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49)
대회장에서 일어난 소란 (2)
진실의 신탁
어둠으로 향하다
경험치 던전
완벽하게 대비하는 법
의외의 연결고리
성채 공략
코어의 끝까지
반전 (1)
대회장에서 일어난 소란 (2)
인류의 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인공지능은 가장 늦게 태동했지만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한 학문이었다.
처음으로 그 윤곽이 대중들에게 크게 부각된 것은 바둑을 두는 간단한 인공지능의 등장부터.
지금에 와서 보면 기초적인 원리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일 뿐이지만 당시에는 미래가 로봇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만큼 혁신적이었다.
전산처리, 검색기, 음성번역기 등등.
인공지능이 다른 분야로 발을 넓히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게임 속 NPC들도 예외가 아니었고, 가상현실 기반 게임들도 함께 변혁의 시기를 맞이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NPC.
최초로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된 가상현실이 등장했을 때, 게임사들은 NPC의 정해진 패턴이 없다는 것을 가장 큰 광고문구로 삼았다.
그러나 정확히 파고들면, 인간과 동일하다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었다.
게임 속 NPC는 주어진 틀 내에선 인간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환경이 변하면 바보가 되어버렸으니까.
상점을 운영하는 NPC는 이윤을 남기는 목적 외엔 관심을 갖지 않았고, 말단 병사는 맹목적으로 상관에게 복종했다.
명령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하극상을 일으키기란 불가능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체적인 사고를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어차피 몇 안 될 겁니다.”
최초로 NPC용 인공지능을 개발한 누군가는그런 망발을 내뱉고 뭇매를 맞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반쪽짜리 인간.
인류의 대부분은 수동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니 틀 내에서 살아가는 NPC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인식을 확장하는 영감(靈感).
틀을 깨부수는 혁명(革命).
그런 것들은 현실에서도 소수의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었다.
NPC들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만 인간을 흉내 내는 것뿐이라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대들에게 신탁을 내려드리지요.”
진실의 대천사의 고고한 목소리가 관중들의 귓가에 울렸다.
“저에게 기도하세요.”
아스리안이 만들어질 당시 모든 NPC들은 외부의 세계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개발진이 NPC에게 ‘현실의 세계를 인식하라’는 목적을 불어넣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의 NPC는 바깥의 세계를 인식했고, 관중들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기존의 NPC들에겐 불가능한 일.
NPC가 스스로 인식의 폭을 확장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관중들이 얼떨떨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가운데 권대호는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좋군.’
2세대 인공지능.
뇌의 원리를 본떠 설계된 그것은 기존의 인공지능과 완전히 다른 작동방식을 가진다.
첫 날의 중대발표가 현실과 아스리안의 물리적 특징을 연결시켰다면, 오늘은 인간과 NPC를 구분하던 ‘인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날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다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
2세대 인공지능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어마어마한 시스템 리소스가 필요했다.
아스리안에 존재하는 모든 NPC에게 그것을 적용하려 하다간 곧바로 서버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다.
이에 개발진의 대안은 간단했다.
대천사, 대악마라 불리는 극소수의 NPC들에게만 2세대의 인공지능을 적용시키는 것.
또한 나머지 초월자들, 천인, 공작, 주교, 등의 스토리의 핵심을 담당하는 NPC들에겐 1.5세대까지 적용시켰다.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NPC일수록 고차원의 인공지능을 부여하는 식으로.
그 중 최고인 2세대 인공지능들은 인식, 사고, 판단, 어쩌면 감정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것까지 갖추고 있었다.
“유저들은 기도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요.”
진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회장에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가 필요해지는 날이 올 것이니 저를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왜 그래야하는지, 그 이유는 곧 알게 될 테니….”
파칫-!
대천사가 현실에 현현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는 나타났을 때처럼 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미 캡슐에서 빠져나온 선수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가운데 강성철이 빠르게 소란을 잠재웠다.
