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24
24 – 3742747
e
재벌의 세계 (1)
* * *
SBC 드라마국 회의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래? 왜 못 쓰겠대?!!”
연출부 회의 중에 임장호가 버럭 화를 냈다.
옥영임 작가가 대본에 PPL 하나를 도저히 못 쓰겠다며 울며불며 연락했기 때문이다.
해당 PPL은 광고료를 제법 많이 제시한 JC기업의 의뢰라, 제작사 ‘보라뱀 미디어’는 연출부를 압박했다.
“아, 씨···. 제작사는 어떻게든 찍으라며 난리! 작가는 도저히 못 쓴다며 난리! 어쩌라는 거야···.”
머리를 쥐어뜯는 임장호.
래원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 제가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것보다, 직접 들려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작가님이랑 통화할 때 녹음 메모를 했습니다.”
휴대폰의 통화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 알잖아, 도 피디. 내가 드라마 원데이 투데이 해? 웬만한 PPL은 나도 다 이해하고 대본에 쓰지. 근데 이건 해도 해도 너어어어무 하잖아! 햇반이라니?
래원의 휴대폰을 스피커를 타고 쩌렁쩌렁 울리는 옥영임의 목소리에, 회의실 안은 침묵이 흘렀다.
– 우리 드라마 제목도 야. 재벌이 햇반을 어떻게 먹어? 집에 삼시 세끼 코스 요리로 내오는 도우미들이 상주하는데! 햇반이 웬 말이냐고!!
가만히 듣던 임장호가 답답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하아···. 그럼 조연들 장면에서 서민들 사이에 끼워 넣으면 되지. 햇반 먹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
래원은 뜨끔했다.
자신도 그와 똑같은 말을 옥 작가에게 했기 때문이다.
– 임 감독이 그래? 생각을 좀 하고 살라고 전해! 그렇게 쓰면 햇반이 서민 음식이라고 비하하는 거 밖에 더 돼? 광고주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좋아하겠어.
녹음 파일이 끝나자 래원을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
“······.”
“옥 작가님 역시 보통이 아니시네요.”
할 말을 잃은 두 감독 사이에서 조연출인 유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누군 PPL이 좋아서 찍냐고. 다 같이 살자고, 드라마 잘 만들어보자고 이렇는 건데!”
“그렇죠···.”
유찬이 볼멘소리를 내며 거들었고, 이에 임장호는 더 노발대발했다.
“툭 까놓고, 옥 작가 그 여자가 억 소리 나게 가져가는 원고료! 그거 다 이런 PPL로 감당하는 거잖아? 그럼 그걸 대본에 녹이는 건 작가가 할 일이지! 못 하겠다면 다 야? 그게 프로 경력 작가가 무책임하게 할 소리냐고!”
그 순간,
래원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였다.
“아! 햇반을 이렇게 넣으면 어떨까요?”
상상한 장면을 임장호와 유찬에게 구구절절 상세하게 읊어보았다.
“오! 전 좋은데요? 우리 어차피 막장 블랙 코미디로 가기로 했으니까 재밌을 거 같아요. 짤로 만들어져서 두고두고 회자 될 지도 몰라요.”
다 듣고 난 유찬의 긍정적인 반응에 임장호도 고개를 끄덕였고, 래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걸로 제가 옥 작가님을 설득해보겠습니다.”
* * *
옥영임 작가의 작업실.
이제 이곳은 래원에게 자기 집만큼이나 익숙한 곳이 되었다.
“작가님, 햇반 싸대기 가시죠.”
“··· 뭐? 햇반.. 싸대기라니, 도 피디?”
“작가님 전작에서 김치 싸대기로 히트 치신 거, 이번에는 햇반 싸대기로 다시 한번 이슈 몰이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래원은 진지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일정이 밀리면 후반부에는 쪽대본과 라이브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든 지금 이 PPL을 마무리 짓고, 다음 스케줄로 넘어가야만 했다.
“작가님이 쓰신 8화 25씬, 강인의 집무실.
강인이 신제품 개발팀 1팀장과 2팀장을 불러서 싸대기를 날리는 장면이요. 여기서 신제품을 ‘햇반’으로 바꾸고, 싸대기를 ‘햇반 싸대기’로 바꾸는 겁니다.”
“··· 어떻게?”
옥영임은 솔깃한 듯 래원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강인의 지시로 레토르트 밥을 개발해온 신제품 개발팀. 1팀장은 ‘햇반’을, 2팀장은 ‘2분밥’을 강인 앞에 내놓습니다.”
옥 작가는 래원의 말대로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
.
