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06
547화 무엇으로 복수를 해야 할까? (2)
말 위에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범한이 1 황자에게 말했다.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체면을 봐주신 것이니 한동안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1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직접 배웅해주겠네.”
범한이 말고삐를 당겨 천하대도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채찍을 왼손으로 바꿔 든 후 추밀원 돌계단에 있는 군 측 인사들을 향해 높이 치켜들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휘휘 내저었다.
그런데 추밀원의 군 측 인사들에게는 저 멀리서 범한이 휘두르는 채찍이 마치 자신들의 따귀를 후려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 * *
범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온 후 1 황자가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으로 물어본 후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바로 황궁으로 돌아갔다. 범한은 그가 급히 회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1 황자의 폭풍 질문에는 그다지 많은 걸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 일에 대해 아직 의문점이 많아서였다.
황궁에서는 태의원의 태의를 셋이나 보내주었지만 범한은 그들이 필요 없었다. 그에게는 3처 형제들이 약을 발라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직 몸에 남아 있는 독은 며칠 후면 제거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등에 생긴 처참한 상처는 대체 얼마나 요양을 해야 나을 수 있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지금 범한은 자기 집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긴장이 완전히 풀린 상태라 순간 저항할 수 없는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래서 등이 화끈거리면서 아픈데도 베개를 안고 깊이 잠들어 버렸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여종이 문을 나가서 뜨거운 물에 담가 따뜻하게 덥혀 둔 쌀죽 한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자 줄곧 범한 곁을 지키던 사람이 죽 그릇을 받아들고는 범한을 부축해 일어 내킨 후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후후 불어 식히고 천천히 먹여 주었다.
한 술 받아먹은 범한이 마른 입술을 오므리고 옆에서 조심스레 죽을 떠주고 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 못 본 사이 백발이 부쩍 눈에 띄게 늘고, 주름도 더 깊어진 아버지의 모습에 범한은 이유 없이 가슴 한쪽 구석이 시큰했다.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범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죽을 먹여 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죽 그릇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에야 차분하게 입을 뗐다.
“예전에 네가 감찰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나는 분명 문제가 생길 거라고 했었다. 하나······ 문제가 이미 불거졌으니, 이제 더는 거론할 필요가 없겠구나.”
범한이 아무런 대꾸도 하고 있지 않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자 범건이 온화하게 말했다.
“말해보렴.”
범한은 산골짜기의 부서진 마차 옆에서 생각났던 궁금한 점들을 아버지에게 모두 말해드렸다. 아버지 대인께서 자신에게 무언가 깨우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아버지 대인은 조정에서 진짜 실력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강단 있고 수법도 노련해 황제 폐하께서도 그를 자리에서 내쫓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이왕 군 측에서 손을 쓴 거라 단정한 거라면······.”
범건이 말을 이어 갔다.
“분석을 좀 해보자꾸나. 경도 방어 외에 우리 경국 대군에는 5로 변병(邊兵), 7로 주군이 있지. 변병의 실력이 가장 강한데 섭씨 가문이 쥐고 있는 정주가 그중 하나, 진씨 가문이 쥐고 있는 하나, 창주 지역의 변병은 연소을이 통제하고 있고, 남소선에 하나가 있지. 주군의 실력은 기본적으로 간과해도 될 정도고. 한데 그렇다 해도 5로 변병은 사실 그렇게 명확히 나뉘어져 있지 않아. 섭씨와 진씨 두 가문의 경우, 문하생들이 오래 전부터 군 곳곳에 들어가 골고루 포진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범건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1 황자 마마께서 과거 서쪽 정벌에 나서셨을 때는, 사실 5로 변병에서 사람을 선발해 대군을 만드신 거였단다. 그들은 전투가 끝난 후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갔지.”
조용히 듣고 있던 범한이 잠시 후 입을 뗐다.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내놓으신 방법이겠군요.”
“그렇단다. 정서(征西: 서쪽 정벌)를 담당하는 장수들은 중요한 인물로 뽑힌 거라 황족의 수족과도 같은 위치였다. 그러니 진씨와 섭씨 두 가문의 지시에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단다. 그렇다 보니 5로 변병은 그 어느 가문도 단독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된 거고 말이다.”
참 희한하지 않은가. 범한이 자객의 습격이라는 큰일을 당했는데도 부자는 한숨을 내쉰다거나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차분하게 상황 분석에만 나섰다.
“경국 방어의 경우 경도성 밖으로 뺑 둘러 40리까지는 경도 수비 관할지지. 수비사는 2만 명을 관할하고 있고. 경도성 안으로는 경국 최강인 금군이 1만 명이 있구나. 또 13성문사의 경우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아 경도 성문을 개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중요한 관아 중 하나이지. 황궁에 시위(侍衛) 일통(一統)이 있고. 비록 우리 조정의 관례에 따라 금군 대통령이 대내 시위를 겸하고 있기는 하다만 그래도 궁전이 대통령을 했을 때 말고는 다른 때는 황궁의 그 태감이 대내 시위를 관리를 했고 또 하고 있지.”
그 태감이라고? 당연히 홍 태감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범한은 뜻밖에도 아버지의 말 속에서 이상한 구석을 발견했다. 금군과 대내 시위를 모두 통괄했던 사람이 궁전뿐이었다고?
범한이 깜짝 놀라 갑자기 고개를 휙 치켜들고 물었다.