어째서 대회 직후 천사가 등장했던 것인지.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인공지능임을 설명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인터넷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스리안과 관련된 뉴스들이 헤드라인을 가득 장식했다.
어제의 중대 발표에 이어 2연타.
성경을 인용해 권대호를 창조주에 비교하는 기사도 있었다.
이번 사건은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자들은 2세대의 인공지능의 개발 시기가 머지 않았다고 점치고 있었으니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대중들은 아니었다.
대회장에 천사가 등장했던 그 순간은 벌써 사진, 영상으로 인터넷에 순식간에 퍼진 상태였다.
-저거 속임수 아님? 저렇게 말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걸지도 모르잖아.
-권대호가 그런 짓을 하겠냐? 얼마나 자존심이 센 양반인데.
-나는 미래에 살고 있다!
-지금 당장 여친 만들러 간다. 아스리안 깔면 되냐?
-ㄴ그래봤자 2세대를 못 만나면 별로 의미 없는 것 같은데…?
시사 뉴스들은 물론. 기존의 아스리안 커뮤니티들도 난리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지한테 기도하라니, 지가 신인 줄 아네?
-쟤 신 맞아요. 진실, 빛, 질서. 이렇게 셋이 천공 최고 서열 대천사입니다. 세계관 설정 검색하면 각 대천사들의 자세한 정보도 나와요.
-근데 요즘 기도레벨을 누가 올려? 기도를 배우라는 공략은 한 번도 못 봤다.
-응 넌 배우지마. 나만 배울거임.
유저들은 2세대 인공지능의 등장에 놀란 가운데, 그녀가 말하는 내용에도 관심을 가졌다.
대천사라면 세계관에서도 가장 윗 서열의 NPC.
그런 존재가 신탁을 내렸다면 틀림없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 아스리안과 연관된 히든 퀘스트라도 숨어 있다면?
유저들은 그런 기대에 부풀어 신탁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저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임 속에서, 천공과 심연 모든 유저들에게 같은 메시지가 일제히 떠오른 것이었다.
평소라면 잠깐의 소란으로 끝났을 해프닝.
-나 ‘진실’이 그대들에게 고합니다. 제게 기도를 바치세요. 저에게 공감하세요.
-천계의 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릴 것이니. 가장 신실한 신도들은 천계를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공감이 모자란 자들도 언젠간 천계에 발을 디딜 자격이 주어질 것입니다.
1. 일주일 동안 공감 상위 500명.
(※이 순위는 매주 초기화됩니다!)
2. 공감 누적순위 500위까지.
(※천계 입장 시 누적 순위가 초기화됩니다!)
대천사의 목소리는 모든 공간, 모든 우주에 울려 퍼졌다.
그것이 대회장에 울렸던 것과 동일한 음색이란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탁의 내용은 현실에서 진실이 말한 내용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바로 자신에게 기도를 바치라는 것! 많은 유저들은 혼란에 빠졌다.
-진짜네, 아스리안의 신이 현실에 강림했던 거잖아 ㅋㅋㅋ
-천계? 거긴 또 어디야?
-천국에 데려다 준다니 ㅋㅋㅋㅋ 무슨 사이비 종교냐ㅋㅋㅋㅋ
-ㄴ천국이 아니라 천계.
-천계를 벌써 열어준다고? 진짜야?
반응은 다양했다.
어이없어하기도 했고, 솔깃해하는 유저들도 있었다.
그 중엔 이미 기도를 익히고 있던 자들도 제법 있었다.
공짜 스킬이라고 배웠지만, 숙련도를 올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큰 쓸모도 없는 듯해 한동안 기도를 잊고 있던 유저들이다.
아스리안에 접속한 그들은 묵혀둔 기도 스킬을 시도해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킬 숙련도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빠르게 상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갑자기 기도 레벨이 왜 이렇게 잘 오르지?!
-난 그대론데?
