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101
00091 여학교의 유령 =========================================================================
영신은 그 날 오후 즉각 퇴학 처분을 당했다. 영신이 차라리 자퇴한 것으로 처리해 달라며 애원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영순은 그 죄질이 몹시 불량해 절대로 자퇴 처리를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학교에서는 영신의 집에 연락을 넣었다. 갑작스럽게 퇴학 통보를 받은 영신의 가족들은 경황없이 달려왔다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망연자실해 주저앉았다. 영신의 부모는 자신들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며 통곡을 했다.
영신의 아버지는 종로통에서 무역상인 민양상회를 운영하던 사업가였다. 민양상회는 상당히 규모가 있는 무역상으로, 영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집에서 마치 공주처럼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 왔다. 그러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작년 시월 경 민양상회가 부도 처리되었고, 가족들은 상당한 수업료가 들어가는 미리암여학교를 그만두게 하려 했으나 영신은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며 가족들을 설득했다고 했다. 실제로 영신은 한 번도 수업료나 용돈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사실인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영신이 그런 짓을 벌이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공부를 가르쳐 주던 세란과 함께 지내며 세란이 상당한 돈을 관리하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한 방을 쓰던 명하의 비밀도 알게 되어, 일이 커지자 겁이 나 모든 것을 세란에게 뒤집어씌워 버렸던 것이다. 세란이라면 모두에게 인기가 많고 신임도 받고 있으니 누명을 쓰더라도 별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세란은 고통 받다 자살하고 말았고,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을 털어놓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영신은 명문 여학교를 그만둘 마음이 전혀 없었고 여전히 부잣집 딸 행세를 하는 것도 멈출 수 없었다. 학교를 졸업만 하면 어떻게든 명문 여학교 출신임을 내세워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영신은 가족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학교를 나가면서도 발광하며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인심 좋고 인기 많기로 이름난 영신이 갑작스레 퇴학 처분을 당한 것에 대해 몹시 의아해하던 학생들은 영신이 은용의 돈을 훔친 진범이고 세란을 자살로 몰고 간 주범임을 알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 물론 빈 교실에서 영신이 낯선 남자에게 붙들려 짐승처럼 발광하며 울었다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들은 영신이 돈에 미쳐 갑자기 정신병이라도 발병한 것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명하가 그토록 감추려던 비밀 역시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명하가 만나던 남자는 보성전문학교의 학생으로 학생운동가라고 했다. 역시 교내에 오랫동안 남자를 끌어들여 데이트를 한 것은 교칙 위반이라 퇴학 처분을 내려야 했으나, 졸업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탓에 대신 낙제 처리를 하여 학교를 일 년 더 다닐 것인지 퇴학 처분을 받을 것인지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명하는 놀랍게도 퇴학 처분을 선택했다. 소화는 자신이 명하와 그 남자를 보았던 날 밤의 대화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상해로 떠나려는 생각이었고 명하는 자신도 상해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었으니, 낙제를 택하고 일 년 더 학교를 다니면 더 이상 그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 틀림없었다.
건축회사의 사장이라는 명하의 아버지가 연락을 받고 달려와서는 명하가 학교에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머리를 밀고 방에 가두어 버리겠다고 펄펄 뛰었다. 이제 경성에 소문이 다 날 텐데 어떻게 살겠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그 길로 퇴학 원서에 도장을 찍고 명하를 데려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유령의 정체였는데, 해경은 처음에 유령의 정체가 세명이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했다. 진짜 세란의 유령이었다고 믿게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명이 직접 나서 영순에게 유령 소동이 자신의 소행이었음을 고백했다. 동생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랬다는 세명의 말에 영순은 대신 다시는 같은 일을 벌이지 않도록 하고, 학교에 피해를 끼친 것은 사실이기에 이번 학기가 끝나면 다른 학교로 추천서를 써 줄 테니 옮기라고 권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화는 갑작스럽게 외국으로 나가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는 것으로 말을 맞추었다.