“궁전을······ 황제 폐하께서 그 정도나 신임하셨던 겁니까?”
범한이 황궁을 방어하는 이들과 첫 번째로 맞붙은 건 경묘 앞 입구에서 궁전의 손바닥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궁전이 현공 사당 일에 연루되어 금군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가장 큰 이유는 황제 폐하께서 섭씨 가문 세력을 경도에서 축출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 말대로라면 궁전은, 그리고 어쩌면 섭씨 가문은 무서울 정도로 신임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왜 섭씨 가문을 어떻게 해서든 2 황자와 장 공주 쪽으로 밀어버리신 거지?’
범한은 은연중에 자기가 무언가 중요한 걸 알아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아 머리가 아파왔다.
범건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황제 폐하께서는 계산 능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도 방위 세력을 가지고 노실 정도는 아니시고······ 그리고 왜 섭씨 가문을 쫓아냈는가에 대해서는 내 보기엔······ 하나 정도는 알 것 같구나.”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버지, 그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범건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범한을 부축해 누이며 천천히 말했다.
“잊지 말거라. 네 어머니는 성이 섭씨니라······. 옛날에 그녀가 경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섭중과 싸운 적이 있었단다. 그때 오죽도 섭류운과 한 차례 맞붙었었지. 너희 두 집안은 아무 관련도 없었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무언가를 걱정하고 계셨을 수 있어. 현공 사당 사건이 터졌을 당시 황제 폐하께서는 너를 지금만큼 신뢰하지 않으셨단다. 하지만 너를 중용할 준비는 하고 계셨으니, 응당 그에 합당한 예방 조치는 마련하시려 했을 게다.”
범한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싸늘하게 탄식하기 시작했다. 제왕의 심술이란······. 그렇게 살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범한도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에는 헛다리 짚을 때가 있다는 점이었다.
“저와 섭씨 가문은 그다지 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범한은 이 말을 하는 동안 보석처럼 맑은 눈을 지닌 낭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 할지라도 미래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범건이 눈썹을 한번 씰룩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황제 폐하께서 왜 이렇게 너를 경계하시냐는 거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후 자그마한 소리로 입을 뗐다.
“아버지, 이번 일은 어쩌면······ 황제 폐하의 계획일까요?”
경도 외곽에 군사를 옮기고 살인을 하고, 심지어 수성용 강노까지 가져다 놓지 않았던가. 그 결과 감찰원 제사이자 천하의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자신이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당했고 말이다!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범한은 그 골짜기에 살수를 매복시켜 놓은 배후에 절대 장 공주의 광기만 있는 건 아닐 것이며, 더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범한이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 중 황제 폐하는 단연 1등이었다. 그리고 2등은······.
“황제 폐하는 아니란다.”
범건이 느닷없이 작은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너를 예뻐하고 사랑해줘도 모자랄 판에 어찌 살수를 보내시겠느냐······그분께서 ······돌아가실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범한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단 잠자코 있다가 다시 물었다.
“경도 수비와 감찰원의 실력을 동시에 무력화시켰으니······ 황제 폐하가 아니라면 또 누가 그럴만한 힘이 있겠습니까? 장 공주와 연소을이?”
범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범건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분명 무언가가 냄새를 맡았구나. 한데 왜 추밀원에서 돌아왔을 때 너의 그 감찰원에는 가보지 않은 것이냐?”
“그럴 리 없습니다.”
침대에 누운 범한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내상을 입은 몸이 자신의 판단을 온전히 믿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는 순간 감정이 격해져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을 보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렸을 때 비개 스승님에게 생물의 독약 입문 과정, 감찰원 규장(規章), 조직 구성, 감찰원만의 일 처리 방법, 살인 기법을 배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삶은 경국 관원과 백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찰원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범한은 아이였다. 기껏해야 천재적인 기질을 지닌 아이 정도였다. 하지만 담주에서의 안지는 상당히 성숙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미래가 감찰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을 거란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경도로 와서 제사 요패를 세상에 내보이고 난 후 범한은 감찰원의 노인들이 꽤나 마음을 써주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감찰원을 범한에게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돌려주고 싶었을 수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인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일수도 있었다.
지금의 범한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재화, 천하에 널리 알려진 명성,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어쩌면 그가 두 세상을 산 경험 덕분이었다. 즉 무수히 많은 전생의 현인들이 지은 시와 문장, 그리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갈고 닦은 굳은 의지 덕분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 모든 건 외적인 것으로 제 몸에 꽁꽁 붙들어 둘 수 없으며, 언제든 몽땅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모든 걸 아직까지 지닐 수 있는 건 감찰원의 힘에 기대고 있어서였다.
감찰원은 이 세계에 범한을 존재하게 만들어 준 근원이자 근간이었다.
그러니 눈 쌓인 산골짜기에서 급습을 당한 것과 현공 사당의 자객 사건은 달랐다. 현공 사당 사건 때 중상을 입은 건 순전히 의외의 사고였다. 그림자가 나선 것이었으므로 완전히 진평평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의 패도의 정기가 병목현상을 일으켜 경맥을 모두 끊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 정도의 중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 덮인 산골에서의 습격은 범한을 죽이기 위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일단 시작된 이상 절대 거둬들일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고······.
그러니 범한이 아버지가 한 말대로 추측하고 있던 거라면, 근거가 약해지게 되어 범한은 언제든 퇴장할 수 있었다. 이에 범한은 그 추측을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또 받아들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