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6)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현과 아인은 곧 왕도의 한 도시로 텔레포트했다.
마도국의 최대 도시, 루프라에는 수백만의 인구가 살아간다.
루프라는 저녁이라 어두움에도 활기가 넘쳤다.
마도국의 기술을 이용한 불빛이 네온사인처럼 온 거리를 환히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야경을 보는 듯했다.
루프라를 대표하는 건물인 마법길드는 명성에 걸맞게 화려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인공 태양으로 추측되는 천체가 건물의 기둥을 축으로 공전하고 있었기에 밤의 길드는 대낮처럼 밝았다.
에스컬레이터랑 비슷한 기구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길드의 마법부여사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들… 시선 받고 있는 거 같지 않아?”
아인이 불안한 듯 현에게 속삭였다.
“이 옷차림 때문인 거 같은데….”
그 말대로 현과 아인은 주변의 이목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길드 안내원이나, 몇몇 손님까지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초반에 유령사냥에서 얻은 ‘유령 부대장의 어둠 로브’.
현도, 아인도 전신을 검은색 단벌로만 입고 있었으니 수상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뭐야, 당신들 암흑사제들인가? 어둠의 사제들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당장 나가도록!”
역시나, 음침한 로브를 입은 두 사람을 본 NPC들은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오해를 사기 전에 현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암흑사제라뇨!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옷은?”
“이건 그냥 사냥에서 얻은 거에요! 저희는 평범한 ‘유저’들이라고요?!”
“흐음….”
게임의 NPC들도 유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타 차원으로부터 건너왔고, 자신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기에 대부분의 NPC는 유저의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관대함을 갖고 있었다.
현은 약 10분에 걸쳐 자신을 해명한 뒤에야 풀려났다.
“제길, 이 빌어먹을 옷부터 빨리 버려야겠군.”
현은 서둘러 로브를 포함한 장비를 교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둘은 한참 걸음을 옮겨 3층 구석의 마법부여점에 도착했다.
내부는 고급 백화점의 귀금속점처럼 깔끔하고 조용했다.
소파에 기대 앉아 책을 읽던 마법사 여성이 어색하게 서있는 현과 아인을 힐끗 곁눈질했다.
“손님 맞으신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현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여성 마법부여사는 설명을 읊었다.
“마법부여 금액은 매직이 500골드, 레어가 2000골드, 유니크는 8000골드. 그 이상의 등급부터는 상황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있습니다. 또한, 마법부여의 성공여부는 단순한 확률에 의거하기에 실패하더라도 전혀 보상해 드리지 않습니다.”
차가울 정도로 간결한 설명을 끝내고 나선 보던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준비가 끝나면 제게 마법부여할 것과 재료가 될 아이템을 하나씩 주시면 됩니다.”
“저기… 탈의실은 없나요?”
현이 조심스레 손을 들고 질문했다.
마법부여사는 그런 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지팡이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그 순간, 현과 아인은 한꺼번에 바로 옆쪽의 방으로 전송되었다.
갑자기 장소가 바뀐 현은 당황했지만, 바로 옆 블라인드가 쳐진 틈으로 방금 전의 장소가 보이고 있었기에 곧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야, 원격 텔레포트 마법진인가….”
“그런 것 같아.”
“여기 주인아줌마, 제법 레벨이 높은 마법사인가 보네.”
타인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진을 그리는 방법은 3단계 마법사 승급을 마쳐야 배운다.
현과 아인의 레벨이 낮기에 의식하기도 전에 옆방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후두둑-.
현은 인벤토리의 레어 장비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히든 네임드 보스들을 잡고 얻은 아이템들.
전신 철갑 플레이트처럼 무거운 방어구부터 가벼운 가죽 갑옷까지.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유령 지휘관의 로브’를 벗어서 내팽개쳤다.
“휴… 드디어 이 구질구질한 옷도 졸업하는구나.”
“디자인은 괜찮지 않나?”
“아니야 아인, 옛 것은 최대한 빨리 버리라는 속담도 있잖아. 내 말은, 아이템은 자주 바꿀수록 좋다는 말이야.”
유령 지휘관의 로브는 20레벨쯤 입기 시작해 여태껏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았으니 만약 이곳이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면 제법 체취가 배어 있으리라.
현이 이상함을 느낀 것은 디자인만 괜찮은 3골드짜리 로브를 인벤토리에서 막 꺼내려던 때였다.
아인에게서 뭔가 평소와는 다른 낌새가 느껴졌던 것이다.
‘방금… 눈이 빛나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행동도 조금 이상했다.
아인은 방금 자신이 바닥에 내팽개친 유령 지휘관의 어둠 로브를 주섬주섬 주워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까이에서 관찰하듯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번씩 콧잔등을 가까이 대어보기도 했다.
“아인, 뭐하는 거야?”
현이 부르자 아인의 어깨가 심하게 움찔거렸다.
마치 최면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어난 듯.
“아, 그, 그냥… 냄새… 가 아니라… 그, 그래. 내구도가 얼마나 남았나 보고 있었어!”
