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7
제27화
의전보좌관에게 보고서를 작성해 올린 뒤 그냥 돌아가려던 레이먼은 이전 동료였던 마르셀의 도발에 참지 못하고 훈련장으로 따라갔다.
레이먼과 항상 대립각을 세웠던 준기사, 마르셀 카르.
그는 평민 출신 주제에 항상 자신보다 뛰어난 평가를 받던 레이먼을 싫어했다.
사사건건 그에게 시비를 걸고 패거리를 만들어 레이먼을 검술 외적으로 억누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레이먼은 그런 마르셀의 계속되는 견제와 시비를 참지 못하고 들이박았다가 윗사람들의 눈에 찍혀 데케인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애초에 마르셀의 일방적인 잘못이었지만, 뒷배경이 없기에 그것은 레이먼의 잘못이 되었다.
현재 레이먼은 데케인에 가게 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하며 마르셀에게 고마움까지 느낄 지경이었기에, 왕성에서 마르셀을 만났어도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마르셀이 데케인과 사수님을 모욕하지만 않았다면.
“데케인? 왕국에서도 버린 그 묘지? 큭, 옛날에 다 죽어 자빠진 것들이 뭐라고.”
“뭐? 모욕하지 말라고? 그새 정이라도 들었냐? 네 사수도 렌 아르젠이라며? 아르젠의 피를 이었으면서 검 하나 제대로 못 휘두르는 쓰레기.”
“꼴에 사수라고 열받나 봐? 그럼 덤벼 봐! 훈련장으로 갈까?”
레이먼은 마르셀이 조금 전에 내뱉었던 말들을 곱씹으며 분노를 가득 채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놈의 면상에 주먹을 갈겨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마아아아아안!!”
사수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사, 사수님?”
레이먼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동료들 사이에 있는 렌을 보았다.
그제서야 다른 이들도 자신들 사이에 렌이 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보았다.
“사수?”
“이 사람이 그 렌 아르젠이야?”
“데케인의 묘지기?”
렌의 한 마디에 훈련장의 열기가 확 가라앉고 싸늘한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다들 잔뜩 흥분한 것 같은데 잠깐 진정해 보자고.”
렌이 레이먼과 마르셀 사이로 걸어가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로 골이 깊은 것 같은데, 이렇게 길거리 난민처럼 싸우지 말고, 기사면 기사답게 검 들고 한 판 붙는 게 어때?”
“넌 뭔데 끼어드는 거야?”
마르셀이 렌의 손을 쳐내고는 쏘아붙인다.
“나? 얘 사수. 보아하니 내 부사수한테 자주 져서 열등감이 심해 보이는데-.”
“헛소리! 열등감? 하! 이딴 놈한테 내가?”
“아이고, 아니야? 그러면 증명해봐. 그전엔 맨날 졌다며? 들어 보니까 검술 평가할 때마다 레이먼한테 져서 가는 길에 울고 그랬다던-.”
“이 미친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마르셀이 렌의 거짓 증언에 발작하며 칼을 빼 들었다.
“쌍으로 미친놈들이었군. 덤벼! 이참에 내가 네놈보다 위라는 걸 보여주지. 아니, 두 놈이 같이 덤빌래?”
부들부들 떨리는 광대가 그의 현재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렌은 태평한 표정으로 피식 웃고 있었고 레이먼은 안절부절못하며 렌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사수님은 현재 본인의 실력을 숨기고 계신다. 이런 녀석들과 엮여서 사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면 안 돼.’
레이먼 또한 잔뜩 진지해진 얼굴로 발검했다.
“사수님이 너 따위랑 왜 붙어? 너 나도 못 이기잖아?”
“두 달 넘게 뒷산 묘지에 처박혀 있던 너를 내가 못 이길 거 같아?”
“자자! 다들 뒤로 물러나자고! 둘이 명예로운 기사의 대결을 한다고 한다!”
렌은 왕성 내부의 모든 이들에게 소문이라도 퍼트리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준기사 마르셀 카르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준기사 레이먼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아마 이 정도면 훈련장 밖에 있는 이들도 들었으리라.
“지는 놈은 상대 가랑이 사이를 기기로-.”
“이 또라이가!”
마르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조용히 훈련장에서 레이먼만 골려주고 말려고 했던 것인데, 이 망할 묘지기가 나타나더니 일을 점점 키운다.
이러다 성내에 소문이 퍼져 둘째 형의 귀에 들어간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닥쳐!”
순간 다급해진 마르셀이 렌을 향해 검을 뻗었다.
위협만 주려고 한 행동이었으나, 그걸 본 레이먼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앙!
부드럽게 위로 검을 쳐낸 레이먼이 발로 마르셀의 명치를 걷어찼다.
“카악!”