-다들 천사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기도해 보세요. 숙련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진짜네 ㅋㅋㅋ 꿀팁 감사.
기도는 초월자에 공감하는 행위.
이미지가 없다면 기도는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즉, 여태까지 유저들은 허상에게 기도를 바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 진실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모두의 머릿속에 형성되었다.
모두에게 공감의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된 것. 기도의 효력이 이전과 다른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천계에 가면 뭘 할 수 있는데요?
-신성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사제나 성기사 계열 직업이라면 언젠간 무조건 천계에 가야 됨. 미리 갈 수만 있다면 무조건 가는 게 좋음.
-나 심연인데 지금 천계가면 어떻게 되냐?
-ㄴ뒤질 듯.
천계에 관한 정보들도 대폭 풀리게 되었다.
초월자는 기도로 얻는 공감을 통해 힘을 행사한다.
기도하는 자는 그 대가로 ‘신성력’을 얻는다.
신성력이란 마기와 대칭되는 신력(神力)으로써 기존의 스킬들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정보까지.
그 외에도 유저들은 관심이 없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커뮤니티는 천사와 기도에 관한 화제로 가득 채워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거 기회 아냐? 랭커들도 기도스킬은 전혀 안 올렸잖아. 걔네들보다도 천계에 먼저 입장해서 어쩌면 따라잡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ㄴ따라잡는 것까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성장이 많이 좁혀지긴 하겠지.
-기도 어디서 배워요?
성장에 대한 또 다른 길이 열리자, 아스리안의 신전은 인산인해를 이룬 유저들로 유례없는 호황을 맞는 중이었다.
아스리안의 접속자 수는 최소 수천만, 주말엔 억 단위에 근접한다.
하지만 유저들이 아는 초월자라곤 오직 하나 뿐!
세상의 모든 기도는 자연스레 진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게임의 메타가 기도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진실이 내다본 계획.
“…과연 그분의 말은 틀리지 않으셨다.”
성왕국은 가장 많은 신전이 존재했던 만큼, 가장 많은 유저들이 찾아왔다.
성왕은 곳곳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유저들을 지켜보았다.
절로 미소가 흘러나오는 광경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대천사의 큰 그림에 감탄했다.
“일루나에서 잃은 것들은 유저를 넣어 메꾼다는 계획이었던가.”
신성력은 마법과 달라 세상의 인과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신성마법이란 초월자로부터 빌려 쓰는 힘이기 때문이다.
심연에 일루나를 빼앗기며 천공의 모든 사제들의 힘이 약화되었다.
[천공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모든 신성마법의 위력이 5% 약회됩니다!]실제로 많은 사제 유저들은 일루나 사건 이후 위와 같은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때문에 사제 게시판이 난리가 난 적도 있었지만….
[천공이 힘을 되찾고 있습니다!]하지만, 진실의 등장 이후 다시 떠오른 메시지로 어느 정도 잠잠해지게 되었다.
균형이 다시 맞춰지는 것은 수많은 유저들이 천공의 신실한 신도로 새롭게 추가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저들은 아직 세력의 영향력이란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성왕은 누구보다도 초월자들의 균형에 민감했다.
우우웅-.
성왕은 손에 빛의 구체를 만들어 보았다.
그것은 어제보다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커져 있었다.
진실께서 얻는 힘은 다시, 모든 신도들의 힘이 된다.
성왕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 다시 일루나를 되찾는다면…?’
벌써부터 신성력은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헌데, 일루나는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의 신력을 증폭시키는 땅!
여기에 유저들의 힘까지 천공에 더해진다면, 어쩌면… 지하에 우글거리는 마물들을 모조리 처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가….”
성왕은 오랜 숙원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부서진 진실의 조각상이 있던 곳을 향해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사가 난입했던 대회장.
살론 또한 대회장에 있었고, 갑작스런 소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2세대 인공지능의 등장. 컴퓨터가 인간과 똑같은 판단, 심지어 감정까지 따라할 수 있다는 개발진들의 말은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어.’
