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9
제29화
스칼렛 아르젠은 렌 아르젠을 따라서 브릴런트로 올라왔다.
원래라면 남부 사막에 더 있어야 했지만, 렌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 흑마법사와 마주치고 사막에서의 사건을 파헤치면서 렌 아르젠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해서 커졌다.
렌 아르젠을 죽이려던 흑마법사.
놈은 스칼렛조차도 힘들게 이겼을 정도로 강한 흑마법사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렌 아르젠이라면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흑마법사는 렌에게 지독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고, 스칼렛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렌의 옆구리에 생겨 있던 상처.
옷에 묻은 핏물을 보면 분명 사막에서 다친 게 분명한데, 상당히 아물어져 있는 상태였다.
더불어 그 상처의 모습도 니게르만이 하던 공격방식과는 많이 다른 형태였다.
‘의심스러워.’
스칼렛은 점점 짙어지는 렌 아르젠에 대한 호기심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래서 지켜보았다.
그에게서 싸움의 냄새가 났다.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싸움을 할 수 있으리란 강렬한 직감.
스칼렛의 이러한 직감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
렌 아르젠의 실체를 밝혀내고 싶다는 열망에, 사막에 대한 일이고 뭐고 무작정 뛰쳐나와 데케인으로 향했다.
역시나.
데케인에는 렌 아르젠이 있었다.
‘뭐 하는 거지?’
검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
이전까지 보았던 렌 아르젠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가 검을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한 감각.
사막에서 묵빛의 지렁이를 마주했을 때도, 흑마법사와 싸웠을 때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저 검을 마주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말…도…안돼…….’
기척을 지우고 숨조차 쉬지 않았다.
아니, 쉬지 못했다.
숨 막힐 듯한 공기가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우웅-
날이 빠진 검 위로 짙은 회색의 검기가 일렁이더니, 검이 움직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검로가 허공을 베었다. 어둠 속에서 검기가 튀어나와 나무를 자르고 사라진다.
“씨……!”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감탄사를 간신히 집어삼켰다.
다행히 렌 아르젠은 검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한 듯한 모습.
‘렌 아르젠이 저 기술을 어떻게……?’
저건 분명 아르젠 검술 제3 절기 월파였다.
하지만 동시에 다르다.
기의 운용이나 발현하는 방식이 월파와 비슷했지만, 파괴력 면에서 확연히 떨어졌고 적을 베는 방식도 달랐다.
‘검기에 담긴 기가 충분했다면……. 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스칼렛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갔지만, 확실히 이렇다 할 파훼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일격.
이건 고작 단순히 절기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스칼렛은 순간 홀린 듯 기척을 드러내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스릉-
검을 빼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릴 것만 같아서였다.
꿀꺽-
자신의 앞에 있는 이는 렌 아르젠이다.
가문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자처럼 제 발로 도망간 버러지. 패배자. 쓰레기.
근데 스칼렛은 그런 렌에게 긴장하고 있었다.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렌의 표정이 순간 굳어진다.
검의 손잡이를 잡은 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역시, 지켜보길 잘했어.”
스칼렛은 지금 싸움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 전 보았던 그 기술.
그것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신도 그것을 배우고 싶을 정도로.
“방금, 그 기술… 뭐야?”
렌은 반쯤 초점이 나간 스칼렛의 눈을 보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저 미친 여자가 당장에 달려들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 저거 분명 자기가 쓴 기술인 거 눈치챈 느낌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조금 전 기술을 못 봤다면 시원하게 얻어맞고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이미 월격을 본 스칼렛은 실력을 드러내라며 정말로 죽이려 들 가능성이 있다.
‘차라리 확 붙어?’
여기서 강령으로 조상님의 힘을 쓰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야……. 그건 해결책이 안 돼.’
이겨도 문제, 져도 문제다.
이기면 압도적인 실력 차가 아닌 이상 계속 덤벼들 테고, 지면 확실하게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져야 한다.
근데 지금 상태론 이기는 것도 불가능, 적당히 약한 척하며 지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방금 기술을 사용한 반동으로 강령을 해봤자 고작 1분은 할 수 있을까?
아니, 1분은커녕 지금은 강령 시도 자체도 온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감수하고 해야 한다.
