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127
00107 황금광 시대 =========================================================================
소화는 아직도 온기가 그대로 남은 보따리 아래를 손으로 한 번 받쳐 보고는 종종걸음을 쳤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 손이 시렸지만 소화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발을 재촉했다. 자색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싼 것은 인혜가 따로 챙겨 준 전이며 떡, 약식 따위의 음식들이었다.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해경에게 줄 것이라 식기 전에 빨리 가져다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번 평양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경이 그대로 혼절하는 바람에,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안 환과 소화가 기겁을 하며 경성역에서 사람을 불러 해경을 바로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시켰던 터였다. 부상이 회복될 시간도 없이 지나치게 무리를 한 탓이었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인혜는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하며 완전히 낫기 전까지는 꼼짝도 말라고 해경에게 호통을 쳤다. 소화에게도 해경이 회복되기 전에는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 바람에 반강제로 당분간은 휴업 아닌 휴업을 하게 생긴 마당이었다. 출근을 하지 않으면 할 일도 딱히 없었던지라 소화는 거의 매일 해경에게 병문안을 다니고 있었다.
“어머, 소화 양. 오늘도 오셨군요.”
병원 문으로 들어서는 소화를 보고 간호부가 인사를 건넸다. 간호부는 올해 스물 하나가 되었다는 처자로 이름은 애옥이라고 했다. 애옥은 해경의 병실을 담당하고 있어, 벌써 이삼 주쯤 매일같이 들르다 보니 자연스레 얼굴이 익은 터였다. 소화는 자리에 멈춰 서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애옥이 마주 목례를 하자 소화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에, 저…….”
“조금 전에 병실에 갔었는데 일어나 계셨어요. 어서 가 보셔요.”
소화가 채 첫 마디를 떼기도 전 애옥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해경은 통증 때문에 안정제나 마취제를 자주 처방받고 있었고, 때문에 소화가 들렀을 때 잠들어 있는 일이 많았다. 잠들어 있을 때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미리 물은 것인데 오늘은 깨어 있다니 다행이었다. 아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 소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옥에게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해경의 병실로 향했다.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에서 네, 하는 해경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무슨 책인가를 읽던 해경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저예요, 선생님.”
소화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해경이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내려놓았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일부러 들를 필요 없다고 했는데…….”
“아, 저어, 오, 오늘은 사장님께서 음식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셔서요.”
소화는 해경이 나무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얼른 침대 옆 탁자에 가져온 보따리를 올려놓았다. 거의 매일같이 들르고 있었으므로 해경이 귀찮아할까 내심 겁이 나기도 했던 터였다. 해경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처럼 소화를 보다가 짧게 웃었다. 소화는 해경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보자기를 풀었다.
“산적, 명태전, 오색경단, 약식하고 수정과예요.”
“향운정에서 잔치라도 있었습니까? 귀한 음식을 그리 싸서 보내다니 어쩐 일이지요?”
탁자 위를 가득 채울 정도의 음식을 본 해경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해경이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해 소화도 머뭇머뭇 해경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저녁에 귀한 손님들이 오신다고 미리 음식을 했는데 조금 보내 드리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라고요. 아직 따뜻할 때 드셔 보셔요.”
“조금 전에 식사를 해서요. 소화 양은 드셨습니까? 아니라면 소화 양도 좀 들어요.”
“그래도 선생님이 먼저 드셔야지요.”
“저는 괜찮으니 식기 전에 얼른 맛이라도 보아요.”
“이것 참, 서로 양보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는 한데 그러다가는 오늘 밤까지 손도 못 대겠군요. 내가 먼저 맛보아도 되겠습니까?”
해경의 말에 소화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 등 뒤에서 누군가 몸을 내밀더니 명태전을 하나 집어 들었다. 깜짝 놀란 소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 복장을 한 환이 서서 입에 명태전을 막 구겨 넣고 있는 참이었다. 소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에게 물었다.
“어머나, 언제 오셨어요?”
“지금 막 왔지요. 지나가다 문이 조금 열려 있기에 정 선생이 어떤가 살피러 왔더니 뜻밖의 훈훈한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겠습니까?”
환이 명태전을 우물거리며 장난스럽게 대답하고는 의자를 끌어 소화의 곁에 앉았다. 해경이 잠시 환을 마주보다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회진하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그렇소만,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라곤 정말 요만큼도 없다는 걸 믿어 주십시오.”
“그런 건 아닙니다만.”
“보던 중 제일 즐거워 보여서 공연히 몹시 나쁜 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하는 환의 얼굴에 해경이 미간을 잠시 좁혔다. 그 표정을 언뜻 본 소화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환이 경단을 하나 더 집어 드는 것을 본 소화는 얼른 병에 든 수정과를 따라 환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같이 드셔요. 목 막히시겠어요.”
“사양은 않지요.”
수정과가 든 잔을 받아 마신 환이 잠시 맛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향운정 음식이 이름난 이유가 다 있군요.”
“그렇지요?”
