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59
00055 악몽의 밤 =========================================================================
이미 늦은 시각이었지만 해경은 사무실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사무실에 앉은 채 해경은 계속해서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탓이었다. 최근 며칠 사이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듯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았다. 실종자들의 마지막 행적을 제외하고는 진전이 없는 실종사건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해경은 손을 뻗어 오 촉짜리 전등을 켰다. 작은 전구의 희미한 빛이 방을 채웠다. 열린 창밖으로 뻗어 있는 경성의 밤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해경은 멀거니 앉아 그 조용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멀리서 들리던 유행가의 레코드 소리도 어느 순간 끊겨 있었다. 해경은 눈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 몹시 피곤한 기분이었으나 잠이 드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기분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도망치다 번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 어린 해경은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잠이 들면 머리가 으깨진 괴물이 찾아와 목을 조르는 꿈이었다. 괴물에게서 도망을 쳐도 소용이 없었고 괴물을 죽이면 그 괴물의 얼굴은 곧 누나의 얼굴로 변해 해경을 쫓아왔다. 오랫동안 시달렸던 악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시 그 꿈이 시작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해경은 얼굴을 두어 번 쓸어 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송화자, 김덕구, 이갑녀, 조평술, 박경인, 송란 같은 실종자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실종자를 찾아 달라는 의뢰가 처음은 아니었고 이번 사건이 그 중 가장 이상한 축에 드는 편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왜 유독 버거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마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 끼어 있기 때문일까. 해경은 송란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송란은 남도잡가(南道雜歌)를 잘 해서 인기가 많았다. 해경은 언젠가 술에 취한 채 향운정의 문가에 걸터앉아 화초사거리 한 대목을 구성지게 뽑던 송란의 모습에 잠시 발을 붙들렸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 기억을 되새기던 해경은 불현듯 열없이 웃었다. 그건 어쩌면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 본 이만이 알 수 있는 극한의 고독. 해경은 그런 고독감이 자신을 잠식할 때면 때로 세상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누나도 자신과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을지 궁금해지곤 했다. 만약 그 겨울밤에 자신이 누나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함께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처럼 끊임없이 헛된 희망을 품는 일은 없었을지도, 하고 생각하던 해경은 문득 소화를 떠올렸다. 가족들이 죽은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헛된 희망이라도 품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하던 소화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거기에는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질감. 해경은 입 안으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뇌어 보았다. 자신이 소화에게 느끼는 것이 그런 감정이었던가 싶어 새삼스럽게 생경한 기분이 되었다.
해경은 소화를 볼 때면 간혹 어린 시절의 누이를 떠올릴 때가 있었다. 그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화의 보호자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해경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터였다. 보호자. 누이에게 하지 못한 것을 소화를 통해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해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해경의 상념을 멈추게 한 것은 문 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였다. 문을 연 해경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인혜였다. 보기 드문 양장 차림에 짧은 베일이 드리워진 모자를 약간 비스듬히 쓴 인혜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향운정으로 돌아가다 사무실 창에 불이 켜져 있기에 혹시나 하고 들러 보았어요. 몹시 늦은 시각인데 어쩐 일로 아직 돌아가지 않았나요?”
“……들어오시겠습니까?”
해경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짧은 베일 너머로 어른거리는 인혜의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인혜는 속이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해경은 그녀를 속이는 대신 대답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인혜가 안으로 들어서며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해경은 사무실의 등을 켜며 오 촉짜리 전구를 껐다. 소파에 앉은 인혜가 해경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일을 하던 건 아니었겠군요. 책을 읽기에는 너무 어두운 등이지요?”
“드릴 건 차뿐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해경이 풍로 위에 물을 올리며 묻자 인혜가 짧게 웃었다. 회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인혜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내려놓으며 등을 돌린 채 찻잎을 덜어내고 있는 해경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아주 피곤해 보이는걸요.”
“네, 조금. 청차로 드리겠습니다. 좋은 것이 들어와서요.”
해경은 지나치듯 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인혜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미스터 정이 이러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인간적이라 해야 할까요, 미스터 정도 사람이긴 하다는 걸 확인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허나 나이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금 걱정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물이 끓었다. 해경은 주전자를 내려 차를 우렸다. 첫 물을 버리고 다시 물을 따른 뒤 잔을 데운 해경은 따뜻해진 잔에 우려진 차를 부었다. 청량한 수색(水色)이 흰 잔을 채웠다. 인혜의 앞에 찻잔을 놓은 해경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나 인혜는 찻잔에 손을 댈 생각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해경을 마주볼 뿐이었다. 인혜의 시선이 불편해진 해경이 눈을 조금 피하자 인혜가 한숨처럼 짧게 숨을 뱉었다.
“어제 소화 양을 혼냈다고요.”
해경은 인혜의 말에 멈칫했다. 인혜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인혜는 웃는 얼굴을 한 채 부드럽게 말했다.
