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60
00056 악몽의 밤 =========================================================================
최근 해경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은 별로 없었다. 평소에도 크게 감정을 드러내는 편은 아닌 해경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역시 요 며칠은 이상했다. 매우 피곤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대부분 소화보다도 더 먼저 사무실에 나와 있는 날이 많았다. 소화가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도 그런 일이 많아, 소화는 대체 해경이 언제 사무실에 오는 것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송란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다 소화가 먼저 나서 알아보겠다고 했던 것도 사실은 해경이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해경은 항상 철저하고 빈틈이 없었으나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간혹 둘만 사무실에 남아 있을 때면 멍하니 한참이나 무슨 생각에 잠겨 전화가 오거나 방문객이 와도 전혀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그 까닭이 궁금했으나 물을 수 없어, 대신 해경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송란의 사진을 들고 고시정에서 경성역 사이를 뒤지고 다니며 송란을 본 사람이 있는지 찾아다니던 소화는 송란을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나물 파는 아주머니와 화엽의 말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송란은 길을 묻는 할머니와 함께 갔고, 그것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본 송란의 모습이었다. 소화는 경성역 주변을 모두 뒤져 보았지만 의심 갈 만한 곳은 없었다. 워낙 사람이 많은 곳이었기에 근처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면 인파에 묻혀 아무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이 흔적조차 없이 이 주변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화가 해경에게 먼저 미끼가 되어 찾아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처럼, 밖에서 이렇게 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진상에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 무섭게 해경은 절대로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평소였다면 적당히 부드럽게 넘어갔을 일인데도 해경이 정색을 하며 되풀이해 말하는 바람에 소화가 내심 몹시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그날 환이 돌아간 이후에도 해경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사건에 관련된 자료들만 몇 번을 되풀이해 읽을 뿐이었다. 소화는 자기 때문에 해경의 기분이 상한 것일까 걱정되어 퇴근하고 돌아가 인혜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소화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인혜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미스터 정이 그랬다고요?”
“네. 제가 공연히 말을 꺼내서 기분 상하게 한 건 아닌지…….”
“그럴 이가 아닌데 이상하군요. 요즘에 계속 그랬단 말이지요?”
“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봐요.”
소화의 말에 인혜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소화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되면 한 번 들러 이야기해 보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미스터 정은 혹여 소화 양이 그런 일을 하다 위험하게 될까 걱정해서 그랬을 거예요.”
소화는 인혜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해경이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해경의 태도에는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다음날도 역시 해경은 자신보다 먼저 출근해 있었다. 전에 없이 눈이 충혈된 채라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해경은 어제 일에 대해서는 별 말 없이 몇 가지 자료를 찾아 주기를 부탁하고는 사무실을 비웠다가 오후에 돌아와 소화에게 일찍 퇴근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요.”
머뭇거리다 퇴근 준비를 하던 소화가 겨우 용기를 내어 꺼낸 말에 해경은 서류를 보고 있다가 퍼뜩 고개를 들어 네? 하고 되묻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네, 네에.”
풀이 죽어 대답한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까닭을 알 수 없이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길을 걸으며 왜 이런 기분이 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소화는 문득 자신이 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생님을 도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을 뿐인걸요. 소화는 그제야 이 기분의 정체를 깨달았다. 자신이 해경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없는 것 같아 이토록 답답한 기분이 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언제나 빈틈없던 해경이었지만 요 며칠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여 자꾸만 눈이 갔던 것이 사실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소화는 걸음을 옮겼다. 평소였다면 전차 정류장으로 갔을 테지만 오늘은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성역 부근까지 온 소화는 잠시 쉬기도 할 겸 근처의 건물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 위를 톡톡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보던 소화는 문득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제 몸만한 짐을 끌고 끙끙대며 걷고 있었다. 옷차림이 매우 남루했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이었다. 오른쪽 뺨은 곰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짐이 무거워서인지 잘 걷지 못해 아이가 한 걸음을 떼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 소화가 그 아이를 도와주려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고보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지나가다 말고 아이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물었다. 아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이 아이의 짐을 들어 주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앞서 걸어갔다.