살론은 일루나에서 도망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과 함께 달리던 그 백의의 소녀의 안타까운 표정을.
‘그 애도 설마, 2세대 인공지능이었던 건가?’
소녀는 지금껏 NPC들에게서 보았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인간보다 풍부한 표정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동화한 현의 표정이 새어나오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녀는 그만큼 세계관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NPC였던 것 같다.
‘아니, 2세대는 대천사 대악마밖에 없다고 하니까, 1.5세대인가…? 쯧, 호감도나 쌓아둘 걸 그랬어.’
하긴, 그땐 그럴 시간도 없었지.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살론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으니, 살론은 슬슬 축제에 참가한 진짜 목적을 상기했다.
살론의 시선이 멀리 서있는 한 남자에게 향했다.
오늘 하루 종일 스토커처럼 그의 뒤를 쫓는 중이었다.
현.
처음에는 얼굴조차 몰랐기에 찾을 수 없었다.
동화한 동안 목소리나 들었지 그의 실제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까.
축제장에 섞인 수십 만 명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들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살론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첫째 날을 보내버리고 말았다.
이어서 둘째 날.
현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는 첫째 날 이후 돌아갔을 지도 몰라.
‘현이 아니라 아인을 먼저 찾았어야 했어!’
살론은 접근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둘이 전작부터 상당히 친했다는 사실은 커뮤니티에서도 은근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아인의 동영상마다 현의 스킬이었던 ‘무력화의 파장’ 이펙트가 등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인에게 현의 행방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의 전환을 하고 나니 의외로 빠르게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축제 관계자들, 그리고 아스리안 유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인파를 헤집다 보니 살론은 곧 뻔히 보이는 변장을 한 채 거리를 걷는 작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게임 속의 아인과 똑같은 모습.
‘찾았다!’
거기다 아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남자!
그들의 근처로 살금살금 다가간 살론은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먹을 쥐고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이럴 줄 알았지! 역시 현은 축제에 있었어!’
살론은 천천히 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좀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음… 소문대로 상당히 친한 모양인데.’
살론은 둘의 대화가 끊기는 타이밍을 잡아 말을 붙여볼 생각이었지만,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결국 그냥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던 도중 기회가 찾아왔다!
아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좋아, 지금이로군.’
살론은 성큼성큼 걸어 서현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던 순간.
톡톡-.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아까부터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아인이었다.
아인은 눈매를 가늘이며 살론을 쏘아붙였다.
“스토커야? 언제까지 따라다닐 건데?”
“아니, 이건, 그게 아니라….”
“뭐야? 아인, 화장실 간다며?”
어느새, 소란을 알아챈 서현까지 다가와 있었다.
살론이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아인이 의기양양하게 말을 내뱉었다.
“잠깐 가는 척 해봤어. 이 스토커가 언제 사라질까 지켜봤는데… 갈 생각이 없잖아? 그래서 이렇게 잡았지!”
“스토커라고…?”
“맞아, 이런 애들은 신고해야 돼. 지금 바로….”
“자, 잠깐…!”
살론이 계속 소리치고 있었지만, 서현과 아인은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외국인인가?”
“외국인이라 해서 봐주지 마. 현.”
“아니, 기다려, 난 스토커가 아냐!”
살론은 재빨리 음성 번역기를 꺼내 소리쳤다.
한국어는 몰라도 스토커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으니, 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
어조, 어투까지 변환하는 번역기는 살론의 절박함까지 고스란히 전했기에 서현과 아인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살론이 뭐라 변명할지 생각하던 때, 서현이 먼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토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마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혹시 그때 그 사람 아니에요?”
서현은 다시 살론의 얼굴을 살펴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맞네, 그 사람!”
일루나의 도시에 남겨졌던 최후의 생존자.
현이 마물의 틈바구니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는 마치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마지막 희망이 바로 살론.