“…내구도?”
“응….”
“네 꺼랑 비슷하지 않을까? 너도 똑같은 로브 입고 있잖아.”
“그…렇겠지? 비슷한 시기에 같이 입기 시작했으니까….”
현은 아인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고 느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평소에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엉뚱한 행동을 하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럼 먼저 나가 있을게. 준비되면 나와.”
현이 탈의실 밖으로 나가자 책을 읽던 마법사가 힐끝 곁눈질하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레어 아이템의 마법부여는 2천 골드입니다. 선불이고요.”
“크흠… 조금 비싼데….”
인벤토리에서 거액의 금화를 꺼내는 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몇 주간 피땀 흘려 모은 돈이 마법부여 한 번에 뭉텅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었다.
현이 돈을 건내는 순간 여자 마법사는 순식간에 감정 스크롤을 펼쳤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노말 등급의 로브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거기까지 불과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현에게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마법부여에 실패하였습니다.] [광휘를 머금은 수룡의 견갑(레어)이 영구히 파괴되었습니다.]“…?”
현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멍청한 얼굴로 여자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
한참 만에 현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방금 그게 시도한 건가요?”
“네 실패했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추가로 진행하겠습니까? 레어 아이템은 2천 골드입니다.”
현은 실망하기보다는 황당한 느낌이었다.
원래 마법부여란 게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는 거였나?
물론 아스라 온라인에서도 마법부여는 클릭 한번이면 끝났지만.
최첨단 가상현실이라는 아스리안에선 무언가 거창한 효과나 주문이 필요할 줄만 알았다.
‘어쨌든 실패란 말이지… 뭐, 한 번에 될 거라곤 처음부터 기대 안 했으니까.’
현은 다음 레어 아이템을 꺼냈다.
데일의 중갑.
체력을 20퍼센트나 올려주고 피격시 30퍼센트 확률로 치명타 데미지를 감소시켜 주는 레어 전신 갑옷이었다.
마법부여가 성공해 옵션을 그대로 이어받기만 한다면 아주 명품 아이템 하나가 탄생하리라.
“좀 천천히 진행해 주세요.”
현은 말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째선지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 든 것은 착각일까.
마법부여사는 서랍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내 펼쳤다.
탁- 짧게 지팡이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현에게는 같은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법부여에 실패하였습니다.] [타락한 성기사 데일의 중갑(레어)이 영구히 파괴되었습니다.]“아니 진짜, 천천히 좀 하라니까요…!”
“어떻게 하든 확률은 같습니다.”
마법부여사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확률에서의 독립변수의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그녀는 미신에라도 기대고 싶은 현의 애절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추가로 하시겠습니까? 2천 골드입니다.”
“아니, 그래서 그 빌어먹을 확률이 몇 퍼센트랍니까?!”
“등급이 높을수록 낮아지니까… 레어 아이템의 마법부여 성공률은 45퍼센트쯤 되겠군요.”
45퍼센트면 대충 절반 정도 아닌가?
현은 절반 정도의 확률이 두 번 연속으로 빗나간 사실에 한탄하는 한편, 자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스라 온라인 시절부터 운이 필요한 부분에선 좌절을 맛본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운이 없다면 총알의 수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 6천 골드. 마법부여가 성공할 때까지 갑니다!”
“알겠습니다.”
세 장의 스크롤이 연속으로 찢어졌고, 마법부여사는 지팡이를 세 번 두드렸다.
6천 골드라는 거금을 들인 마법부여는 눈 깜짝할 새에 끝났다.
[마법부여에 실패하였습니다.] [이스탈의 생명(레어)이 영구히 파괴되었습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하였습니다.] [푸른빛의 뼈 갑옷(레어)이 영구히 파괴되었습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하였습니다.] [라밀라의 갑주(레어)이 영구히 파괴되었습니다.]실패를 알리는 메시지들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쾅-! 현은 자신도 모르게 NPC 마법부여사의 책상을 양손으로 내려쳤다.
“아니 시바-알! 이게 말이 되냐?!”
확률은 거의 반반이라는 건데, 이쯤 되면 하나 정도는 성공해야 정상 아닌가?
“이건 완전 조작 아니냐?”
1만 골드에 달하는 전 재산과 레어 아이템 5개를 한순간에 날려먹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
“내 돈! 내 아이템-!”
현은 가게 안에서 난동을 부릴 기세였지만 곧 수그러들었다.
바로 옆에서 마법사가 압박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그저 눈빛만 보내고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모종의 마법을 이용해서 심장을 압박하고 있는 거 같은데?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가 빨라지고 있다.
만약 여기가 현실이었다면 몸 상태가 위험하다고 판단할 정도로.
“가게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저도 마찬가지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시길. 성공여부는 단순히 확률입니다.”
잠시 뒤에 마법사가 가하던 압박이 풀어지자 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감각까지 바뀌는 게임이라니 진짜 정신 나가겠군…! 점원이 유저를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거야?’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갖춘 게임이 꼭 장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여하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날려먹은 재산을 어떻게 복구할지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고!’