“으응, 다행이다.”
아이를 누군가 도와주었다는 것에 마음이 놓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화는 무심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자 아이와 학생이 향하는 방향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경성역 부근에 새로 지은 신식 호텔 건물이었다. 욱정(旭町: 회현동)의 조선 호테루(Hotel)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지상 3층의 규모였고 창마다 불을 환히 밝혀 제법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소화는 홀린 듯 그쪽으로 향했다.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소화처럼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잠시 서서 호텔 건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호텔 건물 위편에는 영어로 뭐라고 적힌 듯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소화는 호텔 현판에 한글로 적어 놓은 글씨를 읽어 보았다. 라‧세느 호테루.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입 안에서 부드럽게 흘러가는 어감이 좋았다. 라‧세느, 하고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려 본 소화는 고개를 들어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주변을 돌며 이리저리 신기한 듯 구경하던 소화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까 앞서 가던 아이와 남학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와 남학생의 뒷모습이 열려 있는 호텔 뒷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소화는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리부가 쓰는 문인지 문 앞에는 각종 채소 껍질이나 뿌리, 고기 뼈 따위가 버려진 커다란 쓰레기통이 몇 개씩 놓여 있었다.
호텔에 식재료 같은 것을 나르는 아이였을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돌아서려던 소화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기묘한 이질감이 뇌리를 번뜩 스쳤다. 이 정도 규모의 호텔에 식재료를 대는 가게라면 저렇게 어린 아이에게 배달을 시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보통 식재료를 댄다면 아침 일찍 대지 이런 저녁에 대야 할 이유는 없을 터였다. 식재료가 모자라 급하게 주문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어쩐지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틀처럼 무언가 삐그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모를 노릇이었으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소화는 뒷문 근처의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기고 한참이나 그 뒷문을 주시했지만, 시간이 제법 지나 주변이 모두 어두워진 뒤에도 두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쓰레기통에 무언가를 잔뜩 쏟아 버리고는 뒷문을 쾅 잡아당겨 닫았다. 소화는 가만히 그 닫힌 문을 보고 있다가 후다닥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유니폼을 멋지게 차려 입은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소화는 그 직원을 붙들고 물었다.
“저어, 혹시 여기에 계속 계셨나요?”
직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네.”
“그러면 아까 요만한 남자아이가 나오는 것을 못 보셨나요? 키는 이 정도 되고, 무척 낡은 옷을 입은 아이예요. 오른쪽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고요.”
소화가 열심히 손짓을 하며 설명하자 직원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런 아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고보 교복을 입은 남학생은요? 키는 저보다 한 뼘쯤 크고…….”
“오늘 학생이 오가는 것은 못 보았습니다.”
소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 직원이 대답했다. 소화는 아, 네, 하고 대답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잠깐 생각을 하던 소화는 머뭇거리다 직원을 올려다보았다. 직원 뒤편의 호텔 로비에 선 커다란 괘종시계가 저녁 여덟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최소한 한두 시간은 지난 것이 분명했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혹시 이 호텔에 뒷문하고 이 정문 말고 다른 문이 있나요?”
꼬치꼬치 캐묻는 소화가 이상해 보였는지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직원이 조금 강하게 말했다.
“아니오. 손님들께서 드나드는 문은 이 문이 유일합니다.”
