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3
33화. 그 집 호위 기사는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대 (1)
내 폭탄선언에 피핀이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예? 예!”
“내 여동생이 엄청 귀엽거든? 아직 어리긴 하지만, 그 애가 혼기가 찼을 때, 넘보면 죽어버릴 거야.”
옆에서 짐을 정리하던 단델이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그……. 공작님. 너무 이른 걱정 아닐까요? 아가씨는 아직 다섯 살입니다.”
피핀의 눈매가 흐려졌다.
“열다섯 살이요?”
“아뇨. 다섯 살.”
“저는 열여섯이나 됐는데요…….”
게임 속 남주인공들의 얼굴이 피핀의 멍한 낯에 겹쳤다. 나도 모르게 격분하게 된다.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되는 거지! 끔찍한 도둑놈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면서 돈 많고, 예쁘고, 성격… 도 있는 달리아를 노리다니. 피핀 너, 10여 년 후에는 내 동생을 쳐다보기만 해도 사형시킬 거다. 알겠어?”
“예?”
피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비장하게 끄덕였다.
“예! 그럼 미리 준비를 할까요? 나으리만 괜찮으시다면……. 마수 도감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피핀이 꿈지럭대더니 품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제가 만든 못난 나무 장식품이었다. 끝이 뾰족한 말뚝처럼 생겼는데, 피핀 이 미친놈이 그걸 제 눈 쪽으로 가져갔다. 마치 찌르려는 듯한 태도였다.
저 미친놈이!
“야야야야야야!”
“이보세요!”
나와 단델이 달려들어 피핀을 말렸다.
“하지만 아가씨를 쳐다보지 않으려면…….”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한발 물러설 수밖에.
“그냥… 나중에 내가 혼처를 찾아줄 테니까, 내 동생 넘보지 마. 이 정도로 해두자.”
“예. 명심하겠습니다.”
남의 속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고, 피핀은 마수 도감에 심취했다. 마차는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드디어 집에 갈 시간이다.
***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던 때에, 문득 궁금해졌다.
“피핀. 왜 날 따라오기로 한 거야? 내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너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모르는 상황일 텐데.”
마수 도감을 찬찬히 넘겨보던 피핀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으리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카쿠 스승님의 죄도 모르는 척해주셨고. 대신 저를 걸고넘어지셨지만.”
“카쿠의 죄?”
“굳이 제 입으로 말하기는 싫어요. 스승님이 남들 보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거. 저도 알고 있었어요.”
“…다 알고 있었다고?”
피핀은 특유의 멍하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마수가 보고 싶어요. 이번에 사건이 해결되어 버렸으니, 마을에 갇혀 있다간 더 이상 마수를 볼 수 없을 거고요.”
“너…….”
“가끔은 단순해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공작님은 좋은 사람이고, 저는 마수가 보고 싶고. 공작님 옆이라면 저는 더 이상 숨죽이고 살지 않아도 되겠죠. 그거면 충분해요.”
피핀이 슬쩍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 뒤, 장난스럽게 웃었다.
“공작님도, 제가 단순해서 마음에 든 거잖아요.”
정곡이었다.
허가 찔린 나는 실실 웃으며 소파에 드러누우며 다리를 흔들었다.
“너, 특성 바꿔도 되겠다, 관통으로. 방금 허가 찔려서 호감도가 올라갔거든.”
“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몰라도 돼. 잊어버려.”
“예. 잊어버릴게요.”
피핀은 다시 마수 도감 삼매경에 빠졌다.
***
얼마나 오래 달렸을까. 도중에 밤을 지새기도 하고, 멀미도 하고, 배탈도 났지만 그 고통은 다 잊어버릴 수 있다. 이제는 잊어버릴 수 있다.
“집이다!”
드디어 공작성에 도착한 것이다! 도시가 보일 때부터 눈물이 고일 뻔했다니까?
물론 어느 시점부터는 멀미 때문에 의식을 잃고 잠만 자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마다 피핀의 맹한 얼굴이 보였다. 피핀은 항상 마수 도감에 코를 박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건지 읽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모습이었지만,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내버려 뒀다.
“공작님! 드디어 도착입니다. 사용인들을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단델이 쏜살같이 성 안으로 달려 나갔다. 문지기의 인사를 받으며 멀뚱히 서 있기를 1분 정도. 곧 공작성 창문마다 불이 밝아지며, 순식간에 아침을 방불케 하는 화사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와…….”
마수 도감을 읽는 동안 묵언수행 중이었던 피핀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아직 자고 있는 줄 알았건만. 놈은 좀비처럼 상체를 확 일으키더니 잠꼬대 같은 환호성을 내뱉었다.
“우와아어…….”
그리고 마차 안에 머문 채 다시 고개를 떨궜다.
“뭐야. 다시 자는 거야?”
진짜 잠든 모양이다. 녀석도 피곤할 만했지. 부상도 심했었고.
“공작님이 돌아오셨다!”
“마차를 안으로 들여라!”
“공작님을 맞이할 준비를!”
곧 공작성의 사람들이 하나둘 정문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온 성이 분주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피곤한데. 거추장스러운 환영은 사양하고 싶다.”
한숨처럼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당장 집에 들어가 씻고 편하게 누워 있고 싶었지만, 공작의 체면을 잃을 순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잖아.
“공작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뻥 뚫린 길 가장자리에 사용인들이 체스 말처럼 하나씩 정렬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마 내 예상이라면, 두 사람에서 세 사람 정도가 나한테 직접 말을 걸 것 같은데.
“공작님!”
“도련, 아니 공작님!”