순간 숨이 쉬어지질 않을 정도로 묵직한 발길질에 신음을 뱉어낸 마르셀이 바닥을 구르고.
“이 새끼가 감히 사수님한테 검을 들이밀어?”
눈이 돌아버린 레이먼이 그의 상체에 올라타 주먹을 연달아 내갈겼다.
퍽! 퍽! 퍽! 퍽!
살벌한 타격음에 놀란 동료들이 뒤늦게 레이먼을 걷어차 쓰러트리고 레이먼을 짓밟으려는 그때.
“명예로운 기사의 대결에 끼어드는 거야?”
렌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것을 들은 준기사들이 움찔하며 렌을 돌아보았다.
명예로운 기사의 대결.
사실 이건 기사급 정도 되는 검사들에게나 통용되는 말이다. 서임도 되지 않은 준기사들에게 명예가 어디 있겠나?
그렇다 하더라도 미래의 기사를 꿈꾼다면 명예로운 기사의 대결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애초에 렌이 제멋대로 명예로운 기사의 대결이라 소리친 것일 뿐이지만, 순간 준기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땅바닥에 침을 찍 뱉고는 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까부터 네가 뭔데 이렇게 끼어드는 거야?”
“나 얘 사수라니까?”
“사수인데 뭐 어쩌라고!”
렌의 뻔뻔함에 답답해하던 사내가 감정적으로 주먹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렌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번진다.
“너희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훈련장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음성.
동시에 렌의 멱살을 잡은 준기사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린다.
“카, 칼리드 님?”
안에 들어선 이는 왕성에 남부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원정대에서 먼저 돌아온 칼리드였다.
칼리드는 피곤함을 억누르고 시끄러운 소란에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준기사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짜증이 두 배로 커진 상태.
한 번 훈련장 안을 빠르게 스캔한 칼리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렌? 저 미친놈들이!“
칼리드의 정신이 순간 번쩍 들었다.
준기사들이 렌과 레이먼을 둘러싸고 있었고, 레이먼은 바닥에 쓰러져 있다. 렌은 멱살을 잡힌 상태.
렌이 먼저 저들에게 시비를 걸 일은 없을 테니, 백이면 백 준기사들의 문제로 이 지경이 됐으리라.
’하아…….‘
마음만 먹으면 렌이 저기 있는 열댓 명을 도륙하는 데에 1분조차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는 현재 3왕자님과 1왕녀님이 총애하는 인물.
지금 이 상황을 3왕자님께서 알게 되시면 얼마나 분노하실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 상황을 본 칼리드 자신도 저 준기사 나부랭이들이 렌의 멱살을 잡았다는 사실에 열이 뻗치는데, 왕자님과 왕녀님은 오죽할까.
“카, 칼리드 님!”
레이먼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그새 두 배로 커진 마르셀이 벌떡 일어나 왼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을 이마에 올려 경례했다.
나머지 준기사들도 뒤늦게 칼리드를 향해 경례한다.
원래였으면 이미 경례를 받아주었을 테지만, 칼리드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가 렌의 멱살을 잡았던 준기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큽!”
“이런 정신 나간 새끼들이!”
생각지 못한 칼리드의 반응에 준기사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모두 정열!”
“예!”
“뒤돌아.”
“예!”
준기사들이 1열로 서서 뒤를 돌게 만든 사이.
칼리드는 렌과 레이먼의 상태를 살폈다.
“렌,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레이먼 너는?”
“저, 저도 괜찮습니다요.”
레이먼은 이 상황이 얼떨떨했다.
평소에 그렇게 엄격하게 굴던 칼리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젠장, 내가 미안하다. 원정대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놈들 때문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요!”
마르셀은 또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썅!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왕실의 기사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칼리드가 저 묘지기 따위에게 절절매고 있다.
하물며 레이먼의 상태까지도 걱정하는 모습.
분명 묘지기 때문에 레이먼도 덩달아 대우를 받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뭐지? 이번에 남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마르셀은 저들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알 수 없으니 억지로 궁금증을 눌러 참았다.
“잠깐만 먼저 나가 있어 주겠나? 금방 가지.”
“예.”
렌과 레이먼을 훈련장에서 먼저 내보낸 칼리드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채, 뒤를 돌았다.
“렌 아르젠은 이번 원정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3왕자님의 목숨을 구한 귀인이시다. 근데 감히 네놈들이 그런 귀인을 겁박해?”
’망할……, 하필이면.‘
칼리드의 말에 마르셀을 포함한 준기사들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진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다인가?”
“죄송합니다!”
훈련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살기 위해 내지르는 대답이었다.
“다 너희들이 힘이 남아돌아서 그런 거겠지. 너희들의 관리를 못 한 선임들의 잘못도 있으니, 이번 일은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
칼리드의 말에 준기사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 정신머리는 고쳐야겠지. 앞으로는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굴려주마.”