소화가 마치 제 이야기라도 되는 듯 기쁜 얼굴로 눈을 빛내며 묻자 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회진 중이면 바쁘실 텐데요.”
“산적 하나 더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요.”
산적을 집어 가장 위의 버섯을 빼먹으며 대답한 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해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해경이 꽂고 있는 링겔병을 본 환이 침대 옆에 놓인 약 봉투를 살피더니 물었다.
“정 선생, 밤에 잠은 잘 자고 있소?”
소화는 해경이 그 질문에 잠깐 사이를 두는 것을 눈치 챘다. 해경은 소화 쪽을 한 번 슬쩍 살피더니 네, 무어,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환이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술을 두어 번 움직거리던 환이 곧 웃으며 손에 든 산적을 들어 보였다.
“소화 양, 덕분에 잠시 입이 호강했습니다. 정 선생이 꼬박꼬박 밥하고 약 잘 챙겨 먹도록 잔소리 좀 해 주어요. 나는 다음 회진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또 보지요.”
“더 드셔도 괜찮은데요. 조금 나누어 드릴까요?”
소화가 주변을 둘러보며 접시를 찾자 환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다음에 향운정에 가서 직접 맛을 보면 되지요. 정 선생, 나중에 따로 이야기합시다.”
해경에게 마지막 말을 덧붙인 환이 병실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소화는 환이 나간 문을 한 번 돌아보았다. 밤에 잠은 잘 자고 있느냐는 질문에 해경은 분명 잠깐 대답을 망설였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소화는 해경이 자신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을 문득 직감했다. 해경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소화는 자신이 아직 해경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경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털어놓지 않는 탓이었다. 까닭 없이 조금 속이 상한 기분이 되어 스스로도 놀란 소화는 얼른 머릿속의 생각을 지우며 새 젓가락을 꺼내 해경에게 내밀었다.
“맛이라도 좀 보셔요, 선생님. 그래야 저도 먹어 보지요. 저도 아직 하나도 맛보지 못했는걸요.”
해경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받아들었다가 탁자 위에 가득 펼쳐진 음식을 보고는 난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많군요. 워낙 손이 큰 분이니…….”
“저어, 그럼 다른 분들에게 좀 나누어 드리고 올까요? 접시가 있는지 여쭈어보고 올게요.”
소화는 대답을 듣기도 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바깥으로 나왔다. 어쩐지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해경을 마주보기가 어색해진 탓이었다. 때마침 애옥의 뒷모습이 보여 그리로 달려간 소화는 애옥을 붙들고 물었다.
“음식을 조금 싸 왔는데 너무 많아서요. 다른 분들과 나누어 먹었으면 하는데 접시를 몇 개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잠시만요.”
애옥이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곧 접시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다시 해경의 병실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던 해경이 문 소리에 퍼뜩 놀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소화는 해경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가져온 접시에 음식을 나누어 담고는 차곡차곡 쌓아 보자기에 쌌다.
“드시고 계셔요, 선생님. 저 이것 식기 전에 다른 분들에게 드리고 올게요.”
다시 병실을 빠져나온 소화는 잠시 문 앞에 기대선 채 한 손으로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왜 이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휴, 하고 두어 번 고개를 저은 소화는 주변 병실마다 찾아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하나씩 돌렸다. 마지막 접시는 애옥의 것이었다. 다른 간호부 몇몇과 수다를 떨던 애옥이 접시 위의 음식들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나, 이런 것을 다…….”
소화가 음식을 권하자 간호부들이 서로 전이며 경단 따위를 집어 들며 향운정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부터 시작해 경성에서 소문난 음식점이 어디인지, 무엇이 맛있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수다를 떠는 통에 소화도 거기서 한동안 붙들려 있어야 했다. 접시가 텅 비고 난 뒤에도 수다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다음에 꼭 근처의 맛있는 음식점에 함께 가자고 애옥과 약속까지 한 소화가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근 한 시간 가까이 지난 뒤였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나 싶어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선생님, 하고 해경을 부르려던 소화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해경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잠이 든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그 자리에 굳어 있던 소화는 소리 없이 문을 닫고는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의 음식은 거의 줄어 있지 않았다. 아마 맛만 겨우 본 모양이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서늘한 옆모습은 어쩐지 몹시 지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소화는 그 옆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평양에서도 내내 해경이 매우 지쳐 보였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해경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탓일 수도 있었겠으나, 소화에게 해경의 그 불안은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권중만. 소화는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떠올렸다. 평양에서 돌아온 이후로 해경은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소화 역시 그를 떠올리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체를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소화의 머릿속에는 그 날의 일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권중만의 뒷모습과 장내를 울리던 총소리, 호텔 종업원 복장을 한 남자의 왼쪽 가슴에서 선혈이 터지며 그가 뒤로 쓰러지던 모습까지 무엇 하나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잠이 들면 그 장면을 꿈에서 보고 소스라쳐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꿈을 꾸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뉘이면 날이 밝을 때까지 다시 잠들기 어려웠다. 소화는 문득 아까 환이 해경에게 밤에 잠은 잘 자고 있냐고 물었던 것을 생각했다. 해경도 자신처럼 그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일까.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소화는 담요가 덮인 다리 위로 포개 올리고 있던 해경의 한쪽 손이 툭 떨어지며 담요가 조금 흘러내린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이 깨지 않도록 떨어진 손을 다시 올려놓고 담요를 고쳐 덮어 주던 소화는 다음 순간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는 감각에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해경은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그 손은 땀으로 젖어 축축했고 전에 없이 차가웠다. 그러나 소화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손의 차가움 때문은 아니었다. 소화는 자신의 손을 잡은 해경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가락 끝은 떨고 있었다.
