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ity 10000% Catastrophic Player RAW novel - Chapter 83
* * *
관리국 본청 내 헬리포트.
두 미국인 남녀를 앞둔 감시과 차무혁 차장은,
불쾌감에 이를 악물면서도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저쪽의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두 분도 한국 관리 체계가 미국과는 다르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이날 새벽, 미국 국방부 내 게이트 관리부 명의로 협조 요청이 날아왔다.
현재 대한민국이 제공한 ‘그림시커’ 명단을 토대로 토벌작전을 진행 중인데, 그 과정에서 악마와의 전투가 예상되는 만큼 관련 자료 일체를 공개해달라는 것.
‘요청 자체는 이해가 간다. 단순한 미발견 몬스터도 아니고, 대응법 자체가 완전히 다른 존재니까, 악마는.’
그런데 그 형식이 한국의 임의제출이 아닌, 조사관의 파견이라는 점.
또 이쪽의 동의 없이 일방적인 ‘통보’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한국 측은 당연히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인데 도착하자마자 대뜸 이성우 플레이어를 불러오라고?’
무리한 요구다.
“그렇다곤 해도, 악마 대응법에 관해선 이성우만 한 전문가가 없을 텐데요? 그를 꼭 만나봐야 합니다.”
흰 피부 못지않은 은발이 인상적인 여성의 요구.
차무혁의 눈에는 특성 [로그 뷰어]를 통해 그녀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특별조사관 애쉬 뷰캐넌 대위, A급 공간이동 특성 보유자.’
유능한 실무가로 알려진 그녀의 파견은 수긍할 만했다. 긴 이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으니까.
동시에 미국이 지금 얼마나 급한지도 알 수 있는 대목.
‘즉,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다.’
그러니 저쪽의 요구대로 저자세로 나가서, 이성우를 당장 귀찮게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타국 플레이어와 대책 없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건 분명 상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터.
“이성우 플레이어와의 만남을 막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리국에서 강제할 수 없다는 거죠. 그에겐 따로 연락을 넣을 테니, 안으로 드셔서 요청하신 자료들부터 살펴보시죠.”
차무혁으로선 무리한 요구는 쳐내면서 최선을 다해 선을 지킨 것이었으나.
그 순간.
쿠구구구구―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헬리포트 전체를 짓눌렀다.
국장 정찬석의 전력 개방을 상회하는 힘.
그 근원은, 애쉬와 함께 나타난 남성 플레이어였다.
“쿨럭―!”
“크흡······!”
복압을 높여 버텨도 이겨내기 힘든 살기에, 몇몇 요원이 비틀거렸고.
“아무래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것 같네. 영어의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나?”
풀썩―
그가 입을 열마자마 실신해 쓰러지는 인원마저 있었다.
‘제프리 후버. SS급 플레이어······. 역시 무력 과시의 의미로 보냈나.’
그들이 대한민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이성우부터 찾는 걸 보고, 차무혁은 이들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실은 ‘공략 원조’가 필요한 입장이면서,
체면 구기지 않고 실속만 챙기겠다는 심산인 거다.
‘동맹이다 뭐다 하면서 협조니 뭐니 부드러운 말로 어르고 달래는 듯이 보여도······. 알아서 기면서 이성우를 갖다 바치라는 거지.’
아무리 오랜 동맹 관계라도, 각자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건 외교의 기본.
차무혁은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나도록 이를 악물어 살기를 견뎌내며, 재차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아니. 영어로도 분명히 전해져 온다. 힘으로 억눌러서 말을 듣게 하려는 그 야만적인 태도를 뭘로 숨기겠어?”
제프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다행이네. 잘 알아들었다니 말이야. 어차피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거든, 그럴 필요도 없고.”
동시에 그에게서 살기가 한층 짙어지자, 곁에 있던 애쉬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제프리를 제지했다.
그러나 이미 고삐 풀린 망나니를 멈춰 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날 믿으라고. 이게 일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이야.”
‘하아······ 감시과 차장이라는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었는데.’
제프리가 그걸 걷어찬 시점에, 적당한 무력 시위의 단계는 이미 지나쳐버렸다.
동반인의 부정적 심상이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장거리 공간이동의 부작용 ‘사념 충격’까지 더해져, 애쉬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미친 피투성이 전쟁광 같으니······ 한국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거야? 이러면 설령 이성우의 도움을 받게 되더라도, 신의성실을 기대할 수가 없어.’
S급을 초과하는 플레이어가 이성우 한 명뿐인 한국은 결국 주도권 다툼에서 밀려나게 될 테지만,
억지로 말을 듣게 만든 이상 저쪽이 진심으로 도우려 하겠느냔 말이다.
물론, 그렇게라도 이성우가 필요하다는 게 팀장 클랜시의 계산이었겠지만.
애쉬는 짙은 무력감을 느꼈다.