1만 골드와 레어 아이템 5개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경매장에 내놓으면 못해도 한 점당 1500골드는 받아먹을 수 있던 상급의 장비들이란 말이다.
‘이제 와서 네임드 노가다를 다시 할 순 없어. 하지만 장비가 없으면 너무 힘들 텐데…!’
여태까진 맨몸으로 들이받아도 상관없었지만 앞으로의 길은 더욱 험난하다.
최고의 장비를 맞춰야 하고, 새로운 스킬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망할 마법부여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스라의 악몽!
끝까지 나의 발목을 붙잡는 거냐!
그놈의 확률 때문에 또! 이번에도 좌절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바로 그 때.
갑자기 옆에서 터져 나온 휘황찬란한 광휘.
그리고 현을 짜증나게 만들었던 그 담담한 여자 마법사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낮은 확률이었을 텐데 의외로군요. 성공입니다.”
“…?”
현의 고개가 스윽 돌아갔다.
아인의 손에는 손가락에 구멍이 뚫린 장갑 한 쌍이 들려 있었다.
오기 전 잡화점에서 구매한 평범한 노말 등급의 전투용 반장갑.
하지만 그것이 내뿜는 찬란한 광채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것의 정보 창을 본 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검은 반장갑 (유니크)
착용 제한 : [마력 130]
-[아이템 : 레오파드의 지팡이]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레오파드가 천공에 대한 동경으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강력한 냉기의 힘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내구도 (50/50)
마력 증폭률 : 30%
치명타 피해 증가 : 30%
모든 원소 속성 마법 피해 증가 : 50%
-냉기 마법이 5회 적중하면 적을 빙결 상태로 만듭니다.
-투사체 마법의 날아가는 속도가 1.5배 증가합니다.
“유니크 마법부여를 한 번에 성공했다고?”
현이 아스라 온라인에서 악몽을 경험한 것도 유니크 등급의 마법 부여 때문이었다.
확률이 얼마더라.
현이 떠올리기 전에 마법부여사가 먼저 말해주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유니크 등급의 성공률은 20퍼센트 이하이기에 저는 당연히 실패할 줄 알았습니다.”
마법부여사의 말투는 초를 치는 듯하지만, 이번만큼은 현도 그녀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바였다.
50퍼센트나 마찬가지인 확률이 5번 실패할 때, 20퍼센트 확률은 단 한 번에 성공한다?
‘이런 개 같은 운빨 망겜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이 내 액땜이 제대로 들어간 거야. 5개의 레어 아이템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유니크 아이템의 마법 부여가 성공한 것이 분명해.’
그래, 제물 없이 유니크가 한 번에 성공할 리가 없지!
그러면 나도 어느 정도 성공에 대한 지분이 있으니 보상을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현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며 생각하던 때, 옆에서 한 번 더 빛이 솟아올랐다.
아까보다는 작은 빛줄기지만 현을 놀라게 하긴 충분했다.
“이번에도 성공이군요. 하지만 굳이 이런 누더기 같은 것에 레어 아이템까지 마법부여 할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누더기가 아니야.”
마법부여사의 말에 아인이 답했다.
그녀의 손에는 이내 보았던 검은 로브가 들려 있다.
방금 전 현이 바닥에 집어던졌던 ‘유령 지휘관의 어둠 로브’다.
유령 지휘관의 어둠 로브 (레어)
착용제한 : [Lv.20], [신성 계열 직업 착용 불가]
-[아이템 : 피요정의 망토]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피요정 레테가 즐겨 입던 망토입니다. 빈사상태일 때 흥분에 겨워 날뛰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내구도 (24/70)
방어력 : +22%
-체력이 2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 모든 속도가 50퍼센트 증가합니다.
-60초간 지속됩니다.
“자, 선물.”
아인은 히죽대며 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이 여태껏 입어왔던 것과 똑같이 생긴 어둠 로브가 들려 있었다.
“현이라면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않겠어?”
아인이 입고 있는 게 오리지널 어둠 로브, 현에게 건네는 것이 마법부여 된 로브다.
아인은 자신이 입을 수 있음에도 현을 위해 마법부여 된 레어 아이템을 마련해 준 것이다.
“어… 나한테 주는 거야…?”
현은 실실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 위해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로브의 어두침침한 색깔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 아이템에 레어 옵션이 붙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은 아인에게서 기특함을 느꼈다.
‘역시 제대로 키워주니 주인이 베푼 은혜를 갚을 줄 아는구나!’
현은 유령 지휘관의 어둠 로브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잠깐, 근데….”
왠지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별다른 것은 아니고, 전에 입던 로브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이게 내꺼 맞나…?”
현의 중얼거림과 동시.
아인의 어깨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 아이처럼 들썩였다.
“내구도가 너무 많이 닳아 있는 거 같은데….”
“아… 그, 그, 아마도….”