강인은 두 명의 팀장이 내놓은 ‘햇반’과 ‘2분 밥’을 한 입씩 먹어본 후 음미한다.
손으로도 만져서 찰기를 확인해본다.
찰기는 물론이고, 밥알의 쫄깃한 식감, 따뜻한 정도···.
당연히 모든 면에서 햇반이 월등했다.
이에 강인은 2팀장을 향해 쏘아붙인다.
“박 팀장, 이걸 지금 밥이라고 먹으라며 내놓은 거야?!!”
“···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강인은 화나서 더욱 쏘아붙인다.
“이 세상에 시간 넉넉한 사람도 있나? 시간은 원래 누구한테나 부족한 거야.”
“하지만···. 이달에 명절도 끼어 있었고, 저희 팀 직원들 휴가가 몰려 버려서···.”
신제품 개발 2팀의 박 팀장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변명을 해본다.
그러자, 강인이 또 소리를 지른다.
“명절? 직원들 휴가? 지금 상황에 그딴 게 중요해?!!”
겁먹은 박 팀장을 향해 강인이 이번에는 낮게 읊조린다.
“박 팀장, 맷돌 손잡이 알지? 그게 빠져버리는 걸 ‘어이가 없다’고 해. 웃기잖아, 손잡이 하나 없다고 정작 중요한 일을 못 하니까!’”
.
.
재밌다는 얼굴로 래원의 설명을 듣던 옥영임이 또 다음 대사를 이어서 말했다.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어, 어이가 없다고!”
“딩동댕! 일종의 영화 패러디죠.”
옥영임은 턱을 괴고 래원의 설명이 재밌다는 듯 경청했다.
“그리고서 강인이 햇반과 2분 밥을 박 팀장의 양 볼때기에 차례로 날리는 겁니다. 2분 밥은 밥알이 한 톨도 떨어지지 않고 용기 속에 덩어리진 채로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죠. 반면, 햇반의 밥알은 박 팀장의 볼때기에 찰지게 붙구요.”
“푸하하하. 그래서 햇반 싸대기?”
“네. 어떠세요, 옥 작가님?”
옥영임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래원에게 확답하기 전에 정말 가능한 장면인지, 문제는 없는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래원은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한술 더 떠서 설득했다.
“햇반의 적당히 고슬고슬하면서도, 적당히 찰지고 촉촉한 텍스쳐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니 광고주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겁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다소 유치할 수 있으나, 이런 게 옥영임 작가의 취향이었다.
게다가 햇반 PPL을 의뢰한 JC그룹 회장과 JC푸드 사장 일가의 취향 역시 옥영임 작가의 막장 드라마 광팬이다.
지금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나,
훗날 JC그룹이 드라마 제작 사업에 손대면서 옥영임 작가를 밀어주게 된다.
래원은 이 모든 것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옥영임 작가가 고민을 끝냈는지 밝게 화답했다.
“웃기네? 재밌어. 도 피디 말대로 그렇게 써 보지 뭐. 햇반 싸대기.”
* * *
온 세상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드리운 시간.
래원은 집에서도 콘티를 짜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갑자기 잡힌 연출부 회의, 그리고 옥영임 작가의 작업실에서 씨름하는 데에 시간을 다 써 버렸기 때문이다.
식탁 한쪽에서 콘티와 고군분투하는 래원.
다른 한쪽에는 대본들을 촤르르 펼쳐놓고 있었다.
파자마를 입은 래미가 자러 들어가려다가 잠은 안 오고 심심했는지, 래원의 옆에 다가왔다.
래원의 콘티와 대본을 흘깃대며 구경했다.
“아, 이렇게 대본 보고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이대로 촬영장 가서 찍는 거야?”
“꼭 이대로 찍지는 않고 현장에서 스텝들 배우들이랑 더 좋은 게 나오는 경우도 많은데, 일단 연출자가 이렇게 밑그림을 미리 그려가야 되지.”
래미는 래원의 콘티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물었다.
“근데 오빠, 여기 대본에 [린화, 당황한 얼굴로 재성을 쳐다보고. 재성, 그런 린화를 의혹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한 프레임에 갇히면서, 엔딩!]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걸 왜 이렇게 여러 칸에 나눠서 그렸어?”
“아, 대본에는 짧게 이어져 쓰여 있는 지문이지만, 이렇게 컷컷이 나눠서 보여줘야 린화랑 재성의 감정선을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할 수가 있어.”
“그렇구나. 재밌다!”