‘전쟁과 싸움밖에 모르는 저 괴물을 멈춰 세울 방법이 없다니.’
이 정도면 자신은 조사관이 아니라, 공간이동 머신으로 이용당한 것 아닌가?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너희가 선택한 거다.”
마침내 제프리가 전용 스킬 ‘무기고’를 개방해, 전설급 무기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을 꼬나쥐었다.
물론 그가 가진 다수의 전설급 병기에 중에선 떨어지는 물건이지만, 기껏해야 A급에 불과할 한국 관리국 요원들을 무릎 꿇리는 데에는 차고 넘칠 터.
아마도 저들은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난투가 시작되려는 순간.
스걱―
종이가 잘려 나가는 듯한 미성이 제프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텅그렁······
“음?”
무심코 손으로 향한 제프리의 눈에 방망이의 깨끗한 단면이 보였다.
잘려 나간 부분은 보잘것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머리 위에서 들려온 음성이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함부로 힘 자랑이지?”
누구보다 먼저 그를 알아본 차무혁이 외쳤다.
“이, 이성우 플레이어!”
제프리를 노려보던 이성우가 그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날렸다.
아직 연락을 넣기도 전인데 어떻게 알고 여기에 나타난 걸까.
차무혁에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으나 이성우가 어디 평범한 플레이어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인물이던가.
‘난감해질 뻔했는데 슈퍼세이브로군.’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미 상황의 주도권은 제프리와 이성우에게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기에, 차무혁은 요원들을 살짝 뒤로 물려두었다.
“네가 이성우냐?”
제프리가 파괴된 방망이를 내던지며 시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호리호리한 게, 영 힘을 못 쓸 것 같은데? 뭐, 스피드는 쓸 만한 듯하지만 말이야.”
‘이놈은······.’
미국 소속의 SS급 플레이어, 제프리.
한국으로 치면 ‘측정 불가급’의 강자인데, 이전 회차에서 허무한 죽음으로 유명세를 날렸던 터라 이성우도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제프리 후버. 군신의 위용을 계승한 최상급 특성을 지녔으면서도, 고작 빌런들의 함정에 빠져 죽은 머저리.’
“이리 내려와서 이야기 좀 하지 그래? 널 만나려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아니면······.”
그 순간.
제프리의 ‘무기고’ 발동과 동시에 손에 짤막한 단검이 쥐어졌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가 그리로 갈까?”
모든 근접전투 계열의 상위 호환인, ‘군신 아레스’ 특성.
‘저자는 손에 쥔 무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전투 스타일이 천차만별로 변화한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지상에 잔상을 남기고 사라진 제프리의 신형이,
순식간에 이성우의 머리 위를 노리고 나타났다.
“Gotcha.”
말보다도 빠르게 질러오는 단검.
아서 왕이 사용했다던 [카른웨난], 소유자의 모습을 숨겨주거나 잔상을 만들어내는 영웅급 무기였다.
쐐액!
보통 플레이어라면 잔상에 시선이 팔려 허용했을 공격.
허나, [단거리 도약]을 지닌 이성우는 당해주고 싶어도 그러기가 어려웠다.
팟―
그래도 SS급 플레이어라는 건지.
제프리는 공격이 허공을 긋자마자, 정확히 이성우가 옮겨간 방향을 노려보았다.
“하! 역시 속도는 자신 있나 보군. 그렇다면······.”
“그렇다면은 무슨, 이번엔 내 차례다.”
이성우의 뻗은 손으로, 어디선가 거대한 거검이 빨려 들어오듯 날아와 쥐어졌다.
“자신 있으면 막아 봐.”
의도적인 도발.
“흥, 와라.”
통했다.
제프리의 팔에 빛무리가 어른거리다가 방패의 형상을 갖추었다.
원형의 실루엣에 상반신을 다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 표면에 돋친 가시와 갈고리가 특이한 모습이었다.
‘그것까지 꺼내시겠다? 본격적이시군.’
그건 ‘아이템’이 아니라, 전용 스킬 [리노토로스]였다. 군신 아레스의 방패로 알려진 그것은, 방패를 타격하는 무기를 얽어매 파괴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었다.
‘자신감에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대룡거검이 ‘파괴 불가’라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간다.”
허벅지부터 허리를 지나 어깨까지 전달된 회전력이 대룡거검에 실렸고.
이내, 전설급 방패와 전설급 검이 충돌했다.
까앙!
청명한 충돌음 사이로, 억! 하는 외마디 비명이 섞였고.
콰아아아앙―!
제프리가 헬리포트에 처박혀, 거미줄처럼 균열이 퍼져나갔다.
“세상에······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초단거리 이동 스킬, [점멸]로 날아드는 파편을 가ᄁᆞ스로 피해낸 애쉬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미국 관리부가 자랑하는 SS급 플레이어가······ 전용 스킬까지 발동하고서도 한 방에 처박혀버렸다.