역시나.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먼저 반겨준 건, 알베르토 집사장과 뮤리엘 유모였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손을 흔들- 아, 참. 손이라고 할지 면봉 덩어리라고 할지. 아무튼 흰 덩어리를 살갑게 흔들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아직은 낯설기만 한 두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 왔어. 공작성에 있던 그대들은 그동안 잘 지냈는지 궁금한걸?”
체격이 작은 유모가 알베르토를 제치고 내게 먼저 다가왔다. 달려오는 것이 힘들었는지, 나잇살 지긋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유모의 얼굴은 곧 희게 질리고 말았다.
“아? 아아, 우리 아기 도련님의 옷이, 손이……. 아아…….”
나를 훑어본 유모가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뒤로 넘어갔다. 뒤에 서 있던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유모를 부축했다.
“뮤리엘 님! 뮤리엘 님!”
“어서 찬물을!”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다행히 알베르토 집사장은 멀끔한 모습으로 다가와 나를 포옹하고, 내 어깨도 탈탈 털어주었다. 그의 희고 풍성한 콧수염이 움찔움찔거렸다.
“공작님. 얼마나 고생을 하셨길래……. 그래도 강해지신 것 같아, 이 알베르토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때 마차 뒤가 삐걱거렸다. 나는 잊은 물건을 떠올린 듯 가볍게 소개했다.
“참. 호위 기사. 데려왔다.”
뒤를 가리키자, 알베르토의 시선이 삐걱이며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자다 일어난 피핀이 마차에서 기어나와 인사했다. 머리는 까치집에 잠이 덜 깼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피핀의 온몸에도 붕대와 반창고가 한가득이었다. 얼굴에도 시퍼런 멍이 들어 있으니, 확실히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그래도 알베르토를 보고 인사를 할 줄 알다니 기특하다. 도착하고서도 마수 도감에 빠져서 안하무인으로 굴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시골 촌뜨기라 격식이나 예의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는 피핀이었다.
대견해 하는 내 마음과 달리, 알베르토의 안색은 밤하늘처럼 파랗게 물들어갔다.
“아, 아아, 호위 기사가……. 호위 기사가? 기사, 기사가…….”
유모에 이어 알베르토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시종들이 모여 알베르토를 부축했다.
“알베르토 님!”
“집사장님!”
“어서 지팡이를 가져와!”
나는 다 귀찮아져서 그냥 성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누가 나를 쫓아오든지 말든지 상관도 없었다. 너무 피곤했고, 빨리 씻고 쉬고 싶었다.
하지만 또 다른 환영 인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하녀들과 함께 달리아가 등장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잠옷 차림. 어린이의 잠을 항상 방해하게 되어 미안할 따름이다.
“달리아!”
나름 반가워하며 달려갔는데, 달리아는 시큰둥했다. 용 인형을 품에 꽉 끌어안은 달리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라버니.”
다시 나를 부르길래, 아픈 손으로도 들어 올려 안아줬는데, 달리아는 뽀뽀가 싫은 고양이처럼 자꾸 몸을 뒤틀었다.
“안는 거 말고.”
“어?”
“선물. 선물을 주세요.”
벌써 선물의 중요성을 알다니. 역시 떡잎부터 다르다. 공작 영애라면 이 정도 속물근성은 보여줘야지.
하지만…….
“선물은…….”
순간 머릿속에 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도마뱀 말이지…….”
달리아의 꿈 도마뱀, 레크로파다스, 레크로파다스의 사령, 그 사령을 가로채 간 테네리페, 테이데와 카나리아라는 정원아귀…….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어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네가 좋아하는 꿈 도마뱀을 죽인 뒤 그 귀신을 가로채 갔어. 오라버니도 귀신을 부리는 사령술사인데, 걔가 좀 더 강하더라고. 그래서 스승으로 삼기까지 했지.
이해해줄 수 있지? 넌 착한 다섯 살이니까.
“하하……. 하…….”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달리아는 다섯 살이니까.
내가 곤란해하는 걸 알아챈 피핀이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번엔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달리아를 안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가씨. 선물입니다.”
달리아가 몸을 뒤틀어가며 자신을 내려놓으라 반항했다. 하는 수 없이 내려놓으니, 도도도 달려가 피핀의 손에 있는 물건을 낚아챘다.
“이거. 뭐야?”
“제가 깎은 꽃입니다.”
피핀이 달리아에게 선물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반들반들하고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나무 조각이었다. 꽃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고, 뭐랄까, 그냥 울퉁불퉁한 나무토막을 윤이 날 정도로 닦아 놓은 것 같았다.
“…….”
달리아는 나무토막을 유심히 쳐다봤다.
설마 저게 마음에 들었나? 그렇다면 뺏을 거다.
안 돼, 달리아! 피핀은 못돼먹은 남주인공이라고! 지금 사랑에 빠지면 나중에 상처 입게 될 거야!
이 오라버니는 용납 못 해! 다섯 살한테 첫사랑은 아직 일러!
“이잉…….”
달리아의 손에서 나무토막이 힘없이 떨어졌다. 달리아는 우리를 버려둔 채 유모에게 달려갔다. 선물을 가져오지 않은 나와 선물답지 않은 선물을 내민 피핀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다섯 살짜리 공작 영애의 집중력이란 저런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버려지는 처참한 광경을, 피핀은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피핀의 나이는 열여섯. 달리아에 비해서는 많다지만, 사실, 얘도 어리다.
“흠.”
처량하게 바닥에 버려진 나무토막. 나는 형이상학적인 작품을 주워 예술가에게 돌려줬다. 희대의 예술가는 작품을 받아 들고 품에 넣은 뒤,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어른이 되더라도, 전 아가씨가 좋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피핀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도마뱀이나 한 마리 주우러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