직원의 시선에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도망치듯 건물 뒤편으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댔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그 아이와 학생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뒷문이라면 두 사람이 들어갈 때부터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정문으로도 나온 적이 없다면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짐을 들어 주기 위한 것이라면 몇 분이면 충분히 들어갔다 나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싶었으나 한 번 이상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하자 마음에 걸려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해경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할까 생각했으나, 어쩐지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모든 증거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소화는 두 사람이 사라진 뒷문 근처의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긴 채 생각에 잠겼다. 문이 닫힌 채라 몰래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며 눈만 내밀고 한참 뒷문을 보고 있던 소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것인지 열대여섯쯤 먹었을 듯한 소년이 커다란 통을 들고 나와 쓰레기통에 안에 담긴 것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문이 닫히지 않게 근처에 있던 나무토막을 하나 괴어 놓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소화는 재빨리 그리로 들어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디로 통하는 길인지 어둑어둑한 통로가 뻗어 있었다. 절대로 미끼가 되어 수상한 사람을 찾는다거나 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던 해경의 말이 떠올랐으나, 자신이 먼저 나선 것이 아니라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쪽을 살펴보고 서둘러 나오면 될 것 같아 소화는 후다닥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곧게 뻗은 것처럼 보였던 복도는 중간에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왼쪽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아 소화는 반대편 복도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까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던 소년이 소화의 근처를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소화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이 나온 왼쪽 복도는 조리부로 통하는 길인지, 멀리서 불빛과 함께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소화는 자신이 서 있는 쪽의 복도를 돌아보았다. 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복도가 멀리 뻗어 있었다. 지하층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싶어 소화는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복도 벽을 더듬어 나갔다. 복도는 점점 어두워져 어느 순간 마침내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를 복도를 한참이나 더듬거리며 걷던 소화는 문득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무슨 소리가 나고 있었다. 소화는 벽에 귀를 대며 그 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으나, 가만히 들어 보니 사람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남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무언가 두꺼운 것을 힘껏 두드리는 듯한 소리도 났다.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벽이나 배관을 타고 온 것일 수도 있었으나, 소화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걷던 소화가 멈춰선 곳은 막다른 벽이었다. 소화는 어둠 속에서 벽 전체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단단한 벽일 뿐 문 같은 것은 만져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리는 분명 더 가까워져 있었다. 발돋움까지 하며 벽을 더듬어 보던 소화의 손에 무언가 튀어나온 못 같은 것이 걸렸다. 아무도 쓰지 않는 듯한 복도의 벽에 일부러 못을 박아 놓은 이유를 알 수 없어, 분명 잘못 박은 못일 거라고 생각한 소화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못을 손으로 밀었던 순간이었다. 덜컹 소리와 함께 벽이 그대로 돌아갔다. 벽을 짚고 있던 소화는 얼결에 돌아가는 벽에 휩쓸려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소화는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놀람과 얼떨떨함이 더 커서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방금 자신이 있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똑같은 벽이었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방금 그 곳은 이 벽의 바깥이고, 지금 여기는 벽의 안쪽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벽 뒤에 비밀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벽 안쪽으로 들어오자 아까부터 계속해서 소화를 이끌어 오던 희미한 소리들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소화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그러자 날카롭고 기분 나쁜 감각들이 잔뜩 예민해진 귀와 코로 밀려들었다. 벽을 힘없이 긁는 듯한 소리와 작은 신음소리, 그리고 마치 녹이 슨 못을 만졌을 때 나는 것과 같은 냄새가 조금씩 더 뚜렷하게 소화의 감각을 일깨웠다. 비리고 강렬한 냄새였다.
소화는 엎드린 채 천천히 기어 주변을 더듬었다. 벽에 맞닥뜨린 소화는 그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벽 위를 만져 보던 소화는 손에 걸리는 감각으로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를 올리자 촉수 낮은 전구가 켜지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밝혔다. 눈이 부셔 잠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얼굴을 찡그리던 소화는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것은 복도에 나란히 붙은 다섯 개의 방이었다. 세 개의 문은 열려 있었고, 두 개의 문은 잠겨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어둠이 스며나왔다. 본능적으로 저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소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방의 문을 연 소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철제 침대 하나였다. 텅 빈 방 한가운데에 오직 그것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채였다. 소화는 방의 등을 켰다. 천장에 붙은 백열전구가 켜지며 방 안에 하얀 빛이 쏟아졌다. 을씨년스러운 방 안을 둘러보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소화는 주춤거리며 서 있던 곳에서 발을 옮겼다. 짙은 갈색의 얼룩이 회색 바닥 위에 점점이 남은 채였다. 그 얼룩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소화는 무릎을 꿇고 앉아 얼룩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가 코끝에 대 보았다. 쏘는 듯한 냄새가 났다.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맡았던 냄새였다. 비리고 강렬한……소화는 이 냄새를 잘 알고 있었다.