“대체······ 이성우, 저 남자는 제어 계열 아니었나?”
기둥 같은 거검을 이용한 참격은, 누가 봐도 근접전투에 특화된 자의 일격이었다.
애초에 저렇게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검을 누가 휘두를 수 있겠는가?
“제어 계열 맞습니다.”
무심코 돌아보니, 한국 감시과의 차무혁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제프리 중령은 근접전의 최상위 강자예요. 중국의 검선(劍仙), 한국의 투신, 영국의 잭 더 리퍼조차 1 대 1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고요. 한꺼번에 덤비면 모를까.”
차무혁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제어 계열과 근접전투 계열. 그 간극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이성우 플레이어의 제어······ 아니, 지배력이 강한 거겠죠.”
“근거 없는 가설을 편하게도 말씀하시는군요. 한국 관리국에서는.”
“정곡을 찌르셨지만, 어쩌겠습니까. 한국에선 그의 등급조차 정확히 판별할 수 없는 것을. 저도 지금 놀라는 중이지만, 그러려니 하는 데에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 애쓰니, 머리가 터질 것 같더군요.”
여전히 대책 없는 소리였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제프리는 속도에서도 이성우를 능가하지 못했고,
그의 공격을 견뎌내지도 못했다.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도 어쩌겠는가.
명백히 벌어진 상황을.
퍼어엉 ―!
“크아!”
분노에 찬 포효와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제프리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것.
그의 투기는 단검을 쥐었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까는 흡사 재빠른 독사 같더니, 이번엔 싸움소 같군. 뭘 쥐었을까.’
SS급 플레이어와의 대등한 전투라니, 이성우는 내심 호승심이 끓으며 기대가 솟았지만.
제프리가 쥔 큼지막한 해머를 보고선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진심? 그게 최선이었나?”
마공학 제작 아이템, 중력 해머(Gravity hammer).
말 그대로 중력을 이용해 파괴력을 증강하고, 다양한 퍼포먼스를 가능케 해주는 무기였다.
물론, 이성우에겐 완전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성우는 간단히 손을 뻗었고, 제프리가 쥔 중력 해머에 응축된 중력의 방향을 살짝 비틀었다.
콰직!
퍼어엉―!
거센 중력장 폭발과 함께······ 제프리는 도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게 끝이었다.
“······?”
아래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이 보기엔 이상한 결착이었을 것이다.
제프리가 스스로 제 머리를 찍은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어색한 정적 속에, 미국 측의 조사관 애쉬가 제프리에게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고.
“······뭐, 죽진 않았네.”
퍽!
혼절한 제프리의 허벅지를 시원하게 걷어차주곤 이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이 머저리의 난리에 대해선, 대신 사과할게요. 이제 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 * *
관리국 회의실.
혼절한 제프리를 한쪽 구석에 대충 던져 놓고서야, 비로소 악마숭배자들과 악마 대처법에 관한 논의가 오고 갔다.
제프리가 깨어날 듯 나지막이 신음성을 흘릴 때마다 애쉬가 쫓아가 머리통을 때려서 기절을 연장시켜준 덕에, 논의는 매끄러웠다.
“요점은 이거에요. 이성우 플레이어, 가능하다면 미국으로 와줘요.”
물론, 이성우의 동의로 고위 악마 대처법은 공유받았지만.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너무나 많았다.
‘마기’의 정신 침식을 막을 정신 방벽, 본체에 타격을 가할 신성력, 부족한 신성력을 벌충할 미스릴제 병기, 혹시 모를 언데드 군세에 대비한 막대한 양의 은 확보······.
이성우가 미리 필요성을 알고서 차근차근 준비한 스텝을, 촌각을 다투는 당장 마련하기란······ 썩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애쉬는 절박했다.
제프리를 가볍게 가지고 논 그의 무위를 직접 목도한 지금은, 더더욱.
‘이 사람을 반드시 데려가야 해. 그의 유무로 이번 작전의 피해 규모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달라질 거야.’
이성우가 참여한다면,
고위 악마? 그림시커에겐 그런 걸 소환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성우 플레이어, 미국을 대표해서 부탁할게요. 그림시커의 열여섯 멤버가 고위 악마를 소환하는 걸 막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허나, 굳게 닫혀 있던 이성우의 입이 열리고.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위 악마······ 소환하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애쉬의 표정이 멍하게 변해가는 걸 바라보며,
이성우는 자꾸 얼굴로 떠오르려는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갈무리했다.
‘이거, 미국으로 넘어갈 구실과 기회가······ 저절로 넝쿨째 굴러들어왔잖아?’
만일 눈앞의 요원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최후의 성채]를 가동하기 위한 동력원이 잠들어 있는 던전의 공략권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물론, 고위 악마의 모가지는 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