빠르게 말을 더듬는 아인.
의문을 느낀 현이 빤히 쳐다보자 더욱 당황하는 것처럼 붉어졌다.
“아, 아마 마법부여를 하면서 내구도가 깎인 모양인데…?”
“그런가…?”
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건 어쨌든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내구도는 수리하면 그만이니까. 장비 수리비는 마법부여에 비하면 헐값에 가까웠다.
서포터용 무기, 아인의 옷. 그리고 다른 부위의 장비들.
아직도 필요한 장비들은 제법 있었지만 나머지는 차근차근 맞춰 가면 언젠간 전부 갖추게 되리라.
아스리안 온라인은 전 세계 단일서버로 서비스되는 만큼 화젯거리도 많았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공략과 동영상들이 꾸준히 올라왔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모든 플랫폼엔 ‘아스리안 온라인’이 게임 항목의 70퍼센트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저들은 자신의 플레이를 녹화하거나,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모아 유트브에 업로드하기도 했다.
수많은 영상이 올라오고 묻혀가는 과정에서 몇몇 대단한 영상은 커뮤니티 내에서 빠르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레릿’이라는 외국 최대 아스리안 커뮤니티에서 하나의 불씨가 지펴졌다.
자극적인 글 제목은 아스리안 유저라면 누구든 클릭하고 싶어지게 만들었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댓글창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동영상은 랭킹권에 가까운 길드 하나가 레이드를 시도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그 길드의 유저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기에 자국의 커뮤니티 플레이어끼린 가끔씩 누군지 알아볼 유저도 속해 있었다.
-뭐가 2인 클리어냐. 20인 전멸 영상이구만….
그러나 스무 명 남짓 되는 공략조가 순식간에 전멸하자 이 동영상은 제목 낚시 영상이라고 착각하며 대충 넘기려는 이들도 많았지만….
영상의 백미는 검은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두 인영이 등장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머리까지 검은 로브의 후드로 감싼 두 사람.
둘의 움직임은 마치 수년간 함께 합을 맞추는 훈련을 받은 것 마냥 체계적이었다.
네임드의 공격을 모두 받아쳐 내고 결국 쓰러트릴 때는 영상을 보는 사람까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특히 압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스의 마법을 맨손으로 튕겨내는 장면.
그 장면에선 동영상을 찍던 사람도 경악했는지 “왓 이스 댓…”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함께 녹음되어 담겼다.
영상이 올라오고도 수십 분 정도는 거의 댓글이 올라오지 않던 이유도 다들 그 장면을 계속 돌려 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거 혹시 라티스임?
라티스(Lattice).
그의 이름을 언급한 댓글은 가장 많은 추천을 받고 있었다.
라티스는 현재 50벨로서 명예의 전당 랭킹 1위의 유저다.
최고의 자리를 달성했음에도 커뮤니티나 게임 내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 신비주의 컨셉의 유저로 알려져 있다.
-한명은 라티스라고 쳐도 같이 있는 애는 누구일까?
-실제로 딜러는 한 명이고, 나머지 한 명은 보조만 하는 거 같아.
-근데 컨트롤은 둘 다 미쳤는데… 저 빠른 공격을 손으로 쳐낼 만한 실력의 유저가 몇이나 되려나?
-오. 신이시여, 둘 다 저걸 어떻게 맨손으로 빗겨내지? 저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쉬운 점은 영상이 멀리서 촬영되었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서 주변이 조금 흐릿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진짜 라티스일까? 검은 로브 쓰고 있어서 얼굴이 안 보이네… 어차피 라티스 얼굴도 모르긴 하지만.
-바보들아 저거 NPC잖아 lol.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몇몇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진짜 NPC일 가능성도 있네. 유저들이랑 다르게 무기도 없고, 게다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사용하는 스킬이 유저랑은 완전 다름. 쟤네가 쓰고 있는 스킬들 전사, 도적, 마법사, 사제 중 아무도 똑같은 스킬 없다.
-히든 직업일 수도 있지 않을까?
-ㄴ친구야… 히든 직업은 너희 어머니한테 달라고 해서 막 나오는 게 아니란다.
당연히 뻘글도 섞여 있었다.
-로브 안에 들은 사람 여자임! 가슴 부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주 살짝 부풀어 있음!
재미삼아 작성한 댓글이 의외로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은 드립으로만 받아들일 뿐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loool 저 유저 키가 좀 작긴 한데… 그건 아닌 거 같아.
-님 와이프는 다른 데서 구하시면 안 될까요?
관련 글엔 하루도 안 돼서 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손으로 마법을 쳐낼 수 있느냐 하는 논쟁도 있긴 했지만, 가장 주가 되는 내용은 두 명의 검은 로브들이 대체 누구냐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결론은 차차 하나로 좁혀지는 듯했다.
-NPC가 맞는 거 같네. 여러 정황을 따져 봤을 때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
-NPC들이 네임드를 사냥하기도 하나?