그가 동화를 수락해 주지 않았다면 루이즈의 목숨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그의 실력이 떨어졌더라도 위험했을 것이다.
정작 현은 그를 미끼로 던져버리고 말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어도 자신 또한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뭐야, 현이 아는 사람이었어?”
“너도 아는 사람이잖아!”
아인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자 서현이 다그쳤다.
“자세히 봐, 일루나에서 방송까지 나왔었잖아!”
“험, 험….”
서현이 먼저 알아봐준 덕분에 살론은 당황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괜히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후후, 역시 날 기억하는군. 그 날은 정말 대단했어. 우리 둘 다 피지컬이 폭발했던 날이었지.”
“아… 그땐 죄송해요.”
살론은 자신을 혼자 죽게 내버려 둔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핫, 고작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나? 신경 쓸 필요 없어! 거기선 나도… 얻은 것이 제법 많거든.”
아인이 힐긋거리는 가운데 서현과 살론은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론은 아스라의 현과 아스리안의 현이 동일인물이란 사실까지 재확인할 수 있었다.
랭커에 가까운 유저들끼리의 대화는 화제가 끊일 일이 없었다.
“그, 뭐냐. 동화했을 때의 감각 덕분에 콤보의 안정성을 훨씬 높일 방법을 찾았거든.”
“하하, 제가 좀 잘 만들긴 했죠?”
“그 무빙을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정말인가?”
“예전 아스라 유저들이 다들 하는 걸 제 나름대로 개량한 거죠. 뭐.”
“크크, 개량한다는 자체가 창조의 영역인 거지!“
짧은 대화를 통해 서현은 살론이란 유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28살.
프로가 되기엔 살짝 반응속도가 떨어질 시기지만, 그런 것 치곤 실력도 준수했고, 자신의 컨트롤 실력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동영상 채널에 사냥 공략을 공유했지만, 사람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하는 걸 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깨닫게 되었다는 듯하다.
“원래는 조금 유명한 정도였지만… 그 날 이후로는 날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나중에 알아보니까 수십 개의 방송국이 내 모습을 담았더라고. 하하!”
“방송… 이요?”
서현의 눈빛이 싹 바뀐 것은 살론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이었다.
당시엔 경황이 없어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놓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일루나에서 여러 드론이 추격하듯 비행하던 광경을… 그것은 필시 살론에게 1인칭, 3인칭 시점들을 제공받기 위한 것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영상은 지금 아스리안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영상이었다.
“그… 혹시.”
아스리안의 공식 약관에 따르면 해당 컨텐츠의 주체가 되는 유저는 이익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살론이 전부 받아갔다는 말인가?
“얼마나 받으셨는데요?”
“응…?”
갑자기 가라앉은 말투로 묻는 서현의 모습에 살론이 적잖이 당황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크흠, 아주 많진 않지만 적은 것도 아니야. 하지만 역시, 그걸 내 몫으로만 하긴 좀 그렇겠지?”
살론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현의 표정이 급격히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서현의 의도를 파악한 살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이번 축제에 참가한 건 그걸 전해주기 위해서라고 할까…? 너희를 따라다니던 이유도 바로 그거였다고!”
순간, 서현은 서서히 올라가는 광대를 붙잡았다.
아직 속마음을 드러내긴 일렀다.
한 번 더 간을 보는 것이 좋겠지.
“음… 제가 그 출연료의 권리를 주장하기엔 염치가 없진 않을까요? 절 도와주신데다… 돈까지 받기는 좀….”
“아니, 아니야, 어차피 난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목숨이었어. 네 덕분에 관심을 받게 된 거였지. 그리고 어차피 돈은 많거든. 너도 랭커니까 알잖아, 랭커들의 벌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서현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수익에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살론이 본론을 꺼낸 것은, 그렇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이건 다른 이야긴데… 혹시 길드에 사람은 충분해?”
“길드원이요?”