사건을 해결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죽은 동생을 위해 밤마다 위험한 유령 행세를 했던 세명을 생각하면 세란의 누명을 벗길 수 있어 홀가분하기도 했으나 만약 해경이 이 의뢰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신이 여기 학생으로 속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명하가 퇴학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신 역시 무사히 졸업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화는 영신이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것은 은용이 출납부 관리를 맡기려고 생각한 탓이 아니었을까 뒤늦게 짐작했다. 누군가 출납 내역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출납을 담당하는 아이들에게 잘 대해 주고 친하게 지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소화 전에 출납을 맡던 아이들 역시 모두 영신과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소화는 한편으로 영신의 모든 행동이 거짓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영신 역시 다른 동무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소녀였을지도 몰랐다. 소화는 돈이 사람을 얼마든지 괴물로 만들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돈 때문에 괴물이 되어 버린 영신을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울적해졌다.
소화는 기숙사에서의 마지막 날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은용은 다음 날 학교에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대자보에는 작년에 일어난 도난 사건이 모두 자신의 오해였고 세란은 아무 죄도 없이 도둑으로 몰려 그만 괴로움에 자살하고 말았다는 내용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니 성급한 행동으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간 자신이 모든 손가락질과 벌을 달갑게 받아들이겠다는 것도 함께였다. 방에서 짐 가방을 들고 기숙사를 나서던 소화는 은용이 붙인 대자보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이것으로 모두 잘 된 것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가방을 들고 교문을 나서자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던 해경이 내려 소화의 가방을 차에 실어 주고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향운정에서 빌린 차였다. 소화는 해경과 나란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사건을 해결했는데도 보람이 있거나 마음이 뿌듯하거나 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도 기분이 이상해요, 선생님.”
해경은 그 말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사람의 일이란 무엇이든 자로 잰 듯 딱 떨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모든 일이 동전의 양면 같지요. 누구에게나 밝은 부분이 있으면 또 그림자가 있습니다. 소화 양은 그 그림자를 본 겁니다. 항상 밝은 쪽만 보고 살 수는 없지요.”
소화는 문득 지난번 조선극장 폭발 사건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때 해경은 금복이 모든 일을 저지른 범인인 것을 알면서도 중요한 증거인 편지를 모두 태워 버렸다. 소화는 가끔 그 때의 해경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어쩐지 해경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소화는 조그맣게 말했다.
“……만약에 선생님 없이 저 혼자 이 사건을 해결했다면, 저는 자초지종을 모두 알고도 그냥 입을 다물었을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영신 양이 벌인 짓이 끔찍하지 않습니까?”
소화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결국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영신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는 못내 영신이 했던 행동들이 마음 한구석에 돌부리처럼 걸리는 것을 느꼈다.
“맞아요. 영신이가 그토록 무서운 아이인 줄은 몰랐지요. 그런데 영신이는 제게 참 잘해 주었어요. 물론 목적이 있어서였겠지만……그래도 제게 그렇게 대해 주었던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을까요? 어떤 사람도 매일 모든 사람에게 거짓말만 할 수는 없으니 어떤 부분은 분명히 진심이었을지도 모르지요. 눈이 오는데도 명치정까지 나가 웨퍼스를 사다 주기도 하고, 처음 먹어 보는 초콜렛도 주었고, 제가 아프다고 하니 일부러 들러 말동무를 해 주기도 했는걸요.”
소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모든 사람이 온전히 악하거나 온전히 선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조그맣게 웅얼거린 소화는 말을 멈추며 창 밖을 보았다. 학교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정이 든 모양이었다. 멍하니 학교 건물을 돌아보고 있던 소화는 손등을 톡톡 치는 해경의 손길에 깜짝 놀라 해경을 돌아보았다. 해경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화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화는 얼굴이 화끈거려 얼른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을 닦았다. 차가 향운정 앞에 도착할 때까지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수건만 꼭 쥐고 있었다. 해경은 먼저 차에서 내려 소화에게 차 문을 열어주다 말고 소화를 불렀다.
“소화 양.”
“네?”
소화가 울어서 잔뜩 코가 막힌 소리로 되물으며 해경을 올려다보자, 해경이 잠시 소화를 가만히 보다 물었다.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까?”
생각도 못한 질문에 소화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해경을 마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니고 싶어요. 잠깐이었지만 이것저것 많이 배웠고 재미있었어요.”
“그렇습니까.”
기분 탓인지 해경의 대답이 약간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왜인지 몰라도 해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해경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소화는 부은 눈을 두어 번 비비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고요. 제가 학교에 다니면 선생님 일을 도와 드릴 시간이 줄어드니까요.”