래미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다음 대본에 [린화, 강인의 옆에 쪽지를 하나 놓고 나간다. 이를 들어서 읽는 강인의 얼굴 위로] 이 부분도 한 줄짜리 지문이지만···. [쪽지를 들고 다가오는 린화의 떨리는 표정] [쪽지를 강인 옆에 놓는 린화의 떨리는 손]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나가는 린화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강인이 쪽지를 읽고 표정이 구겨지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나눠서 그릴 거야?”
래원의 동생 아니랄까 봐, 래미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캐치하는 아이였다.
“오, 드라마 피디 동생 11개월이면 풍월을 읊네?”
“진짜진짜? 그럼 나 정답 맞힌 거?”
“따로 정답이란 건 없는데, 오빠가 그 장면 콘티를 그렇게 짜려고 했던 건 맞아.”
“헤헤. 재밌다. 나 이 대본 더 봐도 돼?”
래미는 래원이 콘티를 다 짜고 덮어둔 대본을 번쩍 들며 물었다.
“어. 대신 너 친구들한테 스포하고 다니면 안 된다.”
“당연하지이!”
래미는 엄청 재밌는 만화책이라도 보는 것처럼, 이내 대본 속에 푹 빠져버렸다.
‘이 정도 대본 분석력, 캐릭터 이해력이면···. 분명 의외의 재능인데?’
래원은 방금 래미가 보여준 센스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얼마 전 래미의 교복 빨래에서 발견한, 연예 기획사 캐스팅 명함을 떠올렸다.
‘정말로 래미가 방송 일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SBC 편집실.
이곳은 화창한 바깥 날씨와 대조적으로 어두컴컴하고 꿉꿉했다.
임장호는 어젯밤부터 이 안에 콕 틀어박혀서 편집에 매달리고 있었다.
“장호야, 밥은 먹고 하냐?”
“엇, 국장님.”
편집실을 문을 벌컥 연 것은 이 국장이었다.
임장호는 시계를 보고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쯔쯔쯧쯔쯔쯧···.”
밤새 편집실에서 썩어버린 임장호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이 국장.
그는 임장호를 데리고 SBC 건물 앞 두루치기 집에 들어갔다.
“여기 두루치기 2인분이요.”
임장호는 누렇게 뜬 얼굴로 수저와 젓가락을 놓고 컵에 물을 따랐다.
“장호야, 재벌의 세계··· 만만치 않지?”
“네··· 안 힘든 드라마가 없지만, 유독 힘든 거 같습니다.”
이 국장 앞에서 임장호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임장호는, 김 부국장 라인의 ‘변덕규’와 입사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다.
당시 그 기수에서 가장 촉망받던 두 PD는 각각 따로따로, 그때 CP로 부장 직함을 달고 있던 이 국장(이 부장)과 김 부국장(김 부장)의 눈에 들었다.
신입 시절부터 이 국장을 모셨던 임장호는 그를 잘 알았다.
“국장님,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죠?”
“너 인석아 지금···.”
하려던 말을 멈추고 답답한지 한숨부터 푹 내쉬는 이 국장.
“뭔데 그러세요?”
“너 이번 드라마로 래원이 녀석한테 공 다 빼앗기게 생겼어. 알고는 있냐?”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을 빼앗기다뇨? 래원이 제 B팀으로 제가 직접 픽 한 거예요. 우리 라인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이놈이 이렇게 순진해 빠졌어. 그동안 김 부국장이랑 최지철, 황태수, 변덕규가 가만히 있었을 거 같어? 도래원은 이미 그쪽에서 구워삶았어”
“··· 그래도 래원이 제 말도 잘 듣고, 시키는 것도 군말 없이 하고, 저랑 전혀 문제없는데요?”
“아직 사태 파악 못 하냐? 야, 그럼 래원이가 너한테 대드는 하수인 줄 알았어? 너 옥 작가랑 사이 완전 틀어졌다며.”
“그야, 옥 작가가 감독 알기를 무슨 자기 똥개로···. 국장님도 아시잖아요! 옥 작가 성깔머리!”
“옥 작가뿐이야? 촬감이랑 배우들도 죄다 래원이 새끼 칭찬만 하더라! 내가 속상해서 증말···.”
“······.”
“그렇다고 네 욕을 했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이게 말이 되냐? 메인 감독이 B팀 감독한테 평판이 밀리는 게?”
이 국장의 핀잔에 대꾸할 말을 잃은 임장호.
그는 반찬으로 나온 콩자반만 애꿎게 젓가락으로 쑤시다가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호랑이 새끼를 데려다가 키우고 있었던 거야?’
임장호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두 눈은 질투로 이글거렸다.
앞에서 그의 표정을 전부 읽은 이 국장은 또다시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뭘 하면 되지?’
허나 지금 임장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지금 와서 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미 모든 판세가 도래원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e