“소화 양이 매우 걱정을 하더군요. 자기가 미스터 정의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다고요. 어차피 조수라고 말할 정도라면 소화 양에게 일을 좀 돕게 해주어도 괜찮지 않아요? 여기저기 민폐나 끼치고 다닐 아가씨는 아닐 텐데 왜 그리 혼을 냈습니까?”
“혼을 낸 것은 아니고, 그저…….”
해경은 말끝을 흐렸다.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소화의 제안이 아주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해경 자신도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화에게 그런 일을 시킨다는 것은 역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도 없었고, 만에 하나라도 나쁜 일이 벌어진다면― 해경은 굳이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 하나 없고 경성에서 아는 사람도 얼마 없는 소화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자신임을 해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극히 적은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소화의 그 믿음을 깨는 일을 선뜻 허락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송란이에 대한 것은 어찌 되었나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해경을 본 인혜가 말을 돌렸다. 해경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경성역 근처에서 목격된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소화 양이 직접 탐문해 보았다는군요.”
“조수로 일하더니 이제는 탐정이 다 되었네요.”
인혜가 소리 내어 웃고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인혜가 한동안 찻잔 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송란이가 살아 있을까요?”
해경은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쪽으로도 확신할 수 없는 탓이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송란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실종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 실종되었다고 했을 때는 분명 타의에 의해 사라진 것일 테고,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해 이미 며칠째 소식을 알 수 없다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냉철하게 판단하되 마지막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해경의 방식이었다. 해경의 얼굴을 본 인혜가 한숨을 쉬고는 핸드백 안에서 궐련상자를 꺼내 궐련을 한 개비 꺼내 물었다. 해경은 성냥을 그어 궐련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인혜가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고는 천천히 궐련을 빨아들였다가 숨을 뱉었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올라갔다. 서너 모금 정도를 피운 인혜가 궐련을 눌러 껐다.
“미안해요. 속이 좀 답답해서요.”
“죄송합니다.”
해경이 사과하자 인혜가 웃으며 대답했다.
“미스터 정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 송란이 요 계집애, 들어온 후로 한 번도 속을 썩인 일이 없었는데 이런 일로 속을 썩일 게 뭐람. 차라리 돈을 떼먹고 도망치는 게 낫지, 이리 사람을 말려 죽일 일이에요?”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저도 최대한…….”
“미스터 정.”
인혜가 해경의 말을 끊었다. 해경이 멈칫하며 인혜를 마주보자, 인혜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본인부터 신경 쓰는 게 먼저겠어요. 거울이 있다면 좀 보아요. 사람 찾자고 사람 잡게 생겼으니 일단 들어가서 좀 쉬어요. 차를 가져왔으니 집까지 데려다 주지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고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있으려 하는 것 다 알아요. 어서 나가요.”
인혜가 완강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은 정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으나, 악몽 때문에 잠들기 두렵다는 말을 인혜에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마지못해 인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해경의 겉옷을 내려 주고 사무실의 불을 끄려던 인혜가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해경을 보았다.
“전화 한 통만 쓰겠어요.”
“그렇게 하십시오.”
해경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인혜가 수화기를 들어 향운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누군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미랑일 터였다. 인혜가 수화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미랑아, 나다. 그래. 지금 명치정에 있어. 곧 돌아갈 것이다. 방에 불을 때고 있으면 행랑아범에게 말해 불을 좀 빼라고 말해 두렴. 아이들은? 저녁은 먹었고? 그래……뭐라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인혜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인혜가 석고처럼 굳어진 얼굴로 수화기를 움켜쥔 채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해경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까닭을 모르는 해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인혜를 마주보았다. 인혜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입이 마르는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에 남은 차를 들이켰다.
“소화 양이 몇 시에 퇴근했지요?”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해경은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평소처럼 다섯 시쯤 퇴근했을 겁니다. 오늘은 일찍 들여보내서요.”
“중간에 어디 심부름이라도 시켰나요?”
“아니오, 전 아무 것도…….”
대답하던 해경은 말을 멈췄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갑작스럽게 등 뒤를 덮쳐 왔다. 인혜가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잠시 입술만 몇 번 소리 없이 달싹이던 인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랑이가 그러는데, 소화 양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해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화가 사무실에서 퇴근한 지 이미 일곱 시간 가까이 지난 뒤였다. 어떤 일이 있었다 한들 이 시간까지 향운정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화가 경성에서 갈 만한 곳도 없었고, 자신이 따로 시킨 일도 없었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애써 소화가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하던 해경은 퍼뜩 인혜가 아까 했던 말을 되새겼다. 어제 소화 양을 혼냈다고요……. 자신이 미끼가 되어 수상한 사람을 찾아보면 어떠냐던 소화가 떠오르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해경은 저도 모르게 소파의 등받이를 짚으며 숨을 골랐다.
“어디 갈 만한 데가 없나요?”