-그 얘기도 아까 나왔어. 이 게임의 인공지능이 진짜 사람하고 구분이 안 되는 수준이라서 NPC들도 행동 방식은 유저들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그럼 쟤네들은 어디 소속이려나? 둘 다 마법사 비슷한 직업 같은데….
-두 명의 정체도 위에 분석글 찾아보면 있는데 정황상 ‘암흑사제’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함.
-와… 저게 NPC들이었단 말이야? 컨트롤 지리네… 나중가면 유저가 고렙 NPC들 이길 수 있긴 하려나.
그 영상을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타르타르였다.
타르타르는 혼자 게임에 접속해 있었다.
광장의 분수 옆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쫒겨났네….”
몇 시간 전의 일이다.
타르타르는 공식으로 길드에서 추방되었다.
길드원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네임드 공략 당시 생존자는 오직 타르타르뿐이었다.
모두가 전멸한 가운데 혼자 살았다는 것은 즉, 공략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에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타르타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쫒겨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타르타르를 대면한 길드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었다.
“대체 동영상은 왜 올린 거야! 겨우 길드에서 알아낸 히든 네임드야. 스무 명 가까운 길드원들이 죽어가면서 겨우 얻어낸 네임드 정보라고! 하지만 이제 온 세상이 다 알아 버렸군.”
길드장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 듯 다시 분노를 토했다.
“최초 네임드 킬 업적은 이미 물 건너갔고, 어쩌면 우리보다 상위 길드들에게 사냥터까지 뺏길 수도 있다고!”
솔직히 말해 타르타르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 사람들이 네임드와 전투를 벌이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혼자 보기 아깝다 생각했기에 영상을 올린 것이었다.
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감탄과 경악의 댓글을 남기니 괜히 자신도 기분이 좋아졌다.
불운한 점은, 중학생인 타르타르가 어른의 사정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죄송…해요.”
수많은 길드원들의 손가락질을 견뎌내기엔 타르타르는 너무 어렸다.
집단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회의 근본적인 섭리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타르타르는 자진해서 길드를 탈퇴했지만 추방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죄수가 된 기분으로 길드원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도망치듯 나온 감도 있었다.
타르타르는 광장의 인파 사이에 파묻혀 있음에도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소심하고 멍청하기까지 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냥 보스한테 같이 죽었으면 좀 나았을까? 그럼 동영상도 찍을 일이 없었을 텐데… 아니, 그냥 난 상위 길드에 들어갈 그릇이 아니었던 거야.’
한참 자신을 질책하고 나니 이번엔 몇몇 친했던 길드원들이 떠올랐다.
특히 아르넨, 헬더스트 형들.
미안한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항상 기대하고 있다며 격려해 주었지만 실망할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았다.
그들이 네임드 보스에게 죽어갈 때도 자신은 몰래 숨어만 있었다.
‘길드를 나올 때까지 추한 모습만 보였네.’
그렇게 한없이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던 순간, 탁-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타르타르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 어깨를 때리는 익숙한 느낌은?
타르타르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세상을 잃은 표정이냐.”
“그래, 남자라면 이런 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줄 알아야지.”
아르넨, 헬더스트.
길드에 있을 때도 타르타르를 동생처럼 살갑게 대하던 그들이 타르타르의 뒤에 있었다.
타르타르는 이유 없이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저 어리광을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형들… 저 때문에 길드 분위기가… 끄억…?!”
언제나처럼 팡팡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타르타르의 입을 멈추게 만들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그… 혼자만 살아서요….”
“그럼 살아야지 죽냐? 나랑 이 녀석이었다면 멀쩡히 살아 와서 길드장 멱살을 잡았을 거다. 정보도 부족한 채로 날 사지에 밀어 넣었으니 당연하지!”
“아 그리고 길드 말인데.”
헬더스트가 바로 덧붙였다.
“우리도 탈퇴했어.”
“네에?!”
“나랑 얘는 생계형 게이머라서… 규율에 얽매이기 보단 자유롭게 하는 게 더 마음 편하더라고.”
“뭐, 그렇지.”
아르넨이 헬더스트의 말에 맞장구쳤다.
“하지만 그래도….”
타르타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아르넨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네가 올린 동영상 말인데,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될 수 있을 거 같더라.”
타르타르의 몸이 움찔했다.
“아… 그건 죄송해요. 제가 올린 영상으로 네임드 정보가 다 공개 됐다면서요… 사실 정보를 노출할 의도는 없었거든요. 저 때문에 길드가….”
“임마, 길드의 사정 따위 알 바냐? 이미 탈퇴했으면 남이나 마찬가지잖아.”
“네? 그럼….”
타르타르가 의문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아르넨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유저의 플레이 영상을 허락도 없이 올리면 안 되잖아. 유트브는 수익도 생기니까 더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고.”
“다른 유저요?”
타르타르는 깜짝 놀랐다.
“그 두 명이 NPC가 아니라 유저라고요?”
영상의 화제가 된 레릿의 글에서도 검은 로브의 두 명이 NPC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문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었다.
