서 계속해서 시비를 걸고 다닌다더니, 신전 근처에서도 저럴 정도면 안 보이는 곳에서는 훨씬 심하겠는데.’
주변을 경계하던 금사자 기사단원 셋과 그 아래의 준기사 다섯이 바란의 기사 다섯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었다.
금사자 기사단원 셋과 바란 기사 셋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말다툼을 하고 있고 준기사 다섯이 바란 쪽 기사 둘에게 손가락으로 머리를 밀리며 움찔하고 있는 모양새.
렌과 함께 그 광경을 목격한 칼리와 바실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나서려던 것을 렌이 말리고 스스로 다가갔다.
“야, 야. 안에 너희 사절단이 있든 말든, 우리가 들어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어?”
“이게 신전 규율이지 않습니까? 사절단마다 추모 시간이 정해져-.”
“뭐라는 거야? 내가 신전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어?”
손으로 가슴팍을 밀어내려던 꽁지 머리 기사가 준기사에게 손목을 잡히고는 눈을 부릅뜬다.
“하! 지금 잡았냐?”
“야! 이 새끼가 우리 애들한테 뭐 하는 거야! 너 저리 안 비켜!”
금사자 기사단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나서려는 것을 바란의 기사들이 길을 막았다.
“어딜 가려고?”
“진짜, 장례식 기간에 한번 해보자는 거냐?”
“큭, 너희들이 뭘 할 수는 있고?”
삽시간에 치솟아 오르는 열기. 툭하면 터질 것 같은 감정들이 점점 한계치에 달하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우리 앞에서 고개도 못 들던 것들이, 너희 대표가 명성 좀 얻었다고 지금 뻗대는…윽!”
꽁지 머리 기사가 손바닥을 들고 준기사의 머리를 후려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팔목을 붙잡고 비틀었다.
“크아아아아!!”
“왜? 너희도 대표가 검주라고 뻗대고 다니는 거냐?”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린 렌이 기사의 손목을 그대로 비틀어서 완전히 꺾어버렸다.
“아아아아악!”
그리고 시끄러운 비명을 내뱉는 기사의 목울대를 움켜쥐고 지긋이 말한다.
“닥쳐. 소란 피우지 말고.”
얼굴이 새빨개진 꽁지 머리 기사가 덜덜 떨리는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억…….”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비명을 참으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그가 렌을 노려보다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숙인다.
“대, 대장군님을 뵙습니다!”
“대장군님을 뵙습니다!”
금사자 기사단원이 렌을 알아보고 먼저 경례하자, 준기사들도 따라서 다급히 경례했다.
대장군이라는 소리에 표정을 굳힌 바란의 기사들이 입을 다물고는 머리를 굴렸다.
“장례식 기간에 이렇게 상해를 입히는 건 엄벌 대상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기사가 되레 앞으로 나서며 렌에게 따지고 든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기사의 말에 렌이 피식 웃으며 다가갔다.
“그럼 말해.”
짝!
“커헉……!”
렌은 오히려 기사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얼굴이 홱 돌아가며 비틀거린 기사가 눈을 치켜뜨고는 렌을 노려본다.
“이게 무슨-.”
짝!
따지고 들던 기사의 입을 다시 한번 막아버리고.
“이……!”
짝!
한 번 더 후려치자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기사가 이빨 몇 개를 떨어뜨리며 입으로 피를 줄줄 흘려댄다.
스릉-
그러자 기사 셋이 검을 빼 들고 렌을 겨눴다.
“지금 바란의 기사를 상해한 죄로-.”
“얻다 대고 검을 들이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와 바실이 기사 셋을 한순간에 제압해버리고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감히 타국의 사절단 대표한테 검을 들이대다니. 정신이 나갔군.”
바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찬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사절단 대표인 렌은 그렇다고 해도 뒤쪽에 서 있는 짧은 머리의 여자 꼬맹이와 그와 반대되는 덩치 큰 남자에게까지 이리도 쉽게 제압될 줄은 몰랐던 기사들의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나름 사절단에 들어올 정도로 실력이 있던 이들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감히 신전의 규율을 어기고 브릴런트의 사절단이 추모하는 시간에 신전으로 침입하려 한 죄. 사절단 대표에게 검을 겨눈 죄. 그리고…….”
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우리 애들 건든 죄. 본보기로 보여주지. 너희 친구들이 다시는 브릴런트에 시비를 걸지 못하게 말이야.”
그리 말한 렌이 바실과 칼리에게 눈짓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번에 쓰러진 기사들의 팔을 모조리 꺾어버린다.
시끄럽게 쏟아지는 괴성에 그제야 신전 쪽 사람들과 바란의 기사들을 이끌던 단장이 나타났다.
자신의 기사들이 땅바닥을 구르며 처참하게 짓밟힌 모습을 본 단장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친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는 잔뜩 기를 끌어올리며 따지려다 렌의 얼굴을 보고는 주춤했다.
“너…는?”
일전에 훈련장에서 렌과 맞붙을 뻔했던 바란의 기사단장.
렌이 그를 발견하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하, 너였어? 우리 애들 괴롭히라고 한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