칼리드는 이들의 훈련 담당 교관이 아니었으나, 이번에 담당 교관을 만나 제대로 갈굴 생각이었다.
“오늘 훈련장 100바퀴를 오리걸음으로 뛴다. 못하는 놈들은 돌아가지 못할 생각 해라.”
“배, 백 바퀴는…….”
상상 이상의 숫자에 준기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3왕자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지.”
“하겠습니다!”
“좋아. 모두 동의했으니 시작하도록.”
“예!”
열의로 가득 찬 대답.
저 열의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칼리드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아, 마르셀 카르.”
“예!”
오리걸음을 하며 열심히 걷던 마르셀이 대답했다.
“이 녀석들 걷는 거 확인은 네 담당이다. 난 이만 갈 테니, 알아서 바퀴 수 채웠는지 확인하고 보고해라. 마지막 한 놈까지 전부 확인하고 퇴근해.”
“제, 제가 말입니까?”
“왜? 불만인가? 그럼 이번 일 너희 가문에게 말해줄까?”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내일 확인한다. 꼼수 부리다가 걸리면 오늘의 두 배로 할 줄 알아라.”
“예!”
칼리드는 그 말을 끝으로 훈련장을 나섰다.
얼굴이 퉁퉁 부은 마르셀은 이를 악물고는 오리걸음을 뛰었다.
“뒤처지는 놈들 다 죽을 줄 알아!”
마르셀이 가장 뒤로 빠지며 소리쳤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뛰어야 했다.
마르셀과 동료들은 한동안 매일 같이 오리걸음으로 훈련장을 돌았다.
* * *
“죄송합니다요. 저 때문에 괜히…….”
“괜찮아. 너는 실력도 좋은 놈이 왜 저런 놈한테 당하고 사는 거야?”
어쩌다 저 꼴이 됐나 했더니 고작 카르 가문의 양아치놈 때문에 데케인으로 좌천된 거라니.
조금 전 레이먼의 검을 보니, 내가 남부에 다녀올 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마르셀의 검을 자연스레 쳐내는 것이, 마르셀과 레이먼의 격차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당하지는 않았습니다요.”
“……하긴, 너도 한 성깔 하는 놈이었지.”
지금 보면 이 녀석이 나한테 하는 태도가 신기할 따름이다.
다른 놈들한테는 그렇게 까칠하고 아니꼽게 구는 녀석이.
하긴, 나한테도 맨 처음엔 저렇게 대했었지.
“미안하다. 저 녀석들 벌 좀 주느라.”
칼리드가 나왔다.
“괜찮습니다. 근데 3왕자님은 여기 오지 않으신 거로 아는데.”
“나만 먼저 올라왔다. 한 명은 와서 먼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서 말이지.”
“아, 네.”
“아무튼, 내가 왕자님에게는 따로 말해놓겠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입장도 좀 생각해줘야지.”
“……알겠습니다.”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계속 사양하는 것도 무례다.
“그래서 렌, 너는 여기 왜 온 건가?”
“코르미르의 행정관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코헨 트레비스 님을 만나러 온 건가?”
“예.”
“허……, 행정관님과도 아는 사이였어? 대단하구만.”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들어가 봐. 안에 계실 테니.”
“예.”
칼리드가 가벼운 이야기를 끝내고 먼저 떠났다.
“너도 먼저 가. 그동안 고생했으니 며칠 쉬어도 돼.”
“아닙니다요! 어떻게 제가 염치없게 쉬겠습니까요.”
“염치가 없기는……. 오늘은 먼저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 이야기하자.”
“옙!”
레이먼을 보낸 나는 왕성으로 들어갔다.
왕령인 코르미르를 관할하는 행정관 코헨 트레비스.
까칠하고 깐깐하기로 왕실에서 제법 악명이 높은 인간이다.
트레비스 가문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
‘그냥 다른 사람한테 전해주라고 하지.’
왜 굳이 왕성까지 들어가서 코헨 트레비스를 만나게 하는 건지.
벌써부터 그 깐깐한 노인을 만날 생각하니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 같다.
똑. 똑. 똑.
“렌 아르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문 건너에서 들려오는 잔뜩 잠긴 목소리.
끼익.
문을 열자 언뜻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와 함께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서류를 확인하는 노인이 보인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얼굴 위로 살짝 드러난 주름.
검은 머리 사이로 희끗희끗 나 있는 하얀 머리카락까지.
아무리 봐도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근데……, 저 노인이 레이튼 트레비스도 무시한다는 실력자란 말이지?’
트레비스 가문에서 가주인 레이튼조차 한 수 접어준다는 전대의 고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상태창을 살폈다.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