입이 말랐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한 걸음 더 주춤거렸다. 그 바람에 탁자에 놓여 있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챙그랑대는 소리를 내었다. 이마로 까닭 없이 식은땀이 솟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로 들릴 지경이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던 소화는 해경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몇 번 달싹이던 해경이 긴 숨을 내쉬며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어 있는 소화를 마주보다 자신이 소화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약간 당황한 얼굴로 그 손을 놓았다.
“……소화 양.”
해경이 소화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약간 잠긴 채였다. 소화는 해경이 놓아 준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쥔 채 그 자리에 서서 대답 대신 해경을 마주보았다. 짧은 정적이 지났다. 그 정적을 먼저 깬 쪽은 소화였다. 소화는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주워 올려놓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나갔다 왔지요? 피곤하셨나 봐요.”
“아닙니다. 저…….”
“쉬,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음식은 여기 두고 갈게요. 내일 다시 와서 가져갈 테니 따로 치우지 않으셔도 되어요, 선생님.”
답지 않게 무언가 망설이는 해경의 말을 끊은 소화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아직도 해경이 손을 움켜쥐었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경은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눈썹을 약간 좁혔다. 난처한 듯한, 혹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느 쪽이라고도 확신할 수 없는 그 표정에 소화는 문득 해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해경이 가만히 소화를 응시했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화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해경은 긴 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군요. 조심해서 돌아가요.”
“네에, 네, 선생님.”
황급히 고개를 숙인 소화는 후다닥 병실을 빠져나왔다. 애옥이 뒤에서 이제 가느냐고 묻는 것도 듣지 못한 채 정신없이 병원을 나선 소화는 전차 정류장조차 지나쳐 찬바람이 부는 거리를 걸었다. 겨울 해가 짧은 탓에 늦은 오후였으나 거리에는 벌써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나둘씩 켜지는 와사등의 빛에 길바닥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숙인 채 자기 그림자만 보고 걷던 소화는 맞은편에서 오던 남자와 부딪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혜화동에서 종로 삼정목(종로 3가)까지 와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소화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해경이 움켜쥐었던 오른손에 아마도 분명 환각일 테지만 약간 아린 듯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한참이나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소화는 손을 말아 쥐었다.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던 순간 해경은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던 그 입술을 떠올린 소화는 빨갛게 언 코끝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화가 한참을 걸어 향운정으로 돌아오자, 문을 열어 주던 미랑이 빨갛게 언 소화의 두 뺨이며 코끝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아가씨, 어찌 이리 온몸이 다 꽁꽁 어셨어요? 전차가 끊길 시간은 아닌데…….”
“조금 걸어왔어요. 저어, 저녁은 준비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바깥에서 무얼 조금 먹었더니 생각이 없어서요.”
“그러셔요? 말해 두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셔야겠어요.”
소화의 말을 의심 없이 믿은 미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떠밀었다. 소화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랫목을 따뜻하게 덥혀 놓아 이불 안은 후끈거렸다. 얼었던 몸이 풀리며 나른해졌으나 소화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머릿속이 이래저래 복잡한 탓이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쓴 소화는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이던 해경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소화는 그때 해경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입술은 분명 한 단어를 발음하고 있었다.
누나.
언젠가 해경의 책 속에서 보았던 한 장의 사진이 새삼 뇌리를 지나쳤다. 어린 두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그 뒤에 쓰여 있던 두 개의 이름. 정아경, 그리고 정해경. 해경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누이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본 중 가장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지금, 해경이 무의식중에 찾은 사람은 바로 그 누이였다.
정아경. 소화는 낯선 이름을 입 안으로 뇌어 보았다. 그 사진 속의 어린 여자아이가 어떻게 자랐을지 소화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해경의 얼굴을 사진 속 남자아이의 얼굴 위로 겹쳐 보려 애쓰던 소화는 문득 가슴 한구석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해경이 그토록 감추고 있는 것이 어쩌면 그 사진 속 자신의 과거일까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해경이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놓은 비밀을 엿본 것 같은 기분에 소화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어쩌면 죄책감과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소화는 해경이 잡았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떨고 있던 그 차가운 손끝이 마치 돌부리처럼 마음에 채였다. 속이 답답해진 소화는 몸을 뒤척여 돌아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뺨이며 손끝, 발끝이 따끔거리는 감각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소화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해경에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해경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게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소화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늘 자신이 해경과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저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도 없이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소화는 이불 속의 어둠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