인터넷 여론은 이미 그들이 NPC라는 의견으로 굳어졌다.
타르타르의 추측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타르타르는 두 눈으로 직접 그 싸움을 목격했기에 전투의 대단함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아스리안이 출시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금.
도저히 유저 수준의 전투로 보이지 않았기에 타르타르는 처음부터 그들이 NPC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당연히 NPC라고 생각했지. 스킬도, 장비도 유저라고 보이지 않았으니까. 뭐… 컨트롤도 그렇고.”
“놓칠 뻔 했지만, 자세히 보니까 흥미로운 점이 있더라고. 자, 편집 전 영상 한번 꺼내 봐라.”
타르타르는 곧바로 그때의 녹화 원본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영상을 보던 아르넨이 웃으며 어떤 부분을 가리켰다.
편집된 영상에선 보이지 않던 장면이 지금은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봐봐, 도중에 한 명이 ‘빙결’에 걸리니까 나머지 한 명이 불꽃으로 동료를 지져서 녹여버리는 거… NPC라면 이런 방법은 못 쓰겠지?”
“아… 그거…!”
“서로 파티원이기 때문이지! 파티끼리는 데미지를 입지 않는 시스템을 이용했던 거야. 그러니까 그 둘은 무조건 유저라는 게 내 추측이다.”
타르타르의 기억에 비슷한 장면이 번뜩 지나갔다.
현장에서 전투를 직접 목격했고.
그리고 나중에 수십 번 영상을 돌려 보았기에 모든 장면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동료의 불꽃 공격으로 빙결을 해제하는 장면이 있었어.
파티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으니, 유저라는 거구나.
만약 그 장면이 편집 영상에도 들어갔다면 레릿의 추측은 완전히 판도가 뒤바뀌었을 것이다.
“그럼 정말로 라티스일까요?”
타르타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헬더스트가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야. 라티스는 솔플 위주의 플레이어로 알려져 있고… 만약 한 명이 라티스라고 쳐도 영상에 나온 건 두 명이었잖아. 나머지 한 명이 누군지를 설명할 수 없어.”
“아마 명예의 전당에 등록하지 않은 유저라고 생각해. 어쩌면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지도 모르겠군.”
“과연… 랭커가 끝이 아니라 그 위의 존재도 있다는 말인가.”
아르넨과 헬더스트가 서로의 대화에 빠진 와중에도 타르타르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멋대로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인터넷에 올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 어떡하죠?”
타르타르는 울상이 되었다.
요즘엔 게임 내부의 초상권이나, 개인정보를 도용한 것으로도 법적 고소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만약 동영상 속의 그들이 자신을 타겟으로 삼는다면 명백히 쌓인 증거 앞에서 어떻게 방어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당사자랑 잘 얘기해 봐야겠지. 동영상이 꽤 유명해졌으니까 어쩌면 그들이 먼저 유트브 댓글 같은 걸 통해서 연락해 오지 않을까?”
“뭐, 네가 동영상으로 돈을 벌려는 불순한 의도도 아니었으니 그리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동영상에 수익 창출도 신청하지 않은 거 같던데… 그럼 실제로 돈을 번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실제로 당사자를 만나게 되면 잘못했다는 말 정도는 해 둬.”
아르넨과 헬더스트는 타르타르를 겁주듯 짓궂게 말했지만.
고작 이 정도는 큰 문제로 번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게임으로 먹고 사는 그들은 방송이나 영상 업로드 관련 쪽으로도 경험이 있기에 어느 선부터 문제가 발생하는지 대략 알고 있다.
게다가, 정말로 큰 문제로 번진다 싶으면 직접 타르타르를 도와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반면, 잔뜩 겁을 먹은 타르타르는 동영상의 주인을 서둘러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현과 아인은 요즘 게임을 시작한 이래로 사냥다운 사냥을 하는 중이었다.
레벨 110의 정예 몬스터 ‘저주받은 괴목’.
상식적으로 50레벨도 안 되는 유저가 잡을 만한 몹은 아니다.
한 대만 맞아도 위험하고, 50레벨의 유저들은 100레벨 이상 되는 몬스터들의 두터운 방어력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50레벨 수준의 데미지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다면?
[치명타! 251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아인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괴목은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타들어갔다.
몸이 나무 재질인 괴목은 화염 마법 저항력이 낮다는 것을 고려해도 말도 안 되게 높은 피해다.
“와… 데미지 실화인가?”
110레벨의 정예몹 체력이 움푹움푹 깎여나가는 모습은 현의 기를 질리게 만들었다.
무기를 갖춘 아인의 스킬 위력은 100레벨 수준까지도 넘어서 있었다.
‘지금 아인의 마력이 170정도였으니까….’
근접 마법사의 기본스킬, 화염의 손톱은 마력의 5배 데미지를 가한다.
게다가 무기에 달린 수많은 옵션들.
마력 증폭 30퍼센트.
원소 데미지 50퍼센트.
치명타 데미지 30퍼센트 증가까지!