“그래, 만약 나 정도의 재능을 가진 유저가 갈 곳이 없어서 길드를 찾고 있다면 어떡하지…?”
“…?”
살론은 은근슬쩍 떡밥을 던져 봤지만, 서현은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좀 전에 돈에 관한 냄새를 귀신같이 맡던 것에 비하면 눈치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일부러 눈치 못 채는 척 하는 건가.
헛기침을 몇 번 한 살론은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길드는 있나?”
“네, 제가 길드장이죠.”
“오 그렇군! 만약 내가 거기 가입하면 어떨까. 길드의 힘도 상당히 강력해지지 않겠어?”
거기까지 말한 살론은 기대감을 갖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높은 자부심을 가진 그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제안했다는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었지만.
“글쎄요, 저희 길드가 그렇게 큰 곳은 아니거든요. 만들어진 지도 얼마 안 됐고요.”
서현은 태도는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살론은 자신을 더 어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소리쳤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 정도의 재능은 흔치 않아! 전 세계로 따지면 아마 50명 안엔 충분히 들지 않을까 생각되는 정도라고!”
그 순간, 잠자코 지켜보던 아인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 드디어 알았다! 이 아저씨, 50레벨쯤 산에서 퀘스트할 때 한 방에 죽은 도적 아니야?”
“아, 그래?”
“물론, 내 말은… 나보다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지… PvP쪽은 재능이 없다기보단…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이후에도 살론은 은근슬쩍 자신의 스펙과 실력을 읊으며 길드원으로서의 자신을 어필했다.
서현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의 상태 창은 이미 일루나에서 살펴본 뒤였기에 전부 알고 있었다.
직업이 소드 댄서라는 것, 실제로 사냥에 있어서는 자신만만할 만큼의 재능과 실력을 지닌 유저라는 것까지 말이다.
‘잘하는 사람이 많아서 나쁠 건 없긴 한데….’
솔직히 말해, 살론은 길드원으로 받기엔 충분하고도 넘칠 만한 스펙이었다.
자신감이 살짝 지나치다는 점만 빼면 인성도 제법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길드원으로 받아들이기엔 살짝 걸리는 점이 있었다.
살론은 묵묵히 턱을 괴고 서 있는 서현을 긴장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받아줄까? 받아주지 않을까?
만약 후자라면 자신은 자존심을 접고 온라인 커뮤니티의 구인 게시판에 글을 다시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한참 뒤에 서현이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 길드엔 가입조건이 있어요.”
“뭐? 그런 게 있었…?”
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꽈악-! 서현은 쓸데없는 소리가 튀어나오기 전에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입을 다물게 했다.
살론은 조건이란 말을 듣는 순간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조건이지?”
“첫 번째로, 모든 길드원들은 제 동화 스킬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넘겨야 해요. 아, 동화는 이미 수락했으니 통제 우선권만 넘기면 되겠네요.”
“그건 문제없겠군!”
살론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는 이미 한 번 겪어봤다.
게다가 현이 자신에게 동화하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이득이었다.
그 순간의 느낌을 그대로 체득하여 연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전작 랭킹 1위를 수년간 지켜오던 고인물의 노하우를 얻는다는 것은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 제 동화가 섞인 영상수익은 저랑 5대 5로 나눠야 한다는 겁니다.”
“응? 하지만 지금 타르타르는….”
아인이 또 다시 의아하다는 듯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이번엔 살론이 먼저 펄쩍 뛰어올랐다.
타르타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눈을 번뜩이며 되물은 것이다.
“타르타르? 설마 그도 같은 길드에 속해 있나?!”
“아직은 아니지만… 아마 곧 그렇게 될 거에요.”
“역시, 내 예상이 정확했어!”
살론은 타르타르가 현의 길드에 소속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더욱 눈을 빛냈다.
“두 번째 조건도 문제없어. 내가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5할 정도는 아주 싼 수업료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 조건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