인혜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물었다. 해경의 반응을 본다면 충분히 해경 역시 전혀 짐작 가는 곳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으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묻는 것일 터였다. 해경은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아닐 겁니다. 별 일이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이 전신으로 번졌다. 해경은 이런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끔찍하게 싫은 기분이었다. 해경은 약한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끼며 창가로 향했다. 어둡고 인적 없는 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거리의 어딘가에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소화 역시 그 어둠 속 어딘가로 끌려들어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머리가 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요?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 찾아봐야 할까요?”
인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인혜로서도 이런 일은 처음인 탓이었다. 해경은 생각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소화는 대부분 매일 일정한 시간에 퇴근을 했고, 향운정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거의 비슷했다. 명치정에서 나가 전차를 타고 향운정 근처의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서 돌아가는 것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으므로, 소화가 만약 누군가에 의해 실종된 것이라면 분명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차를 가져오셨으니 일단 경찰에 실종 신고부터 해 주십시오. 제가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향운정에서 뵙지요.”
해경은 침착해지려 애를 쓰며 인혜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인혜가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해경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경성 지도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지도 위에 점점이 찍힌 빨간 점들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한참 그 지도를 보던 해경은 겉옷을 집어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길을 되짚으며 해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낮의 거리와 밤의 거리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해경은 주변의 모든 건물을 살폈다. 움막집과 신식 건물이 한데 뒤섞인 기묘한 공간의 어딘가에 사라진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사람이 한 일인 이상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화 양!”
해경은 목소리를 높여 소화를 불러 보았다. 빈 거리에서 끝이 짧은 메아리가 되돌아왔다. 해경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명치정의 사무실 앞에서 걸어서 소화의 흔적을 되짚어 간 해경이 향운정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였다. 인혜는 이미 도착한 듯 차가 향운정 앞에 세워져 있었다. 향운정 안에는 아직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가야금 소리와 기생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도 이따금 대문을 넘어왔다. 해경은 그 자리에 선 채 그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랑이었다. 막 문을 열었던 미랑이 앞에 우뚝 선 해경을 보고는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가 한쪽으로 비켜서며 열린 문을 가리켰다.
“사장님께서 선생님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해경은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후원으로 향했다. 인혜는 숫제 현관을 연 채였다. 해경이 들어서자 인혜가 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나요?”
해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혜가 자리에 주저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일단 경찰에 신고는 했습니다. 꼭 좀 부탁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니 젊은 경찰 두세 조를 보내 순찰을 돌아보겠다고 얘기하기는 하더군요.”
해경은 인혜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 잘못입니다.”
중얼거리듯 뱉은 목소리의 끝이 갈라졌다. 계속 소화의 이름을 부르고 다닌 탓이었다. 해경은 자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소화가 정말 범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려 한 것이라면 해경은 결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결코 그렇게 위험한 일에 소화를 끌어들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해경의 안색이 몹시 나빠진 것을 본 인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해경의 팔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미스터 정 잘못이 아니에요. 그보다 괜찮아요? 얼굴이…….”
“……괜찮습니다. 잠을 좀 설쳐서요.”
해경을 물끄러미 마주보던 인혜가 미랑을 불렀다. 이름이 불리자마자 작은 다람쥐처럼 달려온 미랑에게 인혜가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방 화장대 위에 독일제 약병이 있어. 그걸 좀 가지고 내려오렴. 손님방에 이부자리 좀 봐 드리고.”
미랑이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온 미랑의 손에는 작은 약병이 쥐어진 채였다. 인혜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미랑은 약병과 함께 물까지 한 잔 떠다가 해경의 앞에 놓아두고 물러갔다. 인혜가 해경에게 물었다.
“얼마나 잠을 못 잔 건가요?”
해경이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자 인혜가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분명히 며칠은 되었겠군요. 내 말 잘 들어요. 일단 미스터 정은 지금 잠을 좀 자야 해요. 이 약을 한 알 먹고 바로 손님방으로 가서 자는 겁니다. 알겠어요?”
“사장님.”
해경이 인혜를 부르자 인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토 달지 말아요. 송란이에 소화 양까지, 내 집에서 두 사람이 없어졌어요. 미스터 정까지 그런 꼴을 당하게 둘 순 없어요. 미스터 정까지 사라지면 내 집에서 없어진 사람들은 누가 찾아 주나요? 어서 먹어요. 한 알이면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어요.”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다는 인혜의 말에 해경은 망설였다. 분명 지금의 자신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거미줄이 뒤엉킨 듯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 했다. 두려운 것은 악몽이었다. 꿈이 없는 잠이야말로 지금의 해경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해경은 마침내 약병 안에서 수면제를 한 알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인혜가 미랑을 부르자 미랑이 나타나 해경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해경은 쓰러지듯 자리에 누운 채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끝없이 자신을 쫓아오는 괴물의 숨소리가 들렸다. 환청이다.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몸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경은 마치 끝이 없는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전등의 스위치를 끄듯 생각이 끊겼고, 다음 순간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이 위에서부터 덮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