“아, 아니오. 제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소화 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해경이 서둘러 말했으나 소화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도 재미있지만 선생님의 조수로 일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일하다가 학교에 다닐 만큼 돈이 모이면 제 힘으로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러면 나이가 조금 많아지기는 하겠지만……나이가 많아도 학교에 갈 수는 있지요?”
해경은 소화의 물음에 대답 대신 소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는 안심했다는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해경은 차 안에 있던 소화의 짐 가방을 내려 주고는 말했다.
“학생으로 위장해서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월말까지는 푹 쉬도록 해요. 월급은 모두 쳐서 주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생님.”
“소화 양이 없었으면 이번 사건은 해결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번 사건은 소화 양이 모두 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정말 괜찮은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해경은 손짓을 하며 소화를 들여보냈다.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소화가 향운정 별채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인혜가 달려와 소화를 살피며 물었다.
“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재미있었어요.”
“다행이군요. 이번 일은 소화 양이 모두 혼자 해결했다면서요?”
“아니에요.”
소화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젓자 인혜가 웃었다.
“내가 미스터 정에게 휴가를 좀 주라 했는데, 뭐라 하던가요?”
“아, 그러면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거군요. 월말까지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셔서요.”
“잘 되었네요. 그간 너무 무리했으니 한동안 푹 쉬어요. 새해가 오면 새 마음으로 또 일을 하면 되지요.”
인혜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화가 더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분주히 저녁상을 차리게 했다.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돌아오니 피 한 방울 섞인 사람이 없지만 어쩐지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화는 다음날부터 사무실에 출근하는 대신 향운정에서 쉬며 책이나 여학생 잡지 따위를 구해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며칠이 지나 월급 날짜가 되자 소화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어린 심부름꾼이었다. 남자아이는 명치정 일정목 사십오번지에서 보냈다며 웬 상자를 안겨 주고는 돌아갔다. 향운정에 나가 있던 인혜가 그것을 보고는 별채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게 무어지요?”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보내신 것인가 봐요.”
소화는 상자를 거실로 안고 들어가 풀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작은 보따리와 함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月給(월급)이라고 쓰여 있었다. 소화는 봉투를 일단 꺼내 옆에 놓아 두고는 안에 있던 보따리를 끄집어내어 풀어 보았다. 곁에서 궁금하다는 얼굴로 보따리 안의 내용물을 넘겨다 본 인혜가 어머, 하고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보따리 안에는 화장수와 얼굴에 바르는 구리무[cream], 얼굴을 희게 하는 백분이며 입술연지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입구가 봉해진 종이봉투도 하나 담긴 채였다. 소화는 종이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서 단 냄새가 훅 풍겼다.
“웨퍼스군요. 초콜렛도 있네요. 이 사람이 웬일이람?”
봉투 안을 슬쩍 본 인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소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혜를 마주보았다.
“이런 것을 왜 보내셨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인혜가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손뼉을 마주쳤다.
“곧 있으면 크리스마쓰네요.”
“크리스마쓰가 무언데요?”
“서양 사람들이 예수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인데, 그 날 서로 선물도 주고받고 집에 모여 파티라는 것을 열기도 한답니다. 소화 양에게 크리스마쓰 선물로 보낸 모양이에요.”
인혜의 설명을 들어도 왜 해경이 자신에게 이런 것을 보냈는지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하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화장품 병을 만져 보고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된 화장품을 가져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참을 화장품 들여다보기에 빠져 있던 소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종이봉투에 담긴 과자를 인혜에게 내밀었다.
“저어, 이것 드셔요.”
인혜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매일같이 먹어 질렸어요. 미랑이와 나누어 먹어요.”
소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몇 년을 알고 지내도 이런 것 하나 보낸 적 없던 이가 웬일일까?”
물론 인혜는 그 까닭을 다 안다는 듯한 투였다. 그러나 소화는 미처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소화는 인혜가 나간 거실에 홀로 앉아 있다가 탁자 위의 경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연지 통을 열어 손끝으로 살짝 입술 위에 연지를 문질러 발라 보았다.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던 소화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 어쩐지 창피해져, 얼른 통을 다시 닫고는 그것을 품에 꼭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