무기 하나 꼈을 뿐인데 2.5배가량 화력이 올라갔다.
과연 유니크 아이템의 성능이라고 할까. 마법부여에 들인 일만 골드가 아깝지 않다.
‘하지만 약점도 명확하긴 하지….’
아인의 마력 스탯은 170이 넘는 반면 생명력은 고작 10밖에 되지 않았다.
그에 따른 체력은 500남짓이니 사냥 도중 한 번만 삐끗해도 그대로 사망!
아인의 스타일을 설명하기엔 유리대포란 단어가 가장 적당할 것이다.
몸은 종잇장인 반면 어마어마한 마법 데미지를 보유하고 있으니.
‘하긴, 안 맞으면 상관없긴 해.’
아인이 그토록 불균형적인 성장이 가능한 것은 현의 존재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예 몬스터들의 공격 중에는 가끔씩 광역기나 확정 타겟팅 기술처럼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는 스킬도 있다.
아무리 컨트롤이 뛰어나고 무빙이 좋아도 장대비를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
몬스터의 패턴 중엔 가끔씩 전체 범위 공격도 존재하기에 컨트롤만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바로 그 때가 현의 서포팅이 빛을 발하는 때였다.
1초 무적, 그리고 반탄으로 적절하게 지원해준 덕분에 아인은 극딜을 뽑아내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고대하던 목표에 도달한 것은 정예 사냥을 시작한 지 딱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온몸에서 솟아나는 레벨 업의 광휘를 느끼며 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50레벨… 찍었다.”
서포터 직업을 얻었을 때부터 거쳐 온 역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인고의 시간이었다.
“현, 갑자기 눈감고 뭐해?”
옆에서 물음표를 띄우는 아인의 목소리도 이 순간엔 들리지 않았다.
현이 서포터란 직업을 얻었음에도, 좌절하고 싶어도 캐릭터를 새로 키우지 않고 버텨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드디어… 궁극기를 배울 수 있어!”
50레벨이 되면 모든 직업은 각성 스킬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아스라에선 다들 편의상 궁극기로 불렀다.
일반 스킬의 위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 상황을 반전시키기에 충분한 스킬!
압도적인 차이의 변수를 만들어 내는 그것이 바로 궁극기였다.
50레벨 이후부터는 궁극기 위주의 플레이로 게임이 진행된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때를 위해서 스킬 포인트를 안 쓰고 아껴 두었지!’
현은 아스라 온라인을 플레이했던 만큼 궁극기의 비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포터라는 생소한 직업.
아무 데이터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렇게나 스킬을 올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궁극기를 먼저 익히고, 다음에 나머지 스킬을 익힌다.
그것이 아무 것도 모르는 신규 직업을 플레이 할 때의 정석이다.
‘자, 그럼 대망의 각성 퀘스트를 진행해 볼까나.’
하지만 현은 기억해야만 했다.
서포터라는 직업을 얻고 나서 일이 순탄하게 진행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에게 흘러오는 시스템 메시지는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다.
[서포터는 타인과 공존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단독으로 각성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퀘스트를 함께할 동일 조건의 동반자가 한 명 필요합니다!]메시지를 모두 읽은 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건 또 뭐냐?”
“왜? 무슨 일인데?”
“각성 퀘스트를 누군가와 파티 맺고 진행하라는데?”
현은 아는 지식으로 추측해 보았다.
히든 직업들은 대부분 평범한 직업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
좋게 말하면 히든 직업의 특혜지만, 나쁘게 말하면 히든 직업이 감수해야하는 변수였다.
각성 퀘스트를 둘이서 진행하라는 것도, 서포터(히든) 직업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후훗, 도와줄까?”
설명을 들은 아인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생겨났다.
“역시 나 없으면 안 되겠지?”
결국 결정되었다.
잠시 파티를 해제하고 사냥한 결과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인의 몸이 밝게 빛났다.
110레벨의 정예몹이 주는 막대한 경험치 덕분에 아인의 레벨 업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0레벨을 달성하여 각성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각성의 방’에 들어가는 순간 자동으로 퀘스트가 진행됩니다!]-각성은 한 사람의 자취를 시험받는 동시에 미래를 개척하는 시험입니다.
-퀘스트의 과정에 따라 얻게 될 ‘각성 스킬’은 당신의 신념과 가능성에 동화되어 무수한 형태로 변화할 것입니다.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의 끝에서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십시오.
: 각성스킬 중 택1.
주의 : ‘각성 스킬’은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과정이 반영하며 선택의 폭이 변화합니다. 언제나 당신의 과정에 최선을 다하시길.
***
현과 아인은 대도시 루프라의 한 건물로 들어갔다.
각성의 방.
스킬의 각성을 위해 큰 도시마다 마련된 장소다.
실내는 왕성에 비견되는 고급진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현, 긴장했어?”
“아니….”
“나는 조금 두근거리는데.”
둘은 석상과 촛불로 이어진 길을 계속해서 나아갔다.