– 특성: 광인(狂人)
– 기술: 아르젠 검술 중급
– 힘: 18.9
– 민첩: 20.1
– 체력: 21.2
– 감각: 15.3
– 기력: 10.8
‘제인 공주의 호위인 시카랑 능력치는 비슷한데…….’
시카처럼 지킬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 능력의 단편적인 것만 보고 물러설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질 것을 알아도 정말 죽을 때까지 덤벼들 인간이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렌이 말없이 고민에 잠겨 있자, 스칼렛이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기술이라……, 이름은 월격(月隔)입니다.”
“월격?”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방금 네가 보인 그 기술은 아르젠 검술 제3 절기인 월파(月波)야.”
‘제3 절기 월파? 제3 결전기 월격이 아니라?’
렌은 스칼렛의 말에 순간 눈썹을 꿈틀하며 하벤베르크를 보았다.
– 제3 절기 월파……. 네가 이전에 그러지 않았느냐. 아르젠에서 하벤베르크 검술은 이제 없어졌다고.
하벤베르크가 약간의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렌은 그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결전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월파라는 것으로 개량을 한 건가?’
그래서 스칼렛이 사용했던 기술과 조상님이 사용했던 기술이 달랐던 것이었다.
결전기를 개량하면서 이름도 바뀐 듯했고.
“그 기술의 원래 이름이 월파였군요. 근데 이 기술은 월격입니다. 당신의 기술을 보고 제가 만든.”
“네가… 만들었다고?”
“예.”
렌은 차라리 자신이 은둔 천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하벤베르크 검술에 대해 말할 수는 없고, 명백하게 월파와 비슷한 기술을 내보였으니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천재가 되는 수밖에.
‘그래, 나도 아르젠 핏줄인데.’
과거에 보여준 행적이 있으니 쉽게 믿지는 않겠지만, 어쩌겠나?
본 게 있는데 안 믿을 수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네. 네가 내 기술을 단 한 번 보고 그걸 개량해서 만들었다고? 하!”
그녀의 분위기가 심각하게 굳어진다.
은빛의 시원하게 뻗은 검날 위로 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맞붙어보면 알겠지.”
‘이런 미친!’
그래도 몇 마디 대화는 더 해볼까 했는데, 다짜고짜 이렇게 덤벼든다고?
‘이렇게 죽는 건가…….’
“월격? 그래, 그럼 한 번 따라 해봐.”
아르젠 검술
– 제3 절기
– 월파(月波)
시뻘건 검기를 머금은 그녀가 허공에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강령 – 하벤베르크 아르젠]
정광을 번뜩인 하벤베르크가 검을 고쳐 쥐고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붉은 검기의 앞으로 검을 내질렀다.
파각.
닳을 대로 닳아버린 검이 월파와 맞부딪히며 그대로 조각조각 부서졌다.
하지만 반월의 붉은 검기 또한 렌의 검과 함께 흩어져 사라진다.
“월파, 이름은 좋군. 근데 말이다, 그 기술은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반쪽짜리……, 아니. 반의반 쪽 짜리 기술이군. 쯧.”
검이 부러졌지만, 스칼렛을 마주한 하벤베르크는 여전히 여유롭다.
조금 전 기술을 펼쳤을 때, 보였던 그 기세와 분위기, 느껴지는 압박감을 다시 느낀 스칼렛이 이를 악물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어차피 상대의 검이 부러진 이상 더 이상의 싸움은 불가능하다.
“반의반 쪽……, 반쪽도 아니고?”
어지간히 충격을 먹었는지 스칼렛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그따위 것을 기술이라고 가져왔으니. 쯧쯧. 네 아비가 그렇게 가르치든?”
“……뭐?”
하벤베르크의 막말에 익숙한 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도 강령의 반동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만하고 빨리 끝냈으면 했다.
– 그만하고…, 좀!
스칼렛은 그러한 막말에 익숙지 않은지 충격받은 표정을 도통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저 무식하게 파괴력만 올리고 사정거리를 늘린들 기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아르젠에서 가르친 월파도 그렇게 사용하라고 만든 기술이 아니겠지.”