피다.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킨 소화는 바로 불을 끄고는 다음 방의 문을 열었다. 다음 방 역시 벽에 붙은 철제 사물함 외에는 첫 번째 방과 같은 침대 하나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방의 바닥에도 같은 얼룩이 존재했다. 소화는 불을 켜고 방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미세한 얼룩부터 지름이 엄지손가락 정도는 될 법한 커다란 얼룩까지 온 방 안에 남아 있었다.
소화는 어릴 적 아버지가 닭을 잡던 광경을 떠올렸다. 닭의 목을 칠 때 분수처럼 튀던 피가 머릿속에 스쳐갔다. 그렇게 피가 뿜어져 나왔다면 이토록 미세한 얼룩이 남아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동물의 피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피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소화는 자신이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방의 불을 끄고 나와 굳게 마음을 먹고 세 번째 방의 문을 연 순간 소화는 비명을 지르려다 자기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역시 철제 사물함과 침대만이 놓인 방이었는데, 침대 위에 누군가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던 소화는 숨을 참으며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화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켰다. 바닥에 아예 붙어 버린 듯한 발을 간신히 떼어 침대 옆으로 간 소화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노파였다. 검버섯이 핀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몸 위는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천 아래로 드러난 팔다리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푸른 반점들이 점점이 남은 채였다.
“저……저기요, 할머니…….”
소화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모기 소리처럼 기어드는 소리였지만 그것이 소화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였다. 노파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화는 침을 삼키며 손끝으로 노파의 목줄기를 짚어 보았다. 이질적인 싸늘함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맥은 없었다. 죽은 사람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은 소화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타인의 시체를 가까이서 접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저앉아 울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소화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에는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문 소화는 노파의 몸을 덮은 천을 걷어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늙은 몸이 드러났다. 분명 누군가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고, 무슨 짓인가를 벌인 것이 분명했다. 소화는 예전에 할아버지의 책장에서 보았던 이라는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체를 검안(檢案)하는 방법을 적은 책이었다. 방 안은 딱히 창이 없는데도 서늘했다. 초봄 날씨 정도의 온도였다.
소화는 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봄 석 달에는 시체가 이삼 일이 지나면 변하여 입, 코, 뱃가죽, 겨드랑이, 앞가슴의 살빛이 푸르게 되며 열흘 이상이 지나면 코와 귀에서 썩은 물이 흘러나오고 배가 부풀어 오른다.’ 소화는 빠르게 노파의 시체를 살폈다. 코와 귀는 깨끗했지만 입술과 앞가슴, 배 부분은 푸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죽은 지 아직 사흘이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며 벽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소화는 번개같이 방의 불을 끄고는 벽면에 세워진 사물함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누군가가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소화는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입을 막고 바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구둣발 소리가 열려 있는 세 개의 방문 앞을 천천히 지나쳤다. 소화가 있는 세 번째 방 앞을 지나친 발소리가 네 번째 문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곧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닫힌 문 너머로 한 번 걸러진 희미한 소리가 넘어왔다. 소화는 온 신경을 다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자. 여자다. 뭐라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는 듯한 그 목소리에 소화는 눈을 질끈 감으며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난 후 네 번째 방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바로 그 순간 안에서 절규하는 소리가 스며나왔다.
“제발, 가야 해…….”
그러나 문은 매몰차게 닫혔다. 구둣발 소리가 다시 세 개의 문을 지났고 벽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다시 영원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화는 입을 틀어막은 채 사물함 속에 웅크리고 앉아 쏟아지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를 물었다. 소화는 방금 네 번째 문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송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