걷다 보니 왜곡된 공간의 문이 기이하게 비틀린 장소가 나타났다.
“좋아, 가자고.”
현과 아인은 주저 않고 발을 옮겼다.
왜곡된 공간은 둘을 빨아들였다.
눈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둘은 잠에 빠지기 직전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의식이 가라앉는 느낌은 곧 멈추었다.
약간의 부유감이 느껴졌다.
마치 꿈 속 같은 감각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았다.
마치 무의식이라는 바다에 가라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이런 느낌은 아스라 온라인에선 경험할 수 없었다.
실제 세계와 맞먹는 감각을 재현하고자 했다는 이 게임은 유저에게 각성의 기분 또한 실제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확실히 아스라하곤 많이 달라.’
이전엔 이러한 연출들을 직접 체험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아스리안에서는 이처럼 생생한 연출을 꽤나 자주 느낄 수 있었다.
현과 아인은 끝없이 부유하며 어둠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 명의 동반자를 발견했습니다!] [준비하세요, 두 존재의 각성 퀘스트가 동시에 시작됩니다!]현은 심호흡을 한 번 내뱉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시스템 목소리만 들려오니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팟-!
허허벌판이던 발밑에 바닥이 생겨났기에 깜짝 놀랐다.
반지름 1미터 정도의 둥근 원판.
자세히 보니 단순한 발판이 아니었다.
“시계…?”
아래의 바닥에는 로마 숫자로 1부터 12까지 쓰여 있다.
형광으로 빛나는 시침과 분침이 느릿느릿 그 위를 회전했다.
시계의 가장자리 밖은 암흑의 낭떠러지.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시계만 존재했다.
현과 아인은 텅 빈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커다란 시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중이었다.
시스템 알림은 좀 더 이어졌다.
[플레이어 ‘아인’의 무의식으로부터 키워드를 추출하는 중입니다…] [키워드 : ‘정열’]메시지가 끝나는 순간.
화륵-! 은은하게 빛나던 시침과 분침, 그리고 시계 위의 숫자들이 불꽃에 점화되었다.
불꽃이 밝혀지자 주위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선의 계단.
주위의 배경에는 우선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계단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거대하다 못해 광활하다.
거인이나 다닐 법한 나선의 받침대가 암흑의 공동에서 하늘과 지상의 길을 잇고 있었다.
현과 아인은 나선의 축을 따라 끝없이 아래로만 하강하는 중이다.
끝없이… 끊임없이….
마치 지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굉장해….”
문득 들려온 중얼거림에 현은 옆을 돌아보았다.
아인이 주위의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자신의 눈도 알아채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연출에 감명이라도 받은 걸까?
확실히, 이런 분위기의 공간이라면 아인 정도 나이대의 소녀가 눈을 빛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사실, 아인의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몇몇 잡다한 생각을 하는 새에 원판의 하강은 멈추어 있었다.
본격적인 퀘스트가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최대한의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선 더… 좀더… 무의식에 다가가야 합니다!]
-깊은 곳까지 도달할수록 강력한 각성 스킬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내려갈수록 오히려 무의식에 잡아먹혀 심연의 나락에 빠져 버릴지도 모르죠….
-다행히도 딱 한 번, 시간을 되돌릴 기회가 있답니다!
-각성 스테이지를 시작합니다!
화아아악- 현과 아인의 앞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Start’ 버튼이 그려졌다.
현은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잘 생각해야 돼….’
각성 퀘스트.
기본적인 규칙은 간단하다.
많은 층을 내려갈수록 다양한 각성 스킬, 궁극기들이 해금된다.
궁극기 보상은 결국 하나밖에 고를 수 없지만 선택의 종류가 늘어진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퀘스트 방식은 쉽게 말해, 최대한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그중 현이 가장 눈여겨 본 문장이 바로 이것이었다.
회귀.
마지막 순간에 시간을 처음으로 돌리는 설정은 만화나 소설에도 널려 있었다.
다음 판에는 앞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최적화된 동선을 세울 수 있기에, 이전 판의 경험과 피드백이 중요해진다.
‘시간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이리 된 된 걸까? 죽음 직전에 시간을 되돌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완전 개이득인데?’
생각을 마치고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둘에게 동시에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10으로 변경됩니다!] [모든 스킬이 초기화되며, 스킬포인트를 회수합니다!] [각성 퀘스트가 종료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현과 아인은 갑작스런 탈력감을 느꼈다.
거의 100레벨 수준에 가까웠던 스탯이 초기화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아스리안 온라인은 직접 뇌파를 조정하는 만큼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도 그만큼 선명했다.
“몸이 흐느적거리는 기분이야….”
아인이 조그맣게 불평했다.
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래 아무 이유 없이 시간을 돌린다는 특권을 줄 리가 없지! 그 패널티가 능력치 초기화란 거로군.’
현은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항상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어.
랭킹 1위던 시절에도, 서포터로 구르는 지금도, 그 사실은 마찬가지다.
현이 화면 상단의 알림을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