“네가…,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로 지껄여?”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겠지. 그러니 단 한 번에 이 버러지 같은 기술을 파훼하지 않았나? 그것도 이 쓰레기 같은 검으로 말이다.”
“…….”
스칼렛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저 미치광이가 아무것도 못 하고 부들부들할 정도면 얼마나 데미지가 강하게 들어간 걸까.
렌은 슬슬 영력에 한계가 온 것을 느끼고는 강령을 풀었다.
까득-
앞쪽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행히 납검한 것을 보니, 싸우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저 싸움광이 저럴 정도면 검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던 것 같다.
그게 하벤베르크로부터 완전히 무너졌으니…….
“야.”
스칼렛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렌이 순간 움찔했다.
“예?”
“너 다시 붙어.”
“그러죠.”
‘다시 붙기는 뭘 다시 붙어? 다시는 보기 싫은데.’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웃으며 대답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 그만 좀 꺼져줬으면 하는데, 어찌 됐든 상황은 마무리해야 하니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말을 이어갔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그리고 너, 조금 전까지는 막 깔보듯 막말하더니 갑자기 왜 존대해?”
렌은 여기서 그냥 조상님처럼 말투를 바꿔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연기하면 결국은 들키게 될 테니.
“제가 가끔 속 안에서 다른 인격이 튀어나옵니다. 검도 못 쓰면서 자존심만 강한 인간들을 보면 말이죠.”
렌은 그냥 확 질렀다.
여기서 저 여자가 열받아서 덤비면 그냥 죽은 목숨이지만 이판사판이다.
“……너 렌 아르젠 맞아?”
“맞습니다.”
“네가 그렇게 천재라고? 근데 왜 가문에서 도망간 건데? 그렇게 멍청한 척하면서.”
멍청한 척한 적 없다.
놀리는 건가?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르젠은 그저 좁은 세상일 뿐이니까.”
대충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변명을 내뱉었다.
“좁은…세상……? 하, 하하학!”
스칼렛이 갑자기 헛웃음을 내뱉더니 미친 듯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진짜 미친 여자였군.’
“아, 미안. 아르젠을 좁은 세상이라 할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말이지.”
“괜찮습니다.”
“대륙 최고의 검가가 좁다……. 이게 진짜 천잰가? 너는 고작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그걸 느끼고 도망갔다는 거지?”
그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살짝 훼까닥 했던 눈깔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차분하게 렌을 노려보고 있다.
“너, 진짜 천재가 맞구나.”
“맞습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천천히 걸어 렌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들고 자신의 얼굴로 그를 끌어당겼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듯한 거리.
자그마한 숨결조차 피부에 느껴질 정도다.
“호흡이 매우 흐트러져 있어. 근육은 말을 듣지 않는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고.”
그리 중얼거리던 그녀가 렌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기력은 그리 많지 않아. 아무리 높게 쳐줘도 기사급 수준의 신체. 내 말 맞지?”
– 그래도 눈치는 빠르군.
뛰어난 관찰력이다.
조금 전까지는 잔뜩 흥분해서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진정하고 나니 렌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챈 것이다.
“맞습니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있을 수 있지?”
그녀가 붙잡았던 멱살을 놓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랑 더 싸워보고 싶지만……,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니고서야 너는 내 상대가 안 되겠네.”
그 짧은 사이 렌의 정확한 수준을 파악해 버린 그녀가 피식 웃는다.
상대와 싸우고 싶다는 열의가 푹 꺼진 것이다.
–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니고서라……. 정확하군. 그래도 네놈보다 확실히 전투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구나.
“너는 언제쯤 상급 기사에 오를 예정이지?”
누군가 들으면 미친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스칼렛의 시선엔 일말의 장난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그래? 너라면 그 정도는 느끼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렌을 흘금 쳐다본다.
“아는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누구를 무슨 예언가로 아는 건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흠……, 그럼 내가 그 월격이라는 거 배울 때까지 빨리 강해져. 그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누구한테 배울 겁니까?”
“누구긴, 너지.”
그녀가 그리 말하며 해맑게 웃었다.
“싫습-.”
“안 가르쳐주면 여기서 나랑 죽을 때까지 붙는 거야.”
렌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아……, 미친개한테 잘못 걸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